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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디 있느냐? / 창 3:9-15, 막 3:20-35
구약 본문은 처음 인간 아담의 타락과 범죄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건이다. 아담과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 안에서 걔속적으로 이 범죄를 저질러 왔다. 범죄한 아담은 그의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나아와 그 분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구했어야 마땅했다. 그는 동산을 두루 다니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나는 당신이 하라고 령령하신 그을 일 하지 않았으며,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그것들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라고 소리쳐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아담은 하나님의 임재를 피하여 달아났다. 성서를 보면, 아담이 하나님께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에게 오셨다. 죄인이 하나님께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죄인을 찾아 오셨다. 아담이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아담이여,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 말씀은 최초로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이 첫마디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1. 인간 상실의 비극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소리이다.
아무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찾음은 시작된다. 목자는 소중한 양 한 마리가 잃은 것을 알고서야 찾기 시작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서 잃어버리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비로소 아버지를 다시 찾는 귀향을 결심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하였다. 여기 인간 상실의 비극이 있다. 성서는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슬픈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양의 우리에 있어야만 하는데 어둠 속을 방황하고나 있지는 않은가? 여주인이 손에 있어야 할 드라크마가 집안 구석에 잃어버려져 있는 것처럼,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상실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아들이 돼지 우리에 거하는 슬픔에 처하였듯이, 바로 그 아들의 모습은 잃어버린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가?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할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풍성한 사귐을 누려야 할 우리가 하나님 없는 곳에서 방황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우리가 있어야 할 궤도를 상실하여, 아담이 타락한 그 자리에 우리도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던 동일한 음성으로 우리를 향해 물음을 던지신다.
2. 죄의 각성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소리이다.
죄는 인간이 양심을 어둡게 한다. 허물과 죄로 인간의 영혼은 죽음에 도달하게 되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묻고 계신다. 여러분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그렇다면 왜 불안해 하는가? 여러분의 마음 속을 파고드는 허무의 원인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영혼 속에 있는 진통과 고통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늘을 우러러 떳떳이 태양을 바라볼 수 없는 그 아픔이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은 마치 산사람이 추운 겨울에 산정에 올라갔다가 눈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방불케 한다. 추운 겨울에 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잠드는 것을 통해서 죽어간다. 그들의 죽음은 수면의 쾌락을 동반한다. 그들은 죽는 줄도 모르면서 편안히 죽어간다. 여러 시간 후에야 비로소 지옥의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고통하며 잠을 깨게 된다. 그리고 산정에서 잠든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그것은 영언히 돌이킬 수 없는 후회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로 하여금 죄악의 잠을 깨게 하여, 지옥과 심판의 위험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율법은 이미 우리를 정죄하였다. 선고는 이미 우리에게 내려졌다. 성서는 죄인들은 마치 단두대에 목을 걸어 놓고 마지막 집행을 기다리며 서있는 모습과 비슷한 상황 속에 버려진 것이라고 선언한다. 성서는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 칼을 갈으심이여’라고 말한다. 여기 범죄한 인간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문다고 말씀한다. ‘네가 어디 있느냐?’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소리이다. ‘죄가 너희를 반드시 찾아낼 줄 알라.’ 이것은 죄를 짓고도 행복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 존재의 위기와 하나님의 심판을 깨우쳐 죄의 각성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소리인 것이다. 용서받지 못하면 형벌이 기다린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범한 죄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은 분명한 아픔이다. 그것은 자존심을 드러내고, 진정한 자신의 정체를 보이며 자신을 깨는 아픔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죄를 짓는 것은 쾌락이다. 그러나 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이 아픔이 수반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이 회개의 아픔, 자신을 깨어버리는 아픔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잠 28: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요일 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3. 교제의 회복을 열망하는 하나님의 소리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사람들은 구름이 없는 맑은 하늘 아래서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즐길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거니셨고, 대화를 나누시며 풍성한 사귐을 통하여 인간과 더불어 동행하는 즐거움을 가졌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양심에 파고 들어온 죄는 우리를 미혹하며, 우리 영혼 속에 군림하기 시작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켰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수치를 가져다 주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 주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을 도피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렇게 된 원인을 사람들 때문이라고, 사회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였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때 아담은 ‘내가 벗엇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응답하였다. 여기에 그의 영혼을 파고 들어온 수치감을 볼 수가 있다. ‘두려워하여’란 말은 영혼 속에 파고든 죄의 결과를 설명하여 준다. ‘내가 숨었나이다’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실존을 증언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제의 회복을 열망하여 다시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신다. 인간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집념이다. 우리를 단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애정이다. 그분이 우리를 체념하셨다면 아예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하담과 하와를 향해 말씀하셨다. ‘너는 잊었느냐? 부끄러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던 그때의 기쁨을 잊었느냐?’ 하나님은 20세기 말에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영혼들에게 지금도 말씀하신다. ‘돌아오라. 벌거벗고 불안하며 슬퍼하며, 가난한 너 현대의 아담이여, 하와여, 돌아오라.’ ‘신의 영광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파괴한 자여, 영광스러운 교제 가운데로 돌아오라.’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못할만큼 절망적인 죄인이란 이 땅에 없다. 하나님이 씻기지 못할만큼 희망없이 더럽혀진 죄인도 없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못할만큼 증오스러운 죄인은 없다. 우리는 본래 만물을 지배하여, 만물 위에 군림해야 할 영광스러운 피조물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만물의 노예로 살고 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의 지위를 영광스럽게 회복시키기 원하신다. 우리는 에덴의 영광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인간으로 피조되었다. 그런데 환경에 굴복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본래의 영광스런 인간으로 회복하라고 하신다. 이 아버지의 애절한 부름이 들리지 않는가?
