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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성한 현재 - 남진원 시 전집 6 - 5
어물장수 명자
남진원
강릉 중앙시장 지하로 들어가는 시멘트 바닥 한 옆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건어물 사라고 한다.
국민 학교 때도 야무지던 명자, 그 좋은 성격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웃음을 환하게 얼굴에 담고 고기 파는 모습을 보니 그냥 고맙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에 찌든 모습이라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억척스레 살아가는 거, 그게 우리네 삶인지도 몰라. 고향길에 피어나던 질경이 같이 외유내강의 인물.
자식 낳아 기르며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존경스런 마음이 든다. 기쁘다, 명자야. 잘 살아라!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
어버이날인데도
남진원
병원 침대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꽃 한 송이와 내가 아내의 잠을 멀뚱멀뚱 지킨다.
( 2013. 시집, <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
어 부
남진원
애환을 딛고 선 채
몇십 년 닳은 이마
생애가 출렁이는
피멍든 그물 그물로
한타래 팽팽한 수심
건져내는 야성의 밤
눈 들면 굽이치는
적막을 짚어가며
짭짤한 소금기를
살 속에 절여 절여
이제는 핏속에서 묻어나는
내 목숨의 비린내
삼킬 듯 번득이는
바다의 한 끝을 풀어
뒤채는 푸른 날빛
눈썹 새로 세워놓고
뱃고동 그리운 등대에
달빛으로 익고 있나.
( 1981년 봄. 『시조문학』)
어 부
남진원
출렁여
푸른 물결
뱃노래로 띄워놓고
남실남실 뱃고동 소리
떠가는 듯 아련한 바다
유채꽃 아롱진 남도의
봄을 푸는 어부여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어 부
남진원
적적한 깊은 산속 강에 든 배 한척
자욱한 눈 맞으며 언제나 미동 없다
드리운 낚싯대 멀리 쌓여가는 흰 적막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 2025. 8. 수정
어초(語草)
남진원
건너 산 아래
푸른 풀,
語草는
千年을
자라면
입 다물어도 말하는
가난뱅이가 되나
한 萬年
자라면
말 열어도
크기 없는
허름한 벗이 되나
( 제9시집 『어초(語草)』, 붓다가야, 2002. 8. 1.)
어허
남진원
별이 뜬 하늘을 보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하얀
눈뿐이다.
어허! 어허!
나는 멀거니, 이런 말만 늘어놓고 앉았다.
( 시집, 『장자의 하늘』,태원출판사, 2004. 6. 30. )
Oh!
When watching the sky with stars
And awaking out of sleep,
Only white snow is seen.
Oh! Oh!
Sitting absent-minded,
I mutter just the word repeatedly.
( 訳:원병관 )
어 깨
남진원
요즘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쓸모없는 힘이 들어간다
전에 없던 일이다
신문을 보다가
어깨가 긴장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어깨가 긴장하고
질주하는 차들을 보다가
어깨가 긴장한다
어깨에 힘이 없을 때는
누구도 누르려고 하지 않아
편안하였는데
오늘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느라
더 힘이 들어간다
참한 어깨를 보여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
문득 할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 문학동해안시대 회보 제94호. 1997. 3. 27. )
억새꽃
남진원
산속 가을 하늘위에 별 등잔 켜놓으니
풀벌레는 맑은 숨결 소리의 등을 단다
별빛에 어리는 얼굴, 하얀 물결 억새꽃
언덕을 오르면
남진원
외로운 마음
언덕을 넘어
강아지처럼 언덕을 오르면
머얼리서 손짓하는
머얼리서 손짓하는
눈속 가득 고이는
고향의 얼굴
그리운 마음
언덕을 넘어
망아지처럼 언덕을 오르면
머얼리서 부르는
머얼리서 부르는
귀에 가득 들리는
고향의 음성
( 1980. 8. 20. 물레방아 제5호 )
얼굴
(관동문학 29집)
남진원
병원에 입원한 70대 영감
보고 있으니 호랭이 상이다
젊어서는
보는 사람마다 돈 달라고
호가 났다고 한다
늙었어도 병원 침대에 누워서
여전히 막말과 고함지르기, 욕질이다
부인은 날마다 폐지를 줍고 생계를 잇는다는데
하루라도 술 안 사오면
두들겨 패서 부인이 도망다닌단다
막말과 고함소리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자신의 얼굴에 일생을 새겼구나.
( 제목 ‘관상’을 ‘얼굴’로 바꾸었음. 끝 부분도 수정 )
얼굴
남진원
“돈은 최고!”
“뭐든지 할 수 있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는 건 돈의 힘”
악마는 돈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어요. 악마는 돈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 시작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돈의 유혹에 넘어갔어요. 또 위협하는 말도 했어요. “무서운 이 악마가 너를 죽일 수도 있어”, 그러나 어떤 유혹에도 꿈쩍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어요. 악마도 그 앞에서는 부끄러워 도망갔죠.
방글방글
웃는
아가의 얼굴
[인간과 문학 ] 동시 원고 – 남진원(2016. 4. 14)
2018년 2월 23일 시로 바꾸었음
얼굴
남진원
너무
맑아서
눈을
감으면
비워놓은 자리
들어앉는
하얀
가을 색
너
코스모스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얼굴
남진원
음성 만으로도 귀하신 말씀이기에
향기 만으로도 빛나는 몸이기에
당신을 채광하는 땅
부신 봄날입니다
허기져 아플 때면 눈을 감고 앉습니다
양지바른 들녘에 핀
봄꽃같은 모습으로
조용히 다가오는 당신
그 얼굴을 채웁니다.
( 1991. 10. 30. 아라리문학 10집 )
얼굴
남진원
화낸 얼굴
제 자랑 일삼는 얼굴
욕심쟁이 얼굴은
보면 단번에 알지
이런 사람은
구겨져 버려진 휴지를 보는 것 같다
남에게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얼굴
작은 것에도 고마워하는 얼굴
착한 기운이 가득한 얼굴도
보면 단번에 알지
이런 사람 앞에서는
부처님을 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매일 가만히 들여다 본다
( 1994. 10. 30. 『조약돌』 20집)
얼 굴
남진원
병원에 입원한 70대 영감
보고 있으니 호랭이 상이다
젊어서는
보는 사람마다 존 달라고
호가 났다고 한다
늙었어도 병원 침대에 누워서
여전히 막말과 고함지르기, 욕질이다
부인은 날마다 폐지를 줍고 생계를 잇는다는데
하루라도 술 안 사오면
두들겨 패서 부인이 도망 다닌단다
막말의 고함소리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사람의 얼굴에 일생이 있구나
( 2016. 관동문학 29집. 원제목 ‘관상’을 2024. 8. 수정 )
얼굴과 손
남진원
누가
얼굴을 보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인자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얼굴은
조용히 손을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모두 이분의 덕분이지요
매일 얼굴을 씻어주며
불평하던 손이
부끄러웠습니다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습니다
손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짜증나고 밉던 손이
제일 소중한 손이란 걸
알았습니다
( 1997. 9. 25. 제8시집 . 동시집『 할아버지 이뽑기』 )
얼레리꼴레리
남진원
달콤한 키스처럼
아이스크림 한 덩이 먹고
또 한 덩이 먹는다
이것 먹고 갑갑한 아내의 속이
시원해졌으면 좋겠다
침대에 조용히 누운 아내
내 말은 잘 안 들어도
한 덩이 아이스크림에
금세 마취당했네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 2013. 시집, <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
얼마 줄 거야
남진원
화사한 꽃들이 피었다
너도 나도
꽃 옆에 서서 야단들이다
친구가 멀찍이 서서 찰칵찰칵
계속 셔터를 눌렀다
꽃이 내 귀에 속삭였다
“얼마 줄 거야!”
