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가을문예 1(1996-2004)
#진주가을문예(2004년)
배차계 정씨/김영수
7번이 시내 열기를 가득 달고 돌아옵니다
짤랑거리는 입금 통이 가볍습니다
배차계 정씨는 점심시간을 악착같이 쓰고
일어나 동네 번호판을 바꿔 답니다
반환점이 이번엔 꽃 단지라
향기가 종점까지 묻어올지 의문입니다
견인차에 업혀 돌아온 55번이
정비공장에서 킬킬거리고
사장이 먹다 남은 생수 통을
마당으로 집어 던집니다
기름 밥 먹던 기사들이 연착한 55번처럼
주춤거립니다
''쎄루모타 하고 뿌라그 바까''
그의 발음엔 언제나 자음이 두개씩 달립니다
아니면 입이 싱겁다나요
정씨의 손에는 아직 배차 안 된
나른한 오후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모종 부어 논 꽃 뿌리처럼 무좀이
그의 신발 속에서 꼼지락거립니다
햇빛 노는 마당을 가로질러 가
빈 버스의 재생 타이어를 툭툭 차봅니다
사장 말마따나 아직 빵빵한 구석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신은
55번이 살아 쿠릉거리고
7번은 떠나갑니다
때 절은 목장갑과 욕지거리 몇 마디로
시동걸어 보내야 하는 하루가
지금도 빈 마당에 가득합니다
<심사평/김재홍>
오늘의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도 삶에 관한 넉넉한 시선과 개성적인 표현을 결합함으로써 시적 형상화를 성취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소외된 삶과 세계엣 보다 집둔된 관심을 표출하면서도 그것을 분노나 저항이라는 도식적,기계주의적 민중론에 함몰되지 않고 개성과 건강성으로 이끌어 올리고 있는 것은 앞으로의 가능성도 예감케 해주는 것으로 받아 들여져서 당선작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하였다. 앞으로 상투성이나 도식성에 빠지지 말고 참신성과 서정성을 강화해 나아간다면 특유의 시적 건강성이 더욱 빛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003 진주가을문예>
입동 / 김영미
아버지가 돌와왔다. 쥐색 바라리가 추워 보였다. 늦겨울의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 덕에 집에서는 따뜻한 밥냄새가 났다. 콩비지에 돼지고기를 넣은 어머니의 입가에선 실실바람이 흘러나왔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그저 추워지면 집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밥심 가득 비지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궁금했지만 아버지는 말없이 뜬내만 풍기고 있었다. 인제 김장도 담아야 할 텐데. 묵묵한 숟가락질. 사람이 무정하기는 연락도 없이. 노라리도 아니고 애기 몇 살인데. 끙, 아버지 등 기댄 벽 틈에서 함부로 연탄가스가 새나왔다.
슬레이트 지붕 밑 제비집이 텅 비었다. 아버지는 집이 남쪽 나라인가 봐. 쥐색 바바리에서는 바람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힘껏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맨드라미 빛 담요 위에 너겁처럼 흐트러져 자는 아버지, 노루잠 사이로 언뜻 그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보였다.
이젠 어미니가 떠나세요. 그저 습성이 다른 철새들이 사는 집이라 생각하면 돼요.
