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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도자기가 기원전 4-5천년 이전의 중국대륙의 도자기보다 뒤진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 “소전(少典)의 비(妃)는 안등(安登)이니, 화양(華陽)에 유(遊)할쎄, 「예기」 <제법정의>에 이르기를 여산(厲山)씨는 염제라&중동지역이나 이집트의 도자기가 기원전 4-5천년 이전의 중국대륙의 도자기보다 뒤진다
신농씨의 문화는 서량지도 <전설가운데의 신농씨>라는 제하로 방대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농과 복희는 어떤 면에서 우리 민족과 중국 민족의 분기를 이루는 부분이므로 지면을 할애해 독자들에게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의문에 가득 차 있는 신비의 상고세계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이미 산발적으로 앞서 설명한 것을 다시 한번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왕세기」에 염제 신농씨는 강(姜)씨 성이라 했다. 어머니는 임사(任姒)이니 유교(有蟜:벌레 충 교, 오랑캐 교)씨 여등(女登)이 부친 소전(少典)의 비(妃)가 되었다. 화양(華陽)에서 노니는데 신룡의 머리가 있어 이에 감응해 염제를 낳으니 인신우수(人身牛首)로 강수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 “소전(少典)의 비(妃)는 안등(安登)이니, 화양(華陽)에 유(遊)할쎄, 신룡의 머리가 있어 상양(常羊)에 감응하여 신자(神子)를 낳았으며, 인면용안(人面龍顔)으로 밭가는 것을 좋아했으니 곧 신농(神農)이다”고 했다.
「일주서(逸周書)」<고덕편(考德篇)>에 “작도야근부(作陶冶斤釜), 위뢰사누(爲耒耜耨: 쟁기 뢰, 보습 사, 김맬 누.)라 하여 도자기를 만들고 도끼, 가마를 야금해 농기구를 만들었다 했고,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신농이 밭갈고 도자기를 만들었다(神農耕而作陶)“라 했고, 「광운(廣韻)」에 ”신농이 와기를 만들었다(神農作瓦器)“라 했고, 「물원(物原)」에 ”신농이 옹기를 만들었다(神農作甕)“고 했다.
「감주(紺珠)」에 항아리, 두레박 모두 신농이 만든 것이라 했다. 「월절서(越絶書)」에 헌원, 신농, 혁서(赫胥) 시절에 돌로 병기를 삼았고 수목을 잘라 궁실을 만들었다고 했다.
「오월춘추」<구천음모외전>에 신농, 황제가 현목(弦木)이라는 활시위 나무로 활을 만들고, 염목(剡木)이라는 날카로운 나무로 화살을 만든다고 했다. 「관자」<경중무>편에 신농이 기산의 양지에 오곡을 심어 경작하니 9주의 백성이 곡식을 알게되어 천하가 곡식을 경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국어」 노어(魯語)에 옛날 열산(烈山)씨의 천하가 있어 그 아들이름을 주(柱)라 했는데 능히 온갖 곡식과 채소를 경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왕세기」에 이르기를 신농씨가 본래 열산(烈山)에서 일어났다고 하고, 염제(炎帝)를 괴외(魁隗)씨, 연산(連山)씨, 열산(列山)씨라 했다고 한다. 「예기」 <제법정의>에 이르기를 여산(厲山)씨는 염제라, 여산(厲山)에서 일어났으니 혹자는 열산(烈山)씨가 있었다고 말한다.
열산(烈山), 열산(列山), 연산(連山), 여산(厲山) 또 혹 음이 근사치에 가깝고 글자형이 여산(麗山), 중산(重山)으로 잘못 쓰여지니 이로 인해 「괄지지」에 여산(厲山)이 언급되어 곧 지금의 호북 수현(隨縣) 북쪽이라는 설을 담고 있으니 수산(隨山)씨가 지어낸 글이다.
여기서 잠시 도자기(陶磁器)에 대한 재미있는 단상(斷想)을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필자는 88년에 모종의 자료를 얻기 위해 구 경복궁 국립박물관에 가서 세계의 도자기를 보고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결론만 요약하면 중동지역이나 이집트의 도자기가 기원전 4-5천년 이전의 중국대륙의 도자기보다 뒤진다는 사실과 심지어 이태리 등 서양의 15,6세기 도자기, 접시 마저 중국의 도자기(알고 보면 한민족 조상 것)보다 훨씬 조잡하고 뒤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 도자기의 역사를 알면서 이것이 우리 한겨레의 상고사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도자기의 뿌리를 캐면 한민족의 역사가 밝혀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려청자의 기원이 양자강 절강성 근처의 경덕진 등에 있다 함은 바로 이 곳이 상고시절 묘요(苗猺)계, 백월(百越)계 등의 동이부족이 살았던 것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던가. 고려청자의 기원이 월도요(越陶窯)로 자리잡고 있음이 바로 그 증거다.
