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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명 | 시조 | 존속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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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 | 주전충 | 907년 - 923년 |
후당 | 이존욱 | 923년 - 936년 |
후진 | 석경당 | 936년 - 946년 |
후한 | 유지원 | 947년 - 950년 |
후주 | 곽위 | 951년 - 960년 |
나라명 | 시조 | 존속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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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촉 | 왕건 | 907년 - 925년 |
후촉 | 맹지상 | 934년 - 965년 |
오 | 양행밀 | 902년 - 937년 |
남당 | 이변 | 937년 - 975년 |
형남 | 고계흥 | 907년 - 963년 |
오월 | 전육 | 907년 - 978년 |
민 | 왕심지 | 909년 - 945년 |
초 | 마은 | 907년 - 951년 |
남한 | 유은 | 909년 - 971년 |
북한 | 유숭 | 951년 - 979년 |
십국 이외 세력
나라명 | 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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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이무정 |
걸연 | 유수광 |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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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왕조 |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 |
10국 정권 | 전촉 · 후촉 · 오 · 남당 · 형남 · 오월 · 민 · 초 · 남한 · 북한 |
기타 정권 | 대연 · 기 |
발해(渤海, 존속 기간: 698년 - 926년)는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를 계승하여,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8년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둔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대조영이 만주에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노려 건국하여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의 한 축이 되었다가
926년 1월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침략한 요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를 계승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의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에 걸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한국의 역사 (연표) | |||||||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
환인 환웅 | ||||||
시 대 구 분 ‥ 원 삼 국 | 삼 국 | 남 북 국 | 후 삼 국 |
고조선 | ||||||
진국 | |||||||
삼한 | 옥 저 |
동 예 |
부 여 | ||||
진 한 |
변 한 |
마 한 | |||||
가 야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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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구 려 | |||||||
신 라 | |||||||
발 해 | |||||||
후 백 제 |
태 봉 | ||||||
고려 | |||||||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삼별초의 항쟁 ・ 홍건적의 고려 침공 | |||||||
조선 | |||||||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 |||||||
대한제국 |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 |||||||
군정기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건국할 당시 스스로 나라의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발해라는 국호는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서남쪽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홀한해(경박호)에서 유래 되었다.
홀한해는 사실 바다가 아닌 호수지만 그 둘레가 30km가량 되는 큰 호수라서 바다처럼 여겨져 홀한해라고 불렸다.
홀한해 유역은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 때 기반이 되었던 지역이었고, 홀한해와 같은 의미를 지닌 발해가 국호로 정해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고(구)려라고 하였고, 일본도 발해를 고려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1]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걸걸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2] 기슭에 발해(渤海)를 세웠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하였는데,
이때부터 발해를 자주국가로 인정하였다.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치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가령 당나라는 발해 북쪽의 흑수부 말갈(흑수말갈)이 연합하여 대응해 나갔다.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족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등주(登州)[3]를 급습하여 순식간에 점령하는 한편, 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였다.
이후 당나라가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면서까지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발해의 성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대흥(大興)·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동북 방면의 말갈 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그 무렵 발해의 고민 또한 커지고 있었다.
우선 면적에 비해 발해의 자연 환경은 너무 거칠었다. 모진 추위와 눈으로 덮히거나 얼어붙은 땅은 농사를 어렵게 하였고, 사냥이나 가축을 기르기가 발해의 산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늘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발해의 두 번째 고민은 여러 종족을 잘 통합하여 국력이 하나로 일치된 나라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넓은 만주 지역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훗날 여진족 혹은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고구려인이 된 세력이 있었던 반면, 이때 새롭게 정복된 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욱 컸다.
오랜 고민 끝에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선 756년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상경에 자리잡은 뒤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그밖에 3성(三省)[4]과 6부(六部)[5]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음으로써 거친 자연 조건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발해는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6]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成王)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
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대원의(大元義)·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국력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일시 약화되었다.