창 밖으로 비꽃이 비치는 가 싶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반짝반짝 바늘같은 비가 어머니 등에 꽃혔다. 날이 더 추워지겠구나. 탄불 가는 어머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주가을문예(2002년)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김승원
1
젖줄을 토해낼 때마다 허공에 다리가 놓인다 격자무늬 그물 사이로 굵은 바람만 빠져 나갈 뿐, 거미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2
모두 마을을 떠난 후, 여뀌며 끈끈이 주걱, 바랭이가 무성한 빈집엔 도둑고양이와 생쥐가 떠나고 없다 밤이면 달빛을 풀어 추녀와 젖은 굴뚝 사이 무당거미가 슬그머니 나와 집을 짓는다 연통의 온기가 식어가면서 거미들은 재빨리 세간과 주민등록을 옮기고 이 집의 새 가장이 된 것이다 이제 거미는 썩은 대들보 살집을 파고 들어가 이 집의 내력과 가훈을 갉아먹는다 이 집엔 원래 실직한 사내가 귀향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내가 어느 날 아무도 몰래 밤 기차를 타버리고 그때부터 허물어진 집터를 배경으로 거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집단 농장을 이루고 산다
3
무너진 것들을 배경으로 투명한 젖줄 풀어 길을 내는 저 무당거미의 삶, 여전히 팽팽하고 가파르다
#진주가을문예(2001년)
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김예란
엄마 지난주말 백화점 쎄일 때 주문한 빨간색 원피스 어디 있어요? 글쎄 네 책꽂이에 보렴 책꽂이는 모름지기 삼단이 제일인데 네 지능은 너무 높아 내 가방엔 노란색 미니스커트 밖에 없어요 간밤에 성옥 언니가 먹다 남긴 가스통바슐라르는 내가 입기에 너무 뜨거운 걸요 미니스커트는 지나치게 가볍죠 큰언니 언니가 아끼는 주름치마 빌려줘 그거 철공소에 맡겼어 주름좀 피려고 한시절 바람 잡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니 분식집은 오거리 분식집이 제일이야 거기 한쪽 말이 짧은 남자는 오늘도 화단 아래로 출근했어 작은 애야 그러지 말고 네 머리에서 좀 꺼내 입으렴 네 머리엔 문학 음악 설탕 쌀 없는 게 없쟎니 아니예요 엄마 제 서랍은 요즘 부재중이예요 이 나팔바지는 왜 이래요? 그거 너무 오래돼서 그렇다 자고로 사랑이란 건 오래 되면 빛이 바래거든 아니다 서글플 거 없다 세월이 흘렀거니 하면 그만인거야 얘 막내야머리 좀 올려라 작은애 넌 손가락 좀 펴고 큰애는 얼굴 들어 안돼요 엄마 난 긴 문장이 좋아요 무릎이 안 펴져요 엄마 빨간색 메니큐어 좀 주세요 자꾸 발바닥이 갈라져요 모자를 써야겠어요 노란색 모자는 싫어요 엄마도 노란색은 싫어하잖아요 우리 식구 모두 노란색이라면 모조리 토해내고 싶은 거잖아요 빨간색 원피스는 아무래도 모조리 토해내고 싶은 거잖아요 빨간색 원피스는 아무래도 다른 집으로 잘못 배달되었나 봐요
햇살이 조명탄처럼 터지는 사월
나는 무도회 준비가 한창인 화단 옆을 지난다
개나리 가지가 나를 만진다
올해는 좀 색다른 옷을 입고 나올라나
혹 또 노란 미니스커트?
#진주가을문예 (2000년)
등꽃/김형미
초여름 저녁, 등꽃 향기 밀려온다
아아, 배고픈 욕정이여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 안주도
없이
술로 채워지는 위를 생각하기엔 나는 아직 젊다
이미 오래전부터 칫솔질을 할 때마다 구토가 일었으나
따지고 보면 고통이 나를 치유하고 있다
묵직하게 젖어오는 아랫도리
아릿한 아픔으로 부풀어오는 유두
담배 한 대로 삭히기엔 무척 굴풋했다
빈 방에 누워 자위를 즐기는 일만큼 가슴
허한 일 또 있으랴
이불이 마른 땀으로 축축해질 때쯤
세계가 내 안에서 밑동 째 뽑혀져 나가는
두려움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욕정이라면
내 그리움은 절망인가
절망인가, 술집의 객들은 서서히 비워지고
출구 쪽으로부터 등꽃 향기 밀려와 다시
자리를 채운다
사아랑은 나의 행복 사아랑은 나의 운명
천박하지 않을 만큼만 젓가락 장단 맞추는 등꽃 향기
발끝이 박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나는 빈 잔을 채운다 결국
세상의 낭떠러지는 매일같이 마주 대하는술잔 속일지도
살고 싶은 욕망으로 끝내 귀가하고 마는,
잔인한 초여름 저녁
등꽃 향기에 젖어 젖어
#진주신문 가을문예 시 당선작 (1999년)
이 세대는 느리다
김남용
486 낡은 세대를 부팅한다
오늘은 느리다
바탕화면에 뜰 워드를 기다리는 동안
시상이 달아나다 쓰러진다.
