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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 선언
조원희, 정승일
역사가 우리를 사회민주주의로 부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때로는 무상급식과 보편적 복지로, 때로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다시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무명의 조연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사회민주주의는 온전한 정신(가치관)과 육체(전략과 정책), 손발(조직)을 가진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미래를 향한 역사 무대에 올라야 한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진보는 사회민주주의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주저하고 거부해왔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진보적 자유주의니 평등적 자유주의니 하는 각종 자유주의나 또는 반자본주의 좌파의 품 안에 머무르려 하면서 역사의 부름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때가 왔다.
모든 나라, 모든 시대가 사회민주주의의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지배에 이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으로 출발한 이 나라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0년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그리고 짧은 기간 내에 달성하는 세계사적으로 드문 업적을 이루었다. 오늘날 이 나라는 조선과 자동차 같은 중화학공업만이 아니라 전자와 통신 등 최신 산업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생산력과 기술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땅의 사회민주주의는 이 나라 남녀 노동자와 직장인들이 청춘을 다 바친 땀과 장시간 중노동으로 이룩해낸 거대한 생산력 발전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 나라는 오늘날 기본 인권과 형식적 민주주의 면에서도 미흡하지만 야만적인 독재를 벗어난 나라로 발전하였다. 사회민주주의의 부름은 무수한 투사와 열사들이 독재와 탄압에 맞서 민족해방과 노동해방,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 온 전통과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는 지난 1백년간 우리 민족이 겪어온 고난과 성공, 실패를 모두 감싸 안으면서 이 나라를 사회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인도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도 해방 정국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한 여운형 같은 인물과 정치 세력이 있었으며, 이들은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모든 민중이 평등하게 잘 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삼엄한 미소 냉전과 6.25 전쟁, 미성숙한 주체 역량, 근대적 산업 기반의 부재 등 악조건에 부딪혀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반세기에 걸친 산업화와 민주화의 노고를 거친 이후, 역사는 우리에게 사회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라고 손짓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위기와 파국
‘온 몸에 피와 고름을 뚝뚝 흘리며’ 태동한 19세기 서방의 자본주의는 역사상 유래 없는 문명적 업적과 기술적 진보를 낳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20세기 초중반에 절망과 대립, 두 차례에 걸친 참혹한 세계대전, 그리고 1960-70년대의 황금기를 거쳐 1980년경에 그 1막을 내렸다.
그리고 20세기 말엽 자본주의의 제2막 1장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급진 우파가 주도하는 체제였다. 이 체제는 고전적 자유주의보다 더 거대하고 더 역동적인 기술문명적 발전과 함께 더 통합된 ‘글로벌적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자유주의적인 글로벌 자본주의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과 함께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예외 없는 결과인 양극화를 낳았고 마침내 2008년 이래 스스로 붕괴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그리고 이 땅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화의 거센 흐름이 지배하였다. 금융자본주의 반혁명은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성을 극대화하여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20세기 중후반 선진국에서 달성된 복지국가를 상당 정도 해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 연대는 물론 노동-자본간 합의 시스템을 해체하였다.
‘자본가와 투자자가 수익을 낼 수 있느냐 아니냐’가 기업과 국민경제 의사결정의 최고 가치로 부각되면서 각국 정부는 급진적인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을 통해 자국의 사회경제적 환경을 국내외 자본가와 투자자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데 몰두하여 왔다. 이는 노동자와 직장인들, 그 가족들에게 적절한 생활임금과 사회보장을 확약하던 복지국가의 틀을 허물었고,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88만원 세대(한국)와 빈털터리 세대(미국), 비참세대(일본), 1천유로 세대(유럽) 등 다양한 근로빈곤층을 양산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 부국과 빈국 간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함께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금융시장 불안정성을 심화시켰으며, 마침내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80년 전인 1930년대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버금가는 대불황(Great Recession)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위기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진보의 계기이지 퇴보의 징조가 아니다. 맹목적이고 무정부적인 사적 이익에 의해 추동되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안정하지만, 역사에서 진보의 씨앗은 반드시 이런 상태 속에서만 태동된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보를 향한 역사의 에너지는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만 생성·축적되는 법이며, 자본주의의 발전을 우회하거나 생략한 채 역사가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관과 무관하다.
