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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평화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길
들어가는 말
20세기에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경험한 우리의 세계는 21세기를 맞이한 오늘에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등에서 끊임없는 살육과 전쟁으로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세계 파국의 위험 앞에 직면하고 있다.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한국도 북한의 핵 개발의 의혹으로 말미암아 1994년에는 전쟁의 위험을 경험해야 할 정도로 가파른 위험 앞에 서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위에 수립해야 할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떤 결단을 해야할 것인가?
정당한 전쟁론과 비폭력 평화주의 이론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의 중요한 두 개의 사상적 줄기였다. 이 두 개의 사상적 줄기 가운데 어떤 쪽으로 결단을 하는 것이 참으로 평화를 위해 이바지하는 삶일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두 가지가 아닌 또 다른 제3의 길이 있을 수 있을까?
Ⅰ. 정당한 전쟁 이론
정당한 전쟁 이론은 정당하다면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전쟁이 정당하다면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이기 때문에 얼른 보기에 호전적인 인상을 주는 이론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당한 전쟁 이론 역시 평화를 위한 이론이다. 비폭력 평화주의 이론이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이론인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전쟁이론 역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이론이다. 그런데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군사력의 사용이 불가피하고 정당한 전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이웃과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성에서 출발을 하고 있는 이론이지 호전적인 이론은 결코 아니다. 예컨대, 나치의 히틀러(A. Hitler)에 대항해서 싸운 서방 연합군의 군사 활동은 이웃과 사회와 세계 공동체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 아니었던가 하는 이론이다. 그것은 히틀러에 의해 파괴된 유럽의 평화를 생각할 때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성에서 비롯된 행동이지 결코 호전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이론이다.
미친 운전사가 버스를 몰고 갈 때, 그의 미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행인들이 버스에 깔려 죽고, 이제는 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생명조차 보장할 수 없는 상태가 됐을 때. 이때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죽은 행인들을 불쌍히 생각하고 장례식만 치러주면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것인가? 오히려 미친 운전사를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정신이 맑은 온전한 운전사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해야 할 책임적인 일이 아닌가? 본회퍼(D. Bonhoeffer)에 의하면 미친 운전사는 히틀러이고, 이 히틀러를 죽이는 것은 행인과 승객의 생명을 살려야 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책임적 행동이다. 칼 바르트(K. Barth)는 살인하지 말라는 성서의 계명을 참으로 지키기 위해서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본회퍼에 의하면 이때의 살인은 죄악이긴 하지만 그 죄책은 용서받을 수 있는 죄책이다.
군비 포기와 비무장 평화주의에 반대하는 정당한 전쟁론자들은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으로는 결코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비무장 평화주의는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생명을 적에게 내어주는 지극히 무책임한 행동이다. 그렇다고 정당한 전쟁론자들이 전쟁 그 자체를 정당하다고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을 이상화시키거나 그 자체 속에 도덕적 가치로 채워 넣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전쟁은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교회는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야만적인 침공에 의해 국가의 존속과 국민의 생명이 풍전등화의 상황으로 야기되고 있을 때, 바로 이와 같은 한계 상황 속에서 정당한 전쟁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정당한 전쟁은 한계 상황 속에서 다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책임적인 행동이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 때문에 바르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스위스에서 군 복무를 했다. 이때의 바르트의 신학 정신은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1938년 내가 로마드카에게 보낸 편지에서 … 히틀러의 무력 위험과 침공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 나는 결코 맹목적인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그럴 의향도 없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유럽 전체의 자유를 망쳐놓은 대적 히틀러는 항상 평화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유린했으며 그의 폭력에 대해서 우리는 폭력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정당한 전쟁론은 나치 히틀러라는 한계 상황의 경험 때문에 오늘에 있어서도 쉽게 폐기할 수 없는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를 위한 이론으로 자리 잡고 있다.
1. 정당한 전쟁 이론의 역사
초대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다. 주후 3세기까지의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무력을 사용하거나 군사적 일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터툴리안(Tertullian, A. D. 160-230)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군병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사랑할 것을 명하셨는데 원수를 대적하고 죽이는 군사적인 일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복수해서는 안 되고, 차라리 살해를 당할지언정 살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는 살해당하는 것을 살해하는 것보다 더 낫게 여기는 종교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군복무에 대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했던 셀수스(Celsus)의 말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셀수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군 복무를 거부하는 것을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중요한 이유로 삼으면서, 로마제국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처럼 행동한다면 로마제국은 야만인들에 의해 멸망 당했을 것이라고 기독교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오리겐(Origen, A. D. 184-254)은 만약 로마제국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야만인들까지도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응수했다. 오리겐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능력과 사랑의 감화가 로마제국의 창칼보다 더욱 로마제국을 잘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다.