9세기 전반, 간왕의 종부(從夫)이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발해를 중흥시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으며, 또 요동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 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설치하였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지방에는 부 밑에는 여러 개의 현을 두었고,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다.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부 학자는 비슷한 시기에 분화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의 멸망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년 - 926년, 재위 : 907년 - 926년)는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 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 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요나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발해는 보름여 만인 926년 1월 15일에 멸망하였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요나라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으며, 아울러 한민족은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연도 | 성명 | 연호 | 설명 |
---|---|---|---|
668 | 고구려 멸망. 걸걸중상, 대조영 부자 영주로 강제 이주 됨. | ||
698 | 대조영 | 인구 10여 만호, 군사 정예군 수만 명으로 발해 건국. 고왕 즉위, 연호 천통. | |
719 | 대무예 | 고왕 붕어. 무왕 즉위, 연호 인안. | |
732 | 인안 14년 | 장문휴를 보내어 해군으로 당의 등주를 공격. | |
733 | 인안 15년 |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중지. | |
737 | 대흠무 | 인안 19년 | 무왕 붕어. 문왕 즉위, 연호 대흥. |
756 | 대흥 20년 | 상경으로 천도(遷都). | |
793 | 대흥 57년 | 문왕 붕어. 동생 원의가 즉위했으나 수 개월 후 사망. | |
793 | 대화여 | 성왕 즉위, 연호 중흥. | |
794 | 대숭린 | 중흥2년 | 성왕 붕어. 강왕 즉위, 연호 정력. |
809 | 대원유 | 정력16년 | 강왕 붕어. 정왕 즉위, 연호 영덕. |
812 | 대언의 | 영덕4년 | 정왕 붕어. 희왕 즉위, 연호 주작. |
817 | 대명충 | 주작6년 | 희왕 붕어. 간왕 즉위, 연호 태시. |
818 | 대인수 | 태시2년 | 간왕 붕어.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공격, 북쪽 부락을 공략. |
830 | 대인수 | 건흥13년 | 선왕 붕어. |
831 | 대이진 | 건흥14년 |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
857 | 대건황 | 함화27년 | 대이진 붕어. 대건황 즉위. |
871 | 대현석 | ?15년 | 대건황 붕어. 대현석 즉위. |
894 | 대위해 | ?24년 | 대현석 붕어. 대위해 즉위. |
906 | 대인선 | ?13년 | 대위해 붕어. 대인선 즉위. |
906 | ?7년 |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 |
924 | ?19년 | 거란의 발해 침입,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 |
925 | ?20년 |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거란이 발해에 침입. | |
926 | ?21년 | 거란군, 부여부 점거.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 세자가 지배. |
발해는 황제국을 지향하였다.[7] 중앙의 정치조직은 3성(三省)[4]과 6부(六部)[5]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성하였다.
3성 6부 밑에는 5감(五監)·9시(九侍) 등의 기구를 두었다.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고구려의 전통을 살려서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맡은 문적원, 중앙의 최교교육기관인 주자감 등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는데(오늘날의 광역시에 해당), 국도(國都)인 상경(上京)과 중경(中京)[8]·동경(東京)·남경(南京)[9]·서경(西京)을 가리킨다. 상경은 당의 장안성(長安城)과 그 규모를 같이하여 외성(外城)[10]·내성(內城)[11]을 두고 시가지를 바둑판같이 구획하였다.
지방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12] 최근 러시아의 연해주에선 발해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발굴되면서 연해주가 발해에 속해있었음을 증명하게 되었다.[13]
발해의 귀족 및 지배계층은 고구려 유민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2대 무왕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를 통하여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라고 주장하며 고구려 계승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3대 문왕 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 자칭하였다.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고구려계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발해의 주민 구성은 발해인들로 구성되었다. 이 중 다수를 차지한 것은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 이들은 피지배층이 되어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발해의 지식인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고, 때로는 신라 사람과 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렇게 발해는 상층 사회를 중심으로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하층 촌락민들은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사용 언어는 발해어로 총칭한다.
