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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物 행복(발전) = = 욕구 心 |
그런데 위의 도식이 항상 지속될 수 있을까? 욕구를 무한히 확장시키면 그에 비례하여 더 많은 소유가 확대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많은 사회가 바로 발전한 사회이다. 그런데 소유를 무한히 확대한다는 것은 소비할 상품의 생산을 무한히 증가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체계를 갖는 것이다. 모든 나라가 미국처럼 사는 것이다. 실제 많은 나라에서는 미국과 같은 생활 양식을 따라가려고 하고 있다. 아니면 유럽이나 일본, 최소한 우리나라 같은 생활 양식을 추구하고 싶어한다. 중국의 인구는 현제 13억을 육박한다. 전 세계 인구의 21%가 넘는 정도이다. 인도는 약 10억에 이르고 있다. 모두가 미국과 같이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일본과 우리나라 같은 20%의 잘 사는 국가의 화석 연료와 자원 소비로 인해서 오늘날과 같은 심각한 지구적 위기와 오염이 초래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하고 중국이나 인도, 그외 수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미국이나 유럽과 같이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라면 그렇게 살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미국과 같은 삶을 산다면 인류는 끝장이 나는 것이다.
자원이 무한하다면 모든 나라가 미국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생산 방식은 자원이 무한하다는 전제 위에 만들어진 사회 체계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유한한 것이다. 만일 유한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치, 즉 그동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당연시해 왔던 모든 정치․경제․문화적 가치는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질의 세계에서 마음의 세계로
위의 <표>로 돌아가 보면 결국 소유를 무한히 확장하는 것은 물건을 많이 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한한 생산은 이미 자원의 한계 때문에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복과 발전의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욕구를 줄이는 것’이다. 욕망을 줄이는 것(분모의 감소)은 결국 행복도(결과 값)가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이 많은 사회가 바로 발전된 사회인 것이다.
더 나아가 보자. ‘소유’란 물질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사회는 인간이란 욕망의 동물임을 당연히 여기고 누가 많은 소유를 하는가에 대한 물질적 경쟁에 집중해 온 사회였다. 바로 물질의 시대[物]였던 것이다. 물질의 시대가 바로 인간 간의 경쟁과 대립, 이기심과 이윤 동기를 자극했고, 결국 타인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발생한 환경 위기는 물질의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제 물질적 풍요란, 자원이 무한하다는 인간의 잘못된 전제 하에서 만들어진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 바로 환경 문제가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생태 위기는 물질적 소유의 확대를 통한 행복이 아니라 욕구와 욕망의 절제를 통한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욕망이라는 마음[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시대임을 알리는 것이다.
과거 환경을 파괴한 시대는 산업 사회라고 표현한다. 이 사회는 경제 중심적 가치, 개인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경쟁주의, 목표 지향적인 성과주의의 강박에 얽매인 사회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타인의 실패를 전제로 한 나의 승리, 타인의 불행 위에 쌓은 나의 행복을 당연시하도록 하여, 인간과 인간의 경쟁과 대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어릴 때부터 우열을 가르며 집단과 개인의 경쟁을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강한 것이라는 의식을 각인하고 고취시킨다. 이러한 사고가 결국 서로를 죽임에 이르게 하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와 자연의 죽임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物]의 시대, 돈의 시대에서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러나 환경을 극복하는 생태 사회는 물질의 사회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心]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욕망을 줄이는 삶을 사는 것이다. 환경 문제는 결국 내가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이다. 어떠한 삶이 행복한 삶이냐의 가치관 문제이다. 줄여야 할 욕구는 물질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줄이기만 하는 것에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확대시키고 확장시켜야 할 욕구는 바로 정신적 욕구, 마음의 욕구인 것이다. 생태 문제는 돈의 논리를 넘어서는 문제를 강제한다. 돈의 논리가 바로 경쟁과 대립, 투쟁 사회의 논리였고,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를 파괴시켰고, 결국은 인간 스스로를 파괴한 원인이 된 것이다.
