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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
44 So he left them and went away once more and prayed the third time, saying the same thing.
45 Then he returned to the disciples and said to them,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Look, the hour has come, and the Son of Man is delivered into the hands of sinners.
46 Rise! Let us go! Here comes my betrayer!”
최루탄을 쏘며 방독면을 쓴 전경에 쫓겨 다니고 물대포를 쏘고 사람이 죽고 아예 무기를 든 군인들이 길거리에서 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It's true that the riot police with gas mask and the soldiers with weapons disappeared from the streets.
그 때는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악에 저항했습니다.
At that time, the churches were united and resisted against the evil together.
하지만 노골적인 독재의 폭력이 사라지자 교회가 정의의 본질을 잃고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However, as the violence of dictatorship has disappeared, the church has lost its essence of justice and is breaking up.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We believe one God.
주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를 회복해야 합니다.
Through the Lord we must restore the unity.
믿는 우리끼리 싸우면 어떻게 합니까?
What do we do if we fight each other as Christian?
성경은 우리의 신앙을 전쟁, 싸움이라고 비유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It is true that the Bible compares our faith with war or fighting.
실은 믿음은 적군과 아군의 극단적인 분열의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In fact, belief is the reality of extreme division between the enemy and our forces.
이 사회는 돈 이데올로기 명예 이런 이해관계를 두고 싸우지만 믿음은 오직 영적 내용을 가지고 하는 싸움을 이릅니다.
This society fights for the categories like money, ideology and honor but faith fights for the spiritual contents.
우리는 영적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We are waging a spiritual war.
그 때에 우리는 사탄에 대항하는 영적 아군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Then we became one, as a spiritual ally against Satan.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12 For our struggle is not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the rulers, against the authorities, against the powers of this dark world and against the spiritual forces of evil in the heavenly realms.
세상은 골리앗을 앞세워 폭력으로 생명을 위협할 것입니다.
The world will threaten our lives with violence by Goliath at the forefront.
적들은 이렇게 탱크를 비행기를 이데올로기를 들고 오지만 믿는 사람들은 물맷돌 다섯 개와 작대기를 들고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들고 싸울 것입니다.
Enemies will fight with the tank, the plane and with ideology, but believers will fight with David’s five stones and stick, altogether with the commandments of Jesus' love.
이렇게 영적인 다른 대응 방식에 골리앗들은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The Goliath will laugh at us for those different spiritual defense.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But we are the ones who believe in God.
그래서 전쟁터에서 웃음거리였던 소년 다윗이 될 것입니다.
Therefore we will follow David, the boy who used to be a laughingstock on the battlefield.
당장에 왕으로써 갑옷을 입고 그럴듯하게 호령하는 사울 뒤에 섰다가는 영적인 배패를 당합니다.
If we follow king Saul, who is dressed in armor, and commanding, we will suffer a spiritual defeat.
이 전쟁에서 우리의 지도자로 누가 사울왕이며 누가 소년 다윗인지 아시는 아주 상식적 기준이 있습니다.
In this war, there is a common sense for distinguishing our leader.
Who is the David?
Who is the king Saul?
과연 예수님이시라면 그 일을 하셨을까? 생각하시면 됩니다.
If he were Jesus, would he have done it? Think about it.
제 아무리 설교를 잘 해도 성문제를 일으키며 노회장 총회장 명예를 탐내며 돈을 탐내며 교회를 제 개인 소유물로 알고 제 자식들에게 상속시키기에 혈안하며.......
No matter how good he preaches, if he causes sex problems in the church, covets the honor of the President, and inherits church to his own child....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겠습니까?
Would Jesus do such a thing?
그들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내버리는 아주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To follow them is a very foolish act of throwing away one's soul.
다시 이릅니다.
I'll get back to it.
영적 전쟁에서 가장 먼저 아군과 적군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In a spiritual war, first of all, you must not confuse your army with your enemy.
물론 주님의 편을 아는 일이 쉬운 것만이 아닙니다.
Of course, it is not easy to know the Lord's side
주님은 안식일을 주님보다 더 잘 지킨다는 유대 사람과 싸우신 것입니다.