“무얼?”
“모델료!”
( 2024. 3. 23.)
얼음판
남진원
눈을 쓸고 나니
쨍 -
눈부신 하늘색 얼음판
엉덩방아를 찧게 하고 팽이를 돌리게 하고
신나게 앉은뱅이를 타게 하고
그러면서 얼음판 위에 말간 웃음을
연신 미끄러지게 하였지.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엄나무 잎사귀
남진원
가을 어느 날
엄나무 잎사귀가
햇빛에 반짝인다
그윽히 …
빛과 그늘이 만드는
시간을
보았다
바람 찾아들 때
나도 한 잎 잎사귀였다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엄마
남진원
학교에서 오면
엄마가 반겨줘요.
우리 아들,
왔어!
쪽, 볼이 아프게 뽀뽀를 해요.
엄마가 집에 있으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지요? 공부를 끝마치고 집에 오면 “엄마?” 하고 엄마부터 찾던 일이 떠오릅니다. 밖에 있어도 집에 전화를 해서 엄마가 받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엄마는 포근한 사랑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이죠.
엄마가 엄마 친구와 전화 할 때면
남진원
우리 엄마 전화할 때면
신랑이 어쩌구 저쩌구…
머리가 희끗한 아빠를 아직도 새신랑이라고?
그럼 엄마는, 지금도 새 신부!
진시황(중국의 진나라 임금)은 오래 살기 위해 불로초(늙지 않는 신비의 약초)를 구하려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동방(대한민국인 우리나라)으로 오백 명의 젊은이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엄마가 아빠를 신랑이라 부르면 아빠가 훨씬 젊고 새로운 느낌이 들어 좋은 데요…. 엄마가 정말 젊게 사시는 것 같아 보기에 좋지 않나요!
엄마가 태아에게
남진원
작은 물소리
풀잎 사이로 스며드는 날
엄마는 들길을
걷는 단다
들판은
천천히 풀냄새로
다가오고
들꽃은 널 보고 있는 걸
알고 있니?
음 …
그래 그래
그러고 보니 아기야,
네 속에
꽃 향기가 살고 있는 걸 알았단다
네 속에
웃음 향기가 살고 있는 걸 알았단다
( 2012. 10. 13. 제11시집 『톨스토이태교동시』,처음주니어,)
엄마가 태아에게 주는 말
남진원
“우리 아기 사랑해요!”
엄마는 아기가 자라는 배를 쓰다듬으며
속삭여요
아기는 말 안 해도
엄마 목소리
듣고 있어요
엄마 목소리
기억하면서
자라는 태아
이제는 몸을 틀기도 하고
거꾸로 서기도 해요
“ 사랑해요! ”
자꾸 들려오는 엄마의 말
신나는가 봐요
벌써부터
재롱을 부요.
( 2012. 10. 13. 제11시집 『톨스토이태교동시』,처음주니어,)
*엄마는 ....
남진원
내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게임에 찰싹 달라붙어
나오기 힘들고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만화 영화 속에
꽁꽁 갇혀버리죠.
엄마는
책 앞에서도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 보라 하신다.
엄마는 새 신부?
남진원
우리 엄마 전화할 때면
신랑이 어쩌구 저쩌구…
머리가 하얀 아빠를 아직도 새신랑이라고?
그럼 엄마는, 지금도 새 신부?
진시황(중국의 진나라 임금)은 오래 살기 위해 불로초(늙지 않는 신비의 약초)를 구하려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동방(대한민국인 우리나라)으로 오백 명의 젊은이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엄마가 아빠를 신랑이라 부르면 아빠가 훨씬 젊고 새로운 느낌이 들어 좋은 데요…. 엄마가 정말 젊게 사시는 것 같아 보기에 좋지 않나요!
엄마만
남진원
엄마만
언제나
아가를 안고 잔다
엄마는 큰 천사
아가는 작은 천사
(1978년)
엄마 손
남진원
애구, 귀여운 것
그런 마음으로
내 손 잡은 엄마 손
( 1993. 강원아동문학 18집 )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엄마 엄마 우리 집에
남진원
엄마 엄마 울 가득히
나무를 심어요
산새들 노래소리 날마다 피어나는
새소리에 뒤덮인 집
아, 얼마나 좋아요 얼마나 좋아요
엄마 엄마 우리 집에 나무를 심어요
엄마 엄마 울 밑에는 고운 꽃을 심어요
흰 나비 노랑 나비 날마다 찾아오는
꽃잎 속에 파묻힌 집
아, 얼마나 예뻐요 얼마나 예뻐요
엄마 엄마 우리 집에 꽃을 심어요
(1983. 10. 30. 조약돌 제11집)
(1988. 8. 30. 『풀잎과 코스모스에게 』)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엄마에게 되지게 혼났다
남진원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쌩쌩 -
사나이는 무엇이든 이겨야 해.
동생을 데리고 달렸다.
동생은 추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집에 들어와서 엄마에게 되지게 혼났다.
(*되지게 : ‘죽도록 , 죽을 만큼’의 뜻을 가지 지역말입니다.)
가끔 동생이 미울 때가 있지요. 그러나 형은 동생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한답니다. 형은 씩씩한 동생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추운 날 동생을 데리고 달리기를 하였네요. 어린 동생이 감기 걸릴까 봐 엄마는 큰 걱정을 했어요. 엄마로서는 형을 꾸중하겠지요. 엄마도, 형도 모두 아끼는 마음이 대단합니다. 동생은 참 행복하겠어요. 나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와 아기
남진원
1.
울다가
밥풀처럼
얼굴에 붙어있는
기다림의 저 덩어리
이리 온
엄마가 두 손을 벌리니
눈동자가 뚝뚝 떨어질 듯
기어온다
2.
엄마가 아기 옆에서
아기가 엄마 옆에서
잠이 들고
난로가 조심조심
어둠을 지키는 밤
아가 옆에서 자는
엄마 얼굴은 빙그레
엄마 옆에서 자는
아기 얼굴은 방그레.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엄마의 눈물
남진원
이모가 오시자 아픈 어머니는 우셨다.
이모가 가실 때에도 어머니는 우셨다.
이모를 다시는 못 만날 것이라는 걸 엄마는
아셨다.
마음속에 몇 사람씩은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다시는 못 만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안다. 엄마도 그런 사실을 아셨던 것이다.
엄마의 눈물은 너무 맑아서 그날 주위의 모든 사물이 온통 뭉클해지며 젖었다.
엄마는 자주 그런 아름답고 슬픈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한 번도 그런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 아, 나는 사람 사이에 고귀함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 2018. 9. 7. )
엄마 품
남진원
번개를 보고
똥그래지는 눈
천둥소리가 들리면
몸이 오싹
이럴 때 동생과 나,
엄마 품으로 쏙 숨지
하나도
안 무섭다
해해해해해해…..