또 그보다 거슬러 올라가면 앞서 말한 바대로 바로 신농의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신농이 밭 갈고 도자기를 만들었다(神農耕而作陶)“라 했고, 「광운(廣韻)」에 ”신농이 와기를 만들었다(神農作瓦器)“라 했고, 「물원(物原)」에 ”신농이 옹기를 만들었다(神農作甕)“고 한 기록이다.
그 뒤로도 바로 동이겨레의 혈통을 가진 순 임금이 하빈에서 질그릇을 빚어 도자기를 만든 사실을 보아도 그 유장한 역사를 알 수 있다. 이집트나 중동 심지어 서양의 도자기가 중국의 도자기보다 수천 년 이상 뒤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도자기 기술의 발상지가 중원대륙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동이겨레가 주도한 대륙의 도자기 제조기술은 수 천 도 이상을 가열할 수 있는 도가니(窯)와 고열처리에 적합한 유약을 사용한 점이 저열 처리로 도자기를 쉽게 만드는 이집트, 중동, 서양의 그것과는 질적인 면에서 크게 차별화되었던 것이다.
도자기는 무어냐 하면 쉽게 말해 밥그릇과 술병이라 간단히 보면 좋다. 이것이 좀 더 발전하면서 다양한 기능적인 제품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도자기는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역사발자취를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이다.
브리타니카 사전적 정의를 보면, ‘점토를 원료로 하여 형태를 만든 후 가열하여 소결(燒結)시킨 공예품’이라 간단히 정의되어 나온다. 이를 구체적으로 풀어놓으면 다음과 같다. 이 부분은 양이 좀 많지만 그냥 대국을 개관하기 위해 참고자료 정도로 참조했으면 한다.
-주성분은 골재(骨材:규소, SiO2)와 융재(瀜材:Al2O3, NaO, K2O)로 구성된 규소화합물로서 화학적 성질이 강하다. 생산단계에서 고온으로 가열하는 가마를 사용하므로 유리공예․칠보공예와 함께 요업공예(窯業工藝)라고도 한다. 재질에 따라 토기(土器 clayware)․도기(陶器 earthernware)․석기(石器 stoneware)․자기(磁器 porcelain)로 분류하며, 기능적으로는 생활용기․위생용기․건축재료 등으로 나누어진다. 또 근대 이후에는 금속을 대체하는 신소재로 개발되고 있으며 미술의 표현 매체로도 기능이 확대되고 있다.
토기가 처음 제작된 것은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BC 8000년경부터로 보고 있다. 토기 발생이 갖는 의의는 인류가 자연물을 그대로 가공하여 생활이기(利器)로 만드는 단계로부터 자연물을 혼합하여 가열함으로써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창조적 단계로 전환시켰던 데에 있다. 더 단단하고 쓰기 편한 도기․석기(경질도기)로의 발전은 고온을 유지시키는 가마를 발달하게 했고, 청동․철의 제련과 주조기술을 발명하는 계기도 되었다.
일반적으로 도자기는 태토층(胎土層)과 표면에 씌워진 얇은 유리 질막인 유약층(釉藥層)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 토기를 만들 때에는 태토 만으로 성형하여 구웠기 때문에 표면이 거칠고 물이 스며들어 사용에 불편했으므로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유약의 개발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유약의 발명은 매끄럽고 물이 스며들지 않는 편리한 그릇의 제작을 가능하게 했으나 유약이 발명되기 시작하는 청동기시대부터 세계의 도자기문화는 크게 양분되어갔다.
즉, 저화도(低火度) 유약을 채택한 서아시아․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근동지역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인 고화도(高火度) 도자공예의 제작에 도달하지 못하고 유리공예․금속공예가 발전해온 반면 처음부터 고화도 유약을 채택했던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고화도 자기인 청자․백자를 제작하여 유리나 금속공예보다 도자공예가 크게 성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동․서양은 각각 다른 도자문화를 형성하게 되었고 도자공예의 기능과 역할도 각각 다르게 발전했다.
먼저 저화도 유약(매용제로 납을 사용해 인체에 유해함)을 채택한 근동지역은 사람이 직접 사용하지 않는 관상용의 장식품이나 건축자재들을 주로 만들었지만 고화도 유약을 쓰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식기나 실용공예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도자기가 생활문화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이러한 결과는 근동지역의 도자문화가 장식적이며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는 감상적 쾌락을 위한 것으로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고 그 반면 동아시아 지역의 도자문화는 그의 재질적 특성으로 인간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실용적 공예로 발전하게 되었다.