Jesus have fought against the Jews, who seemed to be better at keeping the Sabbath than Jesus.
주님의 제자들조차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Even Jesus’s disciples had committed Sabbaths.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그것을 비벼먹었습니다.
On the Sabbath, they cut the wheat grain and rubbed it together.
적군들은 예수님을 향해 모세의 법을 어기고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The enemy accused Jesus of breaking the law of Moses.
그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큰 소리로 외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No one confessed to God with the loud voice like Jews who crucified Jesus.
소리만 들으면 유대인들이 더 믿음이 좋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If you only hear the sound, you might think that the Jews were trustworthy.
그러니 믿음의 실체를 보아야합니다.
So you have to look at the reality of faith rather than hearing their voice.
골리앗 앞에서도 그들 손에 작대기가 돌멩이가 들려있는지 거창한 창과 폭력과 조작들이 들려있는지부터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In front of Goliath, you have to check if they have stones and a stick in their hands or spear of violence and manipulation.
우리 주님은 십자가로 최후의 전투를 이기셨습니다.
Our Lord triumphed last battle on the cross.
그런데 주님은 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에 가셨습니다.
But our Lord went to Gethsemane before he burdened cross.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6 Then Jesus went with his disciples to a place called Gethsemane, and he said to them, “Sit here while I go over there and pray.”
십자가 지실 일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해 겟세마네를 찾아가셨습니다.
Before the crucifixion, Jesus went to Gethsemane to pray.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자신의 제자들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Jesus took his disciples to the site.
그것은 예수님의 깊은 배려이셨습니다.
It was a profound consideration of Jesus.
제자들도 앞으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런 고난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His disciples would suffer the same hardships in the future as Jesus had suffered.
제자들도 반드시 절박한 현실을 만날 것입니다.
The disciples would surely face a desperate reality.
그 때에 유일의 방식입니다.
It's the only way on that time.
그들도 주님과 같은 방식 즉 기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They would solve the problem with prayer like what Lord did.
왜
Why?
너무나 간단한 답입니다.
The answer is very simple.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무 작대기와 돌멩이가 집단 드론보다 스텔스기보다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Because they believe God's wooden sticks and stones are stronger than the collective drones and the stealth planes.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Because God rules over the history of this world.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자신이 당하실 죽으심을 두고 외로운 싸움을 하실 것입니다.
Jesus would have a lonely fight over his death in Gethsemane.
제자들도 앞으로 예수님과 같은 경험을 할 것입니다.
The disciples would experience the same thing in the future as Jesus had experienced.
그들의 영적인 전쟁에서 그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까지 모조리 졸고 있을 외로운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They would have a lonely fight in their spiritual war, where even their closest people doze off.
주님은 이런 교육적 목적으로 주님의 치열한 싸움 옆에서도 졸고 있을 제자들을 데려오신 것입니다.
For this educational purpose, the Lord brought his disciples, who would doze off near the Lord’s fierce battle.
그런데 주님은 지금 무엇을 할 지 몰라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But the Lord was not praying because he did not know what to do.
그 반대입니다.
That was the opposite.
주님은 자신에게 정해진 고난을 확신하셨고 주님은 확실하게 정해진 그 싸움을 두고 가장 적극적인 행위를 하고 계셨습니다.
Lord was certain of his hardships in front of him, and he was the most active in his hard work.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7 He took Peter and the two sons of Zebedee along with him, and he began to be sorrowful and troubled.
전쟁의 승패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The factor of Win or lose in war is not like what people think.
승리는 적군의 첨단의 무기의 여부와 군인들의 사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The win or lose does not depend on the high-tech weapon of the enemy and the morale of the soldiers.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서 달려있습니다.
It is depends on God.
그 승패는 이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It is not in this land, but in the hands of God in heaven.
그래서 예수님도 기도하신 것입니다.
That's why Jesus prayed.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8 Then he said to them, “My soul is overwhelmed with sorrow to the point of death. Stay here and keep watch with me.”
그런데 주님의 모습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But the sight of the Lord was strange.
스스로 전능하시고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시는 주님이 이런 죽을 것 같은 고민을 다 하실까?