발해의 수취 제도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콩·보리 등 곡물을 거두는 조세, 베·명주·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두는 공물, 궁궐·관청 등의 건축에 농민을 동원하는 부역이 있었다. 발해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기후 조건의 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나 수렵도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솔빈부의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하였다.
어업도 발달하여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었고 송어, 문어, 대게, 고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 수공업은 철·구리·금은 등 금속가공업과 삼베·명주·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 철의 생산량이 상당히 많았고, 구리의 제련술도 뛰어나 좋은 품질의 구리를 생산하였다. 세금으로는 조세, 공물, 부역 등이 있었다.
한편 수도인 상경 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품매매에는 현물 화폐를 주로 썼으나 다른 나라의 화폐도 함께 사용하였다. 발해는 당나라,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이때 사신과 더불어 상인들이 동행하여 무역하였다.
당나라와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나라는 산둥 반도와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들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14]
3대 문왕 때 학문 연구 기관인 주자감을 세웠으며, 관리들이 학습시킬 수 있게 서적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주자감에서는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휴학생 중에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공주 묘지와 정효공주 묘지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한시가 현재 전하는데, 양태사나 왕효렴의 작품이 유명하다.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것이며, 당나라와 요나라의 역사서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고급 문화를 향유했음을 시사한다.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또한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15]
발해의 지상 건물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터를 통해 당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본떠 설계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16]
발해에서 발견되는 절터나 불상 등은 고구려의 양식을 따른 것이 많다. 다른 조각상도 고구려의 것을 닮아서 소박하며 힘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17]
또한 자기 공예가 발달하여 가볍고 광택이 있었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당나라 사람이 자주 구해갔다고 한다.[17]
발해의 군사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지배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18]
처음에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소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적대적일 때도 있었다. 고왕 대조영은 초기에 신라에 사절을 보내 우호관계를 맻을 것을 희망하였고, 신라는 이에 고왕에게 대아찬직을 수여하여 화답하였다.
신라 성덕왕(聖德王)이 721년에 국경지대에 설치한 북경장성(北境長城)은 발해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었다.
732년 등주를 공격당한 당나라는 발해에 대한 보복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전쟁에 신라를 개입시키고자 하였다. 신라는 이에 응했으나, 폭설을 이유로 군대를 철군시켰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신라는 당나라와 관계가 회복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발해와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그러나 문왕대에 이르러, 발해는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 당나라 못지 않은 문화 선진국이었던 신라와의 교류가 절실했고, 신라도 사이가 안좋았던 일본과의 외교전에서 발해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양국은 신라도와 북해통이라는 두 국제도로를 이용해 사신을 교환하며 외교, 통상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처음에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와 외교관계가 피할 수 없는 과제라 여긴 발해는 결국 713년에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 때부터 당나라와 무역과 외교관계가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732년 당의 말갈 편입 시도에 대해 발해가 등주 공격으로 대응하여 서로 외교관계가 악화되었으나, 문왕대에 이르러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양국간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발해에서는 문방구를 비롯한 여러가지 당나라의 물품들을 수입하고, 당에서는 모피와 가죽, 그리고 여러가지 산림자원을 수입했다.
727년 발해가 맨 먼저 일본에 개국을 알리기 위한 사신이 도착하는 것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후일에는 문화적 교류와 상업적 목적이 더 강했다.
남북국 초기에 일본과 신라는 731년에 전쟁까지 벌어질 만큼 험악했다.
일본의 실권자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는 신라 정토 계획이라는 침략 계획을 꾸미면시 배후에 발해를 끌어들이려고 했고, 이를 위해 758년부터 연이어 발해에 견발해사를 파견했지만 발해는 이미 이시기에 신라와 우호관계를 맻기 시작한 터라 이에 미온적이 되어 결국 일본의 신라 침략 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은 대륙과의 교류에 적대국인 신라와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발해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발해는 자신들의 배로 일본의 견당사를 호송하는 사신을 수차 파견했다.