엉성한 현재
남진원
지금 거울 속을 보는 사람
푹 파인 주름살 내보이며 웃는다
늙는구나
주름살 속에다 쑤셔 넣은 평생의 아픔 평생의 행복
그 덕분에 웃음이 더 깊어졌다
허허허, 다시 웃는다
늙는 게 고맙단다
엉성한 현재로 살아가는 빛나는 암각화 한 폭이다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여는 시
남진원
( 2014. 11. 27. 강릉교육문화관에서 하는 제12회 정기시낭송회 여는 시 임.)
낭송 시첩은 [가을, 시에 물들고 음악에 반하다 ]였다.
나무가 한 해의 삶을 꽃잎과 꽃과 열매에게 매달았다가
우주 속으로 보냅니다
온 몸으로 낭송하는
한 편의 시입니다
저 ---
기막힌 결실에 대한
아무런 성공보수도 바라지 않는
이어있음의
풍요로움
그렇듯이,
한해를 마무리하며
우주를 향해 날려 보내는
풍성한 시낭송과 음악의 울림
아름다운 설렘으로 시의 가을을 엽니다
따뜻한 체온으로 시의 온기를 엽니다.
어어할 거나
남진원
외로움이 밀려오는 밤이면
그냥 모든 게 막막하여라
허전함이 밀려오는 밤이면
그냥 모든 게 부질없어라
사람들은 내가 배때기 부르니
헛 생각이나 한다고 하지만
어디
밥만 먹고 살 수 있다더냐
오늘처럼
시도 때도 없이
외로움이 몰려드는 밤이면
오늘처럼
시도 때도 없이
그리움이 몰려드는 밤이면
잠 못 드는 이 밤
어이할거나
어이할 거나.
( 2021. 2. 2 )
여동생들
남진원
오라버이 잘 계시는가 휴대폰 속 밝은 음색
아픈 속들 다 감추고 오빠부터 걱정하는구나
동생들 따뜻한 정에 내 마음은 늘 봄이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여름
남진원
매미 소리가 두어 차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느티나무 그늘이
점점 더 짙어지자,,
그늘 아래는
무성한 나뭇잎처럼
귀가 솔깃한 이야기와 소문들이
마구 떠돌아다녔다
모두들 더위에 풀 죽은 모습이 아니라
더 신나는 얼굴들이다
구름 속 여름
남진원
한나절 더위 끝에 무성한 매미 소리
소나기 지난 후에 청산이 산뜻하다
구름 속 푸른 여름은 언제 땀을 씻었나
멋진 친환경 여름
남진원
풀은
눈이 달렸나 봐
제초제, 농약 안 친 우리 땅
풀이 먼저 알아보고
쑥쑥쑥 자란다
나도
희망에 부풀었다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어
풀벌레들이
자유롭게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어
친구를 불러
풀 사이 사이에서 들려오는
예쁜 음악에도
귀 기울이고 …
멋진 친환경
여름 날이 될 거다.
여름날
남진원
건너 편 숲 속이 꼼짝하지 않는다
푸르고 푸른
멸(滅)
이윽고
매미소리
강
이쪽으로 건너오며
잠 속에 든
돌을 깨운다
( 시집 『어초』,2002. 8. 1. )
( 제10시집, 『장자의 하늘』, 태원. 2004. 6. 30.)
여름날
남진원
하늘빛도 푸른 빛 아홉 살 푸른 빛
내리는 볕살은 아주 미운 일곱 살
열 두 살 해바라기는 어쩌다가 잠들었나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여름날
남진원
한차례
소낙비 쏟아지고 난 후,
모처럼 공기질 ‘좋음’
우리 가족 모두 활짝 웃는 날
구름 사이
파란 하늘도 ‘방긋’
잠자리 떼가
신이 나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늘 사이
하얀 구름도 ‘방긋’
매미 소리도
더 신나서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우두커니 서서 보고 있는 숲
참 어질다.
( 2019. 6. 1. 『아동문학평론』 여름호 )
2024, 여름
남진원
최악의 폭염에
초열대야까지…
힘들지만
새벽녘 뒷산 숲을 흔느든
매미소리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다
유년의 고향 집 새벽
눈뜰 때 듣던
그 소리의 빛깔보다 더 빛나는
싱싱하고,
쟁쟁한
여름 아침을 물들이는 싱그러움
다더에 몸은
어려워도
그 어느 여름날 보다
기쁘게 맞이하는
행복한 여름
밤이면 쏟아부을 듯 빛나는
별들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 2024. 8. 15. )
여름날
남진원
한낮 긴 닭울음
떠돌다 잠들 무렵이면
여름 볕 무더기 무더기
마을에 쏟아붓는다
고추가 불을 뿜는다
고요마저 타던 불빛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여름날 새벽
남진원
집 옆에 밤나무 숲 무성하여 참 좋았지
새벽부터 밤 숲에서 고함치는 매미소리
아침 잠 좋게 깨우는 싱그러운 노래였지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여름날, 오늘
남진원
인월사 부근에서
들었다
매미소리
맴, 맴 …
꼴 베고 감자 캐던
어린날의 고향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 2025. 8. 8.)
여름날에
남진원
아침 저녁 시원할 때 공부하라 하신 아버님
그 말씀 이제는 거꾸로 지킵니다
더울 땐 시를 짓다가 시원하면 밭일 하죠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여름날의 기억
- 지나온 길 모두가 그리움이라오
남진원
즐거운 여름이라고 생각하니 어릴 때의 잠자리 채가 생각났다
싸릿가지 끝을 둥글게 말아 끈으로 묶고
거미줄을 찾아다녔지. 지붕 어귀나 검정 굴뚝 사이에 쳐놓은 왕거미 줄을 만나면 보물을 찾은 듯 기뻤다
둥글게 된 싸리나무에 왕거미줄을 칭칭 감았다
빨랫줄이나 작은 나뭇가지 끝에 앉은 잠자리를 보면
숨을 죽였다
긴장된 순간,
잠자리가 포르르 날았다
늘 실패로 끝나곤 했지만
즐거웠다.
방학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뛰놀다가 배고프면
부엌에 가서 검정 쇠솥을 열었다.
감자와 보리가 섞인 거무스르한 식은 밥을
물에 말아 김치와 함께 꾹꾹 넘기고는
다시 나와 종일을 돌아다녔다.
어린 날 그런 여름이 있어서
내게는 그 어떤 기념일보다 보배로웠다.
( 2025. 8. 1. )
여름날 최고의 음악
남진원
아름다운 음악 보다,
공포 영화 보다도,
폭염을 헤치고
숲에서 보내는
음악
맴 맴 매앰매앰맴맴맴맴
매미가 보내는
매미소리,
이 여름 최고의 음악이다
( 2024. 7. 27 )
여름 낮잠 후
남진원
풀을 매다가 호미를 던져두고
방에 들어와 씻고 낮잠을 청한다
깨어보니,
장수하늘소 닮은 벌레가
곁을 지키고 있다.
( 2021. 8. 21 )
여름날 해 질 무렵
남진원
해가 난 여름날이면
산제골 소가 놀이터이다
아침 공부를 끝내고 나면 냇가로 내달린다
종일 물속에서 뒹굴다 나오면
어느덧 서산머리에 앉은 햇살이
내려다본다.