초대교회가 군 복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낸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정초되어 있지만, 동시에 로마의 군대의 병사들이 충성의 맹세로 황제숭배에 대한 의무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군대가 황제숭배의 거부로 말미암은 그리스도교의 박해의 주역이었다는 매우 부정적인 경험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절했고 동시에 황제를 위한 군대의 병사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즉 초대교회의 평화주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황제숭배의 거부와 이로 인한 박해의 경험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정황은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승인하고,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크게 바뀌게 되었다.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기 이전에는 기독교는 제국을 수호해야 하는 직접적인 의무를 지니지 않았다. 또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군에 봉사해야 하는 직접적 압력을 거의 받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주후 4세기에 수많은 로마의 병사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고 기독교가 제국을 수호해야 하는 종교가 되었을 때, 전쟁에 대한 기독교의 접근 방법 자체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변화는 주후 3세기까지 우세했던 평화주의가 뒤로 밀려나고, 제국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의 정당성 쪽으로의 접근 방식의 변화를 의미했다. 암브로시우스는 하나님을 위해 싸울 각오를 역설했고 구약의 여호수아, 삼손과 다윗을 칭송했다.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폭력을 폭력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 설사 개인이 무장한 강도를 만났을 경우에도 자기의 생명 보호를 위해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국가가 정의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은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정당한 전쟁이론은 암브로시우스에게서 그 정신이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확고한 이론을 기독교 역사에 남긴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Aurustinus, A. D. 354-430)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행위와 개인적 도덕 행위 사이에 중대한 구분을 지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개인이 자신의 생명의 보전을 위해 살인하는 것은 결코 허락될 수 없다. 그는 개인적 윤리를 위해서는 산상수훈의 윤리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제국을 지키는 병사가 국민의 생명과 정의를 보호하기 위해 야만적인 침략자와 싸워야 하는 경우는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당시 카르다고 도시를 방어하고 있었던 보니페이스(Boniface)에게 “죄악 세상에서 전쟁은 간혹 필수적인 것이다”라는 서신을 보내면서 “어느 누구도 능동적으로 군 복무에 임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 전쟁은 평화를 얻기 위해 수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하는 데 있어서도 공격자들을 정복함으로써 그들을 평화의 유리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평화 조정자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 당신의 의지로는 적군을 학살하지 마십시오. 단지 꼭 필요할 때에 한해서만 그렇게 하십시오. 폭력이 반역자와 저항자에게 사용되듯이 자비로움이 패배자나 포로에게 베풀어져야 하며, 특히 미래에 평화가 깨어질 염려가 없을 때에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라고 썼다.
이상과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당한 전쟁 이론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합법적일 수 있다. 둘째, 전쟁이나 폭력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정당성이 있는 국가 당국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즉 전쟁이나 위법자를 처단하는 것은 개인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셋째, 전쟁시 불필요한 폭력, 약탈, 대학살, 잔학 행위는 금지되어야 하고 적과의 신의도 지켜져야 한다. 넷째, 전시에 일어나기 쉬운 복수심과 증오심 등은 반드시 깊은 신앙심으로 극복해야 한다. 다섯째, 여호수아, 삼손, 다윗과 같은 구약의 인물들은 정의를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하나님은 악을 징벌하신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형성된 정당한 전쟁 이론은 그 이후 국가의 종교로서의 지위를 굳힌 서구 기독교 속에서 지배적인 정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정신은 1096년 교황 우르반 2세가 프랑스의 클레몽에서 튀르키예의 회교도를 징벌하러 나갈 군대를 소집하고, 십자군 원정을 시작했을 때 극단적으로 발전해서 비뚤어진 거룩한 전쟁의 형태로 역사에 나타나게 되었다. 십자가의 깃발 아래서 행해졌던 십자군 원정은 그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더욱 잔학한 원정으로 바뀌었고 회교도에 대한 비참하고 잔학한 학살과 도륙과 파괴가 이어졌다. 즉 잔학한 학살과 도륙이 거룩한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당한 전쟁은 비뚤어진 거룩한 전쟁의 일그러진 모습을 역사 속에 남겼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는 그 이후 회교권에서 완전히 몰락하게 되는 통탄스러운 후유증을 남기게 되었다.
정당한 전쟁 이론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A. D. 1225-1274)에 와서 집대성되고 체계화된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화를 보전하고 행악자를 처벌하고 선을 향상시키기 위한 무력의 사용과 전쟁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무력의 사용과 전쟁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그 무력의 사용과 전쟁이 호전적인 세력의 강화나 잔인성의 동기를 가져서는 안 되고, 철저한 주권자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경우에만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내려온 정당한 전쟁에 대한 사상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계승되면서 이 이론은 신·구교를 망라해서 서구 기독교의 중심적인 전통이 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두 왕국 교리를 발전시키면서 국가는 악을 징벌하고 죄를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성한 기관으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국가에 칼을 맡겼다고 보았다. 루터에 의하면 악을 처벌하고 선을 보호하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국가의 기능이다. 결국 루터에 의하면 전시에 악한 적을 살생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합법화될 수 있다. 칼빈 역시 로마서 13장에 나타난 바울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행악자를 징계하기 위한 국가의 기능을 강조했다. 칼빈에 의하면 국가가 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악행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며, 악한 적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무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2. 정당한 전쟁 이론의 내용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루터와 칼빈이라는 개신교의 신학의 아버지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구교를 망라해서 제도적인 교회의 기본적인 정신이 되어왔던 정당한 전쟁 이론의 정신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어떻게 되는가? 데이빗 아트킨슨(David Atkinson)은 『평화의 신학』(Peace in Our Time)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11가지로 요약했다.
