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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극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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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스크랩 Re:불로수 : 수운 대신사의 생애 (퍼온 글)
빅코리아! 추천 0 조회 9 11.03.08 16: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수운 최 제우 대신사

 

대신사께서는 후천개벽의 시조이시니 포덕 전 36년(1824년)갑신 10월28일 경주 가정리에서 탄생하였다. 대신사의 먼 조상은 신라때 최치원선생의 후예이니 대대로 문장과 도덕이 유전(물려받아 내려옴)할 뿐 아니라 6대조 할아버지부터는 산림학자로 내려 왔으며, 아버지 이름은 최 옥이라 하는데 특히 儒道(유도)에 이름이 나서 벼슬을 하지 않고 홀로 산림처사로 있으면서 경상도 전체 선비의 사표(師表:학식(學識)과 덕행(德行)이 높아, 세상(世上) 사람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가 되었다. 최 옥은 나이 4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항상 이를 근심하다가 한 씨 부인을 만나 대신사를 탄생하니 이 날 천지가 매우 밝고 오색구름이 집을 두르고 상서로운 향기가 하늘과 땅에 가득 찼는데 집 앞 구미산이 크게 사흘을 울었다 한다.

 

대신사께서는 태어나신 후 그 아는 것이 하늘같으며, 사리에 밝으심이 일월 같고, 얼굴이 매우 수려하여 뼈와 살이 한데 통한 것 같고,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아니하시니l 대신사의 부모가 이상히 생각할 뿐 아니라 동네사람들이 <선동>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특히 눈의 광채가 번개와 같아 눔을 뜨면 맑은 빛이 곁의 사람을 엄습하므로 어린 벗들이 부모의 말을 듣고 대신사의 눈을 가리켜 역적의 눈을 가졌다고 조롱한즉 대신사께서는 태연히 대답하되 “나는 역적이 되려니와 너희는 純量(순량:순진하고 선량함 )한 백성이 되어라”고 하셨다 한다.

 

대신사께서 6살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7살 때 아버지마저 돌아 가셨는데 이로부터 대신사의 사상은 일층 이 인간 세계의 무상한 이치를 깨달았을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참된 진리를 잃어버리고 거짓과 간교와 시기와 음해 등으로 서로 속이고 서로 해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여 어떻게 하면 참된 도를 얻어 저 불쌍한 세상을 건질까 하고 밤낮으로 연구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대신사께서 집을 떠나 도를 구하게 된 동기였다. 그래서 대신사께서는 칠 팔세 때에 이미 배웠던 경전을 다시 한 번 상고하여 보았으나 거기서 아무것도 얻은 바 없으므로 다시 불교를 연구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사람을 건질 진리가 없다하여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또한 쇠하였다”고 하는 노래까지 지었다.

 

다음은 그 때에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의 경전을 읽어보고 스스로 탄식하되 “西道(서도)는 몸에 氣化(기화)하는 神(신)이 잇음을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진정으로 한울님을 위하는 도가 아니요 다만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도가 될지라”하시고 이에 주유천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혹 활도 쏘며, 말타기도 하며, 장사도 하며, 음양복술의 글도 연구하였으나 畢竟(필경:마침내. 결국에는)은 하나도 창생을 건질 큰 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에 새로운 古無今無(고무금무:옛적에도 없고 지금도 없음)의 대도를 얻기 위하여 한 편으로 인심 풍속을 살피시며 한 편으로 천시와 인사의 변천을 査實(사실:사실(事實)을 조사(調査)함)하여 沈思黙想(침사묵상:정신을 모아 깊이 궁구하고 마음으로 기도 드림)중에 거의 2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

 

대신사께서 20살 때에 집을 떠나 천하를 주유하다가 31세되는 갑인념에 돌아와 처자를 거느리고 울산 여싯바위골로 이사를 갔다. 이듬해 을묘년 춘삼월 초순이었는데 홀로 초당에서 이치를 생각하고 누었다가 문득 눈을 들어본 즉 어떤 이상한 사람이 앞에 나타나서 조그마한 책 한권을 대신사 앞에 드리고 합장 사배하고 사라지니 이 사실을 일러 乙卯天書(을묘천서)라고 한다.