돈이란 무엇인가
돈은 인간에게 수레를 끄는 소와 같다. 수레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생필품이 가득 들어 있다. 돈은 이 수레를 우리에게 오게도 하고 타인에게 보내기도 하는 에너지이다. 오늘날 이 수레에는 물건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실어보낸다.1) 과거에는 감사와 기쁨의 선물을 정성으로 표하던 것도 이제는 돈으로 표현한다. 이제 개개인의 정서과 감정까지도 돈으로 매개되고 있는 것이다.
돈은 인간의 편익을 위한 교환과 거래의 공정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돈은 내가 필요한 물건을 서로 교환하는 매개의 기능을 넘어서고 있다. 원하던 일을 좀더 쉽게 이루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돈이 이제는 오히려 인간의 활동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인간은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말이 있었다.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보다 많은 풍요를 누리는 일이며, 결국 이를 위해 돈을 버는 행위를 의미한다. 먹기 위해 사는 삶은 ‘먹는 것’이 목표이다. 따라서 이같은 인간은 경제적 가치, 다시 말해 돈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어 인생의 의미보다는 물질적인 풍족만이 가치라고 생각하는 천박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후자의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은 서로 나뉠 수 없는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은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번 유대인 샤일록에 대해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는 어떠한가? 오늘날 전세계적인 부자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증권․주식 등 온갖 금융 상품과 투기 자본, 부동산 투기나 고리대 자본에 의해 재부를 축적하고 있다. 실제 세계 경제는 실물 시장보다 약 20~30배가 더 큰 금융 시장을 갖고 있다. 금융 시장이라는 것은 추상의 시장이다. 현금이 오고가거나 상품이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의 시장인 것이다.
이제 돈은 더 이상 상품을 교환하는 매개가 아니라, 아름다움․고귀함․친절함․선함 등 모든 가치를 환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나아가 돈은 그 자체로 돈을 축적하는 매개가 되고 있다. 도덕적으로 질타를 받던 샤일록이 드디어 세계를 평정하여 고리대 자본, 투기 자본을 보편화시킨 것이다. 돈은 이제 본래의 기능에서 점점 멀어지고 점차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에 복무하기보다는 인간의 욕망에 복무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욕구를 바꾸고 돈을 바꾸자: ‘대안 화폐’의 실험
현재 생태학자나 많은 문명 비판가들은 현재의 경제와 시장이 더 이상 인간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탐욕과 개발이 인류를 파멸로 이르게 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파멸을 초래하는 논리, 즉 경제․성장․개발․발전이라는 것은 거개가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더 많은 풍요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본’이라고 했지만, 동양적 사유로 새로운 문명의 변화를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하고 있는 송희식 씨는 자본이 아니라 ‘화폐’가 모든 문제의 근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화폐 제도의 철칙을 변화시키는 것’을 사회 변혁의 관건으로 생각하고 있다.2)
화폐는 자연적 사물, 경제적 재화, 인간 관계를 양으로 전환시키고 수단적 관계로 전환시킨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삶을 합리적 차원으로 규제하고 인간의 의식을 이성적 차원으로 고정시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비화폐적인 농업 사회에서 인간은 산수나 연산이 필요하지 않았다. 돈 중심의 사회가 결국 수학적 합리주의, 과학적 보편주의를 이끌어 온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폐 제의 변화를 어떻게 도모할 수 있을까? 한 사회가 완전히 자본주의적으로 정교하게 틀이 짜여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수많은 틈들이 있고 비자본주의적인 많은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 대안 운동의 전략은 바로 ‘틈’의 전략이다. 비자본주의적 영역인 이 틈을 확대시키고 확장시키면서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더욱 확장․확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과거의 변혁 운동을 댐을 폭탄으로 때려 부수는 것에 비유한다면, 대안 운동의 이러한 틈 전략은 ‘댐에 금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서히 붕괴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기되고 있는 대안적인 운동이 바로 대안 화폐 운동, 곧 지역 통화 운동(레츠: LETS, Local Exchange & Trading Sysyem)이다. 이 지역 통화 운동은 이미 1983년 캐나다 코목스밸리에서 마이클 린튼에 의해 만들어진 대안 화폐 운동이다.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다자간 품앗이’ 정도가 될 것이다.