허난 성[河南省]과 간쑤 성[甘肅省]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채색 토기의 연마된 표면은 흑색․적색․적갈색․갈색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직경이 넓은 발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그 외에 다리가 3개 달린 큰 솥 모양의 정(鼎), 소 젖통 모양의 다리가 달린 가(斝)와 역(鬲), 길고 넓은 대(臺)가 놓여 있는 두(豆)가 있는데 이러한 조형은 청동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BC 1400년에 백도(白陶)라는 혁신적인 토기가 제작되었는데 그 기형과 장식은 당시에 유행했던 의식용 청동기와 매우 유사하다. 유약은 주대(周代) 후기에 처음 나타나 한대(漢代)에 그 질이 현저히 향상되었다. 즉 한대에는 시유된 경질도기의 전통이 확립되고 북쪽의 저장[浙江]이 주요 제작지로 부상했다. 형태는 신정(神亭:뼈항아리[骨壺]의 일종으로 윗부분에 인물이나 누각을 얹어 장식한 것)이나 농장에서부터 단순한 돼지우리, 조리용기, 남녀와 동물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6조시대(六朝時代)에는 태토의 질이 점차 향상되고 유약도 장석유약에 가깝게 발전하여 질적으로 청자에 한 발 다가서고 초보적인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당대에는 반투명한 자기가 제작되고 8세기 전반에는 매우 화려한 당삼채(唐三彩)가 다량으로 제작되었다. 청색․녹색․갈색․황색․오렌지색을 섞어 채색한 당삼채는 껴묻거리[副葬品]인 도용(陶俑)과 실용기로 구분된다. 도용들은 생동감과 위엄이 넘치면서도 개개의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중에서도 당삼채가 사라지는 756년 안녹산의 난 직전의 것들이 가장 묵중하고 건강하게 표현되었다
. 단색유약이나 다채(多彩) 유약이 입혀진 항아리․주전자․주발․잔(盞)․접시 같은 그릇들은 그 장식에서 이국적인 요소를 보여줄 뿐 아니라 외국 금속용기의 형태를 토대로 한 것도 있어 주목된다. 또한 색상이 다른 2가지 태토를 자유롭게 또는 규칙적으로 혼합한 연리문(練理紋) 도자기도 나타난다.
송대(宋代:960~1297)의 여러 도요지에서는 장석질 유약으로써 세련되고 단순한 형태의 청자와 백자가 제작되었다. 정요(定窯)에서는 백자가 주로 생산되었는데 태토가 매우 희고 경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며, 유약은 상아색을 띠고 시유된 표면이 매끄럽다. 이 가마에서는 주로 발․세반(洗盤)․반(盤)․접시 같은 실용기들이 제작되었다. 정요 도자기의 결점은 엎어놓고 구우므로 구연부(口緣部)에 유약이 없기 때문에 매우 얇은 동이나 은을 그릇에 맞게 잘라 소성 후에 구연부에 씌운 것이다.
청자요지로 북방에는 요주요(耀州窯)․린루요(臨汝窯)․균요(鈞窯), 남방에는 룽취안요(龍泉窯)․관요(官窯)가 있었다. 요주와 린루요의 기본적인 자기유약은 황록색 또는 갈록색의 투명유약이며, 실용적인 기형에 주로 대담한 당초무늬와 목단(牡丹)을 새기거나 압인했다. 균요의 청자는 유약에 혼합된 소량의 산화철이 환원되면서 발색하므로 소성온도와 속도에 따라 표면의 질감과 색상의 변화가 다양하다.
12세기초 동을 사용하면서 동의 양이 과다해 생겨난 산화작용으로 인해 표면에 이끼 같은 녹색의 작은 결정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균요자기에 매력을 더해 주었다. 역시 발․반․접시 같은 실용기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14세기에는 묵직한 화반, 수반, 향로, 커다란 세반 등도 제작되었다. 저장 성[折江省]의 룽취안요는 송의 대표적인 청자요로 태토가 정선되고 종류가 다양해졌으며 흰색을 띤 것을 제외하고 유약이 칠해지지 않은 굽의 드러난 부분은 타서 밝은 적갈색을 띠었는데, 이것은 남방청자와 북방청자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다.
가마의 구조는 도염식(倒炎式)이었으며, 기형이 단순하고 균형이 잘 잡힌 발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청동기의 영향을 받아 삼족의 격․궤․존(尊:술그릇)․과(:술잔) 같은 것도 있었으며, 수출용은 외국인의 취향에 맞도록 제작되었고 가마가 가장 번영했던 13세기말부터 대량생산되었다. 관요는 송 왕실에서 북방의 린루요를 대신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궁중용 기물을 제작했다.
유약은 옅은 녹색에서 연보랏빛을 띤 청색에 이르는 청자유약이 사용되었다. 소성할 때 자연적으로 생긴 자기의 기면 균열을 나중에는 도공들이 장식효과로 사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빙열(氷裂)을 유도해냈다. 푸젠 성[福建省]의 건요(建窯)에서는 짙은 갈색과 검은색의 다완(茶)이 제작되었는데 이들은 소위 유적천목(油滴天目)과 흑유자기의 유약을 변화시켜 토끼털과 같은 문양 효과를 낸 토끼털 천목우로 유명하다.
