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진경 대령(1918.12.22.~1948.6.18) 약력 보고
故 박진경 대령님은
경남 남해군 남면 출신으로 진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대판외국어학교 영어학과를 졸업하자 학도특별지원병에 징집되어 일본 마쓰도공병예비사관학교 수료 후 소위 임관 후 제주에 근무, 해방이 되자 부산 국방경비대 제5연대 창설 시 사병으로 입대 참여하였고, 미군정으로부터 “일본통치하에서 습득한 전투기술을 신생 조국을 위해서 최대한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권유에 따라 군사영어학교를 거치지 않고, 1946년 4월 25일부 현지에서 군번 10091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그후 부단한 노력 끝에 1년 5개월만에 중령으로 진급하여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초대 인사국장을 거쳐1948년 5월 6일 제주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후임으로 취임하였습니다.
박진경 중령은 제주 부임 한달 만에 6월 1일부로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하였습니다. 이 진급은 4개 전투대대를 지휘하므로서 여단장급으로 격상된 직위 진급이었습니다.
좌파에서는 이를 두고 적극적인 토벌로 전과를 감안한 진급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전과는 미미했고 실적도 없이 토벌의지만으로 진급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고 박진경 대령은 제주4·3사건을 슬기롭게 진압할 수 있는 유능한 장교였으며 선 선무공작, 후 진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주민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단위대장에게 선무공작을 강조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는 그의 부하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연대장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은 증언하였습니다.
박진경 대령이 제주도 재임기간은 1개월 13일(43일)에 불과합니다. 실제 부대를 장악하고 작전을 지휘한 기간은 이보다 더 짧습니다.
5월 10일(총선거일) 제주읍에서 김달삼은 오일균 등 양측 5명이 비밀 회합하여 정보교환, 무기공급, 토벌작전 사보타주, 탈영병 적극 추진, 특히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을 암살하기로 합의, 이것은 박진경 부임 4일 만에 암살계획을 결정한 것입니다.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1948년 6월 17일 저녁 제주읍내 있었던 그의 진급 축하연은 제주도지사가 마련한 자리로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 그리고 통위부에서 파견된 장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요릿집 ‘옥성정’에서 성대하게 열렸다고 합니다.
박진경 대령은 자정 무렵 다른 참석자들보다 먼저 부대로 돌아와 1948년 6월 18일에 제11연대본부에 위치한 영내의 집무실에 마련된 침실에서 잠이 들자, 남로당프락치군인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박진경 대령이 암살된 제11연대본부는 당시 제주농업중학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6월 18일 새벽 3시 15분경, 모슬포 주둔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손선호 하사 등 일당 8명이 침실 밖에서 일부가 경계를 하는 동안 일부는 창문을 열어 손전등을 비추고 취침중인 박진경 대령을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됐던 손선호 하사는 M-1 소총으로 저격하였습니다. 위생병이 달려와 울면서 시체를 씻어냈는데 M-1총탄이 심장과 두개골을 정확히 관통하였습니다.
직접 총을 쏜 사병은 울면서 박진경 대령의 피를 씻어내던 그 위생병 손선호이었습니다.
젊은 고급장교로 유명을 달리한 박진경 대령의 그때 나이는 만 29세였습니다. 박진경 대령의 암살 사건을 주도한 이는 남로당 세포였던 제9연대 제3중대장인 문상길 중위였고,
수사과정에서 문상길 중위를 비롯해 강자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신상우 일등중사 등이 체포되었습니다. 문상길, 신상우, 손선호, 배경용 등 4명은 8월 14일 열린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9월 23일 경기도 수색의 한 기슭에서 총살형이 집행됐습니다.
숙군의 시초는 제주4․3사건 당시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되면서, 암살범 문상길 중위 일당을 체포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여수 14연대 반란 등 계기로 육군본부는 바로 남로당 프락치의 대대적인 숙군을 하게 되며, 이후 군 입대자에 대한 사상검열이 강화되었으며, 좌익 혐의자에 대한 검거가 군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비록 고 박진경 대령 제11연대장님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숙군의 결과 국군은 정치적으로 균일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숙군은 국군 내의 좌익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6․25 한국전쟁시기 국군은 전쟁 초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내부로부터 와해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고 박진경대령님의 죽음은 헛되지 아니함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례는 1948년 6월 18일 국군최초육군장으로 엄수되었고, 1950년 6·25한국전쟁 때 나라에서는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이상으로 고 박진경 대령 제11연대장님 약력 보고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