Why did the Lord, who is omnipotent and has complete faith in God, worry about this?
맞는 말입니다.
It makes sense.
고민이 많은 사람은 분명히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A person who has lot of worries is certainly a person who has no faith.
그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는 고민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They have unnecessary worries because they do not know the Almighty, who created heaven and earth.
하지만 죽을 것 같은 고민이 없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But a person who doesn't have a worries dying heart is not a believer.
무슨 궤변이냐 할 것입니다.
What kind of sophistry is this?
믿음이란 되로 받으면 말로 원수를 갚으라는 세상 속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다른 하나님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이릅니다.
Faith means the living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love your enemy in the evil world.
믿음이란 이런 엄청난 갈등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Faith means standing in this position of great conflict.
주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주님이 낮아지셨다는 의미를 가지며 또한 완전하신 의인이 죄의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The fact that Lord had abandoned the throne of heaven and had come to the earth means that he had become low and the righteous had come to the world of sin.
그는 완전한 갈등으로 오신 것입니다.
He came here in complete conflict.
이런 갈등의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장소가 바로 믿음이라는 장소입니다.
It's the place of faith that has this problem.
그러니 죽게 생긴 고민이 없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So a man who doesn’t have fear of death is not a man of faith.
이런 죽게 생긴 고민을 주님은 어떻게 해결하시나? 특별히 선별된 몇 사람을 주님 곁에 두시고 주님은 그들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How does the Lord deal with this mortal agony? Lord chose some special men whom, he would teach beside him.
예수님의 갈등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현장이 바로 겟세마네였습니다.
It was Gethsemane, where the most clear manifestation of Jesus' conflict was.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9 Going a little farther, he fell with his face to the ground and prayed, “My Father, if it is possible, may this cup be taken from me. Yet not as I will, but as you will.”
그런데 아주 주의하실 것이 있습니다.
But there's something that we should take attention.
이 믿음의 싸움에서 주님이 싸우시는 상대는 골리앗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In this fight of faith Goliath was not target of the Lord.
그는 지금 자신과 싸우는 중입니다.
He was fighting with himself.
더 상세히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싸우신 것입니다.
To be more specific, he had fought against himself who was not accepting God's will.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내 방식으로 나의 뜻을 따를 것인가 그 문제를 결정하지 못하는 나를 두고 싸우는 것입니다.
He was fighting with himself for he could not decide whether to follow God's will or follow his own will.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것입니까? 혹은 저것입니까? 그것으로 헷갈리시지 않으셨습니다.
He didn’t question, “Is this the will of God? Or is it that?” he didn't get confused by that.
원수를 사랑할까요 말까요가 아닙니다.
It’s not about the question whether he should love his enemies or not.
원수를 사랑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He was asking God to love his enemy.
희생을 피해갈까요 말까요가 아닙니다.
Let's avoid the sacrifice or not? Not really.
희생을 감당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He was asking God for him to make himself sacrifices.
즉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절대화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God's will was absolute to him.
그 말씀으로 수렴하는 작업이 기도였습니다.
His prayer was only for following God’s will.
그렇게 주님은 이 갈등을 등에 지시고 세상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So the Lord would burden this conflict on his back and solve the problem of saving the world.
그가 그리스도이십니다.
He is the Christ.
갈등이라는 현실만을 목격한다면 사람들은 주님을 완전히 오해할 것입니다.
If people only see the reality of conflict, they would completely misunderstand Jesus.
저 분이 저렇게 비참하게 당하는 것은 그 만큼 징계를 당할 죄를 가지셨다고 그릇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They will make a false interpretation, “what a great guilty he is!” because he was persecuted terribly.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4. Surely he took up our pain
and bore our suffering,
yet we considered him punished by God,
stricken by him, and afflicted.
하지만 이 고난을 받음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회복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들은 이 일을 전혀 달리 보게 될 것입니다.
But if they had known God's will to restore sinners to righteous, they would see it completely differently.
그 때에 그들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Then they will accept the Lord as Christ.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53:11)
11 After he has suffered,
he will see the light of life[d] and be satisfied[e];
by his knowledge[f] my righteous servant will justify many,
and he will bear their iniquities.