고장나면 나의 생명도 시든다
많은 작품들이 한꺼번에 손상될 때
말없는 기계에 폭언하는 일은
죽은 친구에게 우정을 말하는 것처럼
싱거운 느림이다.
새로운 시상도 사라진다
결연히,
전원을 끈다
486 낡은 세대를 접는다
첨단 기술이 녹슬지 않은 노트북,
그러나 이미 이 세대는 느리다
586은 돼야…신제품이란 있는 것일까?
폐지더미에 깔려 있던 색바랜
원고지를 빼내오고
중학교 시절 기초 언어를 연습하던
만년필을 꺼내 잉크를 채운다
잠들었던 선들이 일어나고
맑은 점들이 알알이 번진다
지금까지 이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시간을 거스르는 일은 두려웠고…돌아볼
거울이라도 있었던가?
새로운 것을 바란다면 잊고 있던
기억의 서랍을 열어 뒤적여 보라
486세대를 서랍에 넣는다
#진주가을문예(1998년)
자정의 비 / 김영산
순간, 골목 어귀에서 어둠이 비틀거린다 플라타너스와 체르니 사이 흩뿌리는 가랑비에 자정의 목덜미가 젖는다 푸른 선풍기 느리게 돌고 있는 주점은 칠부쯤 눈을 감았다 빗물 낯바닥에 어리는 불빛 아무리 밟아 뭉개도 꺼지지 않는다 우우 데모하여 바람의 꽁무니 쫒아다니는 적막이여 국제건강약국 낡은 입간판에 붐비는 부식의 시간이여 벼룩신문 어느 광고에 중고 희망 매물은 나온 게 없을까 가슴에 꽂힌 향기로운 절망도 시들어 버린 지 오래다 수천 갈래 생의 교차로에 녹색 신호등 플러그가 빠져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막차 보내고 난 장의자에 길게 드러눕는다
#진주가을문예(1997년)
수인번호 5705번, 그녀는 애벌레를 키운다
유영금
그녀는 감옥 안에서 노래한다
노래하는 자유만 있을 뿐이다
노래는 자폐를 살해하는 힘을 숨기고 있다
간수의 눈빛이 그녀를 옥죄일수록 흑빛
노래가 애벌레처럼 쏟아져 나온다
다른 수인들도 노래를 부르며 견딜 것이다
견딤보다 몸서리치게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아름다움의 끝에 닿으면 노래에게서 버려질 것이다
노래로부터 버려지고 싶은 그녀를 위해 누더기 같은 수인번호를 가위로 자른다
자르는 순간 다시 엉겨 붙는 속성을 지닌 더러운 번호, 징그럽게 알을 깐다, 오글거린다
그녀는 알았다, 감옥 안의 노래가 감옥 밖의
노래 보다 살인적으로 자유롭다는 걸,
#진주가을문예 (1996년)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 이영수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맑은 날과 희뿌연 날들의 차이는 엄청나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가 그렇듯 안경은 그 위험수위를 꼼꼼하게 따져 혼돈으로부터 날 구해준다 내가 안경을 쓰면 안개들이 걷히고 아프리카 코끼리 들소떼가 막 몰려온다 안개가 몰려와 코끼리도 잡아먹고 들소떼도 잡아먹고 아프리카도 잡아먹힌다 내 안경과도 흡사한 대식가의 입 나도 세상을 먹고 있는 거지 걸신들려
안경을 벗으면 세상들이 안개처럼 빠져나간다 건물들이 흔들리고 서 있는 길들마저 꺼져 도시에는 늙은 바람만 몰려다닌다 내가 통째로 삼킨 아프리카 코끼리가 안경알을 깨고 정글 속으로 달아난다 핏줄을 따라 들소 떼가 빠져나가자 서 있기가 힘들다 나 흔들리고 있는 거니 저 보기 싫은 빌딩들의 정글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니? 식인종들의 종친 회의는 누가 해골 지팡이를 집어던져 난장판이 되었지 미친 사람들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어느 파가 몰표를 던졌니 그 무식한 족장들의 추격대가 날 발견했을까 안개의 정글은 흰 나무들만 돋보기 안경을 쓴 채 나뭇잎을 읽고 있다
안경을 벗으니 배가 고프다 안경을 쓸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