 

대신사께서 책을 받아 살펴본 즉 유. 불. 선. 기. 기타 모든 글 가운데 없는 글이라 마음을 굳게 먹고 그 글 끝에 씌어 있는 한 구절에 의하여 이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을묘천서>는 대신사께서 도를 지극하게 구하던 정성에서 생긴 정신작용으로서 이를 반추에 보면 사람의 마음은 구하는 것에 의지하여 감응하는 바 큰 것을 알 수 있다.

 

포덕 전 4년 丙辰(병진)년 여름에 대신사께서 천서의 뜻대로 49일 기도를 행하고자 양산 천성산 적멸굴에 들어가 기도를 행한지 47일 만에 문득 마음으로 생각하여 본 즉 간 밤에 숙부가 돌아갔으니 공부를 마치지 못하리라 하시고 드디어 집에 돌아 왔더니 그 일이 과연 맞았다.

그 이듬해 丁巳(정사)년 가을 다시 천성산에 들어가 지성으로 기도를 봉행하시니 역시 불가사의한 이적과 영험이 있을 뿐이요 濟世安民(제세안민)할 대도는 얻지 못하였다.

 

대신사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초에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고 도탄에 빠진 창생을 건질 대도를 얻기 위하여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고 선조의 유산을 탕진하면서 20여념 동안 천하를 편답하였으나 이렇다할 소득이 없음을 한탄하고 크게 결심한 나머지 포덕 전 1년 己未(기미) 10월에 경부 용담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곳은 대신사께ㅐ서 선조로부터 여러 대 살던 곳이요 대신사께서 태어나신 옛터라 대신사께서 대도를 얻기까지는 산 밖에 나가지 않으리라 명세하고 처음 이름 濟宣<제선>을 고쳐 濟愚<제우>라 하였으니 <濟愚>라 함은 미욱한 사람을 건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문 위에는 <도 기운이 길이 있으니 사특함이 들지 못하도다. 세상사람들과 한가지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世間衆人不同歸道氣長存邪不入(세간중인부동귀도기장존사불입)>라는 글을 지어 붙이고 산곡을 산보하고 집안에 조용히 앉아 묵념하면서 이 제세안민의 도를 구하고자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위에 말한 대신사의 반생을 살펴보건대 대신사께서 도를 구하기 위하여 20세에 집을 떠나 주유천하하다가 을묘년에 천서를 얻고도 그로써 아직 부족하다하여 2년간이나 기도를 계속하여 신통력을 얻고도 오히려 만족함이 없어 다시 5년 동안이나 마음공부를 계속하고 기어이 후천무극대도를 얻기로 결심하고 용담에 돌아와 산 밖에 나가지 아니하며 세상과 같이 돌아가지 않기로 맹세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구도하기를 힘쓴 것은 옛적 성인의 미치지 못할 바 큰 根基(근기:①근본(根本) 되는 힘 ②끈기 ③진기)를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신년(1860년)4월5일에 대신사께서 목욕재계하고 초당에 가만히 앉았더니 문득 마음과 몸이 떨려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서 형상하기 어려울 즈음에 문득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어 수심정기하고 물은 즉 대답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하였다.

 

대신사께서 다시 “한울님이시여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나이까”하자 가로대 “개벽후 오만년에 내 또한 공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너를 세상에 나게하여 이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하였다.

대신사께서 가로대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가로대 “아니다. 나에게 영부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면 네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하거늘 대신사께서 이 말을 듣자마자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다만 하늘과 땅 사이에 찬란하고 휘황한 빛이 있어 뛰고 동하고 번쩍 거리며 우주의 한 끝과 한 끝이 서로 맞닿은 듯하며 하늘과 땅의 뿌리가 서로 얽히어 온 천비만물이 그 밑층에서 나왔다가 꺼지고 꺼졌다가 다시 나오는 듯하였다.

이에 대신사가 이것이 영부임을 알고 눈을 들어 자세히 보고자 한 즉 그 광체 문득 없어져 보이지 않으며 공중을 향하여 귀를 기울여 말을 다시 듣고자 한 즉 도리어 들리던 말이 없어지는지라 대신사께서 그제야 이 말과 이 영부는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요 육신의 귀로 듣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비로소 영부는 천지만물의 생명이며 사람의 산 혼이며 세상을 살리는 하늘의 큰 혼인 것을 알았다.