1) 이 전통은 액면 그대로의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전쟁은 악으로 간주 되지만, 때때로 아주 작은 악으로서 정당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반드시 십자군 정신과 정당한 전쟁론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만 한다. 거의 대부분의 정당한 전쟁 전통 가운데는 십자군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정당한 전쟁론자들’에게 나타난 목포는 정의의 확립을 통한 평화이다.
2) 국가의 권위가 무력에 의존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락되는 상황이 있다. 즉, 공격당하는 국민들을 합법적으로 방위하고 부당하게 압박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경우에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
3) ‘정당한 전쟁론자’는 이 죄로 물든 세상에는 아직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이 이론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켜도 정당한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전쟁이 정당하게 수행되도록 전쟁 방법에 한계점들을 설정하고자 한다.
4) 전쟁은 단지 합법적 권위자, 즉 루터가 말하는 ‘군주’ 또는 칼빈이 말하는 국가의 통치자에 의해 일어나야 하며, 반드시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있어야 한다.
5) 전쟁의 원인은 반드시 정당해야 한다.(여기에서 ‘원인’이란 ‘최종적’ 원인, 즉 전쟁을 하게 된 목적을 말한다) 전쟁을 유발시키는 것은 불법이며, 전쟁은 오로지 그 불법에 대한 대응책이어야 한다.
6) 전쟁에 의뢰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7) 전쟁의 동기는 반드시 정당해야 한다.
8)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여지가 보여야 한다.
9) 전쟁으로 기대되는 이익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초래되는 악을 훨씬 능가해야 한다.
10) 차별의 표준- 폭력은 반드시 무장한 자들에게만 사용되어야 한다. 비전투자 보호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의식적으로 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될 때, 인접해 있는 비전투자들에게 다소의 침해가 가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가 최대한으로 축소되어야 하겠고, 가능한 한 적의 사회와(enemy society) 공공기관들은 보호되어야 한다. 비전투자 보호는 적의 부상병들과 포로들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와 보호에까지도 적용된다.
11) 전쟁은 반드시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무력만이 사용되는 방법으로 일어나야 한다.
몰트만(J. Moltmann)은 그의 책 『정치신학 정치윤리』에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정당한 전쟁이론의 핵심을 다음의 6가지로 정리해서 설명했다.
1) 전쟁은 합법 당국을 통해 선포되어야 하며, 국가의 공익에 기여하여야 한다.
2) 전쟁은 선한 목적을 갖고 행해져야 한다.
3) 전쟁은 유익한 결과가 기대 되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전쟁 전보다 전쟁 후의 상황이 더 호전되어야 한다.
4) 긴장 완화를 위한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여야 한다.
5) 수단이 그것을 통해 극복 되어져야 하는 악보다 더 악해서는 안 된다. 즉 수단은 목적에 상응하는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6) 군민(軍民)은 구분되어야 하며, 민간인은 보호되어야 한다.
결국 정당한 전쟁 이론은 개인적 윤리와 국가적 행위를 구분하는 터전 위에서 개인적 윤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 사랑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지만 국가적 행위는 다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신학적 관점으로 국가가 악을 제어하고 선을 장려하고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력의 사용이나 전쟁이 정당할 수 있다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3. 정당한 전쟁 이론의 문제점
정당한 전쟁 이론은 오랫동안 제도적인 교회의 중심적인 사상이 되어왔고 또한 상당 부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점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론이다. 그 문제점들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정당한 전쟁이론은 개인 윤리와 국가의 행위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를 구분하는 이런 전통은 20C에 라인홀드 니버(R. Niebuhr)에 의해 계승되고 있는데, 개인 윤리에는 원수 사랑을 포함한 사랑의 윤리를 적용할 수 있지만 사회 윤리나 국가의 행위에는 정의를 기초로 행동해야 한다는 이와 같은 정신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속에 과연 이런 구분을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원수 사랑을 포함한 사랑의 윤리는 개인적인 관계에만 해당된다는 제한적인 가르침이 신약성서에 과연 존재하는가? 이 점에 있어서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 혹은 국가의 행위를 구분하고 있는 정당한 전쟁이론의 구분은 성서적인 타당성을 찾기 어렵다.
