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9일(월)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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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기반으로 한 <해리포터> 시리즈와 더불어 가장 성공을 거둔 영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트와일라잇> 시리즈다. <트와일라잇>은 스테파니 메이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을 둘러싼 갈등과 서스펜스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성공에 이어 영화도 개봉 첫날 3,59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08년을 살아온 뱀파이어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청순가련한 인간 소녀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충격적인 사랑의 결과를 보고 싶은 관객들의 열망은 결국 이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들고 있는데, 벌써 최근에 다섯 번째 에피소드가 개봉된 상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손꼽히는 씬이 바로 에드워드와 벨라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이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기 위해 벨라를 집으로 초대한다. 에드워드의 방을 구경하는 벨라. 그가 수집한 음반들을 둘러보다 음악을 플레이시킨다. 잔잔한 호수의 파문처럼 흐르는 피아노의 물결. 둘은 선율에 맞추어 수줍은 듯 춤을 춘다.
이 장면에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극도의 긴장과 설레임의 간극을 메우며 흐르던 그 음악. 바로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가운데 세 번째 곡인 ‘달빛’이다.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프랑스 작곡가다. 인상주의 음악은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기존 음악계의 화성법과 규칙적인 리듬에서 탈피하여 분위기와 순간적인 인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했다. 베토벤이 인간의 격렬한 감정과 불굴의 의지를 음표에 담았고, 말러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회한을 교향악적 화음에 담았다면 드뷔시는 우리 삶을 스쳐가는 수많은 영상과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순간의 감정을 음악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달빛’은 드뷔시가 인상주의 기법을 확립한 시기의 작품은 아니지만, 이미 드뷔시 특유의 악상과 작법이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면서도 매우 서정적이다. 덕분에 첼로, 바이올린, 플룻 등 많은 편곡버전이 존재하며, 단독으로 독립 연주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레오폴드 스토콥스키의 오케스트라 편곡 버전은 또 한 편의 아름다운 사운드 트랙을 듣는 느낌이다.
단 한명의 드뷔시 스페셜리스트를 꼽으라면 단연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다. 극단적인 완벽주의 피아니스트였던 미켈란젤리의 작품해석은 연주하는 음악마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 가운데서도 도이치 그라마폰에 남긴 일련의 드뷔시 피아노곡 녹음들은 최고의 연주로 꼽는다. 그의 드뷔시 연주는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철함과 지독한 탐미주의가 공존한다. 하지만 안타깝게 그가 연주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현재 음반으로 남아있지 않다.
영화에 직접 사용된 음원은 토마스 바사리의 녹음이다. 관록과 연륜이 가득한 피아노 연주로 미묘한 음의 변화를 현미경처럼 정밀하게 포착한 연주다.
최근의 연주자들 가운데서는 장 이브 티보데의 데카 녹음이 인상적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듯한 연주. 애매모호하고 몽환적인 밤의 분위기 속에서, 운명처럼 다가온 뱀파이어와의 사랑을 앞둔 규정할 수 없는 신비로운 느낌. 베일에 쌓인 것처럼 은은하게 뿌려지는 달빛의 이미지를 섬세하고 세련된 터치로 담아내고 있다.
<독립영화감독/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