신자유주의의 압도적 지배의 시대는 2008년 말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끝났다. 이제 자본주의의 대위기를 맞이하여 인류는 다시금 민주주의냐 자유 시장이냐, 진보냐 퇴보냐, 문명이냐 야만이냐 라는 단도직입적인 양자택일 선택의 기로에 섰다. 현재 진행 중인 유럽의 경제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가 지난 1백년간 피와 땀으로 쟁취하여 쌓아올린 민주주의와 노동권, 복지와 문명의 진지를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에 기댈 수 없으며 그 헤게모니를 거부하여야 한다는 점이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파국
그렇다면 세계 자본주의의 제2막에서 이 나라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19세기말 세계 자본주의의 제1막에서 매우 후진적이고 희망의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했던 이 나라가 20세기 말 제2막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는 하나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19세기에 세계의 진보 세력이 갈망하였던 보통선거권과 초중등의무교육, 8시간 노동제 등이 대한민국에서 이미 형식적이나마 대체로 실현되었다. 게다가 젊은이의 80% 이상이 전문대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19세기 유럽 진보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위대한 역사적 성과이다. 또한 이 나라는 기술문명의 측면에서도 세계의 선두에 서있다.
우리나라는 비록 구매력 기준이지만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수년 내로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하여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소규모 도시국가를 제외할 때, 개발도상국에서 출발한 나라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선진국 문턱에 도달하였다. 물질적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오늘날 이 나라는 20년 전부터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세계화의 조류 속에 깊숙이 휘말려 있다. 오늘날 우리 민중의 삶은 너무나 고단하다. 빈부격차는 오히려 과거 군부독재 시절보다 더 심해졌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빈부격차 심화와 청년들의 대량실업, 급격한 빈곤 증대,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만연, 투기의 만연과 가계부채 급증, 출산율저하와 높은 자살률, 황금만능풍조에 따른 사회적 황폐화 등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국적 양상마저도 주변적 배역이 아닌 주역으로서 앞장서서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위기 문제들은 언제든지 화산처럼 터져나올 듯한 엄청난 불안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다. 더구나 2008년 이후 세계 경제 전체가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대불황의 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항해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머지않아 이 나라 역시 앞으로 문명이냐 야만이냐, 민주주의냐 보수반동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할 것이다.
박정희 경제체제와 경제적 민족주의
식민지 예속에 이은 6.25 전쟁의 참화, 그리고 가난과 독재로 점철된 지난 1백년의 역사로 상처받은 우리 민족에게 지금까지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기여해온 것은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에는 보수적 민족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 있었다.
먼저 박정희로 대표되는 보수적 민족주의는 우리 국민이 가난을 벗어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실현하려면 경제개발과 공업화에 매진하여 자립경제를 실현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공과 자립경제를 국시로 채택한 박정희의 ‘반공주의적 민족주의’ 하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민족주의적 경제개발이 진행되었다. 적어도 경제정책에 국한해 볼 때,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된 박정희식 경제체제는 산업정책과 은행국유화, 외환금융시장 통제 등 각종 제도적 장치를 통해 선진국 자본이 한국 경제를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면서 국내 자본 특히 대자본을 육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반민주적, 반노동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민족주의는 한국경제의 자본주의적 공업화에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이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다다르게 하는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지만 진보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이러한 반공적 민족주의와 개발 독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보적 민족주의는 박정희의 친일 전력과 성급한 한일국교 정상화, 베트남 전쟁 파병 등에서 나타났던 친일·친미적 태도를 시종일관 비판했으며, 또한 경제성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마저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진보적 민족주의는 이 나라에 있어 친일 매판세력의 척결과 민주주의 및 인권의 신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은 경제개발 전략으로 외국자본과 외국 기술, 외국시장에 의존하는 의존적, 종속적 공업화를 비판하는 ‘민족경제론’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렇지만 오늘날 명백하게 판명된 바와 같이, 박정희 체제의 반공 보수주의적인 정부주도형 공업화는 한국경제를 자립적 자본주의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오히려 ‘민족경제론’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 북한의 경제개발은 실패로 끝났다.