 

한울님과 대신사의 문답<천사(天師)문답>은 경신년 4월5일부터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때 한울님께서 돈과 권력 권모술수로써 세상을 건지라고 시험하였지만 대신사께서는 이를 듣지 않고 열 하루 동안 음식을 끊고 홀로 앉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이에 한울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름답도다 너의 뜻이여! 가상하도다 너의 절개여! 너의 공부가 이미 지극하고 너의 닦음이 이미 도수에 이르고 너의 행함이 이미 원만하였으니 이제 너에게 무궁 무궁의 조화를 내리노라>하거늘 대신사께서 다시 수심정기하여 그 이치를 물으니 한울님께서 말씀하시길 “영부라 함은 곧 나의 마음이며, 나의 마음이자 곧 너의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알리요. 천지는 알되 귀신은 알지 못하였나니 귀신이라 함도 나니라. 네 이제 무궁의 도를 받았으니 네 먼저 스스로 수련하고 뒤에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세상에 펴면 네 또한 길이 살아 천하에 소연하게 되리라”하였다.

 

대신사께서 이 말씀을 들은 순간에 갑자기 정신에 새 기운이 돌며 마음에 새 생각이 일어나더니 이제까지 공중에서 들리던 한울님의 말씀이 대신사의 마음속으로 울어나와 降話(강화)가 되어가지고 만지장서를 내렸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여 무궁을 외이고 무궁을 노래하니 천지. 일월. 성신. 초목. 금수가 한가지로 그 노래에 화답하고 그 성음을 통하여 영의 줄이 무궁으로부터 무궁에 통하여 억 천 만리의 공간이 눈앞에 있고 천만년의 많은 시간이 눈앞에 있어 먼데도 없으며 가까운데도 없고 지나간 시간도 없고 오는 시간도 없어 백 천 만 년 억 천 무량의 시간과 공간이 한 조각 마음에 들어있게 되었다.

대신사께서 스스로 기뻐하고 스스로 즐거워하며 강화로 주문을 외우니 <시천주 영아장생 무궁무궁 만사지 侍天主 令我長生 無窮無窮 萬事知:선생주문>라 하였다. 천사문답은 이에서 끊어지고 단순히 강화로써 무극대도의 이치를 발표하게 되었다. 대신사는 1년 동안 홀로 강화의 가르침에 의하여 스스로 수련하고 스스로 닦아 장차 포덕천하의 대법을 세우게 되었다.

 

대신사께서 득도한 후 제일 먼저 부인에게 도를 전한 다음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퍽을 펴게 되었다. 신유년에 이르러 포덕이 날로 늘어 감에 따라 대신사께서는 도 닦는 절차를 정하되 입도하는 처음에 반드시 입도식을 행하게 하니 이는 도를 길이 지키겠다는 중한 맹세이며 청수를 받들게 하니 이는 기도하는데 표준을 정한 것이요, 주문을 항상 외우게 하니 장생의 영부를 얻는 방법이요, 항상 심고를 하게 하니 수심정기를 행하는 것이요, 의관을 정제하게 하고 길가면서 먹으며 뒷짐지는 버릇을 금하니 행실을 단정히 함이요, 악육(개고기)먹는 것을 금하니 도장의 청결과 인정을 양함이요, 누워서 큰 소리로 주문외우는 것을 금하니 도 닦는데 게으름이 없게 함이었다.

 

도의 바람이 날로 높음에 이에 문을 열고 손님을 맞으니 그 수 매일 그러하고 자리를 펴고 법을 베푸니 그 맛이 그러하였다. 관자(어른)도 있고 동자도 있으며 노인도 있고 부인도 있었다. 도 닦는 사람 가운데는 용사 비등한 글씨를 쓰는 이적도 있으며 무식한 사람이 시를 짓는 이상한 일도 있으며 둔하던 사람이 갑자기 총명하여지며 용모에 和氣(화기)가 돌아 육체가 탈퇴하며 오래된 숙병이 스스로 낫는 사람도 있어서 대신사께서 기뻐하면서도 도인들의 신앙이 잘못될까 근심하기도 하였다.

 

한 펀 많은 사람이 동학에 입도하여 성황을 이루자 이를 시기 음해하는 사람이 있어 모함을 하므로 대신사께서 지목을 피하여 포덕 2년11월에 전라도 남원 은적암으로 가게 되었는데 제자들들 이별하고 남원으로 가는 도중 방방곡곡을 찾아 들어 인심풍속을 자세히 살폈다.

