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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아주 먼 옛날) 무극無極을 가지는 바가 있는데, (무극無極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어우러지고 아우러진 바로서, (태극太極을) 이루었으며, 하늘과 땅을 앞서는 바로서, (하늘과 땅을) 생겨나게 했다.
混, 與渾通. 物, 無極也. 未有天地, 先有無極. 以爲太極, 之本. 所謂無名, 天地之始, 是也.
“혼混”은 어우러지고 아우러진다는 말과 뜻을 더불어 한다. “물物”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없는 바이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끝점에 다다른 바인) 무극無極을 가리킨다. (아주 먼 옛날) 아직 “하늘과 땅”을 “가지는 바가 있지” 않을 때, “먼저” 무극無極을 “가지는 바가 있었다.” 이른바, (무극無極 이것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큰 바이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끝점에 다다른 바인) 태극太極을 일삼은 바로서, (태극太極) 그것의 근원이다. (이른바, 제1장이) 일컬은 “이름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名”,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 시작점天地之始”, 그것(이 무극無極)이다.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무극無極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이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끝점에 다다른 바인데, 따라서)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가지는 바가 없다! 뚜렷하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가지는 바가 없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의 정도나 수준이) 홀로 서는 바인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처음의 모양과 모습을) 고치지 않는다. (태극太極은 만물의 변화를) 두루 일삼는 바인데, 따라서 (만물의 변화는 일부러 일삼아) 줄어들게 되고, 빠뜨려지게 되며, 넘어뜨려지게 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음陰·양陽은 만물이 말미암는 바인데, 따라서 만물의 변화가 생겨나게 되며) 따라서 만물의 어미로 일삼아질 수 있다.
寂廖, 無聲, 無臭也.
“적료寂廖”는 (무극無極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로서, 또렷하게 맡을 수 있는) 소리를 가지는 바도 없는 바이자, (뚜렷하게 들을 수 있는) 냄새를 가지는 바도 없는 바라는 뜻이다.
獨立而不改, 言無極, 墮在陰陽之中. 則遂爲太極. 卓. 然獨立. 而不爲陰陽, 所雜改, 其形體也.
“독립이불개獨立而不改”는 뜻한다. “무극無極은 음陰·양陽의 한 가운데(中; 근원) 내려와 자리하는 바이다. 그리고 (무극無極은 태극太極의 근원으로서) 태극太極을 말미암고 일삼는 바이다. (따라서 무극無極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의 정도나 수준이) 높다. 이른바, (무극無極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의 정도나 수준이) 홀로 서는 바이다. 따라서 (무극無極은) 음陰·양陽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과 더불어) 뒤섞인 채,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었던 처음의 모양과 모습을) 고치는 그러한 모양과 모습을 일삼지 않는다.”
周行而不殆, 言太極, 樞紐陰陽. 萬轉萬變, 終始, 一轍, 無少差跌也.
“주행이불태周行而不殆”는 뜻한다. “(무극無極은 태극太極의 근원으로서, 태극太極을 말미암고 일삼는데, 따라서 무극無極은 태극太極이 음陰·양陽을 말미암고 일삼는 데 있어서, 태극太極의 문지도리와 문고리가 되며) 태극太極은 (음陰·양陽의 근원으로서, 음陰·양陽을 말미암고 일삼는데, 따라서 태극太極은) 음陰·양陽(이 오행五行을 말미암고 일삼는 데 있어서, 음陰·양陽)의 문지도리와 문고리(가 되며, 음陰·양陽은 오행五行의 근원으로서, 오행五行을 생겨나게 하고, 오행五行과 더불어 어우러지고 아우러지는데, 따라서 음陰·양陽은 오행五行이 만물을 일삼는 데 있어서, 오행五行의 문지도리와 문고리)가 된다. (따라서) 만물의 변화가 시작되고 끝나게 되며, 하나의 바퀴를 이루게 되고, 줄어들게 되거나 빠뜨려지게 되거나 넘어뜨려지게 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爲天下母, 言陰闔陽闢之間, 萬物, 由是, 化生. 如子女之生於母也.
“위천하모爲天下母”는 뜻한다. “음陰이 닫히고, 양陽이 열리는 사이, 만물은 그것을 말미암는데, 따라서 (만물의) 변화가 생겨나게 된다. 마치 아들과 딸이 어미로부터 생겨나는 것과 같이.”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나는 (무극無極과 태극太極) 이것의 본명을 알아차리지 못하겠는데, (따라서)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별명 지어 불러 도道라고 일컫는다.