보수적 민족주의건 진보적 민족주의건, 후진국 민족주의는 방어적이며 부정적인 사상이다. 따라서 이 나라가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 문명적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정치적으로도 더욱 굳건한 민주주의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개발도상국 단계에나 유효했던 민족주의적 사고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적-민족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집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민주화 세력 및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 민주 정권에 참여한 민주화 세력과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은 남북화해와 정치적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박정희 체제의 유산을 부정하는 것은 모두 선(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국경제의 시장화, 자유화에 스스로 앞장섰다. 그들은 IMF와 미국정부가 요구하는 것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 즉 ‘자유 시장화’의 물결 속에 빠뜨렸다.
그 정부들을 지지했던 학자·지식인들은 이러한 자유주의화 즉 시장화를 ‘진보’의 이름으로 미화시켰던 바, 그것이 바로 ‘진보적 자유주의’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정신과 이념은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데 무능하거나 오히려 악화시켰다는 것이 지난 민주 정부의 실천에서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이는 그 정부들의 정통적 후계자인 오늘날 민주통합당의 모습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미국의 정치경제 사조의 영향을 직접 받아온 우리나라에서 민주통합당의 정신과 이념은 미국 클린턴·오바마 민주당의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렇다면 김영삼 정부, 그리고 김영삼 정부를 계승한 이명박 정부 등 보수정권은 어떠한가? 이명박·김영삼 정부를 이끌어온 정신적 지주는 ‘보수적 자유주의’였으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레이건과 부시로 대표되는 미국 공화당의 정신과 이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레이건과 부시, 마가렛 대처로 대표되는 정치경제 사조를 신자유주의라 지칭한다.
1990년대 초반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군부 독재 유산의 해체’와 ‘박정희 경제체제 유산의 해체’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시한 이래, 정부 주도 자본주의는 악(惡)이고 시장 주도 자본주의는 선(善)이라는 잘못된 구도와 사고방식이 한국의 개혁 세력과 진보 세력에게 깊이 침투하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그들 스스로 정부를 장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도가 아닌 시장 주도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민주정부가 아닌 시장에 넘어갔다.
이 모든 일이 ‘개혁적 진보’와 ‘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이름하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 민주 정부의 집권기에 진보 혹은 범민주화운동 세력 중 상당수가 그 ‘자유주의 개혁 정권’에 몸소 참여하여 신자유주의적 경제사회 개혁을 이끌었으며 그리하여 진보를 희화화하는 일에 일조했다.
진보적 자유주의, 민족민주 자유주의의 한계
그런데 ‘시장 주도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한국 진보 세력의 자본주의 비판 정신을 마비시키고 있다. 즉 ‘공정한 시장질서’, ‘공정하고 착한 자본가’, ‘공정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진보적 자유주의 또는 평등적 자유주의 같은 각종 자유주의적 담론의 진보적 유효성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것은 빌 게이츠 또는 스티브 잡스 같은 착한 자본가들이 미국 리버럴의 미래 비전인 것처럼 우리의 경우 문국현 또는 안철수 같은 착한 자본가들을 한국 리버럴의 미래 비전으로 포장하게 만드는 신념의 뿌리로 작동한다.