발해인이 남긴 역사적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의 사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발해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 일연의 《삼국유사》, 유득공의 《발해고》 정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에 의하면, 18세기의 규장각에서도 발해의 정식 역사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위 논란이 있는 자료 중에는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으나 발해 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발해가 아닌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시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판단한다.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 발해 말갈전과 《신당서》 발해전에 전하는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식했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와 신라가 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 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 발해의 터에 유민이 여러 나라를 재건하였으나 곧 멸망하였다. 그리고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운 괴뢰 국가도 존재했다. 이들 중 다음과 같은 나라가 알려져 있다.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일찍이 고구려의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되었다. 이후 거란은 중국과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에 복속되었다. 907년 야율아보기는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요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대체로 한족과 몽골족에 동화되었고,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서요는 중앙아시아쪽으로 옮겨갔다.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의미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 또는 한족을 나타내는 햐타드 (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3세기 이전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인(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요(遼, 916년 - 1125년), 거란국(契丹國) 또는 카라 키탄(Kara Khitan)은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요'는 중국식 국호이고 '카라 키탄'은 대거란이라는 의미로,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킨 명칭이다. '키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요나라는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과 이전의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와 상경 임황부, 개봉 등의 수도가 있었다.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2대 황제인 태종 때에는 주로 중국 경략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936년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946년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일대 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현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하였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에 들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요나라는 동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나라(金)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당했다.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망해가던 이때 요나라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하지만 120년 만에(금나라와 비슷하게) 징기즈칸에 의해 멸망한다.)
요나라는 점령지의 중국인과 발해인 등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중 지배 체제를 만들어냈다. 중국인과 발해인 지역을 통치하는 남면관에서는 당(唐)식의 군현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북면관에서는 내륙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을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렸다.