그제사 물 밖으로 나온 우리는
옷을 입고 나선다
가볍고
기분 좋은 발걸음
논둑 길 사이로 걸어가면
메뚜기들이
무서워 도망치는 모습도 반갑다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의 나물 보따리가
산이다.
풋풋한 산나물 냄새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수건으로 땀을 닦으시며
반기시는 머머니 모습,
최고였다!
( 2025. 9. 28.)
여름 바람
남진원
호박 내음
옥수수 내음
배여오는
들판에서
한 여름
꽃잎이 되어
얼싸절싸 뒹군다
( 1979. 10. 20. 물레방아 제4호 )
여름밤
남진원
할머니 이야기
아가 귀에
풀어놓는 밤
아가는
하나 둘
별을
손가락에 걸으며
이야길 듣는다.
눈꺼풀 사르르
꿈나라 찾아
벌써
꼬옥 쥔 손바닥
할머니 이야기가
한 웅쿰
별이
한 웅쿰
- 《교육자료》1976. 3월호.동시 1회 추천 .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 2025. 4. 5. * 나의 삶 나의 문학, 남진원문학전집 1권 ‘문단보행’ 속에 수록 ])
( 남진원의 문단사 51년. 제1권 . p. 25,)
태백시, 1973년의 황지는 검은 탄광 마을이었다. 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검은 산과 검은 물이었다. 나는 희망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없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관사에서 일어나서 학교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었다. 내게 유일한 희망은 학교의 전체 조회시간이었다. 아이들 앞에 선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검은 탄이 묻어있지 않은 맞은 편 매봉산이었다. 푸른 매봉산에서 피어오르는 아침 엷은 안개는 신비감마저 자아냈다. 일주일에 한번 씩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떤 막연한 비상을 꿈꿀 수 있었다. 1975년 부지런히 교육 전문잡지였던 『 교육자료』와 『 새교실』에 작품 투고를 꾸준히 하였다. 추천되기는커녕, 작품 평에도 내 이름 석자가 없는 것을 보고, 늘 실망이 앞서고 내 재주 없는 것을 탓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1976년 1월 하나의 두툼한 소포 봉투를 받았다. 발신인이 한국교육출판사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열고 보니 1976년 교육자료 3월호였다. 그 곳에 내 이름 석자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듯한 책에 내 이름 석자가 실린 것이었다. 『 교육자료』에 보낸 응모작이 추천된 것이었다. 교무실 내 책상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하면 된다!”
이때부터였다. 어느새 나는 유년의 고향 집에 가 있었다. 태어나서 국민 학교 졸업때 까지 12년, 아니 더 정확히는 11년 동안의 기간이었다. 그 11년이 내 평생의 큰 추억으로 남았다. 그러나 다섯 살 때까지는 기억에 없기 때문에 고향살이는 5년을 빼면 6년 정도이다. 이 6년의 추억이 내 70년의 세월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아마 처녀림 같은 자연환경 속에서의 추억, 뜨거운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 동네 어른들과 친구들의 정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 ‘여름밤’에서처럼 할머니는 끔찍이도 나를 사랑하셨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네 살 때 밥그릇에 싼 오줌 밥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잡수셨다고 하였다.
그래서인가, 나는 그 옛날 고향집 이야기를 평생 동안 작품 속에 그려넣고 있다.
여름밤
남진원
할머니 옛 얘기가
깊어가는 여름밤
아이는 귀를 반짝
별들은 눈을 반짝
잠이든 아이 손에는
이야기가 한웅쿰 별이 한 웅쿰
여름밤
남진원
길쭉한 산그림자가
개울을 지나고 감자밭을 지나
온통 마을에 드러누울 때
얼룩소가 외양간으로
저녁을 몰아 들어가고
마당 한가운데에선
여우와 토끼와 호랑이가
실꾸리처럼 풀려나오는
할머니 옛날 이야기
마당가 대추나무도
살래살래 엿듣고
반딧불 반짝반짝
호롱불 들고 찾아오면
꽃잎 같은 아이들의
귀가 별처럼 열리는 밤
눈이 별처럼 빛나는 밤
어둠은
달빛에 쫓겨
무성한
옥수수밭에서
귀를 세우고 있었다.
(1975. 6)
지금 살펴 보니, 1975년 이 무렵에 쓴 작품들이 많이 있다.
(‘꽃씨’, ‘아침마다 거울과’, ‘ 아침교실’, ‘탄마을의 밤’ ‘가을’, ‘썰매’ 등의 작품이었다.)
여름밤
남진원
마당에 자리 깔고
동생과 누워
할머니 옛 얘기 듣고 있는 밤
나무 뒤 달님도
가만히 숨어
할머니 옛 얘기에 싱글벙글
지붕엔 하아얗게 박꽃이 피고
시냇물 흘러가는
강둑에 앉아
영희와 하나 둘 별을 세는 밤
우리 집 누렁이도
내 곁에 앉아
두 귀를 세우고 쫑긋쫑긋
숲속엔 도란도란 풀벌레 울고
(1983. 10. 30. 조약돌 제11집)
(1988. 8. 30. 제4시집<동시집>, 『풀잎과 코스모스에게 』)
여름밤
남진원
어둠과
고요가
가만히 마을에 내려서면
풀벌레들은 조용히
노래 주머니를 열어놓고
실을 뽑듯 한올 한올
노래를 짠다
그 때쯤
수런대며
벼 포기 사이에서
방울방울 떠오르는
개구리 울음에 쌓여
마을은
풀빛 노래들이
동글동글 떠다니는
동화 속 나라
아이들의 꿈도
창문을 열고 나와
하나, 둘
별이 되어 날아오른다.
( 1982. 5. 『아동문예』)
여름밤
남진원
풀잎들이
모여 앉은
들길에
풀벌레들이
풀벌레들이
밤새도록
노래를 깔아놓는다.
빠꼼 빠꼼 빠꼼
빠꼼 빠꼼
별들이 내려다 보고 있다.
( 제8시집, 동시집 『할아버지 이뽑기』, 1997. 9.25. 대교출판 )
여름밤
남진원
풀냄새 짙어가면 모깃불 피어나고
멍석 위에 풍성하게 쏟아지는 별빛들아
사람도 풍경이었지, 고향집의 예쁜 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여름밤 경포 호수
남진원
이따금 찾아 간다
물빛 고와라
천천히 호수 따라
둘레를 걷고 있으면
청자 빛 개구리 울음
바둑돌 놓듯 하고
고개 들어 하늘 보면
思惟 속에 뜨는 별들
스스럼없는 눈빛으로
다가오는 물결의 律
맑아진 그리움이 보이네
천년 바람, 그 숨결
(강호시조문학, 2016.)
여름밤은 달빛 그물에 걸려
남진원
달님이
한밤에
그물을 친다
맨 먼저
풀벌레 소리가
자욱하게 걸려 올라온다
개똥벌레도 걸렸다
어느새 대숲을 돌아 흐르던
물소리도 치렁하게 걸리고
은비늘
하얗게
날아내리는 밤
온통
달빛으로 짠
그물에 걸려
출렁이는
출렁이는 여름밤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여름밤의 별
남진원
별들이 모두
밤에 나타났어요.