허베이 성[河北省]의 츠저우 요[磁州窯]에서는 술병과 자기로 된 베개가 많이 생산되었으며, 장식은 갈색 또는 흙색의 하회장식이고 모티프는 꽃이 많다. 이 장식법은 소지에 어두운 색의 이장을 칠한 다음에 이것을 긁어서 문양을 나타내는 것인데 한국의 박지분청기법과 같다. 송의 도자기에서 또 1가지 중요한 것은 영청(影靑)이다. 이는 백색 소지에 푸른기가 도는 유약을 시유한 것으로 이것은 장시 성[江西省]과 후베이 성[湖北省]에서 구워졌는데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이집트의 카이로에서도 발견되었다.
원(元:1206~1368)의 도예 중심지는 징더전[景德鎭]이고 이때 가장 중요한 성과는 중국도예에 혁명적인 효과를 가져온 반투명 자기를 처음 만든 것이다. 또한 이미 9세기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중동으로부터 하회의 코발트 청색 안료가 도입되어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생산되었다. 청화백자는 해외수출용과 내수용으로 제작되었는데, 해외수출용은 전통적인 중국 도자기와는 전혀 다르고 이슬람 금속공예의 장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형태는 접시․반․발들과 같이 구연부가 열려진 형태와 매병(梅甁)․주전자처럼 구연부가 닫혀진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는 일본․인도차이나․페르시아에서 모방되었고 델프트와 그밖의 유럽 도자기에 영향을 미쳤다. 내수용은 수출용의 육중한 그릇에 비해 매우 작아서 높이가 26cm를 넘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제단용 병과 3발이 달린 소반 등이 있다. 명대(明代:1368~1644)의 주요요지도 역시 경덕진으로 이곳에 관요가 설치되어 청화백자가 다량으로 생산되었고 다채색의 백자도 생산되었다.
코발트는 16세기말까지 거의 페르시아에서 수입하여 사용했다. 도자예술이 특히 발전했던 선덕연간(宣德年間:1425~35)에 제작된 청화백자의 특징은 강한 청색, 힘차게 조절된 선, 전면에 비례하여 조화를 이룬 문양이다. 이들은 근동으로부터 들어오는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훨씬 더 중국의 전통에 부합되게 도자기를 제작하여 외국의 기형이나 장식과 더욱 뚜렷하게 대조되었다. 성화연간(成化年間:1465~87)의 청화백자는 선덕연간의 청화백자에 나타난 코발트 안료의 농축되고 집약된 효과가 매우 고르게 입혀진 회청색으로 바뀌었고, 비교적 섬세하여 자신감이 없는 ' 궁정완'(宮廷)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나타난다. 또한 청화백자에 시유한 백색 바탕에 노란 에나멜로 문양을 채색하는 청화황채(靑華黃彩)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기법은 홍치연간(弘治年間:1488~1503)과 정덕연간(正德年間:1506~21)에 가장 유행했고 가정연간(嘉靖年間:1522~66)까지 계속되었다. 백자에 5가지 색의 유약으로 그린 오채기(五彩器)가 제작되었는데 정덕연간의 오채는 형태와 장식의 순수함에서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정덕연간에는 이슬람 궁정에서 파견된 환관들이 그곳으로 수출될 청화백자의 문양을 감독하기도 했으며, 이중에는 S자형의 꽃을 그린 모하메트 소용돌이 장식이 눈에 띤다.
이슬람교도인 환관들 사이에서 애용되었던 마호메트 요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으며, 종류는 대부분 필통․등잔․상자 같은 문구들인데 이들은 페르시아나 아랍 문자들로 장식되었다. 가정연간에는 백자소지의 타락이 현저해지며, 산화철적색(토마토 적색) 바탕에 금색으로 시유한 발이 나타난다. 용을 음각한 위에 황색유약을 시유한 것도 있다.
융경연간(隆慶年間:1567~72)과 만력연간(萬曆年間:1567~1620)에는 녹․황․자․철홍색을 시유한 기물과 만력오채 그리고 다량의 청화백자가 수출용으로 제작되었지만 궁중에서 사용된 도자기들은 가정연간의 것과 거의 비슷했으며 대량생산과 궁중의 엄격한 요구, 경덕진의 질좋은 점토층의 고갈 등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품질이 떨어졌다.
청대(靑代:1644~1912)에도 많은 도자기가 유럽으로 수출되었는데 수출용 도자기는 내수용과 구분되어 생산되었다. 재료를 정선하고 제작을 통제해 정교하게 마무리되었으나 명나라의 도자기에 비해 생동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강희연간의 도자기는 형태․표면․색상 등에 있어서 송대 도자기의 세련미를 재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중국과 서양에서 가장 아낌을 받았다.
특히 명나라 영락연간(永樂年間:1403~24)에 유행한 난각(卵殼) 자기인 완을 모방한 것은 원품보다 완벽할 정도이다.