거란족 지배자들은 중국인 고문을 두고 중국식 행정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족적 주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 부족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를 쓰지 않고 거란 문자를 고안해냈다.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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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 숙조 (遼肅祖) (요 태조 추숭) |
소열황제 (昭烈皇帝) |
야율누리사 (耶律耨里思) |
- | - |
- | 요 의조 (遼懿祖) (요 태조 추숭) |
장경황제 (莊敬皇帝) |
야율살랄덕 (耶律薩剌德) |
- | - |
- | 요 현조 (遼玄祖) (요 태조 추숭) |
간헌황제 (簡獻皇帝) |
야율균덕식 (耶律勻德寔) |
- | - |
- | 요 덕조 (遼德祖) (요 태조 추숭) |
선간황제 (宣簡皇帝) |
야율적노 (耶律的魯) |
- | - |
제1대 | 요 태조 (遼太祖) |
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
야율아보기 (耶律阿保機) |
신책(神冊) 916년 ~ 922년 천찬(天贊) 922년 ~ 926년 천현(天顯) 926년 |
916년 ~ 926년 |
제2대 | 요 태종 (遼太宗) |
효무혜문황제 (孝武惠文皇帝) |
야율덕광(耶律德光) | 천현(天顯) 927년 ~ 938년 회동(會同) 938년 ~ 947년 대동(大同) 947년 |
926년 ~ 947년 |
- | 요 의종 (遼義宗) (요 세종 추숭) |
문헌흠의황제 (文獻欽義皇帝) |
야율배(耶律倍) | - | - |
- | - | 장숙황제 (章肅皇帝) (요 목종 추숭) |
야율이호(耶律李胡) | - | - |
제3대 | 요 세종 (遼世宗) |
효화장헌황제 (孝和莊憲皇帝) |
야율원(耶律阮) | 천록(天祿) 947년 ~ 951년 | 947년 ~ 951년 |
임시 | - | 익무황제 (翼武皇帝) |
야율찰할(耶律察割) | - | 951년 |
제4대 | 요 목종 (遼穆宗) |
효안경정황제 (孝安敬正皇帝) |
야율경(耶律璟) | 응력(應曆) 951년 ~ 969년 | 951년 ~ 969년 |
제5대 | 요 경종 (遼景宗) |
효성강정황제 (孝成康靖皇帝) |
야율현(耶律賢) | 보녕(保寧) 969년 ~ 979년 건형(乾亨) 979년 ~ 982년 |
969년 ~ 982년 |
제6대 | 요 성종 (遼聖宗) |
문무대효선황제 (文武大孝宣皇帝) |
야율융서(耶律隆緖) | 통화(統和) 983년 ~ 1012년 개태(開泰) 1012년 ~ 1021년 태평(太平) 1021년 ~ 1031년 |
982년 ~ 1031년 |
제7대 | 요 흥종 (遼興宗) |
신성효장황제 (神聖孝章皇帝) |
야율종진(耶律宗眞) | 경복(景福) 1031년 ~ 1032년 중희(重熙) 1032년 ~ 1055년 |
1031년 ~ 1055년 |
제8대 | 요 도종 (遼道宗) |
인성대효문황제 (仁聖大孝文皇帝) |
야율홍기(耶律洪基) | 청녕(淸寧) 1055년 ~ 1064년 함옹(咸雍) 1065년 ~ 1074년 대강(大康) 1075년 ~ 1084년 대안(大安) 1085년 ~ 1094년 수창(壽昌) 1095년 ~ 1101년 |
1055년 ~ 1101년 |
- | 요 순종 (遼順宗) (요 천조제 추숭) |
대효순성황제 (大孝順聖皇帝) |
야율준(耶律濬) | - | - |
제9대 | - | 천조황제 (天祚皇帝) |
야율연희(耶律延禧) | 건통(乾統) 1101년 ~ 1110년 천경(天慶) 1111년 ~ 1120년 보대(保大) 1121년 ~ 1125년 |
1101년 ~ 11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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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운16주 : 허베이 성(하북성: 河北省)
약자: 冀 | |
![]() | |
행정 단위 | 성 |
---|---|
청사소재지 | 스자좡 (石家庄) |
면적 | 187,992km² (12위) |
인구 (2007년) 인구밀도 |
70,320,000 (6위) 374/km² (11위) |
공산당 서기 | 장윈찬(张云川) |
성장 | 천찬궈(陈全国) |
민족 | 한족 - 96% 만주족 - 3% 회족 - 0.8% |
ISO 3166-2 | CN-13 |
시차 | UTC+8 |
웹사이트: www.hebei.gov.cn |
허베이 성(하북성, 중국어: 河北省, 병음: Héběi Shěng)은 중화인민공화국 북부의 성이다. 베이징과 톈진을 둘러싸고 있으며, 랴오닝 성, 내몽골 자치구, 산시 성, 허난 성, 산둥 성과 접하고 있다. 황하 북쪽이라는 데에서 이름을 따왔다.
허베이 지역에서는 일찍이 호모 에렉투스의 일종인 베이징 원인이 거주하였었다. 이들은 70만 년 전부터 20만 년 전까지 존재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허베이지역은 중국의 오래된 문명발생지라 전해지기로는 복희(伏羲)가 바로 형태 일대에서 생활하고 하고, 황제(黃帝)가 예전에 탁녹에서 치우와 대전을 벌였다 한다.
춘추시대 동안 허베이 지역은 북쪽은 연(燕)의 판도에 속했고, 남쪽은 진(晉)이 지배했다. 이 시기에 적(狄)으로 알려진 유목민족이 북중국에 침입하여 허베이 성 중부에 중산(中山)을 세웠다. 당시 연나라 태자 단이 진시황을 암살하러 가는 형가를 송별한 곳이 연나라의 국경 역수하였다. 지금의 역현의 역수 근처에 형가탑 고적이 남아 있다. 전국시대에는 진이 분열되었고, 허베이의 많은 지역은 조(趙)의 판도에 있었다.