4.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구원의 소리이다.
태초에 시작된 하나님의 탐색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어느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악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죄를 용서 받아서 거룩한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고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하셨다. 그런 이유로 독생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령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친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신다. 또한 교회당에서 울리는 복음의 메아리는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신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언제 그를 찾아오셨는가?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한 석양녘에 찾아오셨다. 조급하게 아담을 다루신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른 아침에 당장 아담을 찾으셨다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만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른 아침에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맹령한 진노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뜨거운 정오에 찾아오시지도 않았다. 그리고 불안에 빠진 죄인들이 캄캄한 어두운 밤 중에서 더 격렬한 고통으로 신음하지 않도록 한밤중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날이 저물어가는 서늘한 저녁에 하나님은 자비의 손길을 펼치시고 자비롭게 불어오는 석양의 바람과 함께 아담을 찾아왔던 것이다.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거룩한 권고가 지금 죄인들을 향하여 울려퍼지고 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어느날 다윗왕이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도록 선지자를 보내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사용하는 대신 선지자를 사용하신 것이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니느웨를 등지고 하나님이 없는 무목적의 삶을 향해서 도피할 때에 하나님은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파도를 불렀다. 물고기를 준비하셨다. 그래서 떠나가는 요나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오늘날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편들을 통하여 우리이 영혼이 돌아오기를 촉구하신다. 경건한 어머니들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촉구하신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이나 친구들의 목소리와 권면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찾아오신다.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잃어버린 우리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이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겠다. 우리의 마음은 돌밭처럼 굳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다. 그분은 아침의 이슬에서도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으며, 오늘 하룻동안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길 기대하며 기다리신다. 그분은 저녁 황혼에 회개하지 않은 우리를 위하여 아파하신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러기에 하나님은 ‘내가 너를 찾아왔다’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죄악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죄를 이길 수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하나님은 우리 속에 성령의 능력을 베풀고, 죄를 이기는 거룩한 권능을 주시려고 우리를 찾아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려는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멀어진 관계는 얼만큼의 시간이 흘러갔던지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시다. 우리가 낮에 살고 있든, 어둠에 살고 있든, 도는 도덕적인 어둠이 얼마만큼 우리 속에 깊었든지 그 어둠이 문제가 아니다. 상거가 멀었지만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향하여 달려가서, 그 아들을 끌어안던 그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마라.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착각을 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한때 하나님을 떠날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깊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부딪혔다. 시 139:7-10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삶을 향해 찾아오시고 있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네가 어디 있냐?’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없는 장소에 살고 있지 않은가? 평안과 기쁨이 없는 곳에 있지는 않은가? 무료한 시간의 절망 속에 거하지 않은가? 그리스도 없이 살고 있는가? 이제 나오라. 죄책과 불안한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가? 이제 하나님께로 나오라. 이것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만 하시겠다는 정도의 하나님의 의지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분이 우리를 찾으시는 이유가 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이유가 있다. 그분은 우리를 찾아와서 인도하시기 원하신다, 보호하길 원하신다. 우리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시고, 필요를 공급하길 원하신다. 이제부터 우리 인생의 모든 불안과 갈등과 고민의 문제를 담당하시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리고 기다리신다. 아버지를 버리고 먼 나라로 갔던 탕자가 돌아올 때, 그 아들을 맞이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지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하신 눈길이 있다. 아버지는 다가오는 아들보다 더 성급한 걸음으로 아들을 향해서 달려갔다. 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발길을 보라. 때묻고 먼지나는 그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는가?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노라’고 말씀하시는 자비하신 거룩한 음성이 여러분의 귓속에 들려오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 순간에도 여전히 동일한 사랑과 감격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너는 어디 있느냐?’ 우리는 물론 이 음성을 묵살해 버릴 수가 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이 시간 이후의 인생을 어제와 똑같이 살 수가 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우리의 인생을 그럭저럭 마칠 수가 있다. 그러나 어느날 ‘너는 어디 있느냐’는 이 음성을 한번 더 듣게 될 것이다. 주께서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 날 예수님께서는 한번 더 우리를 향해서 이 음성을 던질 것이다. 그때 무덤 속에 있던 육체는 다시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영혼은 다시 그의 몸속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 주님은 선언하실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 너는 내 자비를 거절했다.’ ‘이제 저 마귀와 그의 사자를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하나님의 자비를 거절하는 분들이 있는데 왜 거절하나? 지금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어느날 심판의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 ‘너는 어디 있느냐“고 오늘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에 응답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1995-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