더구나 민족·민주 진보 세력의 상당수가 여전히 구시대적인 반제·반봉건 민족해방·민중민주 혁명론(NLPDR)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이들은 마치 한국 자본주의가 1960-70년대에 머무르고 있는 양 착각하면서 민족자본가, 양심적 자본가로 미화된 중소벤처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 즉 민족민주 자본주의, 민족민주 자유주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 한국 진보의 과제인양 착각한다.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민족민주 자유주의자들’은 공정한 시장질서와 공정한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공정 시장 자본주의’의 잠재적 가능성을 신뢰한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공정 시장 자본주의의 잠재력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아무리 착하고 공정하다 할지라도 자본주의는 그 자체 빈익빈 부익부의 체제이며 정의롭지 못한 체제이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같은 착한 자본가들의 모국인 미국 자본주의가 선진국 중 가장 빈부격차가 심하며 복지국가가 취약하다는 점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의 정신없이, 사회민주주의를 논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공정한 시장질서’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해 여전한 신뢰를 보내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민족민주 자유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사안에 따라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자유주의와 협력할 수 있다. 즉 사회민주주의는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보수주의 및 신자유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 참여민주주의와 시민적 노동권 및 복지권 등을 지지하는 한에 있어 그것과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의 근원적 한계를 늘 잊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든지 사회민주주의와의 협력을 저버리고 신자유주의의 협력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비판한다.
반자본주의 진보의 한계
물론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여전히 전통적 진보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제세력이 있다.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이처럼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 정신으로 충만한 반자본주의 진보파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먼저 다양한 모습의 반자본주의 진보파는 오늘날 민중의 일상생활을 좌우하는 국가정책과 경제사회 정책의 무대에서 전혀 주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 및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그 역할을 맡겨 놓은 채 여전히 주변적 위치에 머물러 있다. 왜 그럴까? 그 가장 큰 원인은 사상적 혼란과 이에 따른 정책적 무능력이다. 이들의 대다수가 여전히 과거의 사상과 이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본주의에 내재한 위기와 모순을 해결하는 주도 세력으로서 자신을 환골탈태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일부는 교조적인 전통 좌파 사상에 여전히 머무르면서 자본주의 그 자체를 개혁하는 일체의 개혁적 시도를 거부하거나 또는 소극적 동참에 머무른다. 이들의 혁명주의적 정신구조는 일거에 모든 것을 뒤집으려는 한판주의이다. 이는 초기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태도와 닮아 있는데 따라서 이들의 정치는 일종의 종교적 정치운동이 된다. 또 이들은 강경한 급진적 실천이 있어야 그나마 작은 것이라도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마치 급진적 실천만 있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혁명이 성공할 것처럼 생각한다. 이들은 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입장을 경멸하면서 수정주의라고 매도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종말론적 종교인의 태도이다.
그런데 사랑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종교와는 달리 혁명주의는 언제나 상처 받은 자존심에서 비롯된 증오를 정치운동의 에너지로 삼는다. 그렇지만 증오라는 감정은 인간을 과거에 얽매어 현재를 파괴하려 할 뿐, 한걸음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참된 진보 정치는 인간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질문에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현실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일상적 삶의 개선하는 것, 미래를 한걸음씩 여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적 삶을 무시한 채 막연한 혁명적 미래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어떻게 국민의 마음을 얻고 집권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가?