기원전 221년 진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현재의 허베이 북쪽에 유주, 남쪽에는 기주를 설치하였다. 조조가 예전에 장하변에 "동작대"를 건설하여 그 아들 조식으로 하여금 동작대부를 짓게 하였다. 한 말기에는 공손찬이 허베이 북쪽을 할거하였고 남쪽은 원소가 할거하였다. 원소가 공손찬에 대하여 승리하였지만 곧 조조에게 패하였다. 허베이는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에 속하게 되었다.
서진 말기에 북방의 유목민들이 침입한 이후 오호십육국의 혼란기와 남북조 시대가 연이어 도래하였다. 최북방 국경지대에 위치한 허베이의 주인은 여러차례 바뀌었다. 후조(後趙), 전연(前燕), 전진(前秦), 후연(後燕) 등이 허베이 지방을 차지하였었다. 440년 북위(北魏)가 화북지방을 통일하였지만 534년에 둘로 분열되면서 허베이 지역은 동위(나중의 북제)에 속하게 된다. 이 때의 수도는 업(鄴)으로 현재의 허베이 성 한단시 린장 현 경내이다. 589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당대에는 이 지역이 처음으로 “하북(河北)”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안록산이 예전에 하북절도사에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오대십국 시대의 초반에는 여러 나라들이 이 지역을 할거했으나, 후당(923-936)을 세운 이존욱(李存勗)이 이 지역을 통일하였다.
오대십국의 다음 왕조인 후진(後晉)의 고조 석경당(石敬瑭)은 그가 후당을 뒤엎는 데 큰 도움을 준 거란의 요나라에게 많은 영토를 내어 주게 된다. 이 땅을 연운16주(燕雲十六州)라고 하는데, 이 지역이 만리장성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의 한족 왕조들은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북송대에는 연운16주의 귀속 문제가 계속해서 송과 요 사이의 논쟁거리가 되었으나 북중국을 만주족의 금나라에 완전히 빼앗기게 된 1127년부터는 허베이 지역이 금나라의 판도에 들어가게 된다.
몽골족의 원나라는 중국을 여러 지방행정구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으나 허베이 지역을 따로 주로 독립시기키지는 않았다. 명은 허베이 지역을 북직예(北直隸)로 하여 직접 관할했는데, 이것은 수도 베이징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천진에 현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서광계가 남쪽의 쌀을 하북 연해에 이작하기 시작했다. 중국 북쪽지방의 쌀농사의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남직예는 현재의 장쑤 성과 안후이 성이다. 만주족의 청이 1644년 중국을 접수한 후 남직예는 폐했으나 북직예는 그대로 두어 그냥 직예라고 불렀다. 청대 동안 허베이 성의 북쪽 경계가 지금의 네이멍구 지방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내몽고의 맹(盟)들과 그 관할 범위가 겹치게 되었다.
청조가 1912년 몰락하고 중화민국이 이를 대체하였으나 곧 중국은 각지에서 할거한 군벌들 사이의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직예는 베이징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직환전쟁, 제 1, 2차 봉직 전쟁 등이 그 예가 된다. 국민당 정부의 북벌이 성공하면서 군벌에 의한 통치는 끝을 맺고, 수도가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 결과 직예라는 이름을 허베이로 바꾸었고, 더 이상 직할지가 아니라 일반 성의 지위로 돌아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몇가지 변화가 생긴다. 러허성과 챠하르성의 분할 폐지로 이전의 러허 성의 일부인 청더 지역과 차하르 성의 일부인 장자커우 지역이 허베이로 합쳐지게 되면서 그 북쪽 강역이 만리장성 북쪽으로 확장되었다. 성도 역시 바오딩에서 새로 성장하고 있던 스자좡으로 옮기게 되었다. 잠시동안은 톈진이 성도이기도 했다.1966년 톈진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성회는 다시 보정으로 돌아왔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보정의 정세가 혼란하여 성회는 1968년에 지금의 스좌장시로 옮겨지게 되었다. 1976년 7월 28일 탕산에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다. 24만명이 사망하는 20세기 최악의 지진 중의 하나로 기록된 탕산 지진이다. 이후에도 10여 년간 여진이 계속되었다.
