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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원한 금융 황제, 로스차일드와 이스라엘 건국
유대인 역사의 클라이맥스는 사실상 로스차일드 가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스페인계 세파르디(Sephardi) 유대인들이 주도해 왔다면, 로스차일드 이후로는 독일계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이 주도하게 된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국제적인 대규모 금융 산업을 일으킨 로스차일드 가문을 알지 못하고는 오늘날 세계 금융시장의 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1) 랍비 교육 받고, 고물상, 환전소 개업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는 어려서부터 명석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로스차일드를 랍비로 키우려 했다. 열 살에 랍비 양성학교(유대교 신학교)에 들어간 그는 3년 만에 부모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그 후 친척들의 도움으로 유대계 은행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도제로 일하면서 은행업을 <탈무드>의 시각으로 조망하며 7년간 다양한 금융업의 본질을 파악했다.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 마이어는 아버지가 하던 고물상 겸 골동품상을 하면서 옛날 동전을 수집하여 부유층을 상대로 거래를 했다. 장사는 부자를 상대로 해야만 남는다는 기본적인 유대인의 상술을 따른 것이다. 공짜나 다름없는 옛 동전의 목록과 카탈로그를 정성껏 만들어 부유한 귀족들에게 팔러 다녔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가장 부자 귀족인 헤센 카젤 공국의 빌헬름 왕자와 인연을 맺고 거래할 수 있게 된다.
빌헬름 왕자에게는 칼 부데루스라는 개인재산을 관리하는 재무관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마이어에게 관심을 보이고 좋아했다. 부르데스는 마이어를 통해 빌헬름 공의 런던 채권을 할인하면서 빌헬름과 부데루스는 점차 마이어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고 서로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 평소 마이어는 아들들에게 유대인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장사를 가르쳤다.
그는 유대인이 돈을 벌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다. 첫째는 5천 년의 역사요, 두 번째는 머리라는 것이다. 5천 년의 역사는 수많은 지혜의 축적을 의미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머리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개개인이 총명하더라도 일의 성취를 위해서는 집단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아들들에게 이를 강조했다. 그는 협상 능력보다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항상 먼저 스스로 미소를 지었다. 마이어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능력이 있었다. 이것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었다.
2) 국제어음 결재를 시작하다
그 무렵 헤센 카젤 공국은 용병 장사로 유럽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1775년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휘하의 군대를 3백만 달러를 받기로 하고 영국 측 용병으로 파견했다. 이때 마이어에게 기회가 왔다. 빌헬름 공이 용병파견 대가로 수취한 영국은행 어음을 처리하면서 환전수수료를 아껴 서로에 이익을 얻게 한 이후 로스차일드는 국가 간 어음결제 금융거래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빌헬름 공이 1785년 독일 헤센 공국의 왕위를 승계해 빌헬름 9세가 됐을 때, 그는 엄청난 유산도 함께 상속 받았다. 그간 신임을 쌓은 마이어는 최고 궁전상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귀족들이 애호하는 고급 명품 거래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로스차일드 가족의 사업기반 조성과 더불어 정치적 실세들과의 교분을 쌓기 위해 20년 이상 빌헬름을 위해 일하며 인맥을 구축했다. 마이어의 다섯 아들들은 빌헬름 9세를 위해 유럽 전역에 산재한 빌헬름 9세의 채권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고 성실히 관리했다.
1797년 마이어는 형제들 중 가장 두뇌가 명석한 셋째 아들 네이션을 영국으로 보내 로스차일드 일가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네이션은 처음에 면화, 양모, 담배, 설탕 등의 무역을 하다가 경쟁이 치열하자 금융업을 시작했다. 금융업 가운데서도 채권, 금, 주식 거래가 그의 전공 이었다
3) 빌헬름 9세의 재산을 관리하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해 1806년에는 친 영국 성향의 빌헬름 9세의 공화국도 점령했다. 빌헬름 9세는 처가인 덴마크로 피신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부데루스 재무관에게 맡겼으며, 재무관은 다시 필요로 할 때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마이어에게 그 돈을 맡겼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3백만 탈레르(thaler)였다.