2) 정당한 전쟁이론은 그 이론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이 원수 사랑을 포함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정신이라기보다는 구약적 특징이 더 많은, 악을 징벌하는 율법적 정의 개념에 의해 보다 많이 지배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보다 악을 징벌하는 율법적인 정의 개념이 우세한 정당한 전쟁이론이 진정한 그리스도교적인 윤리일 수 있을까? 정당한 전쟁이론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적인 윤리라기보다는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에 보다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윤리가 아닐까? 정당한 전쟁 이론은 율법적인 정의 개념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한 복음적인 윤리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3) 정당한 전쟁이론이 기초하고 있는 정당성에 관한 문제에도 근본적인 문제점이 내재하고 있다. 정당한 전쟁이론은 정의를 위해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정의일까? 악한 적의 공격으로부터 선한 자국을 방어하는 것은 정당하고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악하고 자신은 선하다는 기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정의인 것이 상대방에게는 정의가 아닌 경우가 매우 많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이 갖고 있는 인권의 개념을 회교권에 적용하면 상당한 거부감을 회교권의 지도자들이 느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회교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체제 속에서는 미국과는 다른 인권 개념을 그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볼 때 사악한 인권 침해가 회교권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어쩌면 미국적인 인권 개념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운 인권 개념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회교권의 지도자들이 그 인권 개념이 정당하다고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때 회교국들이 미국적인 인권 개념에 의해 심각하게 자국의 위신과 주권이 침해받았다고 생각될 때 정의로운 전쟁을 그들은 일으킬 수 있다. 유사한 경우를 남한과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994년 7월에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을 때 조문 문제 때문에 남북한 사이에 심각한 긴장 상태가 발생했다. 남한 정부와 남한측의 대체적인 생각은 6·25의 원흉인 김일성의 죽음에 조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판단했고, 이런 판단에 기초해서 남한 정부는 조문을 위한 방북을 일체 불허했다. 여기에 대해 북한측의 반응은 “상식 이하의 무례한 처사”로 비난하면서 그것은 “초보적인 예의 범절도 모르는 비인간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북한측은 한국 정부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짐승보다 못한 추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규탄하면서 “미국, 일본의 정상들도 김일성 주석의 서거에 애도를 표하고 있을 때 정상회담의 상대방이고 동족인 김영삼만이 조포(粗暴)하고 경망스럽게 행동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또한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긴장 때문에 남한 정부가 군과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린 것을 북한측은 “초상집에 불질하는 망동”으로 규정했다. 즉 남한측의 관점에서는 정상적인 행위가 북한측의 관점에서는 짐승보다 못한 추행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종류의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전통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정의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갈등 상황이 야기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체제가 다른 집단 사이에는, 더구나 교전 상태에 있는 양국가 사이에는 서로 다른 정의 개념을 갖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 정의를 찾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할 경우, 과연 전쟁이 없는 시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정당한 전쟁 이론은 평화를 만드는 정신이라기보다는 평화를 깨뜨리는 정신이 될 가능성이 늘 존재하고 있다.
4) 정당한 전쟁 이론으로는 군비 경쟁을 막을 길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군사력이 필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 우리의 군사력이 증강되었을 때 상대방에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끝없는 군비 경쟁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세계는 군비 경쟁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고 세계의 평화는 요원하게 된다.
5) 정당한 전쟁이론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어려움은 오늘과 같은 핵 시대에도 정당한 전쟁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핵전쟁이라는 묵시록적인 파국에 직면해서 어떠한 정당성을 과연 논할 수 있을까? 인류의 파멸이 눈앞에 보이는 오늘의 핵전쟁의 위기 앞에서 정당한 전쟁이론은 그 터전을 상당 부분 상실할 수밖에 없다. 핵전쟁의 위기 앞에서 정당한 전쟁이론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고집하는 것은 평화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망치고 인류를 파멸로 끌고 가는 죄책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핵전쟁의 위기 앞에서 정당한 전쟁을 운운하는 것에는 결코 정당성이 없다.
Ⅱ.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고 제국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기독교에 맡겨지기 전까지, 처음 3세기 동안은 기독교는 군사적인 문제에 있어서 대체로 비무장 평화주의의 입장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제국을 수호해야 하는 종교가 되면서부터 비무장 평화주의적 정신은 뒤로 물러나게 되었고 정당한 전쟁 이론이 제도적인 교회의 중심적인 정신이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도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정당한 전쟁론의 입장을 견지했고, 개혁의 좌익이었던 재세례파 미하엘 자틀러(Michael Sattler)는 독일의 남서부 네카(Neckar) 강변의 로텐부르크(Rottenburg)에서 처형되었다. 자틀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장없이 사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군대, 경찰, 형리 등의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종교개혁의 시대에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을 제창하고 실천했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자틀러가 작성한 사이트하이머 신조(Scheitheimer Artikel) 제6장에 의하면, 검이란 그리스도의 완전성과는 동떨어진 어떤 질서일 뿐이다.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의 또 하나의 대표적 인물인 메노 시몬즈(Meno Simmons)는 평화의 왕을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박해자를 향해서도 칼을 빼드는 것이 아니라 선을 베풀어야 하고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돌려대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나에게 말해 보시오. 기독교인이 성서적으로 보복과 반역의 전쟁과 구타와 학살과 고문과 도둑질과 강탈과 약탈과 도서들을 태우는 일과 나라들을 정복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변론할 수 있겠는가를 …. 모든 반역은 육에 속한 것이고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 오 사랑하는 독자여, 우리의 무기는 칼과 창이 아니요, 다만 인내와 침묵과 소망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학대받든지 상관하지 않고, 원수 갚는 일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왔으며…. 그들은 오로지 평화만을 생각하고 갈망하고 알 뿐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라면 국가도, 좋은 물질도, 생명도 그리고 모든 것들까지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불붙었던 정당한 전쟁론과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 사이의 논쟁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전세계가 핵전쟁의 묵시적 상황의 위기 앞에 서게 되면서,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장 없이 사는 삶’만이 세계의 참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신념하에서, 산상수훈의 윤리적, 정치적 실천을 요구하면서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이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원수 사랑의 정신과 비폭력, 비무장을 강조하면서 비무장과 이로 인한 수난과 죽음의 각오 위에서 평화를 만들어야 함을 역설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평화의 길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평화의 왕인 그리스도께서는 무장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도 무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오늘의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의 기본적 정신이다.
