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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하느님과 맘몬
구약성경(집회 31:8)과 사해문서 및 탈무드에 나오고 있으며 신약성경(마태 6:24, 루카 16:9,11,13)에 나오는 맘몬(라틴어:mammona, 영어:mammon)은 ‘재물’을 의미하는 낱말(가톨릭대사전, 맘몬)이다. 성경에서 재물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하며 하느님과 재물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가르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오늘 복음은 하느님과 맘몬에 관한 이야기다.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쓸 생각이 없다. 그에게는 특별히 하느님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핍박하거나 착취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모세와 예언자들 그리고 그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재물을 가진 자들에겐 영화로운 삶이 보장되어 있고 그 재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잘 쌓아두면 되는 것이다. 반면 거지 라자로는 부자와는 처지가 다르다. 그는 강아지들처럼 땅바닥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집어먹으며 살아가야 하는 신세다. 그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는 동네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을 때조차 그 개들을 쫓아낼 힘도 없는 모습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함 때문에 하느님께 희망을 둘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자, 하느님께 의탁하리라!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의 모습에서 자신 또한 비천한 인간에 불과함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에 ‘맘몬’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의 맘몬은 자본(재화, 돈 등)과 권력이 대표적이며 더 나아가 사회적 맘몬으로서 학력과 출신 등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왜 그런가? 재물이 많은 부자에게 하느님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한 수단이 충분하면 그만이지 그 이상 하느님 따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수단이 옛날에는 재물이라는 단순한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면 오늘날에는 다양해졌다는 것뿐 맘몬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맘몬은 인간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비천한 존재인지를 망각하게 만든다.
최근 보도로는 주요 대학의 의대생 중 고소득층 자녀가 48%를 차지하고 소위 SKY라고 하는 대학의 재학생 중 고소득층 자녀가 40.7%를 차지한다. 그들은 훗날 권력기관과 고연봉자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권력기관은 우리 사회의 최상위계층과 매우 긴밀한 연대 속에서 서로를 돌보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억울하고 부당한 피해자가 발생해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그들은 적당히 할 도리를 하는 시늉만으로 충분하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약자들의 하소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부를 축적한 자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겐 두려울 것이 없다. 그들은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외치며 정의와 공평을 부르짖는 자들을 불순분자로 몰아 ‘제거’한다. 그런데 게다가 ‘개혁’이라고? 그들만의 세상을 위협하는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다.
우리 시대의 ‘맘몬’은 대단히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권력은 곳곳에 있으며 우리 사이를 강자와 약자로 가르고 있다. 친구 사이에도 강자와 약자가 있으며, 부부 사이에도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진다. 직장에서는 물론이고 각종 조직이나 단체 심지어 교회 공동체 내에도 권력은 곳곳에 숨어있어 강자와 약자로 우리를 나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거지 라자로처럼 절대적 빈곤에 놓인 사람은 우리 사회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소수이다. 동네마다 주민센터에 가면 사회복지 담당자가 ‘부스러기 빵조각’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활비, 식료품비를 지급한다. 그래서 절대적 빈곤이 아닌 상대적 박탈감이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맘몬은 모든 사람의 탐욕을 부추기고 있다. 정의와 공평,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다면, 좀 더 힘을 가질 수 있다면 뭐든지, 어떻게든 할 태세다. 하느님이 아쉬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맘몬은 더욱 교묘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긴다. 맘몬은 인간이 자신의 비천함보다는 나르시스적 환상에 빠져들게 한다.
맘몬과 달리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은 ‘고아들의 하느님’이요, ‘과부들의 하느님’이시다(신명 10:18, 14:29, 16:11,14, 24:17, 24:19-21, 26:12-19). 이스라엘 공동체는 약자들, 고아와 과부들을 자신들의 책임으로 여겼다. 하느님께서 그들 편에 서 계시니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어느 법전에서도 볼 수 없는 뛰어나며 독창적인 윤리성을 보여주는 신명기 법전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계시해 주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분명히 사회적 약자, 가난한 자들은 존재하지만 라자로처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 제도를 통해 법에 호소할 수 있고 권력을 가지면 또는 부를 축적하면 그다지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권력을 움켜주려고 애쓰고 부를 삼키려고 기를 쓴다. 어떡하든 권력을 쟁취하면 되고 부정하든 부를 축적하면 되는 것이다. 권력과 부는 소수에게만 돌아가기에 대다수 사람은 박탈감과 패배감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피해의식으로 또 다른 권력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 같다. 권력자들의 권력 남용과 약자들의 폭력(힘의 남용)은 같은 맘몬의 한 형태로 보인다.
교회 공동체가 권력자와 약자로 구별되어서는 안 된다.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 다양하고 교묘한 형태로 현대사회의 맘몬은 사람들을 분열시킨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맘몬으로 서로 일치하고 그 맘몬을 지키기 위해 하나가 된다. 일치하고 하나가 된다고 해서 거기에 성령의 친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식별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하느님’을 외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맘몬도 있으니 긴장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맘몬에 취할 수 있다.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아모 6:7) 그러니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티모 6:11) 우리 시대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우리 시대’의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루카 16:31)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자비심’이 우리 사회의 어느 곳에 있는지 잘 식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표징을 잘 읽는 것이고, 나의 소명을 깨닫는 것이며, 우리 시대의 약자와 가난한 자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필요한 곳에 우리가 찾아가는 것,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비천함을 없애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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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권력을 가진 자의 권력남용과 약자들의 폭력은 같은 맘몬의 한 형태라는 말씀에서 영화 기생충이 떠오릅니다.
요즘은 부자들이 더 순진하다며, 어떻게든 부자들한테 붙어서 뜯어내면 된다는 기생충. 그러나 그 안에서마저 지하층과 반지하층으로 다시 권력구조를 만들어내던.
인간사회 어느 곳이나 피할 수 없는 권력계층의 발생에서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세례와 성찬으로 하나의 계층인 하느님의 자녀로 한몸이 되게 해주셨으니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원문보다 더 깊은 감동의 댓글 감사합니다!
심리치료에 10년 넘게 투신하여 오면서 수많은 내담자들에게서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비참하고 처절한 삶결에서 저의 약하고 비천한 모습을 무수히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이 아니 계신다면 우리 인간은 어쩔뻔 했을까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있듯이
우리에게 하느님이 계시니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할 일입니다.
시대의 표징을 잘 읽고 식별할수 있도록 말씀에 귀기울이고 항상 깨어 있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시대의 표징 ! 중허지요!^^
선과 악, 무관심 속의 세상속에서...
나는 어느 쪽일까?
측은지심과 자비로움에 눈 뜨게 하여 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