강희 말기부터 징더전의 채색자기에 서양적인 취향이 점차 증대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고월헌(古月軒)이라는 양채(洋彩) 에나멜 도기에서 가장 현저하다. 장식이 유럽 풍경이거나 중국 꽃이라 하더라도 사실적인 묘사나 명암법, 원근법 등 서양의 특징을 보여준다.
강희제 때 청화백자의 소지는 뛰어난 백색으로 유명하며, 문양과 그림은 명나라 때의 것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고 투각한 도자기가 옥공예품의 영향을 받아 부흥되기도 했다.
유약은 동적색이 단색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연분홍, 녹색, 망간흑색, 황색, 금박 등이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녹색은 후기에 출현한 것이며 터키옥색도 나중에 나타난 것이다. 한편 유럽 도자기도 중국에 영향을 주었는데 유럽 상인들의 취향에 따라 문장이 그려지고, 초기 마이센 도자기가 중국에 들어오기도 했다. 징더전에서 제작된 순백자는 유럽으로 수출되어 독일․네덜란드․영국에서 장식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반면, 서양 고대의 도자기 역사를 스케치하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초반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과 차탈휘위크에서 신석기시대의 부락이 발굴되면서 BC 9000년경에 이미 거친 연질토기(軟質土器)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BC 6500년경에는 경질토기가, BC 3000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물레성형 장식도기가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 도기의 표면은 밝은 바탕에 어두운 색상으로 기하학적 문양, 물새, 달리는 개 등이 그려져 있다. 이후 바빌론 등지에서 최초로 시유되어 소성된 점토벽돌 패널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주석유약이나 납유약에 구리를 넣어 파란색을 낸 것이었다.
이집트의 도기는 아주 다양한데 초기에는 붉은 소지에 백색 이장으로 기하학적인 문양, 도안화된 동물, 풍경 등을 그린 것이 특징이고, 26왕조(BC 664~525) 이후에는 그리스에서 점토를 수입하기도 했으며 점토인물상 제작에서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제1왕조 때 이미 터키옥색과 푸른색의 동유약이 시유되었으며 나중에는 동․코발트․망간을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에 사용하기도 했다. 에게 해의 도자 중심지는 크레타였으며, 초기(BC 3000~2000)에는 물대가 높이 달린 잔과 물대가 길게 달린 주전자 같은 항아리가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기하학적 문양이 주로 그려졌다. 중기에는 어두운 바탕색에 적색과 백색으로 식물이나 해양생물을 장식한 것이 많았는데, 후기에는 이것이 양식화된 형태로 변했다.
BC 550년경까지 그리스 도자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는 흑회식(黑灰式) 도기와 적회식(赤灰式) 도기가 제작되었다. 흑회식 도기는 붉은색 바탕 위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고, 적회식 도기는 그 반대이다. 그림의 소재로는 신화와 영웅에 대한 전설이 많으며 뒤에는 일상생활 장면도 등장한다. 6세기에는 도기에 사인[署名]을 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도공과 화공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있고, 한쪽만 있는 것도 있어서 양자의 직능이 구분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BC 4세기말 흑회식 도기와 적회식 도기는 아테네에서 더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BC 8세기에 에트루리아에서는 부케로라고 하는 환원염소성의 흑색 토기가 제작되었고, BC 6세기경에는 부조․음각․거푸집(몰드)기법 등으로 새와 동물들을 기물에 장식했으며,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흑회식 도기와 적회식 도기가 제작되었다.
BC 1세기 로마 제국은 아레초 도기라고 불리는 적색마연도기가 주류를 이룬다. 성형에는 일반적으로 거푸집을 사용했으며 부조장식을 한 경우도 많다. 이 장식법은 테라 시길라타(terra sigillata:디자인을 압인한 소지)라고 불렸는데 금속공예기법에서 따온 것이다. BC 1세기에는 이집트와 근동에서 납유약 기법이 도입되어 동을 사용한 푸른색의 유약이 부조장식에 시유되었으며, 이 기법은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까지 전파되었다. 또다른 로마 도기로는 누런색이나 검은회색이 나는 등잔과 그리스도교적인 모티프로 장식된 것도 있다.
서양 중세 도자기 역사
시리아․이집트․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아나톨리아의 이슬람 도기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 질에 있어서 극동의 것에 비교될 만큼 뛰어났으며, 유럽 도기의 발전에 중국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이슬람 도기는 초기(AD 661~750)에도 바빌론과 시리아의 영향, 그리스․로마의 자연주의적 장식기법의 영향을 받아 훌륭한 도기를 제작했다. 그러나 중국 것과는 달리 형태와 재질감보다는 풍부한 색상과 장식에 더 중점을 두었고, 장식문양도 종교적 이유로 동물보다는 꽃이나 식물잎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슬람 도공들은 9세기에 주석유약을 재발견하고, 귀금속 용기를 모방하기 위해 도기 표면에 주로 사용하는 광택유약을 발명해냈는데 이것이 도기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주석유약은 중동 도자의 특징으로 나중에 스페인과 이탈리아 전유럽으로 전파되어 마욜리카․파이앙스․델프트 도자기로 발전했다. 11~15세기에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서는 미나이 채색기법과 일종의 스그라피토 장식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중 미나이 기법은 1차로 고온소성을 한 후에 저화도에서 발색하는 여러 가지 색유를 시유하여 다시 굽는 것으로 주로 청색․터키옥색․자주색․빨강색․초록색․백색․금색을 낸다. 또한 테헤란 근처의 레이에서 사용되었던 실루엣 장식법은 검은색이나 흑청색 이장을 몸체에 칠하고 원하는 그림이나 문양을 긁어서 그린 다음 그위에 투명유약이나 동이 들어있는 터키옥색의 유약을 시유한 것이다. 카샨은 광택유약을 칠한 타일 생산으로 유명한데 이 타일은 모스크나 공공건물의 벽에 사용되었다.