여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마이어는 이 재물을 그의 정원 한구석에 파묻고 나서 4만 탈레르 정도 되는 자신의 상품과 재물은 숨기지 않았다. 만약 이때 자신의 재산까지 다 숨겼다면 나폴레옹군의 엄격한 수색으로 발각되었을 것이고 끝내는 빌헬름 9세의 재물도 빼앗겼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재산과 목숨을 걸고 빌헬름 9세의 재물과 대외 차관 장부를 지켜낸 것이다.
이 시기에 그의 아들들도 매우 힘든 일을 해냈다. 점령기간 동안 나폴레옹군은 빌헬름 9세의 숨은 재산과 채권들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아들 형제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차를 몰고 유럽 전역을 돌며 점령군 모르게 그간 빌려준 빌헬름 9세의 채권을 모두 회수하였다. 그 뒤 회수금은 피난 가 있는 빌헬름 9세에게 안전하게 전달되었다. 이제 로스차일드 가문과 빌헬름 9세의 관계는 돈에 관한 한 한 가족처럼 믿고 맡기는 사이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빌헬름 9세가 돌아왔을 때 마이어는 빌헬름 9세의 재산과 그에 따른 이자를 더해 돌려주려고 했으나 빌헬름 9세는 도리어 그 돈 모두를 20년 동안 2퍼센트 이하의 이자로 마이어에게 맡겼다. 이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업을 성공으로 이끌게 된 계기가 되었다.
4) 금융 네트워크 구축과 빠른 정보 활용
마이어는 다섯 아들에게 유럽 각국에 상주하게 하여 유럽 전역을 금융네트워크화 하여 로스차일드 가문이 다국적 금융 기업으로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들었다.
형제들은 유럽 전체를 커버하는 통신과 마차 수송망을 만들고 무엇보다도 빠르고 뛰어난 정보 분석력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 예로 1806년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릴 때 공산품 가격이 폭등하자 밀수도 서슴지 않았다. 또 1815년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과 그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시에는 남보다 빠른 정보 입수와 분석으로 영국의 증권시장에서 떼돈을 벌었다.
로스차일드가는 정보와 시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란은행을 접수하고 유럽 금융계를 장악하면서 세계 최대의 다국적 은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5) 산업혁명의 원동력, 로스차일드의 자본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이 증기기관을 발명하자 영국에서는 철도의 장래성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 네이선도 마차보다 나은 수송 수단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로 영국에서 철도가 순조롭게 발전하자 네이선은 오스트리아에 있는 형 살로몬 마이어 로스차일드(2남)에게 철도사업을 추진해 볼 것을 권했다. 5년 동안 신중한 준비기간을 거쳐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해 1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유럽 대륙 최대의 대규모 철도건설 사업 면허를 취득하고 많은 반대 여론 속에서도 ‘페르디난트 황제 북방철도’라는 명칭으로 추진하여 4년 뒤 성공적으로 철도 일부를 개통하였다.
1830년대부터 본격화된 프랑스의 산업혁명 또한 제임스 마이어 로스차일드(5남)의 자금력으로 이루어졌다. 제임스는 형이 추진하는 오스트리아의 철도사업을 참고하면서 프랑스 철도사업이 난관에 부딪히자 형이 했던 대로 철도노선에 프랑스 황제 이름을 붙여서 반대 여론을 잠재웠다.
개통은 형보다 더 빨랐다.
6) 로스차일드가, 부의 승계와 유대인 순혈주의
나폴레옹이 철수한 뒤 독일은 그동안 흩어져 있던 3백여 개 작은 봉건국가들을 합병해 30여 개의 큰 봉건국가로 구성된 독일연방으로 거듭났다.
로스차일드가의 큰아들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이 통일 독일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암셀은 비스마르크 재상과 부자지간처럼 가까이 지내며 그를 음으로 양으로 후원했다.
나폴리에 있는 4남 칼 마이어는 교황청 재원 조달과 이태리 금융 산업으로 성공했다.
로스차일드가의 총자산은 지금까지 정확히 밝혀진 적은 없다.