다른 한편 어떤 이들은 포스트모던 같은 선진국 신좌파의 철학 사상에 물든 나머지 숨 가쁘게 변화하는 국내외 자본주의와 민중의 생활현실을 적극적으로 포착하여 정치경제적 대안을 제시하는데 무능하기 그지없다. 이들은 서구 68혁명에서 시작된 신좌파의 자유절대주의 지향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즉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한 부정’과 ‘대안 없는 즐거운 저항’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이 땅의 반자본주의 진보파는 공산주의 또는 포스트모던의 이념을 가지고 있되 그것을 실천할 완성도 높은 경제 전략과 사회 전략, 그리고 그와 결합된 정치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불임의 정치 세력이며 그리하여 민중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정치적 능력을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성과
진보의 대안 부재와 그 한계를 목도하면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역사적 경험이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현안인 대량 실업과 빈부격차 심화, 산업공동화와 출산율 저하 등의 문제를 1백 년 전부터 경험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생활정치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대안 없는 혁명주의나 철학적 개인주의로 도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고자 싸우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추상적인 ‘혁명적 민중’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현실의 민중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미래의 언젠가에 이루어질 막연한 혁명에 대한 기대와 준비보다는 ‘지금, 여기’를 개선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사회적 대안들을 고안해내고 실현하는데 몰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저차적인 욕망을 넘어, 고차적인 가치와 삶의 지평으로 민중을 인도함으로써 민중 스스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주역이 되도록 자극하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내재한 진보적 역동성과 처참한 파괴성의 양면을 동시에 인식했으며, 그 진보적 역동성을 보존하면서도 그 처참한 파괴성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와 정책들을 창조해냈다. 그들은 유토피아에만 몰두한 나머지 막연한 이상향(理想鄕)에 대한 종교적 논의에 열중하기 보다는 생활정치에 헌신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장기간 집권하는 가운데 한 걸음 한 걸음 미래로 나아갔다. 그렇기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세계 경제라는 제약조건을 철저히 고려한 가운데 ‘자유와 만민평등’이라는 인류의 꿈에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을 고민했으며, 그리하여 현실 속에서 그 이상(理想)에 가장 근접한 국가를 건설해냈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기존 좌우파의 철학적 도그마를 극복하여 ‘자유’와 ‘인권(기본권)’의 개념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였다. 즉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좌파와 우파의 역사적, 긍정적 유산을 폭넓게 받아들여 그것을 소화하였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합리적 핵심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양자의 한계와 부정성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그리하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혁신적인 정치·정책적 역량을 발휘하였으며, 그리하여 민주공화국이 자본과 시장을 이성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여 사회공동체의 발전과 개인·개성의 해방에 기여하도록 경제를 재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근본문제는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했는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세계를 변화시키되 ‘긍정적’(!)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그 변화를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그들은 정치의 아방가르드보다는 정책의 아방가르드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였다.
우리나라 특수성 속에서의 사회민주주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성취한 역사적 전통과 성과를 이어받고자 할 때,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특수한 국내외적 환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나라에서는 남북분단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이 오랜 기간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추동된 결과, 그리고 지난 민주 정부들이 보수적 및 진보적 자유주의들의 협조 하에 시장 주도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결과, ‘시장 원칙’과 ‘자본 제일 원칙’이 일상생활의 지배적 규칙(rule)으로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삶의 폐단을 교정할 역사적 기회를 지금까지 갖지 못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 그 자체의 폐단을 교정할 진정한 진보적 생활정치에 대한 민중의 욕구가 극도로 높아지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가 추진한 형식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가 낳은 삶의 피폐화에 실망한 국민들은 이명박 한나라당 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보수적 자유주의 이명박 정권이 전방위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한 결과 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화되었고, 그리하여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렇다면 박근혜 식의 보수주의, 즉 자본주의를 적절히 관리하고, 노동자와 국민을 어떻게 적당히 통제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들의 입장에서 삶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데는 관심이 없는 보수주의 복지국가론에 맞설 수 있는 진보적 대안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민주통합당 또는 통합진보당 식의 진보적 자유주의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안 없는 반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는 유일한 대안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긍정적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그 양자의 부정적 한계를 뛰어 넘는 사상, 사회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둘째, 이미 수년간 진행 중인 글로벌 금융위기는 앞으로 더욱 심각한 파국적 국면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 국면에서 세계 자본주의는 수많은 위기와 혼란, 격변과 대립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위기와 격변 속에서 국제적 신자유주의에 맞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적인 대안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국제적 사회민주주의이다.