不知, 是, 無極乎! 太極乎! 未定其名. 故以道爲其字也.
“(그 본명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 그것은 무극無極이다! 태극太極이다!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은) “그 본명”을 정해 부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노자는 일부러 일삼아) “도道”로써 “그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별명”을 삼은 것이다.
强爲之名曰大.
(나는 음陰·양陽 이것의 본명을 알아차리지 못하겠는데, 따라서)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불러 “대(大;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깊고 큰 바)”라고 일컫는다.
此, 以陰陽言之. 盖上文, 旣以道而字太極. 則今, 不應復名, 之故也.
이 문장은 음陰·양陽으로써 (“도道”) 그것을 일컫는다. 이른바, 앞 문장은 이미 “도道”를 이른바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으로 “별명 지어 불렀다”. 따라서 지금 (이 문장은 “도道”를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으로) 말미암지도 않고, 되돌이키지도 않으며, “이름 지어 부르지도” 않는데,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有名, 萬物之母. 則陰陽, 可以名矣. 然名可名, 非常名. 故其名, 强爲之名也.
(제1장은 일컬었다. 음陰·양陽이 지어 부른) “이름을 가지는 바가 있는 것은 (그것이) 만물의 어미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음陰·양陽은 (“만물의 어미”라는 점에서 음陰·양陽이라)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1장은 또한 일컬었다) “음陰·양陽은 (음陰·양陽으로)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한 음陰·양陽은 저절로 그러하게 바뀌거나 본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달라지는 기氣로서의) 음陰·양陽이 아니다.” 이른바, 그 (음陰·양陽이라 지어 부른) “이름”은 (“만물의 어미”라는 점에서 음陰·양陽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大, 盛大流行之意也.
“대大”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깊고 “큰 바”로써, (만물에게) 흐르고 다닌다는 뜻이다.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대大”, 이른바 “서(逝;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바)”. “서逝”, 이른바 “원(遠;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가로막히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 “원遠”, 이른바 “반(反; 만물의 흐르고 다니는 바가 되돌아가 짝하는 바).
逝, 如論語. 逝者, 如斯. 之, 逝. 言日往而月來, 寒往而暑來, 皆陰陽, 承載太極之道, 繼續, 不已也.
“서逝”(가 뜻하는 바)는 『논어論語』 (「자한子罕」이 뜻하는 바)를 (더불어) 같이 한다. “공자孔子가 시냇가에서 일컬었다. ‘서逝’(가 뜻하는 바)는 (시냇물이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모양과 모습) 이것과 (더불어) 같이 한다. 낮과 밤에 (일부러 일삼아) 머물지 않는〔子, 在川上, 曰逝者, 如斯夫. 不舍晝夜.〕.” (따라서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머물지 않는 모양과 모습) 이것이 “서逝”(의 뜻)이다. 이른바, 해가 지고 달이 뜨며, 추위가 가고 더위가 오는 것은 모두 음陰·양陽이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인 “도道”를 이고 진 채, (해와 달, 추위와 더위에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이어지게 하고 이어지게 하기 때문인데, (“서逝”의 뜻은 이것과 더불어) 다르지 않을 따름이다.
遠, 如易繫. 遠, 則不禦. 之, 遠. 言陰陽, 承載太極之道, 無遠不到. 莫得以限止之也.
“원遠”(의 뜻)은 『역경易經』 (「계사상繫辭上」의 뜻)과 (더불어) 같이 한다. “원遠은 이른바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가로막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가로막히지 않는 모양과 모습) 이것이 “원遠”(의 뜻)이다. 이른바, 음陰·양陽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인 “도道”를 이고 지며, (따라서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가로막히거나 (그것에) 다다르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이른바, 음陰·양陽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인 도道를 이고 지는데, 따라서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다하거나 그치는 바를 얻는 바가 없다.
反, 如先天對待, 後天反對之反. 言先天之終, 必爲後天. 對待之終, 必爲反對也.