그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갈등 상황에 오셔서 모든 우리의 죄를 스스로 지셨던 것입니다.
He abandoned the throne of heaven and came to this situation of conflict and committed all our sins
그리스도로써 주님의 갈등은 필연적이셨듯이 믿는 사람들의 갈등 역시 필연적입니다.
The conflict of the Lord as Christ was inevitable, and so is the conflict of the believers.
믿는 사람들의 자초한 고난을 통해 세상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Peace will come to the world through the self-imposed hardships of the believers.
성경은 반복해서 주님의 우울하심과 고민을 전합니다.
The Bible tells the Lord's gloom and anguish repeatedly.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갈등의 상황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That's the inevitable state of conflict.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0 Then he returned to his disciples and found them sleeping. “Couldn’t you men keep watch with me for one hour?” he asked Peter.
믿음의 싸움은 외로운 싸움입니다.
The battle of faith is a lonely fight.
그 싸움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No one can help in the fight.
그들은 변화산에서도 선발되었던 특별히 사랑받는 제자들이었지만 주님의 현실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They were specially loved disciples who were also selected in Mt. trance-figured, but they were sleeping in the presence of the agony Lord.
주님은 그 누구에게도 위로 받은 수 없는 외로운 싸움을 홀로 싸우신 것입니다.
The Lord fought a lonely battle.
믿음의 싸움에서 가장 결정적인 내용은 이 세상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습니다.
The most crucial content in the fight of faith cannot be shared with anyone in the world.
지금 모든 사람들은 외로운 전쟁을 치르는 중입니다.
Now everyone is fighting a lonely war.
집안의 형제 부모조차 이 믿음의 싸움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Even brothers and parents in the family can interfere with this fight of faith.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1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
거대한 괴물 골리앗이 소리를 지르자 그 소리에 질려서 우리는 지고 말았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When the giant monster Goliath screamed in a loud voice, they were scared by the sound and convinced that they lost the war.
하지만 거기에 분노한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But then a wild-eyed person appear.
그는 다윗인데 이 소년이 골리앗을 이기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줄 것입니다.
He was David, and this boy would defeat Goliath and gave Israel a victory.
그런데 이 승리를 참으로 특별한 싸움이었습니다.
But this victory was a very special fight.
다윗의 골리앗과 싸움의 승리는 골리앗과 싸움 이전에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David's victory in the battle with Goliath was set before the battle with Goliath.
골리앗과 싸우기 전에 소년 다윗이 들판에서 곰과 사자와 싸우면서 그의 승리는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His victory was predicted for David fought the bear and the lion in the field before fighting Goliath.
다윗은 믿음으로 곰과 사자를 싸워 이겼던 것입니다.
David fought the bear and the lion in faith.
주님은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That is what the Lord had pointed out.
주님은 골고다의 십자가 길에서의 승리의 결과를 겟세마네의 언덕에서 기도를 통해 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The LORD was praying for the outcome of Golgotha's victory on the cross.
제자들은 기도를 하지 않음으로 3번 주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The disciple would deny the Lord three times for not praying.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옷을 벗고 도망칠 것입니다.
Someone would take off his clothes before the Lord's cross and run away for not praying.
주님의 그 십자가의 승리가 없으면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습니다.
Without the victory of the Lord's cross there is no salvation for the people.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그 승리를 결정하신 장소가 겟세마네였습니다.
Then it is Gethsemane where the salvation was decided.
그런데 제자들은 치명적으로 그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But the disciples did not pray fatally.
사람에게는 육적인 내용과 영적인 내용이 두 개가 동시에 있는데 육신이 약한 것입니다.
There are the spiritual and the physical in human being, but the physical was weakened.
그들이 육신의 힘이 약한 것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They had to overcome their weak physical strength with the help of the Holy Spirit.
성령하나님의 중요한 역할은 방언하고 예언하고 앉은뱅이가 벌떡 하고 일어나게 하고 이런 종교기술적 부분이 아닙니다.