13~14세기의 카샨타일은 세련된 기술, 밝은 색상, 복잡한 디자인이 특징이고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는 중앙아시아가 몽고의 지배를 받는 동안 중국과의 교역이 증대되면서 특히 명의 청화백자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4세기부터는 중국의 청자를 모방하지만 뛰어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뒤에는 청나라의 연채(軟彩) 자기를 모방해 제작했다.
13세기 터키에서 관심을 끄는 도자기는 아나톨리아에서 만들어진 시유된 건축용 타일과 벽돌인데, 이것은 모스크를 장식하는데 사용되었다. 터키 도자기는 15세기까지 명의 청화백자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페르시아 디자인을 답습했으며 오스만 세력의 확장과 함께 전성기를 맞는다. 터키의 이즈니크에 세워진 도자공장에서 가장 널리 제작된 형태는 평평한 접시, 컵, 굽달린 접시, 발[鉢] 등이다.
장식 모티프로는 꽃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사용자의 종교적인 면에 맞추어 양식화된 형태로 무늬가 그려졌다. 또한 물고기 비늘 모양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이탈리아의 마욜리카, 베를린의 자기, 영국의 우스터 도자기에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전까지 제작된 유럽 도자기는 납유약 도기, 주석유약도기, 석기, 연질자기, 경질자기, 본차이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납유약 도기는 중세부터 외부의 영향없이 만들어졌는데 황색․갈색․자주색․녹색유 등의 유약이 사용되었고, 힘있는 형태였으나 끝마무리가 거친 경우가 많았다. 이 유약은 15세기말 주석유약이 널리 보급되면서 쇠퇴했다. 최초의 주석유약 도자기는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는 프랑스․독일․네덜란드․영국․스칸디나비아로 확산되어 영국 웨지우드의 크림웨어가 출현할 때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석기는 16세기 독일에서 널리 제작되었으며, 18세기 영국에서 발전하여 웨지우드의 장식이 풍부한 재스퍼 도자기와 배솔트 도자기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연질자기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메디치의 후원으로 제작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17세기말 프랑스에서 대량생산되기 전까지는 소량밖에 생산되지 못했다. 경질자기는 작센에서 에렌프리트 발터가 시작했는데 그의 조수인 요한 F. 뵈트거가 이어받아 1710년 마이센에 공장을 세우고 대량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18세기말 조사이어 스포드 2세가 자기에 골회를 첨가하여 본차이나를 만들었다.
스페인의 도기는 광택유약 도기와 주석유약 도기의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광택유약기법은 이집트를 통해 스페인 무어인에게 전달되었는데 흙은 조야(粗野)하고 소성하면 붉은색이 도는 누런색이 된다. 금색․황색․동광택 유약이 있으며 파란색으로 덧칠한 접시도 많다. 장식은 무어 디자인을 반복한 것이 많은데 점차 퇴보했다. 초기 디자인 무늬는 대부분 식물 형태와 아라베스크였으나, 뒤에는 문장에 나타나는 사자나 독수리 같은 동물과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사슴․영양 등이 등장했다.
양질의 주석유약도기는 17~18세기에 탈라베라에서 만들어졌고, 녹색․황색․주홍색․회색 등을 띠었다. 이탈리아 도자기도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주석유약도기(마욜리카)와 스그라피토 기법으로 장식된 것이다. 마욜리카 주석유약도기는 13세기 마욜리카 상인들에 의해 중동으로부터 남부 스페인의 이슬람 문화에 소개된 것이다. 마욜리카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스페인 무어인의 광택도기에만 적용되었으나 16세기에는 모든 주석유약도기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
이 기법은 주석유약을 시유한 후 몇 가지 색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소성하는 것인데 가장 좋은 도기에는 코페르타라고 불리는 투명납유약으로 시유했다. 색상은 코발트 청색, 동록색, 망간 자주색, 타티모니 황색, 철홍색, 주석백색으로 제한되었다. 마욜리카 도기 형태는 그림을 그리기 쉬운 접시 같은 간단한 형태가 대부분이지만 약품 항아리나 물대가 달린 항아리도 있다. 장식문양으로는 참나무잎과 문장용 동물이 사용되었으며, 고딕풍 장식이 유행한 후에는 고전적 모티프가 등장한다.