누구든 직장은 잃더라도 나름대로 기술과 능력은 있다. 따라서 반드시 돈이 있어야만 상대의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일정한 규칙에 합의한 회원들끼리 서로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나 기술, 혹은 곡식이나 재화를 교환하면 돈을 교환하지 않고도 서로의 만족을 도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는 반드시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한 마을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 받으면 되는 것이고, 그 교환 과정에서 일정한 공정성을 갖추면 된다. 그것의 매개가 바로 돈인 것이다.
오늘날 돈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고 이를 위해 인간을 이용하고 친구와 애인과 모든 조건과 관계를 이용한다. 그러나 지역 통화 운동에서의 돈은 인간의 교환과 애정의 나눔을 위한 도구이다. 인간 간의 교류가 중심인 것이고, 돈을 바로 이를 이루기 위한 매개인 것이다.
현재 영국에서는 1998년 말 약 6백여 개의 레츠 시스템이 운용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30개 주에서 2백50개가 넘게 운영되고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만 해도 1990년대 초에 약 2백여 개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3) 그리고 한국에서도 한국불교환경교육원에서 운영하는 ‘두레’와 미내사 모임에서 운영하는 ‘FM머니’, 서초구청에서 운영하는 ‘서초그린머니’, 민들레교육통화에서 운영하는 ‘민들레’ 등 민간 단체 약 30여개가 운영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제2건국위원회, 노동부, 보건복지부뿐 아니라 서초구청, 송파구청, 중구청 등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역 통화 운동에 정부나 관청이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운동은 바닥 운동과 시민 운동, 다시 말해 풀뿌리 차원의 자발성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칫 새로운 운동의 참신함만으로 섣불리 이 운동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위해 돈이 이용되는 사회
사회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화폐 가치의 변화, 화폐 체제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사회가 돈이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고 있으며 그래서 결국 “돈에 의해 굴림을 당하는 사회”라면, 우리가 지향하는 생태적 사회는 인간 본연의 관계가 살려지고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 돈이 이용되는, 즉 “돈을 굴리는 사회”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것이다.
생태적 사회에서는 자연성이 되살아나는 것이며, 인간이 자연 속에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환경 운동과 생명 운동은 이처럼 뒤틀리고 거꾸로 된 것을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돈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를 인간을 위해 돈이 이용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수돌 교수가 쓴 『작은 풍요』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하인리히 뵐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어느 조용하고 아늑한 어촌 마을의 아침이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한 고기잡이 노인이 평화롭게 단잠을 자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 휴양을 온 한 관광객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이 노인이 잠자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이 젊은이는 사진을 찰칵, 찰칵 찍어 댔다. 그런데 이 소리에 그만 이 고기잡이 노인이 잠을 깨고 말았다.
“그 뉘시오?”
“아이쿠, 죄송합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이온데 할아버지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아서 그만․․․. 죄송합니다.”
“․․․․․”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고기 잡으러 나가지 않으세요? 벌써 해가 저만치․․․”
“이미 새벽녘에 다녀 왔구먼.”
“아. 그러세요?․․․그러면 또 한 번 더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 뭐하게?”
“․․․참, 할아버지두. 그러면 저 낡은 거룻배를 새 걸로 바꾸실 수 있잖아요?”
“그래 가지고선?”
“그 다음에는 새 거룻배로 고기를 잡으시면 휠씬 빨리, 한결 많이․․․”
“음․․․그 다음에는?”
“그야 당연히 크고 좋은 배를 몇 척 더 사시고, 사람도 많이 부리고․․․그러면 뭉칫돈 버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겠어요?”
“옳거니, 그래서는?”
“그 다음에야․․․이 마을에 생선 가공 공장도 세워, 싱싱한 통조림도․․․”
“흠․․․그리고 나서는?”
“그때는 별 일도 않고 가만히 누워 그저 편안히 지내실 수 있지요.”
이 말에 고기잡이 노인은 대답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지내고 있네.”
“․․․․․”
유정길: 1960년생. 국민대 건축학과 졸업. 현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사무국장. 저서 『환경 논의의 쟁점들』(공저). 역서 『아리랑 고개의 여인』, 『그린피스』.
1) 이원규(1998), 「win-win시스템」, 『지금여기』 98년 1-2월호..
2) 송희식(1995), 『자본주의 우물을 벗어난 문명사』, 모색: 234쪽.
3) 위 이원규의 글,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