<화폐전쟁>을 쓴 쑹홍빈(宋鴻兵)에 의하면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1850년을 전후해 약 60억 달러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수익률을 6퍼센트라고 가정하면 160년이 지난 오늘날은 최소한 50조 달러 이상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빌 게이츠 재산의 1천 배 이상으로 2009년 기준 전 세계 금융자산의 4분의 1이 넘는 돈으로, 쑹홍빈은 지금 세계 금융자본의 절반이 사실상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이라고 주장한다.
로스차일드가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끼리 결혼했다.
다섯 형제의 아들들 열두 명 중 아홉 명이 사촌들과 결혼했으며 마이어의 후손들 50쌍 가운데 반이 사촌끼리 결혼했다. 이는 혈통을 지키기 위한 유대인의 오래된 관습이자 그들의 부를 지키기 위한 방책이다.
과학자 그레고리 코크란은 저서 <1만 년의 폭발>에서 이러한 순혈 유전적 영향을 유대인 가계를 추적해 연구했는데, 중세 유대인의 지능이 평균보다 12~15점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생존을 위해 좀 더 똑똑한 유대인들이 더 많은 자식을 낳으면서 금융 유전자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근친결혼에 따른 가우처병·니만피크병(스핑고미엘린이란 지질을 분해하는 효소의 결핍으로 이들 지질이 간과비장 등에 쌓여 커지면서 성장부진, 정신박약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유전병) 등의 유전병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대인은 ‘민족’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즉 ‘유대민족’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2천여 년 동안 유랑하던 중 많은 인종과 혼혈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종교인 유대교다.
7) 로스차일드 후손들의 눈부신 활약
(1) 이스라엘 건국을 돕다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는 19세기 후반의 시오니즘(Zionism)에서 비롯된다.
시온이란 <구약성경>에 나오는 지명으로 고대 예루살렘에 있던 두 개의 언덕 중 동쪽에 있던 지역이다. <예레미야서>에는 시온은 유대인들이 유수에서 돌아올 구원의 장소로 묘사된다. 이런 이유로 시온은 단순한 지명을 떠나 유대인들에게 영원한 고향으로, 구원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 유대인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대회에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의 출발점이 되는 ‘유대인 국가를 세운다.’는 역사적인 결의문 ‘바젤강령’이 채택되었다.
바젤강령의 요지는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실패하고 대학살이 일어나자 많은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하면서 엄청난 수의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빈손이었고 누군가의 재정적인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때 프랑스의 에드몽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하는 유대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댔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을 거금을 주고 사들여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이스라엘을 세우는데 기여한 것이다.
에드몽이 매입한 개척지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도시에서 유대인의 도시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뒤에도 그는 많은 건국 자금을 지원했다.
(2) 영국의 이중 플레이와 시오니스트들의 활약
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위해 당시 영국은 미국의 참전이 절실했다. 이를 위해서는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시오니스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 까닭에 영국의 전시 내각은 1916년 10월, ‘세계시온주의자연맹’ 대표이자 유럽 최대 금융재벌이던 영국의 리오넬 로스차일드와 비밀리에 회동해, 전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또 영국은 시오니스트인 로이드 조지를 총리로 전격 임명했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 친독 노선을 지향하던 미국의 시오니스트들이 친영 노선으로 입장을 정리하게 되고 이어서 1917년 4월 미국은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 뒤 당시 영국 외무 장관인 밸푸어는 “영국 정부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국가를 세우는데 찬성하고 총력을 기울여 도와줄 계획이다.”라는 밸푸어 선언을 리오넬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로 보냈다.
밸푸어 선언이 나오도록 뒤에서 도운 유대인이 또 있었다.
바로 유명한 과학자이자 시오니스트인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이다.
1차 대전 당시 영국은 폭약의 제조 원료인 무연화약이 부족했다. 마침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맨체스터대학 화학교수였던 바이츠만이 고심 어린 끝에 아세톤의 대량생산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해결했다.