스그라피토 도자기는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다. 이 기법은 한국의 분청 가운데 박지분청(剝地粉靑) 기법과 유사하다. 스그라피토는 비잔틴에서 시작되어 키프러스를 통해 북부 이탈리아로 전해져 발전되었는데 볼로냐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었다. 연질자기는 메디치가 시대에 피렌체에서 만들어졌으며, 경질자기는 1720년 베니스에 공장이 세워지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후 여러 곳에서 바로크 양식의 문양이나 문장이 그려진 상품이 생산되었다.
프랑스의 중세 도기는 정확하게 분류하기 어렵지만 13세기에는 납유약이 사용되었고 스그라피토 장식도 등장했다. 베르나르 팔리시는 1548년 납유약을 시유한 전원풍의 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생산품은 대부분 큰 접시였고, 시내․도마뱀․곤충․잠자리 등의 문양을 청색․녹색․자주색․갈색 등으로 그렸다. 뒤에 그는 고전적 소재와 성서적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부조기법으로 장식했다.
또한 동시대에 생포르셰르에서 한국의 인화분청과 같은 기법의 우아롱파이앙스가 만들어졌다. 파이앙스는 16세기초 이탈리아 마욜리카 도기기법과 다자인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 발전된 것이다. 17세기 후반에는 중국의 자기가 유럽에 널리 알려지면서 점차 중국의 디자인을 모방하게 되었다. 루이 14세 때 스페인 전쟁의 부담금으로 은이 사용되자 귀족들이 은그릇 대신 파이앙스를 사용하게 되었다.
1740년 상회유약기법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1670년대에 세워진 생클루 공장에서 연질자기가 생산된 이래 1770년 세브르에서 경질자기가 생산될 때까지 프랑스에서는 여러 가지 장식기법과 외국의 디자인을 모방해 연질자기를 생산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자기공장은 1738년 뱅센에 세워졌다가 1756년 세브르로 옮긴 공장인데, 이 공장의 주식을 루이 15세가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759년 왕립 칭호를 받고 1793년 국가재산으로 귀속되었다. 1800년 연질자기 생산이 중단되었고, 17세기 후반에는 주로 파리 근처의 작은 공장에서 경질자기가 생산되었다.
독일에서는 석기와 주석유약 석기가 발전했다. 석기는 라인란트에서 시작되었는데 아주 견고하고 색상은 백색부터 회청색까지 다양하며, 유약은 소금유약을 사용했다. 장식은 정교한 고딕 양식 부조에 성서의 내용이 모티프가 되었으며, 17세기말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독일 석기는 해외에서 명성을 얻어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 마이센에서도 석기를 만들었으나 자기가 유행하자 1730년경에는 석기의 제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파이앙스 공장의 수는 많았는데 처음에는 주석유약 도자기로 난로용 타일과 큰 잔을 만들었고, 뉘른베르크에서 대량생산되었다.
장식은 중국적인 모티프와 문장․경치․성서적인 소재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푸른색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파이앙스와 자기장식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공방화가의 작업이다. 이들은 공장에서 장식을 하지 않은 기물을 공방으로 가져와 그림을 그리고 이곳에서 머플 가마를 사용해 소량으로 소성했다. 마이센의 공장에서 제작된 초기의 경질자기는 깨끗하지 않았으나 1715년 이후 10년간에 걸쳐 많이 개선되었으며 어려운 청색 하회유약 장식보다는 상회유약 장식이 발전했다. 그림은 지형적인 모티프, 이탈리아 희극인물, 꽃, 항구풍경 등이 그려졌고 초기에는 중국풍의 다양한 용기와 인물상도 많이 만들어졌다.
네덜란드에서는 16세기에 이탈리아풍의 마욜리카가 유행했고, 17세기에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다량으로 수입되면서 중국의 청화백자를 모방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또한 당시 네덜란드의 회화와 유사한 양식의 그림도 많이 그려졌다. 17세기초 이후에는 델프트에서 주석유약 도자기가 다량으로 생산되었으며 타일도 그 유품이 많이 남아 있다. 영국의 중세 도자기는 무유(無釉) 도자기가 일반적이었으나 프랑스를 통해 납유약기법이 도입되면서 13세기 이후에는 산화동을 사용해 녹색유약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때 제작된 것은 큰 잔과 액체를 저장하기 위한 실용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주석유약 도자기는 1550년경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와 런던 근처에서 제작되었지만 1628년 이후에는 여러 곳에서 만들어졌다. 중국 도자기는 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18세기초 브리스틀에서 두드러졌다. 주석유약은 18세기말경 웨지우드의 크림웨어가 나타나면서 퇴조했다. 라인란트와 중국 석기가 들어오면서 이를 모방하기 시작했고, 인화(印花) 장식에 갈색유약을 사용했는데 1690년경에는 이 갈색유약 대신 소금유약을 사용했고 여기에 광명단(光明丹)을 넣어 광택을 더욱 증가시켰다.