 

혹 시객을 만나면 시를 논하고 연세 높은 분(古老)을 대하면 풍속을 물으며 혹 깊은 절을 찾아 불도도 토론하였다. 하루는 말을 타고 낙동강 왼편 웅천이라 하는 동네에서 떠났는데 한껏 길을 오고 생각한즉 한번도 말에서 내린 일도 없는데 어느듯 낙동강을 건넜으매 대신사께서 바야흐로 마상에서 무슨 생각을 깊이 한 것을 깨닫고 자못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 이튿날 의성이라는 고을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주인집 외아들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고 고쳐준 후 “세상의 큰 병을 고치면 사람의 작은 병도 자연 없어지는 것이니 그 대 만약 생각이 있거든 이세상의 큰 병을 고치는 도를 하라”하고 주문을 써서 주인에게 가르쳐 주고 천도를 전하고 곧 떠났다.

 

며칠만에 무주에 다달았는데 마음의 노소 여러사람이 서재에 모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무서운가?”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대신사께서 “죄 없는 땅이 제일 무서우니라”말하고 “마음이 곧 죄없는 땅이니라”말하면서 “거듭나서 산 혼을 일으켜야 한다”는 뜻으로 설법한 후 도를 전하였다.

 

여러 날 만에 남원에 이르러 그 고을 어떤 의술하는 집에서 며칠 묵으면서 주인에게 도를 전하고 며칠후에 남원 고을 서편 10여리 밖에 잇는 교룡산성 안에 잇는 선국사(일명 용천사)에 이르러 한 암자를 빌어 있으면서 그 방 이름을 <은적암>이라 새로 고치고 도 닦기를 시작하였는데 어느 누구도 대신사를 아는 자 없었다.

 

은적암에 있는 동안에 수덕문과 권학가를 지어 멀리 고향에 있는 제자에게 부치니 제자들이 처음으로 선생이 은적암에 있는 것을 알았다. 대신사께서 은적암에 있으면서 그 절에 있는 송월당이라는 노승과 더불어 도를 토론한 끝에 “나는 儒도 아니요 佛도 아니요 仙도 아니요 그 전체의 원리인 천도를 좋아할 뿐이요”라고 말씀하였다.

 

대신사께서 그 이듬헤 임술 봄에 은적암에서 돌아와 박대여의 집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최경상(해월신사)이 와서 뵈옵거늘 대신사께서 가로대 “그 대 어찌 알고 왔는가?”하고 물으니 최경상이 “오늘 아침에 스스로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찾아 왔습니다”하였다.

대신사께서 가로대 “그대의 마음이 열렸도다”고 하자 경상이 “소생이 근자에 반병의 기름을 가지고 스물하루밤을 세웠사오니 어찌된 까닭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대신사께서 가로대 “이는 영적이니 그대 지금부터 포덕하면 가히 덕을 펼 수 있으리라 운이 이미 그대에게 돌아왔으니 그대는 힘쓰라”하였다.

 

포덕 3년7월에 새로 많은 사람들을 포덕하였는데 그 중에는 지벌이 높고 문필이 수려한 사람이 많은지라 대신사께서 이들에게 “우리 도는 지벌이나 문필을 숭상하는 도가 아니니라”고 경계하였다.

 

이어 10월 도인 가운데 마음을 닦는데 힘스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도인들을 경계하였다.

포덕 4년 7월에 대신사께서 최경상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海月이란 도호를 내린 후 이어 8월14일 도통을 전수하니 이로부터 해월신사께서 천도교의 2세교주가 되셨다.

 

癸亥(계해)년 1863년 말경이었다. 장도경이란 제자가 급히 찾아와 대신사에게 아뢰기를 “들은 즉 근일에 조정에서 선생을 이단으로 지목하여 체포코자 한다 하오니 선생은 몸을 피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신사께서 웃으면서 가로대 “도가 나로부터 나왔으니 내 스스로 당하리라. 어찌 몸을 피하여 후환을 제군들에게 미치게 하리오. 또 내 스스로 헤아리니 시운이 이미 그러한 지라 사람으로 대운을 어김이 옳지 아니하다”하고 여전히 태연하였다.