The important role of the Holy Spirit is not about speaking strange language, prophesying, and making the seated man jump up and rise up.
성령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를 부르짓으면서도 십자가를 감당할 의지력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The Holy Spirit give the ability for Christian to bear the cross even they experience the trouble.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2 He went away a second time and prayed, “My Father, if it is not possible for this cup to be taken away unless I drink it, may your will be done.”
주님의 기도는 변화가 없으셨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Take attention that there was no change in the Lord’s prayer.
주님은 똑같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십니다.
Jesus prayed with the same prayer topic
특별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There was not special answer from God.
주님께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새로운 것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알려주시는 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What Jesus wanted from God was not the intellectual problem that others don’t know about.
주님의 기도는 주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그 전쟁에서 승리하실 수 있는 의지를 채워주시라는 것입니다.
Jesus’ prayer was asking for will to win the war that already he knows about.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변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As a rule, God’s will can not be changed.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Therefore, Jesus asked God to let him follow God’s will.
이 하나님을 뜻을 저항하는 나와의 싸움이 기도입니다.
Fighting with my own will that resist to God’s will is the prayer.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3 When he came back, he again found them sleeping, because their eyes were heavy.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4 So he left them and went away once more and prayed the third time, saying the same thing.
믿음에 있어서는 근원적으로 그 누구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기대할 것이 없었다는 것을 세 번 반복하신 것입니다.
In faith, he repeated three times that there was nothing to expect from other’s help.
주님의 제자들은 세 번을 졸고 자고 있었습니다.
Jesus’ disciples were dozing and sleeping for three times
그리고 하나님의 정해지신 뜻 그 희생을 감당하게 해달라는 주님의 기도가 변함없이 세 번 반복된 것입니다.
Jesus prayed three times to let him endure the sacrifice that is need to follow God’s fixed will.
믿음의 깊이의 여부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그 독립성에 있습니다.
The depth of faith is decided by the act of standing in front of God alone.
자전거를 탈 때에도 뒤에서 잡아주다가 손을 놓은 줄도 모르고 안심하고 달리다보면 비로소 자전거를 타게 된 것입니다.
We learn to ride a bicycle as we ride the bicycle alone without noticing that the hand is released from it.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faith is the same
남은 졸고 있어도 나는 하나님의 일을 꿋꿋이 감당하는 일입니다.
It is that even others doze off, I’m handling God’s will.
주님은 기도를 통해 그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The Lord set example in prayer.
목사가 저렇쿵 장로가 저렇쿵 교회 누가 저렇쿵 그것이 자신의 믿음 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깊이의 문제입니다.
If gossip about church, pastor, and elders are affecting your faith, then it is problem with your depth of your faith.
믿음은 하나님과의 외로운 싸움입니다.
The faith is the solitary fight with God.
그리고 그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It is the act of accepting absoluteness of God.
주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하셨습니다.
Jesus cried on the cross, “Eli, Eli, lama sabachthani.”
주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또 수용할 수 없는 하나님 뜻을 수용하며 죽으십니다.
Even Jesus accepts the unacceptable God’s will, and dies on the cross.
믿음을 통한 고통은 그 뜻을 순종하면서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The pain of faith has to be accepted even though it is incomprehensible.
하나님의 일은 그 일을 감당하면서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God’s work is something that you are handling but can not be handled by you.
그 하나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That God’s will should be accepted.
그 일을 위해 주님께서 같은 말씀으로 세 번 기도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중언부언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The fact that the Lord prayed three times for the event with the same words does not mean that the Lord repeated.
문제는 실천인데 그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The problem is the taking an action, but that is very hard.
그래서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 세 번 같으셨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So it is shocking that the contents of Jesus’s three prayers were all same.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God’s will cannot be changed.
그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God’s word is absolute
그 말씀만이 유일의 선이십니다.
God’s word is the only good.
얼마 전 어느 목사님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A while ago, I got an email from a minister.
어떤 정치인이 사회주의를 일부 수용한다고 하니 그 사람을 무조선 반대해야한다는 것입니다.
A politician says he accepts some socialism. Therefore, the minister said that he has to vitally oppose him.