내가 너를 지켜 줄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아요.
어두운 곳에서 내려다 보아요.
반짝 반 짝
반 짝
반 짝 반짝
반짝 반짝 반짝
반 짝
사랑의 빛을 전해요.
별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나 봐요.
높은 곳에 있으면 무섭지 않나? 나무 꼭대기에만 있어도 어지러울 것만 같은데… . 별들은 깜깜한 밤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어요. 참 대단해요. 나를 지켜주는 수호 천사 같아요.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면 참 행복한 일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큰 행복을 느끼지 못하죠. 별들은 하늘 높이 있어도 가장 낮은 곳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네요. 남을 걱정해주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네요. 사랑을 전하는 별처럼 우리도 주위에서 사람들에게 작은 별이 되어 볼까요?
( 2012. 10. 13. 제11시집 『톨스토이태교동시』,처음주니어,)
여름밤 종소리
남진원
잎새마다 흘러내리던
초록이
엷은 비닐을 쓰기 시작하고
방울방울
개구리 울음이
눈 뜨기 시작할 때
아담하게
마을 가운데 들어선
교회당 한 채
그 위에서
맑은 숨결로 쏟아지고 있는
우리들 귀가 푸는 종소라
어느새, 황토길 위로
어둠을 열어가는 종소리 앞에
여름밤은 무수한 별을 꺼내
빛을 뿌리기 시작하고
산마루엔
종소리에 익어
노오랗게 물든 달님이
환하게 환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 1980. 8. 월간『기독교 교육』)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여름 방안에서
남진원
앞에는 선풍기
벽에 걸린 온도계는 32도를 가리킨다
이 염천에 어느새
면역력이 길러졌나
오래된 김 구워 밥에다 젓갈을 올려놓고
김 쌈을 해 먹고
배부르니
고소소
잠이 솔솔
의자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니
여기는 욕심도 야심도 낡아버린 곳,
내 무문관인 줄 알겠다.
(2023. 8. 21)
여름방학
남진원
7월 24일, 방학하던 날이 이날이었지.
어릴 때 국민 학교에서 방학공부 책을 받고 집으로 가던
신나던 날
즐겁던 날
방터골 뒷산에서 참매미 우는 울음소리가
한결 어릴 때의 일을 그립게 한다.
일생을 통해 발걸음이
제일 가볍던 날
방학한 후부터는
아침에는 공부를 하면서
한낮이 되길 기다렸지.
문래줄 소에 가서 풍덩거리며
멱을 가고 골자기 가재도 잡을 때면
산도라지 꽃은 조용히 지켜보고
골짜기 나리꽃은 더욱 활짝 웃어주었다.
‘해야, 해야
제발 천천히 가다오’
교회에 가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 빌기도 했지.
(2021. 7. 24.)
어린 시절 여름방학
남진원
여름방학 하던 날은 최고로 즐거운 날
얼굴엔 함박웃음 깡총대며 좋아했지
막 나온 ‘여름공부’책 끼고 신명나던 귀가길
여름방학 공부 책
남진원
방할 하면 받았던 「여름 공부」 그 겉 표지
고기 잡는 시냇가 옆 황소가 풀을 뜯고
밭 가엔 원두막 한 채 여름 한창 익었지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여름 밭에서
남진원
호미질 괭이질로 구슬 땀 쏟아낼 때
무엇인가 놀라면서 달려오는 幾微 있어
풀 대궁 헤치며 오는 천금 같은 바람아
잠시 앉아 쉬는데도 뻥 - 뚫리는 듯 이 시원함
호미도 만족한가보다 벌러덩 밭에 누워있고
멍하니 쉬는 내 기분 즐거움의 한계를 이미 뛰어넘었다.
(2019. 7. 21.)
여름 숲
남진원
닿아서 스며서 돋는 씨 크는 외세
눕고 또 서다가 넘치며 몰아치며
섞여서 빛과 어둠으로 둘러쳐진 물의 나라
꿈길 몇 번씩 손뼉 치며 날아오고
핏줄 만 가닥 소리로 무늴 짜며
夢想의 그물에 걸려 파득이는 푸른 악기
( 1990. 11. 30. 『아라리문학』 9집 )
( 1994년 『강원시조』 9집)
여름 숲에서
남진원
四圍가 고요하니 花響도 반 쯤 차고
허공 속 드나드는 녹차 잎인가 새소리인가
여름 날 풀빛 하루가 또 그래서 길을 잃다
( 현대시조 여름호 2011. 6. )
여름 숲속 아침
남진원
나무에서
팥알처럼 떨어지는
새소리에
새벽이 달아난다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은빛 새들의
저 낭랑한 눈부심
하늘빛 청청한 모습으로
산은
눈망울 번뜩이며 깨어나고
새들의 날갯죽지에서
쏟아지는
푸른 바람 한떼
산 메아리
이끼로 자란 골짜기마다
해 뜬 버드나무 잎새들이 파닥이고
상쾌한 빛깔만 골라 담아
졸졸졸
아침을 굴리며 가는
물소리에
여름 숲속 아침
온통 비취빛 귀를 열고 서 있다.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여름 숲에 대한 리플레이
남진원
비스듬히 누운 밭 가로 둘러선 밤나무 숲
짙은 그늘 드리운 채 매미 떼 끌어들여
밤나무, 여름을 묻혀 소리를 마구 보냈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여름 숲에 대한 리플레이
남진원
비스듬히 누운 밭가로 둘러선 밤나무 숲
짙은 그늘 드리운 채 매미 떼를 끌어들였다
새벽은 여름을 묻혀 그 소리를 퍼 날랐지
어둠을 흔들면서, 또 원시의 아우성으로
내 방을 찾아오던 숲속 요정 난쟁이들아
청아한 금속성 언어 아직 슬지 않았네
여름 아침
남진원
간밤에 빗소리가 늦도록 들리더니
아침에 눈 떠보니 세상이 경이롭다
청청함, 바로 이런 것 이 우주의 천지개벽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여름 아침
남진원
마루에 엎드려서 여름공부 하다보면
귓가에 다가오는 챔 매미 노랫소리
신나는 풍각쟁이야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연필심에 침 묻히고 더 힘주어 글씨 쓴다.
여름에
남진원
소나무 가지에 잠자는 쇠박새를 깨울까 봐, 청설모가 고무줄 늘이듯,
살금살금 …
떡갈나무 사이에서 풀벌레가 작고 귀여운 소리로 누굴 부르는 걸까
가만가만 …
보름달을 닮아가는 엄마 배가 더 나올까 말까
말랑말랑…
모두 이 여름에
조심조심 …
( 2012. 10. 13. 제11시집 『톨스토이태교동시』,처음주니어,)
여름은 좋아
남진원
1.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호박잎 축축 늘어진다
그렇지만 매미가 맴 맴 맴 맴 노래하는
여름은 좋아 여름은 신나
2.
바람도 한 점 불지 않는다
땀방울이 송송 돋아난다
그렇지만 과일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여름은 좋아 여름은 신나
3.
소나기 좍좍 쏟아진다
새들이 휙휙 숲에 숨는다
그렇지만 무지개 곱게 걸린 하늘을 보면
여름은 좋아 여름은 신나
4.