 

12월 9일 아침에 해월신사께서 대신사를 찾아뵈었더니 대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 내 오늘 밤은 특별한 일이 있으니 제군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내일까지 오지 말라. 만사가 다 천명이니 어기지 말라”분부하고 홀로 촛불을 밝히고 밤을 새더니 새벽에 이르러 선전관 정운구가 어명으로써 대신사를 체포하였다.

 

이튿날 아침 대신사께서 정운구와 더불어 서울을 향하여 갈 때 여러날 만에 과천에 이르러 3일간 유숙하게 되었다. 하루는 대신사께서 북을 향하여 통곡하거늘 정운구가 그 이유를 묻자 대신사께서 “오래지 않아 알리라”하더니 이튿날 아침 서울로부터 온 선전관이 조정의 명을 전하며 “지금 금상께서 붕어하셨으니 동학선생 최제우는 대구 감영에 환수하여 심문하여서 상보하라”하였다.

 

이듬해 甲子(갑자) 1월6일에 대신사께서 다시 대구에 이르니 대구 감사 서헌순이 대신사를 심문할 때 대신사의 위엄있는 용모와 눈에 광채있음을 보고 마음에 심히 탄복할 뿐아니라 더욱이 대신사께서 당시 경상도 일대에 이름난 최옥의 아들임을 알고 마음 속에 죽일 생각이 없어져 만약 회개하면 아무쪼록 살려보리라 속으로 정하고 영리한 아전을 시켜서 밤에 가만히 옥중에 가서 그 뜻을 알렸다.

 

그러나 대신사께서는 심문장에 들어와서는 감사가 “ 네 무리를 모아서 백성을 속이니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하느뇨?”하는 말에 대하여 “내 무극대도로써 천하를 건지고자 하노니 공은 오직 생각대로 하라”하고 조금도 후회하는 빛이 없으니 감사가 민망하여 다시 옥에 가두고 여러번 회개하기를 일렀으나 대신사께서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다.

 

이처럼 스물 한 번을 불러 물었으되 말이 한결 같으므로 감사가 노하여 형장으로 치니 문득 벼락같은 소리가 나며 집이 크게 울렸다. 이에 좌우의 사람이 다 실색하고 감사 또한 크게 놀래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이때에 해월신사께서 대구에 이르러 옥졸을 사귀어 형제의 의를 맺고 옥졸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옥안에 들어가 가만히 대신사를 뵈었는데 대신사께서 아무 말씀없이 담뱃대 한 개를 주었다.

 

해월신사께서 담뱃대를 받아 가지고 나와 본즉 속에 종이심지가 있고 심지에 글을 썼으되 “등불이 물위에 밝으니 혐의할 틈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음이 있도다”하였다. 이 글 뜻은 등불은 대신사의 심법에 比한 것이요, 물은 유형이라 해월신사에게 比비한 것이요, 물 위는 무형이라 대신사의 영혼에 比비한 것이니, 이것은 나는 죽어 무형이 되고 너는 살아 유형으로 있으나 나의 심법은 무형과 유형이 통하여 변치 아니함이 물위에 불을 켠 것과 같다 함이다.

또한 바짝 마른 기둥은 대신사를 比비한 것이요 마른 형태라 함은 대신사의 영에 비한 것이며 힘이라 함은 심법에 비한 것으로서 나의 육신은 죽으나 나의 심법은 힘이 남아 있음이 마치 큰 나무가 죽어서 큰 기둥이 되는 것과 한가지라 함이다.

 

그리고 또 <높이 날고 멀리 뛰라>고 하였으므로 해월신사께서는 태백산으로 향하셨다. 甲子년 3월10일에 대신사께서 대구 장대에서 형벌을 받을 때 망나니가 세 번 칼로 치되 조금도 기색이 다름이 없었다.

겁이 난 망나니가 칼을 버리고 도망을 치려 하자 대신사께서 옥졸을 향하여 “청수를 가져오라. 내가 죽으려 하여도 신명들이 용서치 않으니 내 신명들을 달래어 보리라”하여 청수를 앞에 놓고 한 참 기도를 드린 후 “내 이미 세상일을 다 마쳤으니 칼을 들어 나를 베라”하고 조용히 죽음의 길로 나아가 순도하였다.

 

이로부터 대신사의 육신은 영원히 없어지고 그 심법과 성령이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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