셋째, 개발도상국 단계를 지나 선진국 문턱까지 이른 한국 경제의 발전 수준을 볼 때 우리는 이 나라가 이미 자유주의적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선두 그룹의 일원으로 떠올라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한국 자본주의가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자본주의와 중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자본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협력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자신의 정치 전략과 경제사회 전략을 구사하여야 한다. 우리 경제의 발전 수준과 대내적 복지국가의 발전 수준에 조응하여, 그에 맞는 적절한 수준의 대외 개방과 대외 협력을 신중하게 추진하여야 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의 진보적 대안은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로의 무조건적 통합을 의미하는 FTA도 아니며, 그렇다고 무조건적 단절을 의미하는 반세계화도 아니어야 한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보호주의가 득세할 위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대내적 복지국가의 발전에 조응하는 적절한 수준의 대외개방과 대외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정치경제적 사고방식은 사회민주주의이다.
넷째, 중국의 성장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간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미·중·일·소 등 초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끝까지 평화와 중립을 선택해야 자립과 번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대외적인 평화와 중립을 고수하기 위해서도 대내적인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전략이 필수적이다. 과거 스웨덴이 제2차 세계대전에 휩쓸리지 않고 대외적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복지국가 전략을 통해 대내적인 경제적-사회적 긴장을 해소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부름에 응답하여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려 하는 우리는 이 나라의 지난 1백년 역사가 낳은 성과와 한계를 모두 껴안으며 드디어 보편적 세계사의 중심 무대로 나아가고자 한다. 즉 이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의 탄생은 19세기말 유럽에서 출범한 사회민주주의가 한 세기를 건너 뛴 끝에 이 땅에 그리고 아시아에 상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아시아가 세계 역사를 이끌어갈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미래 역사의 주역
이런 모든 면을 고려할 때,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이다. 스웨덴과 핀란드, 덴마크는 역사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사상의 종주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의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들과 달리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자유주의적 재편이라는 도전에 맞서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데 상당 부분 성공하였다. 즉 그들은 보편적 복지와 노동민주주의를 두 축으로 하는 복지국가 체제가 시장유연성과 어느 정도 상호보완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에게 상당히 양보하였으며 진보의 역사적 성과에서 후퇴한 면이 일부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진보의 주요한 역사적 성과와 내용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인류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930년대의 대공황 속에서도 노-농 동맹과 같은 창의적인 정치노선과 그리고 가장 앞선 선구적인 적극적 재정지출 확대 정책 등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으며, 이를 통해 국민들의 신뢰를 얻은 바 있다. 그리고 지금도 북유럽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제금융자본이 요구하는 긴축 기조를 거부하고 복지국가의 유지 및 강화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나라가 직면한 상황도 1930년대에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직면했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만약 오늘날 이 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세계 자본주의의 대위기 국면 속에서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처럼 적극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정치적, 정책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 나라 민중과 시민의 신뢰를 점진적으로 획득하는데 성공한다면, 이들은 다가오는 미래에 이 땅의 주도적인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역사적 과제는 이 나라를 복지국가와 문명국가로 만드는 본격적인 진보 정치이다. 마치 소국이면서도 오늘날 세계적인 복지국가이자 문명국가로 우뚝 선 스웨덴과 핀란드처럼, 우리는 대한민국을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복지국가, 문명국가로 만들고자 한다.
이 나라 진보는 영광스럽게 사회민주주의의 부름을 받았으며, 아시아 최초로 고차적인 복지·문명국가를 건설하는 영광스런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 기회를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의 여부는 오로지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이 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
2012년 8월 6일
위 글은 (가칭) 사회민주당 준비모임의 위탁에 따라 조원희와 정승일에 의해 공동으로 작성되었다. 글의 초안에 대하여 사회민주당 준비모임에서 발표와 토론이 있었고, 그 토론에서 지적된 사항들에 대하여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시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친 후 다시 사회민주당 준비모임의 승인을 거쳐, 최종적인 원고가 2012년 8월 6일에 제출되었다. |
http://sdpkorea.koreafree.co.kr/board/index.html?id=intro&no=13
첫댓글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이 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