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부두는 배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여기저기 구불텅거리는 장사진은 마치 석쇠 위의 오징어 같았다. 그들은 모두 휴가철 서해로 떠나려는 여행자들이다. 그 벌판에는 단 한 그루의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작열하는 마당에 드리워진 사람들 그림자조차 단번에 불이 붙어 호르르 타버릴 것만 같은 오후다. 땀도 말라붙은 사람들, 코일이 감긴 전열기구의 열판처럼 새빨간 얼굴은 어디선가 뻗쳐 올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쉴 새 없이 두리번거렸다.
그중에서 제일 긴 줄, 덕적도 서포리 항 매표구 앞에 은실과 서윤도 줄 서 있는 중이다. 갑자기 나타나 서해로 그리고 덕적도 서포리로 2박 3일 바캉스를 떠나자고 제안한 것은 여고 때 친구 은실이었다. 딱히 다른 스케줄도 없던 서윤은 그저 떠밀리다시피 인천 연안부두까지 왔으나 어쩐지 살벌하게 느껴지는 풍경에 마음에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줄지어 선 사람들을 앞에서부터 주욱 훑어보는 서윤의 표정이 아까부터 어두워진 것을 은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표정은 밝고 목소리는 새소리처럼 가벼웠다.
들었던 대로 서해는 뱃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겠지. 인천 인근 지역에 있는 산업공단 근로자들이 많을 거야. 아니면 섬사람들이겠지. 표를 사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자꾸 훑어보아도 서윤은 딱히 어떤 해석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노동 현장의 근로자라도 이제 태양을 향해 떠나려는 사람들 같지가 않고 바닷가에서 방금 돌아온 사람들처럼 장사진을 치고 있는 그들은 모조리 마르고 그을리고 심하게 말하면 피폐해 보였다. 어째서일까? 그래도 한 번 휴가철에 휴가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는 정도는 형편이 되는 사람들 아닐까? 자꾸 떴다 사라지는 상념들을 애써 지우며 서윤은 기분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다.
힌 번도 가보지 못했던 섬과 섬들, 그들은 바다에 어떤 모습으로 떠 있을까? 영종도 안면도 용유도 시도 덕적도 도도도...서해에 섬이 많다고는 하나 낯선 이름들이 눈에 띄어 놀랍기도 하고 언젠가 가보리라던 섬들을 상상하며 서윤은 자신의 기분을 애써 달래고 있었다. 정기선이 있는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정기선이 없는 곳으로 떠나려는 사람들까지 몰리자 연안부두는 주변을 서둘러 불도저로 밀고 풀 한 포기 없는 황토밭에 간이 매표구를 설치했던 것이다.
마이카시대가 오는가 했더니 바캉스라는 법정 전염병이 이렇게 빨리 극성하리라고 관계 당국인들 예상했겠는가. 그리하여 명승고적과 이름난 산과 해수욕장은 수년 사이에 여름이면 발 딛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이제는 섬과 섬들이 이미 섬이 아니며 서해고 남해고 섬들은 수용 능력의 턱없는 부족으로 해마다 몸살을 앓는 시대가 왔다.
그리하여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바캉스 특수로 여름 한 철이면 톡톡히 한몫을 잡는 부류도 생긴 것을 부인하진 못하리라. 먼지만 풀풀 날리던 초토화된 전쟁 도시에 눈부신 문명을 이루어내고 있는 악착같은 사람들이다.
장사진은 드디어 매표소를 향해 앞으로 가는 사람만 나타나도 새치기를 경계하는 눈알들이 일제히 불을 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마당을 지나 은실이 주황색 나일론 줄을 걷고 나가 한참 만에 갖고 온 정보는 두 가지다. 오후 2시가 지나야 표를 판다는 것과 줄지은 행렬은 2일 전부터 표 팔 때를 기다려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시간은 더딘 걸음으로 가고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조차 없는 광장에 불볕더위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줄을 찾아 왔을 때부터 졸고 있는 장사진 앞 냉차 장수는 오후가 되어도 여전히 졸고 있었다. 새빨갛게 땀띠 돋은 팔을 냉차 통 위에 얹고서 말이다. 어쩜 몇 시간이 지나도록 냉차를 주문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 그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저 보리물 정말 끓여서 만든 것인지 믿어도 될까? 흔히 여름 한 철을 넘기려면 신문 지상에 반드시 올라가는 머리기사- 식중독, 대장균 기준치 등등, 이런 단어들이 서윤의 머릿속에서 떠돌면서 한 시간이 넘게 냉차를 주문하고 싶다, 와 아니다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사막에서 한 국자의 물은 선사가 아니라 의무이다. 표를 사려는 여행객들은 어쩌다 만난 사막이지만 저 냉차 장수는 날이면 날이 사막일 것이다. 저 냉차 장수에게 오아시스란 몇 푼 되지 않는 냉차 주문이 아니겠는가. 서윤은 생각했다. 자신들의 목마름보다도 냉차 장수의 목마름을 구원해야 한다고. 오백원짜리 땡그렁 한 푼이 작열을 감수하는 장사진보다 냉차 파는 그녀에게 한 모금의 생수일 것이다. 서윤으로부터 주문을 받은 아줌마의 수정체에 순간 불이 확- 켜지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두 아가씨는 후하게 꾹꾹 눌러 주는 냉차를 타들어가는 장기에 숨도 쉬지 않고 부었다. 그리고 삽시에 비운 플라스틱 잔을 그녀에게 건네고 있을 때 여전히 침묵하고 있던 매표구로 사내 하나가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첫댓글 어릴 때 마셨던 그 냉차 맛, 재료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확실히 맛은 있었어요^^
꽤 예민한 편이었는데 배탈 한 번 안 나고 ㅎㅎ
옛 생각 돋네요^^ 잘 읽었습니다~~
네- 보리차 끓인 물에 설탕이 아니고 --뭐더라--그건 넣어서 달착지근하게 만들면 보리의 구수한 맛과 어울려
여름 한 철 --차고 시원하고 꿀맛이었죠.
사내 하나, 기대됩니다.
사내--사내가 나오긴 나오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