이와 같은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매우 많이 정초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순수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이 논쟁이 심각했던 독일에서는 80년대 초 사민당(SPD) 출신 수상이었던 슈미트(Schmid)와 그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된 기민당(CDU)의 콜(Kohl)은 산상수훈의 윤리를 문자 그대로 정치적 영역에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공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은 순수한 종교인들의 이상과 정치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비무장 평화주의 정신은 정치적인 책임성에 무책임하다는 현실 정치인들의 관점을 명백히 노출시킨 것이다.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은 이웃과 적에 대한 사랑의 정신의 실천으로 예견되는 평화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1)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은 역사 속에 잠겨 있는 깊은 죄악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즉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은 악의 교활함과 간사함과 이를 억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책은 마련하지 않고, 우리가 적을 사랑하면 적도 우리를 사랑할 것이라는 단순하고, 천진난만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2) 무장하지 않고 정말 무장한 적을 막을 수 있을까? 오히려 도륙당하지 않겠는가?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은 악의 난동을 방조하는 이론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일 우리에게 적을 억제할 힘이 있으면 상대방이 악한 힘을 쓰지 않을 텐데 정당한 힘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악의 난동을 부채질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3)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 속에는 세상이 악의 통치로 종결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예컨대 히틀러의 통치가 연합군에 의해 저항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럽은 히틀러에 의해 장악되었을 것이고 유대인의 씨는 유럽 땅에서 멸종되었을 것이다. 비무장 평화주의에 대한 니이버(R. Niebuhr)의 비판에 의하면 비무장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에 비해 전제정치를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전제정치는 저항받지 않을 경우 내부로부터 파멸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니이버에 의하면 전제정치는 저항받지 않으면 더 자란다.
4)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은 자국민에 대한 책임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자신의 신념이 비무장 평화주의여서 그것을 실천하다가 자신이 죽는 것은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 및 자신의 국민들의 생명은 과연 누가 책임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비무장 평화주의 속에는 없다.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은 악한 적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결국에는 자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이론이 될 위험이 내재하고 있다.
Ⅲ. 평화를 이룩하는 길
지금까지 우리는 정당한 전쟁이론과 비무장 평화주의 이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두 가지 이론은 모두 평화를 만들기 위한 이론이었고 긴 역사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주장되어왔던 정신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두 가지 이론은 모두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당 부분 수정하거나 새로운 정신에 의해 대치되지 않는 한 평화를 만들어 내려는 본래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국에 직면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면 어떠한 정신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살아야 참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평화를 이룩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있을까?
1. 평화를 이룩하는 정신
평화는 개인이나 국가가 평화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을 때 그 정신에서부터 평화는 만들어진다. 즉 평화로운 세계는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이라는 심물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과 같다. 따라서 평화를 위해서는 평화를 만들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 이전에 평화를 창출할 수 있는 정신으로 무장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렇다면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정신은 무엇인가?