2005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탈리아의 폼페이에 버금가는 유적을 발굴하였다. 성의 중동부에 있는 캉(沧)현의 류멍춘(柳孟春)촌 에서 700여 년 전에 지진으로 인해 매몰된 것으로 보이는 거주지를 발견한 것이다. 지진이 아니라 계속되는 홍수로 매몰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이 유적은 송대에 상업 중심지로 번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허베이 성은 11개의 지급 행정구역으로 나뉜다. 모두 시(市)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이름 | 한자 | 병음 | 유형 | 허베이성 행정구역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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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스자좡 | 石家莊市 | Shíjiāzhuāng Shì | 지급시 | ![]() |
2 | 바오딩 | 保定市 | Bǎodìng Shì | 지급시 | |
3 | 창저우 | 滄州市 | Cāngzhōu Shì | 지급시 | |
4 | 랑팡 | 廊坊市 | Lángfāng Shì | 지급시 | |
5 | 헝수이 | 衡水市 | Héngshǔi Shì | 지급시 | |
6 | 싱타이 | 邢台市 | Xíngtái Shì | 지급시 | |
7 | 한단 | 邯鄲市 | Hándān Shì | 지급시 | |
8 | 장자커우 | 張家口市 | Zhāngjiākǒu Shì | 지급시 | |
9 | 청더 | 承德市 | Chéngdé Shì | 지급시 | |
10 | 탕산 | 唐山市 | Tángshān Shì | 지급시 | |
11 | 친황다오 | 秦皇島市 | Qínhuángdǎo Shì | 지급시 |
11개의 지급 행정구역은 172개 현급 행정구역(22개의 현급시, 108개의 현, 6개의 자치현, 36개의 구)으로 다시 나뉜다.
인구는 2003년 기준으로 6769.4만명이다. 허베이성은 복잡 다양한 소수민족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며, 주요 소수민족은 몽골족, 만주족, 조선족, 회족이다. 한족은 전 성 인구의 96%를 차지한다. 기타 55개 소수민족은 288.33만명으로 전 성 인구의 4%이며, 전국에서 10번째로 많은 비율이다. (2003년) 농촌거주지로는 맹춘(孟村), 대창(大厂), 청롱(清龙), 풍녕(丰宁), 관성(宽城), 위장(围场) 6개 자치현과 란평(滦平), 평천(平泉), 융화(隆化) 3개의 민족현이있다. 그리고 54개의 민족촌이 있다.
허베이 성에는 모두 7개의 풍경명승지구, 5개의 국가역사문화도시, 5개의 성급역사문화도시, 1개의 중국 역사문화 진(镇),한 개의 중국역사문화 촌(村),165곳의 전국 중요문물 보호기관이 있다.
창주(滄州)와 오교는 중국의 무술과 곡예의 고향이며, 전국 거의 모든 곡예단 대부분에 오교인이 속하여 있다. 격년으로 ‘오교국제곡예예술제’가 열리면, 20여개 국가의 곡예단이 참가한다, 만성(满城)의 한묘(汉墓)는 유비의 선조 중산정왕유승(中山靖王刘胜)의 무덤으로서, 중국 제일의 “금루옥의(金缕玉衣)”와 유명한 “장신궁등(长信宫灯)”이 출토되었다. 하북은 전통적 중국희곡인 평극(评剧)의 고향이다. 하북 북동쪽에서 시작된 평극(评剧)은 경극등 다른 형태의 중국희곡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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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할시 | 베이징 · 상하이 · 충칭 · 톈진 |
특별행정구 | 마카오 · 홍콩 |
타이완 성(현재는 분리된 타이베이, 가오슝, 신베이, 타이중, 타이난 시 포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 통치 지역이 아니며 중화민국의 영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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