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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33~48절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같은 고통이 와도 전처럼 행동하라]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 팔 복의 말씀 후에 가르치신 내용으로
‘너를 송사하여,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려고 할 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는 것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앞서 38~39절에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너희가 들었으나 이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고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악한 자들이 누명이 씌우고 끌고 다니며 채찍질을 하고 뺨을 때렸지만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미리 우리에게도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했지만 잠잠하셨음으로 가르치신 것을 보이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도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도 대적하지 말라 하신 것은~,
⤷ ‘대적하게 하는 일’은 사단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대적하게 하는 일’로 인해
예수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가 깨어지고, 가정이 깨어지고, 교회와 국가가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더 이상, 사랑도 없고 용서도 없고 겸손도 없는데
사단은 ‘대적하는 일’을 통해 자기가 임금인 세상을 통치합니다.
‘대적한다는 것’은~
억울해도 참고, 때리는 대로 맞으라는 것이 아니라, 악인이라 할지라도 같이 저주나 욕이나 험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적하지 말하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일인 대적하는 일’에 넘어가게 되면~ 이 땅에의 나의 삶의 권리가 사단의 통치에 갇히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어두움에 갇혀 예수님의 성품을 닮을 수도 믿음이 바르게 자라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을 지셔야 헸기에 말한마디 없이 재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처럼 다 참아야 된다고 한다면 사회의 질서가 엉망이 됩니다.
⇨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은 예수님의 모습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면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아야 하는 모습을
완전히 동일시 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믿음이 있다, 신앙인이다.’ 라고 말을 하는데~
⇨ ‘믿음이 있다, 신앙이 있다,’ 라는 것에 대한 본질적은 의미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다, 닮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닮은 그가 바로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요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천국은 어떤 자들의 모임입니까?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즉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자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즉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자가 이 땅에서도~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천국에서 누릴 그 행복감을 누리며 살다가 죽어서 천국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지셨는데, 왜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과 길’에 대해서~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요 구원의 길은 협착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커트 라인이 있어서도 인원 제한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세상에 속해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열지 않는 문, 가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주인 삼고 있는 세상과 물질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기 때문에 육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 매력이 없어
그 문 열기를 싫어하고, 그 길 가는 것을 싫어하고 도리어 그 문을 열고 그 길을 가는 자를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그리스도인만은,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아무런 매력이 없는 이 문을 열고, 이 길을 기쁨으로 갑니다.
참 그리스도인만이, 나를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원이 문으로 고백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만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나의 구원의 길로 믿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만은 왜 이 좁은 문을 열며, 이 좁은 길을 기쁨으로 갑니까?
⇨ 육신의 결국은 이슬같이 지나가는 것이요, 그 후에 내 영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육신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영원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는 영원한 기쁨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 그리스도인은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으로
⇨ ‘그 중심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러분, 예수님 믿습니다, 하는 그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다, 구원의 길은 협착한 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에 세상에 대한 사랑과 육신의 정욕으로 가득찬 자들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열 수 있는 구원의 문을 열지 못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갈 수 있는 길을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생각해 볼 것은~ 나는 내 영혼의 구원을 바라고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맞는가.
나는 내 영혼의 구원을 바라고 구원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를 갈망하는가.
앞서 말한 대로,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했습니다.
앞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은 것처럼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도 그때도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서론의 말씀이 조금 길었는데 오늘 분문 40절~
‘너를 송사하여,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려고 할 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것에 대한 말씀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죄를 사하여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요, 구원에 대한 말씀이요, 십자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뺐고 뺏기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행동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에 대해서 먼저는 이사야 59장 17절부터 자세히 알아봐야 합니다.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썩지 않은 영원한 영광]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개역한글)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공동번역)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표준새번역) 응징을 속옷으로 입으셨다.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셨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전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려 이 부분은 다음에 전하도록 하고
본문과 이사야 59장 17절에 나타난 ‘속옷과 겉옷’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속옷’은 남이 보지 못하는 은밀한 것, 수치를 가려주는 것의 의미가 있고,
‘겉옷’은 눈에 보이는 열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에서
‘너’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끊임없이 송사하고 참소하고 고발하는 자’는 사단을 말합니다.