모기가 앵앵 날아다닌다
모깃불 매캐해 기침이 난다
그렇지만 반딧불 호롱호롱 날아다니는
여름은 좋아 여름은 신나
( 1990. 3. 1. 『솔바람』 2집 )
무더운 여름을 비가 다 채어가니
남진원
한창 더울 이즈음에 태풍이 몰려와서
처서가 되어도 그치지 않는 비야
오지게 달구어질 게 여름만은 아닌데.
무더운 기운일랑 비가 다 채어가니
잡풀만 키워놓고 모기떼가 극성이다
질척댄 뒷산 숲속은 허우대만 멀쩡타
모깃불 핀 저녁은 제격이 반딧불 구경
빗물 섞인 농약 냄새 꿈속 같은 전설이다
이제는 어느 곳에서 듣고 보고 할 건가
(2021. 8. 20.)
누가, 여름을 연주하나
남진원
감자 꽃 피고 지다가 뻐꾸기가 목이 쉴 무렵이 되면
매미가 찾아왔다. 어김없었다.
누가? 아, 여름의 연주자 매미의 멋진 음악 축제가 펼쳐졌다.
나는 모기장 속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매미소리가 들리면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매미소리와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 모든 게 안심이 되어 한없이 평화로웠다. 푸른 색 매미의 연주는 달콤한 잠의 꿈속까지 이어졌다.
제일 신나는 건 온갖 꽃들이었다.
뿌리를 흙속에 더 단단히 박은 꽃들이 꽃잎 귀를 열고 향기는 자꾸 진해졌단다.
(강원아동문학 43집. 2018년)
여름이 가는 길목에서
남진원
여름이 가는 길목에서 찾아온 손님들
하늘에서 날갯짓하는 잠자리, 잠자리, 잠자리 떼
가을이 그냥 오는 게 아니었구나.
(2023. 8. 28)
여름이 깨어나는 아침
남진원
해 뜨기 전 채마밭에는
포르르
참새들 날아왔다가 날아가고
두엄더미 옆에서
키 한질 자라
꽃으로 수를 놓는 코스모스
나비는
오이꽃 주위에서
오르락내리락
아직 햇살 내려앉기 전이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매미소리
시원하게
우리 집을 흠뻑 적셔놓는다.
( 2015. 9. 17. 제14시집 『 산골에서 보내온 동시』, 좋은 꿈 ),
여름 고향집 저녁
남진원
풋고추 상치쌈에
피곤을 털어넣고
이 얘기 저 얘기로
꽃 피우는 저녁상
하늘엔 싱싱한 별꽃
다투어서 피어난다
장맛으로 익어가는
초여름 저녁 한 때
산나물 배인 옷깃
이야기로 살쪄가고
멍석엔 개구리 울음
질펀하게 젖었다.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남진원
폭염이 제아무리 지속되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여름 다 가기 전에
후회되지 않게
못해 본 일 없이 다 해 봐야지
나리꽃 꺾어 들고
환하게 웃던
어린 시절 분이야.
고향 냇가에서
맨손으로 풀숲을 더듬다가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며
고기잡이를 해 보는 거야
매미채 들고
매미 소리 따라
등이 흠뻑 젖도록 숲속을 헤매 봐야지
해거름 저녁이면 방죽에 앉아
그날처럼
도란도란 옛 얘기도
또 해 보는 거야
그래그래, 한여름 밤
탁자에 앉아
머리 허연 친구들 불러 모아
여름밤 총총히 빛나는 별을
다시 세어 보는 거야.
( 2025. 8. 24 )
여름 저녁
남진원
마당에 멍석 펴고 식구들이 모여 앉았다
찐 감자 옥수수 상추쌈에 푸짐한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도 상 닳도록 떠들었지
모깃불 피워놓아도 달려드는 모기 떼들
목이며 무릎살을 몇 번 씩 물렸어도
별 돋고 어둑해져야 자리 털고 일어났지.
여름 저녁
남진원
2025년 8월의 여름 저녁은
아파트 책상에 앉아 시만 쓴다
문 다 열어놓아도 후덥덥한 건 마친가지
TV 뉴스는 시끄러운 정치판 이야기
안 봐도 그 속내는 훤하다
여당은 자랑질이고 야당은 헐뜯기로 나서니
늘 신물 난다
드라마는 신선미 꽝에다가 연기력도 바닥을 치니
채널 돌리기에 바쁘고
이놈의 폭염은 언제쯤 떠나려나
잠은 오지 않고
이래저래
승질만 난다,
그래도 참아야지 별 수 있나.
( 2025. 8. 29 )
여름, 저녁 6시
남진원
그 용맹스런 폭염의 기세도
저녁 6시가 되니
축 쳐졌다
밖에 나오니
걸어다니는 기븜이 배가 된다
어디서 나타났지?
잠자리 떼가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나보다 더
신나한다
( 2024. 7. 27 )
여름 줄낚시
남진원
호랑바위 부근 아래 검은 물 넘실넘실
애들은 저녁이면 줄낚시를 놓았다가
새벽에 서너 마리 씩 뱀장어를 낚아왔지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여름 풍경
남진원
매미가
소란 떨더니
소낙비
한 차례 다녀갔지
씻긴 모습 드러낸
집 앞
풀잎들
앞 냇가 물소리,
또 얼마나
맑아졌을까
여름 한나절
남진원
매미가
소란 떨더니
소낙비
한 차례 다녀갔지
고목이 된 나무들
한가롭고
씻긴 모습
앞 다퉈 드러내는
풀잎들
앞 냇가
물소리는,
또 얼마나
맑아졌을까
여름 한낮의 매미소리
남진원
소곤대던
풀잎끼리도 입 꼭 다물었다.
모두 더운 가?
개울 이쪽에서도
개울 저쪽 산 밑 나리꽃 핀 곳에서도
기척이 없다.
심심해서 돌멩이를 주워 물 위로 던졌다.
그 때,
작은 금속성 소리가 밧줄 늘어뜨리듯 늘어지며 들린다.
점점
빠르다.
점점 눈부시다.
어느새, 강 이쪽과 저쪽을
허공 물고기가 되어,
마구 쏘다닌다.
< 2023. 현대시조 여름호 단시조 >
여백의 언어
남진원
나이가 들다 보니 말은 자주 여백이다
간간이 麝香같은 넋두리가 있을 듯 해도
행간을 헤아려보면, 늘 불명확한 근사값
여보 라는 말
남진원
부부가 기대는 등이다 '여보!' 이 한마디 말
그대와 나 사이에 수액처럼 흐르는 말이다
백년은 싹을 틔우고 또 천 년은 꽃을 피울 ‥‥
( 「바다시낭송회 카페, 2016. 4. 11. )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 시집속의 시조집 「나를 놓다」-
‘여보!’ 이 말 한마디 말
남진원
평생을 기대인 말 ‘여보!’ 이 한마디 말
우리 서로, 마음 안에 강이 되어 내달렸지
백년은 싹을 피우고 또 천 년은 꽃을 피울….