(1) 정의
평화를 창출하는 첫 번째 정신은 정의이다. 탐욕이나 이기심은 평화를 깨뜨리지만, 정의는 평화를 창출해 낸다. 많은 사람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있었던 심각한 혼란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수십만 명이 죽고 또 암매장당하고 매년 500%, 1,000%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하지 않았던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유는 정의를 상실했던 군부 독재의 불의 때문이었다. 불의가 깊은 곳에는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정의의 열매는 평화”(사32:17)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지배하는 평화로운 세계는 정의를 기초로 한다. 구약의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미가 등의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핵심도 정의였다. 왜냐하면 정의 속에 하나님의 참 뜻이 뿌리내리고 있고, 정의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인 형제자매간의 참된 사랑의 평화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 때문이었다. 정의가 없으면 사회적 평화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또한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짓밟는 불의한 질서가 지배하는 한 분노와 저항과 테러로 인해 세계의 평화는 깨어진다. 그러므로 평화를 창출해 내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질서를 회복해야 하고, 정의를 찾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 급선무이다. 분쟁을 해결하는 첫 번째 방법도 정의와 정당성을 찾는 길이다. 만약 상대편에 40%의 잘못이 있고 우리 쪽에 60%의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의 60%의 잘못을 고치고 상대방은 40%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우리의 잘못이 10%밖에 되지 않고 상대편 잘못이 90%인 경우에도 우리의 잘못 10%를 우선적으로 고쳐야 한다. 그리고 상대편의 부당한 주장을 고치도록 촉구해야 한다. 정의를 기초로 상호 간의 잘못을 고칠 때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단순한 산술적인 해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정의나 정당성에 대한 양측의 이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고, 이 경우에 문제 해결은 상당히 복잡해진다. 우리는 상대편에 90%의 잘못이 있다고 보는데, 상대편은 우리 쪽에 90%의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런 경우는 한쪽 편의 이기심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양측의 가치관이나 문화나 종교나 정치 질서가 다른 경우에 정의에 대한 개념과 정당성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당한 전쟁 이론의 문제점도 바로 이곳에 있다. 우리 쪽의 정당한 전쟁은 상대편에서 볼 때는 지극히 불의한 전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의와 정당성이라는 정신 하나만으로는 평화를 창출해 내지 못한다. 정의는 평화가 건설되는 반석과 같은 기초인 것은 틀림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땅 위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정의 개념은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매우 많다. 정의나 원칙을 많이 내세우는 사람 주변에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정의는 대단히 훌륭한 가치이지만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더 높은 정신에 의해 사용될 때 비로소 참으로 평화를 창출하는 반석과 같은 정신이 될 수 있다.
(2) 이웃 사랑
평화를 창출하는 두 번째 중요 정신은 이웃 사랑이다. 이 이웃 사랑의 정신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정의를 추구하는 정신과 공동의 뿌리를 갖고 있지만, 단순한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는 정신으로, 평화로운 공동체 형성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정신이다. 이 이웃 사랑의 정신은 이웃에 대한 지원과 사랑을 내포하고 있고, 무가치한 이웃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이웃 사랑의 정신은 이웃에 대한 관용과 이웃을 잘되게 하고자 하는 이웃에 대한 애정이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정의의 차원을 뛰어넘는 정신이다. 바로 이런 차원 때문에 이웃 사랑의 정신은 평화를 창출해 내는 폭발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이웃 사랑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정신의 핵심이다. 이기심이 모든 악의 근원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웃 사랑은 모든 평화의 근원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국제 사회의 평화도 이 이웃 사랑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자국민의 이익만 생각하는 정책은 국제 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다. 이웃 국가의 아픔을 우리가 짊어질 수 있을 때 진정한 평화로운 인류 공동체는 형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 국가의 아픔을 우리가 짊어질 수 있을 정도로 국민정신을 성숙시킬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평화가 이 땅 위에 뿌리내릴 것이다.
(3) 원수 사랑
교회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정신 가운데 일반인들이 실천하기 대단히 어려운 정신이 원수 사랑의 정신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실천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원수 사랑의 정신을 가르치셨을까? 혹자는 원수 사랑의 정신은 이 땅 위에서는 실천할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서나 실천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대단히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원수가 존재하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 사랑의 정신을 언급한 것은 원수들이 현존하고 있는 이 땅 한복판에서의 실천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할 때 원수들 사이의 반목과 살인과 도륙과 전쟁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평화를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시대에도 로마의 지배 계층과 이에 영합하고 있는 일부 매국적인 유대인들과 소위 독립당이라고 볼 수 있는 열심당 사이는 심각한 원수 관계였다. 로마의 지배 계층은 이 열심당을 한 사람이라도 더 잡아 사형시키기를 원했고, 열심당은 로마의 지배 계층이나 그들의 앞잡이 유대인들을 도륙하기를 원했다. 바로 이 원수 갚는 싸움의 한복판에서 예수께서는 원수 사랑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원수 사랑의 정신은 천국에서 실천하는 정신이 아니고 원수들간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평화가 파괴된 이 땅 한복판에서 실천해야 하는 정신이다. 흑인과 백인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인종 차별의 현장 한복판에서, 종족 간의 원수 갚는 싸움으로 수십만 명을 죽이고 또 죽이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살해 현장 한복판에서 실천해야 한다. 이것의 실천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신이 필수적이다.