사단의 고발, 송사, 참소는 두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앞에 나가 참소합니다.
욥기 1장 6~9절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기신 후에는 공중으로 쫓겨나 이때부터는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12절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그래서 여기서 송사하는 존재, 고발하는 존재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억울하게 하는 세상 사람으로 말하면서
억울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맡기고 참으세요, 라고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이런 부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100% 영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윤리, 도덕을 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요,
구원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의 설교들은, 영에 대한 복음을 땅의 것으로 다 덮어버려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항상 먼저 영적인 것으로 먼저 생각하고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날마다 그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송사하는 자는~ 나를 억울하게 하는 이웃이 아니라 사단을 말합니다.
그 사단이 ‘나’를 송사해서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데 ‘겉옷’까지 주라고 합니다.
‘속옷’은 남이 보지 못하는 은밀한 것, 수치를 가려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입혀 주신 ‘속옷’은 아담이 은밀하게 지은 죄 수치를 가려준 옷입니다.
그래서 ‘속옷’은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인간의 수치, 은밀한 죄, 교만, 탐욕, 정욕을 의미하고
사단이 ‘속옷’을 가지려고 ‘송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치, 은밀한 죄, 교만, 탐욕, 정욕을 다시 들춰내고
다시 죄에 빠지도록 미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겉옷’이란 눈에 보이는 열심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은밀한 죄악들, 정욕으로 세상을 얻기 위해,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영광을 위해 살았던
그 더러운 열심, 대적하고 이기려고 하고 원수 맺고 보복하는 열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나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하시고 씻어주신~
눈에 보이지 않는 수치, 죄악, 교만, 탐욕, 정욕으로 살도록 다시 미혹한다면
수치, 죄악, 교만, 탐욕, 정욕은 원래 사단이 그 주인이니 이 모든 것을 사단에게 줘버리고
또 그것과 함께 ‘겉옷’ 즉 이것들을 위해 열심을 내었던 그 더러운 열심까지 줘 버리란 말입니다.
⇨ 그래서 이 비유는, 누군가가 너의 가신 것을 빼앗기 위해 억울하게 고소하거든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줘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도 이렇게 못 살면서 이렇게 살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일 뿐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류의 죄 때문인데 그리고 우리는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예수님이 용서하신 죄와 더러운 것들을 사단이 다시 이런 것들로 미혹을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사단에게서 나온 그 속옷, 그 모든 수치와 더러운 것들을 사단에게 줘버리고
아울러 그 더러운 일에 열심을 다했던 겉옷도 줘버리라는 말입니다.
악한 자 사단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할 때, 믿음으로 이길 것을~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상태, 다시는 세상을 주인 삼지 않는 영적인 모습을 말하는 영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나는~ 나의 수치가 된 것들, 죄악된 것들을 여전히 소중한 것처럼 여기고 살고 있지 않는지 하는가입니다.
결론
이 세대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불법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선지자였던 이사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눈물로 전했지만
백성들은 도리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따라간 결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땅에 속한 말입니다. 즉 육신의 욕심에 맞는 말입니다.
즉 이사야, 예레미야의 말은 육신을 거스리는 하나님의 영적인 말씀으로 육신에 속한 자들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세상과 육신을 부인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듣는 복음으로~ 나를 부인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받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한다면
바른 복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듣는 복음으로~ 내 안에, 세상과 육에 대한 정욕으로 채워져 있다면 거짓 복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 때와 같이 환란의 때가 가까울수록 거짓 복음이 판을 치고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
그 성도가 바로 그리스도인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한울타리 교회 성도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잘 깨달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하며 사시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