( 2011년 『현대시조』, 여름호 )
여울목(여울에서)
남진원
내 못잴 여울목에 눈썹이 하얀 사랑
철마다 단비 내려 무성하게 자라나도
망치여 가슴의 못질, 앓을수록 푸른 깊이
(수필 ‘몇 장단 풍물을 쳐야’ 속의 시조)
( 1990. 11. 30. 『아라리문학』 9집 )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 시집속의 시조집 「나를 놓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 남진원 산문집,『달빛에 싼 청산 한 채』‘절망에 넘어지고’ 중에서)
여의도를 지나며
남진원
혼자 살아가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개를 키워 보라고 한다
나는
나도 거두기 힘든데 개까지 …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보다 더 깊은 뜻이 있는 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나 대신 짖어주는 개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 2024. 12. 24.)
여인
남진원
여인은
화초
어디 여인 뿐이랴
사람은
사랑의 물을 줄 때에야
싱그럽고 윤기있게 피어오르는 꽃
( 1984. 3. 10. 물레문학 3집)
( 1985. 11. 7. 제2시집,『나비, 청산의 나비』)
여인의 달
남진원
네 눈은
양잿물에 적신
푸른 숫돌
피 쏟아놓은
밤 밤 밤 밤에
칼잡이 춤을
추며
춤을 추며
불같은
울음 우는
달아
달아.
(1984. 3. 10. 『물레문학』3집)
여행을 떠나죠
남진원
여행을 떠나죠
단풍잎 한들한들
손짓하는 산
어서 오라 정답게 손짓하는 산
산새도 비쭁비쭁 우릴 부르면
마음은 발갛게 꽃물이 들어
바람 따라 동실동실 가벼운 발길
구름 따라 둥실둥실 흥겨운 발길
여행을 떠나죠 여행을 떠나죠
여행을 떠나죠
산 열매 익었다고
눈짓하는 산
어서 오라 정답게 눈짓하는 산
풀벌레 찌르 찌르 우릴 부르면
마음은 초록색 풀물이 들어
바람 따라 동실동실 가벼운 발길
구름 따라 둥실둥실 흥겨운 발길
여행을 떠나죠 여행을 떠나죠
역사
남진원
역사는 풀이다
역사는 풀처럼
생생한 생명 활동이다
(2023. 8. 10)
歷史는 흐른다
남진원
만나고 헤어짐을 會者定離라 했다던가
그 때 그 모습들은 세월 따라 떠나갔네
이렇게 생생한 꿈이 우리 사는 삶이네
( 2003년 10월 20일 한울림문학회 회원들이 백일장에서 각종 입상한 기념으로 찍은 단체 사진을 보며 쓴 시조)
( 2019년 8월 15일에 )
역사를 더듬어보다
남진원
천하를 욕심내어 취하고자 한 영울들
수많은 배반과 복수 불러오고 말았지
죽어서 가지고 산 게 대체 무엇이었나
( 2019. 12. 31. 남진원 산문집 ,
『달빛에 싼 청산 한 채』‘존재와 욕망에 대하여 말하다 ’ 중에서. )
역사의 강
남진원
시인 묵객 호걸들아 어디로 간 것이냐
흐르는 역사읙 강 무심히 들여다보니
긴 고독 침묵의 낚싯줄 세월속에 잠재웠네
易學 모임
남진원
새벽 잠 깨운 채로 닭 백숙 준비한다
엄나무 감자 대추 情도 한 말 쓸어넣고
쇠솥에 불을 지피니 기쁨마저 설설 끓고
방터골 암벽 아래 애단법석 마련하니
호법신장 암암리에 계곡을 지켰구나
그 많던 행락의 발길 일순간에 끊겼다
術家들 一杯二言 객기처럼 떠다녀도
가만히 들어보면 모두가 귀한 法說
저마다 생각 한자리 獅子吼가 아닌가
(2020. 전자책 시조집 『꽃물 들어 아픈 날』, 한국문학방송)
鳶
남진원
하늘, 해, 구름에
먼 먼 웃대의 말씀이 얹힌
그래서 말씀 하나 앉히고 싶은 바램으로
댓살에 종이를 바르고
귀한 귀 하나를 열어놓은 아침.
가난도 맛드는 연줄에
맺힌 것
가라앉힌 것
모두 일구어
신라적 바람마저 부추기며
비늘을 세우면
발가벗은 몸으로 솟구치는
외로운 넋 하나
광활한 솟을 대문을 두드리는
아름다운 나의 자맥질
연실
넘실거리며 출렁이며
함성 한 끝을 쥔 채
마악 불을 지르고 있다.
( 1987. 10. 1. 제3시집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
鳶
남진원
어린 날 매년 정월이면 연을 날렸다. 바람 부는 날, 들판에서 연줄을 풀어내면 연줄은 연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어찌 연줄만 하늘로 들어올릴까
바람을 가르며 이리저리 꼬리를 날리며 하늘로 오르는 연의 활달한 모습 .
날고 싶은
꿈을 얹어서
연줄을 타고 오르는
아이들의 웃음
겨울 밤하늘 별들이
유난히 더 반짝이는 줄 알겠지!
蓮
남진원
황토에 뿌리 실한
소나무 등걸은
애시당초 양반집 후손의 것
그 후손의 한 가닥 뿌리
억겁을 돌아
오늘은
퇴락한 문반 댁
연못 위에 앉았다
고인 못물은
잠이 부족해
썩는 것이 꿈만 일거나
입맛도 헐벗은
진흙 집
그 수렁 속에서 떠오르며
네 핏줄을 드러내놓고
방랑길 손 맞잡던
바람도 드러내놓은 후에야
죽은 듯
피워놓았네
蓮 한 송이
( 1993. 10. 9. 『시와 산문』 제1집. )
연말
남진원
금년 2024년이 저물어가는구나
연말이라는 이유 하나로
설렐 것도 없는 날이지만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길 크리스마스가
찾아올 준비에
작은 설렘을 가져도 본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나,
눈도 침침하고
몸이 아파도
‘이것도 내 삶이야’ 하면서
나를 스스로 위로하고
조용히
저녁 해를 바라본다
저무는 한 해가 감사할 뿐이다.
신년 카드도 몇 장 사서
올해는 고마웠던 분들에게 보내야 겠다.
( 2024. 11. 24 )
연못
남진원
연잎도
잠잠해지고
나무도
잠잠해지고
연못 옆에 선
나도 잠잠해진다
심심한
재미 때문이다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연못에서
남진원
연못에 하늘이 내려앉았다
내가
해도 내려다보고
구름도 내려다보고
하늘도 내려다본다
내려다보는 즐거움이 있네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고등학교 교정의 연못
남진원
파란 하늘이 풍덩 빠져 있다
하늘 위로 떠가던 구름도 내려 앉았다
연못 속 세상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연못가에 앉아 있으면
아무 높다란 철학적 생각이 없어도
국어 시간 시속에 등장하던
도연명이나 이백이 된 듯하다.
그리고
동그랗고 작은 연못이
소리없이
온통 우주를 담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때,
사람 살아가는 법도
연못이 가르쳐주었고나.
( 2025. 8. 31. )
연세 요양병원에서
남진원
어머니 살아실 제 둘째를 먼저 보내고
집 나간 셋째 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얼마나 활화산 같은 그리움을 삭혔을까
눈감고 누운 어머니 맥박이 떨어진다.