가. 증오심의 제거
증오심은 살인의 영인 마귀가 활동하는 무대이다. 살인의 영인 마귀는 인간의 증오심을 도구로 분열을 일으키고 살인과 전쟁과 죽음의 역사를 이 땅 위에 만들어 나간다. 종족 간의 증오심은 평화를 깨뜨리는 제1의 적이다. 증오심을 부추기는 모든 형태의 교육과 가치관 및 정치적, 사회적 운동들은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맑스주의 운동은 경제적 정의와 인간 사이의 형제 공동체 형성이라는 좋은 목표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의 방법에 있어서 자본가들과 지배 계층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고, 이 증오심을 기초로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 실천적 악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맑스주의의 붉은 혁명이 일어나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피 흘리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이웃의 피를 보는 보복적인 운동은 원수 갚는 피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조선시대 때 우리 민족이 사색당파로 당파 싸움을 하면서 그중 한 파가 집권하면 다른 정파를 도륙하는 일을 하고 정권이 바뀌면 지난번 집권 파가 도륙당하고, 이런 일을 계속하다가 가문과 가문 사이에 원수를 맺고, 당파 사이에 원수를 맺고, 피바람 불어오는 싸움을 계속하다가 결국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에 빼앗긴 비극을 맛보지 않았던가. 증오심과 피의 보복은 평화를 깨뜨리고 가문과 공동체와 나라와 세계를 파괴한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증오심을 제거하고 보복 정신을 없애야 한다.
나. 용서
용서를 개인과 개인 사이에만 존재하는 단순한 도덕적 차원으로만 보는 사람은 용서가 갖고 있는 사회 변혁적인 힘을 알지 못한다. 용서는 사회의 분열과 이로 인한 깊은 악을 치유하는 힘이다. 적을 응징하겠다는 생각은 땅의 평화를 깨뜨리기 쉽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는 인과응보적인 정의에 기초한 행동은 세상에 매우 보편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평화를 창출하는 정신은 못 된다. 십자가의 힘이 땅의 평화를 이룩하는 진정하는 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속에서 평화를 이룩하는 그리스도의 정치, 사회적인 규범을 배워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부활로 이어지고 땅의 깊은 악을 파괴하고 평화를 만들어 낸다. 이 점에 있어서 비폭력 평화주의의 길은 상당 부분 정당성이 있다. 비폭력 평화주의는 평화를 만드는 현실적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데에는 부분적으로 실패하였지만, 평화를 만드는 정신에 있어서는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다. 적을 형제로 보는 정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적을 형제자매로 보도록 가르친다. 적을 적으로 보고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흑백논리적인 사고는 평화를 깨뜨리는 대단히 위험한 정신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적의 생명도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모두가 한 형제자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만백성을 한 형제자매로 보는 이 정신은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 참 평화를 위한 정신이다.
라. 공동의 선을 위한 노력
적을 형제자매로 보는 정신은 공동의 선을 창출한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정신의 종국은 공동의 선을 창출하는 데 있다. 공동의 선을 위한 정신은 적을 섬멸하기 위한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적을 사랑하는 정신이고 공동의 선을 위해서 적을 지원하는 정신이다. 자국만의 이기주의는 공동의 선을 위한 정신과 반대된다. 공동의 선을 위한 정신은 적을 위한 희생의 감수를 내포한다.
마. 원수에 대한 지원과 기도
원수 사랑은 원수에 대한 지원과 원수를 위한 기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오 리를 가자면 이를 마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십 리까지 가는 행위가 세상의 평화를 만들어 낸다. 평화는 곤경 속에 있는 원수를 지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것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악이 아닌 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할 때 이루어진다.
2. 평화를 이룩하는 방법
정의와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은 평화의 세계를 만드는 정신이다. 우리가 평화를 이룩하는 구체적 방법을 논하기 이전에 평화를 만드는 이와 같은 정신으로 무장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신으로 무장했다 할지라도 평화를 창출해 내는 구체적인 방법이 없이는 평화의 세계는 쉽게 도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평화를 이룩하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
(1) 악의 억제를 위한 힘의 사용은 부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비폭력 평화주의의 길을 외쳤던 재세례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경찰이나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을 죄로 여겼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경찰이나 군인으로 복무하면 정말로 죄가 되는가? 오늘날에도 비폭력 평화주의의 길을 가기 원하는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은 현역병으로 근무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사회봉사기관에서 일정한 기간 봉사하는 것으로 병역 의무를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모든 국민이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만일 세상에 경찰이나 군인이 없다면 악한 자들의 난동과 악한 적의 침입과 살인과 강도, 약탈로 말미암아 세상이 암흑의 세계가 되는 것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비폭력 평화주의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악의 심각성을 있는 그대로 깊이 고려하지 않는 천진난만함에 그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악을 억제하는 칼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고 또한 이를 가르쳤다. 그들에 의하면 국가가 칼을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악을 억제하고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지 위함이었다. 이와 같은 정신은 이미 바울에게서 유래되고 있는 정신이었다. “그(국가)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13:4). 우리는 바울과 루터와 칼빈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는 악을 억제하기 위한 힘의 사용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의 힘의 사용은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책임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을 억제하기 위한 책임적 행동으로서의 힘의 사용을 넓은 범위에서 인정해서는 안 된다. 정당한 전쟁론자들은 과거에 이 힘의 사용의 범위를 상당히 넓게 인정했던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전쟁이 정당하다면 전쟁할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정의 개념 위에 존재하는 칼의 사용은 심각하게 비판받고 수정되어야 한다. 부분적으로 인정되는 힘의 사용은 본회퍼와 칼 바르트가 주장했던 것처럼 극한 상황 내지는 예외적인 상황과 관련이 깊고, 또한 국민의 생명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서 국가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 힘의 사용은 악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적극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악을 외면적으로 억제하기 위한 소극적인 효과가 기대될 뿐이다.