하지만 믿음의 기준은 세상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But the standard of faith is God’s will, which cannot be represented by any ideology from this world.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과 같이 절대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The true faith is to follow God’s will as Jesus did.
사랑의 계명 위에 어떤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앞에 절하는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If we insist the ideology on the word of love, that is same as worshiping the idol.
사회주의도 하나님의 뜻인 사랑의 계명에 위에 있을 수 없으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도 그 사랑의 계명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The sociology cannot stand on the word of love which is God’s will, and the ideology of capitalism cannot stand on the word of love.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초대 교회는 자본주의가 아닌 공산주의적 요소가 더 많습니다.
The early church, where disciples received the Holy Spirit and denied their possession as their own, has more communist elements, not capitalism.
한국 교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하나님주의인 것으로 아주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The churches in Korea are mistaken that they treat the capitalistic market economy as the God’s will.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y worship the ideology of capitalism.
한국 전쟁과 분단의 현실을 통해 남북 모두 이데올로기가 우상화되고 말았습니다.
Because of Korean war and the reality of division, The Ideology is idolized in South and North Korea.
교회는 사랑의 계명이 세상 이데올로기의 월등한 우위에 있음을 확신시켜야합니다.
The Church have to give confidence that commandment of love is the superior superiority to the world ideology.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5 Then he returned to the disciples and said to them,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Look, the hour has come, and the Son of Man is delivered into the hands of sinners.
무섭게도 겟세마네의 시간은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THe time in the Gethsemane was passed away.
그들은 그 귀한 시간을 졸면서 보냈고 시간은 그만 흐르고 말았습니다.
The waste the precious time by falling asleep, and the time was ended.
이제 실천의 시간 골고다의 길로 자리를 옮겨가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Now the time has come, and they had to move to Golgotha.
물론 그것은 예수님의 시간표였습니다.
Of course it was Jesus' timetable.
그들은 실패를 경험해 본 것입니다.
They experienced failure.
하지만 훗날 그들은 적을 맞아 자신들의 시간표를 따라서 스스로 겟세마네를 찾아 와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Later they will follow their own timetable, face with enemies, and would come to gethsemane and pray.
그리고 그들의 십자가를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They would have to take there own cross.
예수님의 방식은 치고받고 싸우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Jesus’ method was not hitting and fighting.
하나님의 길에는 무릎으로(기도로) 가는 과정이 필수적이었습니다.
It was requirement that they had to walk with their own knee.
당장 급하고 성질이 나고 이 과정을 걸렸다면 그 사람들은 지금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도중입니다.
If people take anger and urgent process without praying then they are going through wrong pass.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Those people are walking without God’s help.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데리고 스스로 죄인에게 팔려가는 길로 가고 계셨습니다.
Now Jesus was going the road that selling himself to the sinner with his disciples.
그 길은 사람들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패배하는 현장이었습니다.
That path was the scene, which cannot be understood by people.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승리가 있습니다.
But, there is God’s victory.
신앙은 결국 사람이 알 수 없는 비밀한 것입니다.
The belief is something secret which this world can not understand.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
46 Rise! Let us go! Here comes my betrayer!”
제자들은 주님과 일어나서 함께 가야만 합니다.
The disciples should walk with Jesus.
다른 길이 아닙니다.
Not the other path.
그 길은 죄인에게 팔리는 길입니다.
The road is where he get be sold to sinners, betrayer.
45절에 이어서 주님의 말씀을 다시 반복되어집니다.
After verse 45, the Lord’s word is repeated again.
자신 스스로 죄인에게 팔려가는 길을 택하셔서 그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It is that he chose to get be sold to sinner and walk on that road.
믿음은 전혀 다른 가치와 전혀 다른 방식을 가지지 않으면 참가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Without having different way and different values, faith is the battle that cannot participate.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턱도 없습니다.
In other word, if you are not reborn by the Holy Spirit it’s impossible.
세상 전쟁의 전혀 반대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It has the form that is opposite to the war in this world.
그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승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People who absolutely obeying the God’s will will experience the victory.
주님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최종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Through the prayer at Gethsemane, Jesus achieved the vi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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