“반反”은 “하늘을 앞서는 바는 하늘을 뒤서는 바를 짝하여 다가서는 바이자, (하늘을 뒤서는 바가) 되돌아가 짝하는 바이다”라고 할 때의 “반(反; 되돌아가다)”과 (더불어 뜻을) 같이 한다. 이른바, “하늘을 앞서는 바(先天; 無極·太極·陰陽)”의 끝점(終; 陰陽)은 반드시 “하늘”을 뒤서는 바(後天; 萬物)를 (말미암고) 일삼는다. (이른바) 짝하여 다가서는 바(對待; 先天)의 끝점은 반드시 “되돌아가” 짝하는 바(反對; 後天)를 (말미암고) 일삼는다.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따라서 도道는 “대(大; 만물에게 흐르고 다니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큰 바”가 되어야 한다. 하늘도 “큰 바”가 되어야 하고, 땅도 “큰 바”가 되어야 하며, 임금도 “큰 바”가 되어야 한다. (이 4가지의) 영역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한 가운데에 머무는 바가 있는, (이른바) 4가지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큰 바”가 되어야 하는데, 따라서 임금도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큰 바”) 그것에 머무는 1가지 영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域, 上天下地之界域也.
“역域”은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이 경계가 되는 “영역”이다.
道, 爲天之中. 天, 爲地之中. 地, 爲天之中.
“도道”는 “하늘”의 한 가운데(中; 無極·太極)를 (말미암고) 일삼아야 한다. “하늘”은 “땅”의 한 가운데(中; 無極·太極)를 (말미암고) 일삼아야 한다. “땅”은 “하늘”의 한 가운데(中; 無極·太極)를 (말미암고) 일삼아야 한다.
而王, 又主天地之中. 盖天地之中, 二氣升降. 王, 實爲之, 樞紐. 故洪範, 皇極. 亦以王心言之.
“따라서 임금”은 이른바 “하늘”과 “땅”의 한 가운데(中; 無極·太極)를 주인으로 (말미암고) 일삼아야 한다. 이른바, “하늘”과 “땅”의 한 가운데(中; 無極·太極)는 (음陰과 양陽의) 2가지 기氣가 (밀고) 올라가는 바이자, (잡고) 내려오는 바이다. (따라서) “임금”은 진실로 (“하늘”과 “땅”의 한 가운데) 그것을 (말미암고) 일삼아야 한다. (그) 문지도리와 문고리를. 따라서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은 “황극(皇極; 無極·太極)”을 일컬었다. 이른바, (따라서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은) “임금”이 일삼아야 할 마음으로서,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마음) 그것을 일컬었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따라서) 사람은 땅을 본받아야 하고, 땅은 하늘을 본받아야 하며, 하늘은 도道를 본받아야 하고, 도道는 자연(自然; 無爲)을 본받아야 한다.
人心之謙冲柔弱, 法地之虛靜. 地之虛靜, 法天之玄穆. 天之玄穆, 法道之太極陰陽. 道之太極陰陽, 又法無極之自然.
“사람”의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아래로 낮추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텅 비우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해) 부드럽고 연한 것은 “땅”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비고 조용한 모양과 모습을 “본받기” 때문이다. “땅”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텅 비우고 조용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모양과 모습을 “본받기” 때문이다. “하늘”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어렴풋해지게 하고 어슴푸레해지게 하는 것은 “도(道; 無極)”인 태극太極과 음陰·양陽의 모양과 모습을 “본받기” 때문이다. “도道”가 태극太極과 음陰·양陽의 모양과 모습이 되는 것은 이른바 무극無極인 “자연(自然; 無爲)”의 모양과 모습을 “본받기” 때문이다.
此, 所以天地人之道也. 邵子, 皇極經世書, 亦引用地法天, 天法道之言.
이것이 이른바 따라서 “하늘”, “땅”, “사람”이 말미암고 일삼아야 할 이치이다. (따라서 중국 송宋나라 때의) 소옹(邵雍, 1011~1077)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이른바 “땅은 하늘을 본받아야 하며, 하늘은 도道를 본받아야 한다”는 (노자의) 문장을 인용했다.
盖老子此言, 精深微妙, 得大易之要旨. 但其, 自居於太極陰陽. 而五行以下, 皆藐視之. 不使與於道者. 與儒道爲, 不同也.
덧붙여, 노자의 이 문장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빽빽해지게 하고, 깊어지게 해야 하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슴푸레해지게 하고, 어렴풋해지게 해야 한다”는 (뜻을 가진) 문장으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큰 바가 되게 해야 한다”는 『역경易經』의 요지를 얻은 문장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 문장에서) 일부러 일삼아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을 “도道”)에 (관련시키는 데) 머물렀다. 따라서 오행五行 이하가 모두 아득하게 살펴지게 되었다. (따라서 오행五行 이하가 모두) “도道”에 관련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른바, (이것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일삼는 바가 (서로) 같이 하지 않는 바이다.
右第二十四章.
여기까지가 제24장에 대한 풀이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