(2) 힘과 폭력은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힘의 사용을 폭력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폭력과 힘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다른 개념이다. 6학년 아이가 1학년 아이를 발로 차고 무지막지하게 구타하는 것은 폭력이지만 선생님이 6학년 아이의 손을 강제로 잡고 구타를 못 하게 하는 것은 선생님으로서의 책임적인 힘의 사용이다. 몰트만은 인권 문제를 다룬 그의 중요한 논문에서 힘과 폭력의 구별을 역설하면서 책임적인 힘의 사용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힘과 폭력의 구별은 정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당성이 없는 힘의 사용은 폭력이다. 그것은 철저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책임적이며 정당성이 있는 힘의 사용을 폭력의 영역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3) 힘의 사용은 정당해야 한다.
힘과 폭력을 구분하고, 힘의 사용의 효용성을 언급하고, 정당한 힘의 사용을 옳다고 언급하면 이것은 곧 정당한 전쟁 이론과 매우 유사한 이론이 된다. 그러면 정당한 전쟁 이론이 정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정당한 전쟁 이론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바로 정당성 자체에 있다. 정당한 전쟁 이론의 정당성 속에는 율법주의적인 정의 개념의 정당성이 그 중심에 들어 있지, 원수 사랑을 포함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이 그 중심에 들어 있지 않다. 즉 율법주의적인 낯선 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대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힘의 사용은 정당해야 한다고 말할 때의 정당성은 율법주의적인 낯선 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사랑의 힘의 사용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는 앞에서 평화를 이룩하는 정신 세 가지를 언급했다. 정의와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의 정신은 땅의 평화를 만드는 초석이다. 그런데 힘의 사용은 정당해야 한다고 했을 때의 정당성은 바로 이 세 가지 정신에 의해 지배되는 힘의 사용을 의미한다. 정당한 전쟁론은 이 세 가지 가운데 주로 첫 번째의 것인 정의라는 개념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율법주의적인 특징이 많은 정의 개념에 의해 지배되는 힘의 사용은 벌거벗은 낯선 힘이 되기 쉽고 그 결과는 보복적인 폭력에 의해 파국을 맞기 쉽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바울의 정신이 지시하는 것처럼 율법주의는 평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힘은 사랑 속에서 나타난다. 정당한 힘의 사용이란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에 의해 지배되는 힘의 사용이다. 즉, 그리스도의 정신이 가르치는 이웃과 원수에 대한 진정한 책임성 때문에 사용되는 힘은 정당성을 지닌다.
이때의 힘은 폭력이 아니고 사랑이다. 그러나 힘의 사용이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세상 속에서 소위 정당하다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많은 힘의 사용이 부당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힘의 사용을 부당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자신이 힘과 능력의 신이시고, 그는 그의 전능한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나 그의 힘과 능력은 십자가의 사랑 속에 숨어 있고, 십자가의 사랑 속에서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전능한 힘은 나타난다.
(4) 칼의 효용성은 부분적이지만 참된 평화의 길은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의 정신의 실천 위에 있다.
우리는 앞에서 악을 억제하기 위한 힘의 효용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 효용성은 매우 부분적이고 악을 근원에서부터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악을 근원에서부터 파괴하는 참된 힘은 칼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 속에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칼에 의한 질서의 유지와 평화를 생각한다. 그러나 칼에 의한 질서의 유지와 평화란 폭발을 앞두고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다. 강대국이 칼과 무력으로 약소국을 짓밟고 일시적으로 질서를 유지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 질서는 짓밟힌 백성들의 증오심과 테러와 폭탄 투척으로 이내 심각한 혼란에 부딪힐 것이다. 악을 근원에서 파괴하고 진정한 평화를 수립하는 길은 사랑의 실천뿐이다.
(5)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기도는 평화를 가져다 준다.
20세기 초 칼 바르트는 이미 하나님이 계신 것이 곧 평화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곧 평화의 없음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평화의 왕이요 하나님만이 참으로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평화를 도래케 하는 방법들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 방법들을 실천했다고 반드시 평화가 도래한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앞에 언급한 방법들을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국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나가는 말
하나님만이 평화의 왕이시고,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 평화의 길이다. 따라서 평화를 이룩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평화의 길을 뒤 따라가야 한다. 이 뒤 따름이 제자의 길이고 평화를 이룩하는 길이다.
이 평화를 이룩하는 길은 구체적으로 정의와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고, 이 정신이 명하는 바에 따라 때로는 책임적인 행동을 취하고, 때로는 이웃과 공동의 선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때로는 이웃과 적을 지원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을 걷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주의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율법주의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만이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는 참된 길임을 가슴 깊이 새기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