이제 떠나시는, 먼 길 채비 하시는 어머니
맥박은 0을 가리키고 고요히 눈, 감으셨다
(2018. 1. 30.)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연을 날리자
남진원
1.
연을 날리자. 연을 날리자
연은 우리들의 꿈
저 넓고 푸른 하늘로
꿈을 둥실 올리자.
씽씽 바람을 타고 더덩실 덩실
하늘로 하늘로 연을 날린다야
2.
연을 날리자. 연을 날리자.
연은 우리들의 희망
저 넓고 푸른 하늘로
희망을 둥실 올리자.
씽씽 바람을 타고 더덩실 덩실
하늘로 하늘로 연을 날린다야
(후렴),
연을 날리면 우주 속 어딘가에
외계의 아이들도 만날 수 있을 거야
처음 보는 신기한 동물들도
친구할 수 있을 거야
세계를 넘어 우주와 하나가 되는 거야
모두 한 가족이 되는 거야
열반
남진원
비가 내려오며 소리를 낸다
즐거운 가 보다
바위에 부딪치고
계곡을 굽이돌아
들판을 지나고
얼마나 흘러왔나,
큰 바다에 이르러서 소리를 모두 지웠다
비의
열반
열한 시의 믹스 커피
남진원
한 시간 끝난 강의 잠시 휴식 시간이다
저잣거리 이야기도 슬며시 웃음짓고
따뜻한 믹스 커피가 정겹다고 끼어드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영농일기
남진원
새 땀으로 맛들일 수첩을 펴놓는다.
벌써 손 끝에 묻어나는 풋 봄 내
凍土를 익히고 남을 씨도 골라 놓으며
새벽 풀잎 밟고 어둠 연 길목에서
트인 하늘 그 품 아래 해 맞잡은 두툼한 손
산 빛에 일어선 아침을 쟁기에 얹고 나선다.
거름 끼 눅눅히 밴 내 인생 밭을 매면
잔 근심 마른 나날 풀잎 속에 묻혀지고
일상은 푸른 몸부림 불끈 황토를 흔든다.
더러 등진 사람 그 고향도 데려와서
갈라 터진 살을 비벼 매운 눈물 일구는 땅
여름날 뜨거운 볕도 나누고 또 나누며
뒷산 솔숲 열리면서 내려오는 바람소리
앞 단추 풀어놓고 댓돌 아래 내려서면
달덩이 훤한 산마을 시름도 한 채 넘어간다.
( 시조집 『내 인생 밭을 매면』, 삼환인쇄사. 1991.)
( 2020, 전자책 시조집『꽃물 들어 아픈 날』, 한국문학방송)
영동공원에서
남진원
무덤들이
즐비하다
행복한 삶이
얼마였는지
알 수 없지만
삶의 애증을 뒤로 한 채
누워있는 사람들
잠든 듯
그저 평화롭게만 보여도
손 건네면 아픔이 더
만져질 것 같아
나는
나무처럼 마냥 섰다.
(2021. 12. 20.)
영산홍을 보며
남진원
사랑 북 손에 쥐고 수줍게 찾아왔지
우사 같은 빈가에서 날줄 씨줄 짜던 손길
영산홍 붉던 꽃잎의 기도 같은 그대 純情
( 2013. 05. 시집 [하늘에 기댄 아네], 태원 )
영산홍을 보며
남진원
딱딱한 바위 틈 새 빛으로 찾아와서
온기를 아니, 열기를 화사하게 지피누나
그대가 나에게 주던 그 사랑의 불꽃이네
깊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아내
맑은 눈망울 보니 더욱 마음 슬퍼지고
동행 길 삼십 육년의 삶, 한순간의 꿈이구나
( 「바다시낭송 카페」, 2010. 6. 8 )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 시집속의 시조집 「나를 놓다」
영웅호걸
남진원
천하를 취하고자 쳐들었던 검이던가
권세의 발갈음들 흔적 없이 사라지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무심하네 세월의 강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영월 장릉에서
남진원
2025년 8월 19일 한 시인과 영월의 장릉을 다녀왔다
16세에 불귀의 객이 된 단종
단종의 무덤은 고요하건만
쉴새 없이 드나드는 관광객들
장릉 덕분에
관광객을 맞이하고
주위의 식당가는 바쁘다
강릉의 바다와 오죽헌, 허균 허난설헌 유적지 등이 강릉의 시민들을 먹여 살리는데 일조를 하듯이,
영월의 군민들을 먹여 살리느라 …
죽어서도 단종은
고단하겠구나.
예순 여섯에
남진원
이마에 이미
주름살 깊고
입술 주위
콧수염은
희기도 하다
마음은 젊을 때보다
더 청춘이건만
아찌 이리 늙었나
예술가의 정원
남진원
계곡이 싱그러움을 만들 수 있는 건
숲 덕분이다
계곡에
고요한 음익을 전하는
물소리는 늘 잰걸음을 하며 흘러가고
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노래를 열매처럼 달아놓기도 한다
언제부터인지
계곡은
자연 속에서 서로 서로가
‘예술가의 정원’을 만들어 놓은 줄을
이제야 알겠다.
( 2024. 8. 21)
예전엔 몰랐던 일
남진원
젊은이의 발걸음이 사뿐사뿐
가벼운 걸음걸이를 보면
꽃피는 봄날이 아니어도
입에서 나오는 탄성
‘아름답다!’
젊은 남녀 환하게
웃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선계의 선남 선녀 아니어도 입에서 나오는
탄성
‘아, 아름답다!’
예전엔 몰랐던 일
아름다움의 진면목
늙어 봐야 알아
병들어 봐야 알아
아름다움 뿐 아니라
모든 게 기적 아닌 게 없었구나
모든 게 행복 아닌 게 없었구나
늙어서야 알았다
숨 쉬며 평온하게 사는 일
남부럽지 않은 인생이라는 것을.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옛날 집
남진원
내가 사는 옛날 집은
목조 단층 건물
나팔꽃 치자꽃 절로 자라니
꽃구경 하고 가오.
흥부네 박처럼
주렁주렁 열린 박
우리 집 대문은
늘상 열려 있으니
벗이여 지나다가 들려주시게
치자꽃 몇 송이 선물하려네.
오고 갈 곳이 어디에 있나
남진원
방에 들어서면 조용히 방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책을 정리하고 보니 방을 휘둘러 볼 여유가 생겼다.
물건이고 가구고 책이고 어느 것 하나 내 숨결 안 닿은 것 없고 내 모습 아닌 게 없다.
모두가 다 나였구나.
먼 후일 사람은 가도 강원도 강릉시 방터길 53-20 번지의 방은 남진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걸 누가 기억하지 않아도, 남진원은 이미 남진원으로 이 방이 되었다. 그렇구나 집 밖으로 나가 시내로 들어가던 길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그 길도 남진원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우주와 숨을 쉬는 이 세계의 공간이 모두 남진원의 모습 아닌 것이 없네.
돌아보니 자네 역시 자네의 모습 아닌 것이 없네.
그래, 너도 그렇고 저 분도 그렇고 모두 모두 그렇구나.
오고 갈 곳이 없다는 게 이 말이야.
( 강릉문학 2020. 12월. 작시: 2020. 3. 15.)
오늘
남진원
날마다가
오늘이구나
(2021. 12. 2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