하임 바이츠만은 나중에 이스라엘 건국준비위원장이 되고 이스라엘 건국 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밸푸어 선언이 나온 배경은 간단하다. 영국은 유대인들의 돈과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밸푸어 선언 이전에 이미 아랍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한바 있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수에즈운하를 둘러싸고 터키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곤경에 빠진 영국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 아랍의 지도자인 후세인에게 전쟁 협력을 요청하고 전후 아랍의 독립을 약속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영국을 위해 형제나 다름없는 터키에 총칼을 겨눴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영국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영국의 이중 플레이에 아랍은 영국에게 철저히 속은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오늘날 화약고로 돌변한 것은 이러한 영국의 이중 플레이도 하나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8) 이스라엘 재탄생과 중동전쟁
(1) 오스만제국의 분할과 유대인 쇄도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배하자 국제연맹은 오스만 제국에 지배받던 국가들 가운데, 터키를 제외한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한시적으로 위임통치하는 것을 인정했다.
영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은 아랍 지역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남시리아의 4개 지역으로 분할했다. 남시리아는 요르단 강을 경계로 동·서 두 지역으로 다시 분할하여 요르단 강 동안은 요르단 왕국이 되고 서안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쇄도하기 시작했으며, 이미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물결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1929년, 그리고 1936~1939년에 아랍인들은 영국의 정책에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영국은 1939년 유대인의 이주를 제한한다는 방침을 발표했으나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에 불만을 갖게 만들뿐이었다. 이후 독일에 히틀러의 등장으로 위기를 느낀 유대인들은 더욱 팔레스타인 이주를 재촉하게 되고 이 지역의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긴장이 높아져 갔다.
(2) 이스라엘 건국과 1차 중동전쟁
1947년 영국은 국제연합(UN)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으로 분할하는 안을 내놓았다. 특히 성지인 예루살렘도 분할하기로 했다. 이러한 UN안을 바탕으로 1948년 5월에 이스라엘이 건국했다.
기원전 63년에 멸망한 후 2011년 만에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건국은 곧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아랍 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인 전쟁이 20일 넘은 전투 끝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켜내 1948년 6월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미국의 지원으로 현대적인 군대로 변한 이스라엘군은 모세 다얀 장군의 지휘 아래 카이로, 암만, 다마스쿠스를 폭격해 결국 아랍 연합군이 항복했다.
1949년 2월 평화조약 조인으로 승리한 이스라엘은 UN안 보다 50퍼센트나 더 많은 지역을 점령했으며 자신의 고향에서 축출된 아랍인은 80만 명이나 되었다. 오늘날 세계는 이들을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다. 1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규모 전쟁은 네 번이나 더 일어난다.
9) 히틀러 재산 압수 이후 로스차일드 베일 뒤로 숨다.
히틀러의 부상과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로스차일드 일가에 치명적이었다. 히틀러의 직접 영향권 아래 있었던 빈의 로스차일드가는 모든 재산을 압수당한 채 추방되었고, 프랑스가 나치에 정복되자 프랑스 로스차일드가도 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다.
나치에게 혼이 난 로스차일드 일가는 이후 전면에서 물러나 대리인을 세워 경영을 하면서 그들의 자산을 전 세계에 여러 가지 형태로 분산시켰다.
훗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민 간 초창기 독일계 유대 금융인들은 직간접으로 대부분 로스차일드가의 영향 아래 있던 사람들로서 그들 중 일부는 로스차일드가의 대리인들이다.
골드만삭스 가문 등 독일계 유대인들은 유난히도 금융에 밝아 미국 건국 초기에 금융 및 재정 분야에서 짧은 기간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금융을 휘어잡는 토대를 마련했다.
현재 표면적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열 명이 약 15억 달러 자산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 가문의 자산은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르며, 지금도 거대 유대계 자본의 배후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관련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다섯 가지 성공비결로 정보, 인맥, 기회활용, 단결력, 아이디어를 꼽고 있다.
첫댓글 만촌! 저물어가는 한해의 막바지 까지 '독서광장'을 빛내주고 있네요.
유대인과 로스차일드 가문, 그리고 세계금융산업의 뿌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만촌이 있어 경목카페가 풍성했던 한해 였습니다.
뜻있는 새해 맞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보! 言施 감사해요.
노년의 갇힌 생활에서 이렇게 카페에서라도 자주 만나야지요.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만사형통하소서!
만촌, 감사합니다.
그 정열이 어디서 나오는지
청년이 여기 왔다가 울다 가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건강하고 가내 다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낙솔! 만각!
그리고 카페지붕님들이여!
올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운수대통, 만사형통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