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은 언제 봐도 새삼스럽고 신기하다. 아이가 '아빠'와 '엄마'를 말하던 날의 감격을 기억하는 부모들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하나씩 언어를 습득함과 동시에 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는다. 이 과정을 촉진하고 장려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해낸 장치가 '말놀이 노래'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다/ 맛있는 것은 바나나/ 바나나는 길다/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빠르다/ 빠른 것은 비행기" 기억나는가? 이 노래의 반복되는 리듬과 이미지의 연쇄는 각각의 단어들과 그것의 성질을 쉽고 빠르게 익히도록 만든다. 원숭이와 사과, 바나나, 기차, 비행기는 아무 관련도 없지만 우리는 이 노래로 인해 그것들 사이에 어떤 새로운 맥락을 형성하게 된다. 이 노래가 제공하는 재미는 이 낯선 충격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 역시 마찬가지다. 상어의 '어'자는 이 시의 '어쩌지'라는 낱말과 시종일관 겹쳐지다가 마지막 행의 '어!'라는 감탄사로 종결된다. 아이는 상어가 자기 방의 창문과 침대를 물어뜯을까 봐 두렵다. 나아가 상어는 지붕을 물어뜯고 비행기를 물어뜯다가 급기야는 해님을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다운 두려움이 '어쩌지'와 '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제 아이에게 상어는 '어쩌지'와 '어!'라는 감탄사로 기억될 것이다.
최승호(54) 시인은 '말놀이 동시'라는 이름으로 몇 권의 동시집을 통해 이런 의도를 실험해 보았다. "멍게야/ 멍하게만 있으면/ 멍청해져/ 바보 멍청이가 된다고/ 멍게야/ 뭘 좀 해/ 뭐라도 해 봐"(〈멍게〉)에서 보듯 그의 동시는 '멍게'의 본질을 노래하기보다는 그 말을 형성하고 있는 소리나 그것의 독특한 리듬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시에서 그것의 '뜻'이나 '주제'를 따져보는 것은 재미없다.
시란 무릇 의미뿐만 아니라 말의 운용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 본연의 유희성과 리듬감은 이 말에 대한 새로운 감각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최승호 시인은 이런 작업을 통해 우리 동시에 만연되어 있는 지나친 의미지상주의를 경계했을 수도 있다. 때로는 처음으로 단어를 발음해보는 유아처럼 우리가 자명하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그 순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사물과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 사이의 그 경이롭고도 순결한 연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