1730년대부터는 거푸집으로 양각의 문양을 시문하는 것이 유행했으며, 거푸집은 금속, 나무, 초벌구이한 점토 등과 같은 재료로 만들었다. 1745년경 석고로 뜬 거푸집이 소개되면서 문양이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며 다양해졌다. 1755년경 리버풀에서 전사기법이 처음 사용된 후 타일 및 모든 종류의 도자기에 이용되었다. 스태퍼드셔의 토머스 휠던은 아게이트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상이한 색상의 점토나 이장을 결합시켜 만든 것이다.
유약은 초기에 소금유약을 사용했으며, 후기에는 무색의 납유약을 사용했다. 조사이어 웨지우드는 도예분야에서 신고전주의의 주창자로 재스퍼 석기, 1768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흑색자기라 불리는 배솔트 석기, 크림 등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영국과 외국의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게 인기를 끌었다. 배솔트 이후 1775년경 재스퍼가 제작되었는데 주로 화병․물병․촛대․장식판․메달 등과 같은 장식품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무유의 석기로서 얇게 성형해서 높은 온도에 구우면 반투명해지며 세브르 자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색상은 청색․녹색․라일락색․황색․흑색이 있고, 배솔트처럼 주로 장식도자기로 사용되었다. 1743년 런던에 연질자기 공장이 세워져서 동물 형상의 큰 잔과 인물상이 만들어졌고, 1772년 경질자기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1750년 보에서 자기소지에 골회를 넣으면서 그동안 점토에 유리가루를 넣어 만든 프랑스 연질자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영국만의 독특한 본차이나를 만들게 되었다. 조사이어 스포드 2세는 경질자기 소지에 골회를 첨가시켜 영국의 표준격인 본차이나를 만들었다.
반면 한국 도자기 역사의 바탕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처음 토기가 발생한 때는 근동지역과 중국보다는 조금 늦은 BC 6000년경이다. 당시 한국의 토기는 근동․중국의 채문 토기문화권과 계통이 다른 빗살무늬토기[櫛紋土器]로서 남부 시베리아에서 발생하여 동쪽으로는 만주․한반도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 독일까지 분포하는 각문 토기(刻文土器) 문화권에 포함된다. 청동기시대(BC 1000)에 와서 중국 도자의 영향이 일부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것은 철기문화의 수용과 함께 들어온 춘추․전국시대의 재유약 도기기술이 전래된 이후부터이다.
이것은 윤적법(輪積法)과 타날법(打捺法)을 함께 사용하여 성형하고 고화도(1,100℃)에서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내는 새로운 기술로서 그 이전에 윤적법 성형과 산화염․중성염․소성법보다 발전된 기술이다. 새로운 기술의 전래로 고화도의 환원염 경질도기 제작이 가능해지면서 질도 다양해져 도자공예가 일상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재료의 공예보다 점차 높아졌다.
삼국시대에는 경질도기의 제작법이 일반화되고 말기에는 근동의 저화도 납유약기법이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으며 고화도의 재유약도 일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도자에서 고화도 유약을 씌운 청자를 만든 때는 남북조시대 후기인 9세기경이다. 청자는 오랜 고화도 경질도기의 기술적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 도자문화의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청자에 이어 백자를 만들고 11~12세기에는 중국의 청자보다 뛰어나서 당시 중국인들까지 '천하제일'이라고 동경했던 비색(翡色) 청자를 제작했다. 장식기법에서도 독창적인 상감기법을 개발하고 산화동으로 장식하여 환원염에 의한 붉은색을 최초로 내는 등 고려인의 독창성은 세계도자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청자는 14․15세기를 지나면서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모하여 분청사기라는 특별한 조형의 자기로 전환되었다.
분청사기는 청자의 제작기술과 조형적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된 것으로 태토나 유약은 청자와 유사하지만 형태와 장식 등은 청자와 달라서 청자가 귀족적 취향의 섬세한 조형이라면 분청은 서민적 취향의 소박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청은 16세기 후반 백자기술이 보편화되고 실용성이 부각됨에 따라 질이 떨어졌고 자체 소멸되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백자는 내화도가 높은 고령토로 제작되어서 백자기술이 확대됨에 따라 청자와 분청이 소멸되어갔다. 백자는 이미 고려 초기부터 일부 제작되고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자공예의 중심이 되고 있다. 조선의 백자는 조선사회의 지도적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공예관에 의해 검소․검약을 조형의 원칙으로 삼고 다양한 색채나 사치스러운 장식을 지양하는 간결․단아한 아름다운 조형미를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의 백자는 개화기를 거치면서 산업화된 생산세께를 갖춘 일본 및 자본주의 국가의 산업도자의 유입으로 서서히 쇠퇴하다가 일제시대에 완전히 소멸되었다.britann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