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밖에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머리말
* 우리집 하녀인 리나는 저녁 기도를 올릴 때, 거실 옆에 앉아 깨끗이 씻은 손을 빳빳하게 다림질한 앞치마에 단정히 모으고 맑은 목소리로 우리와 함께 찬송가를 부를 때는 분명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이며 우리들의 세계인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엌이나 또는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가 없는 사나이에 대한 얘기를 들려줄 때라든가 혹은 조그만 푸줏간에서 이웃집 여자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버리고 다른 세계에 속했으며 비밀에 둘러싸여 있곤 했었다. p. 12
*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는 그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서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p. 60
* 예를 들면, 나비 중에는 수컷보다 암컷의 수가 훨씬 적은 종류의 부나비가 있어. 이 부나비도 다른 곤충들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번식을 하지. 수컷이 암컷을 수정시키면 암컷이 알을 낳는 거야. 만약 네가 지금 이 부나비 암컷을 한 마리 가지고 있다면—자연과학자들이 자주 하는 실험인데, 밤이 되면 이 암컷을 찾아 수컷들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몇 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에서 날아오는 거야. 몇 시간이나 되는…! 생각해 봐. 몇 킬로나 떨어진 먼 곳에서도 수컷들은 그 부근에 있는 유일한 암컷의 냄새를 맡는 거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설명해 보려고 애쓰지만, 그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냐. 일종의 냄새나 그 비슷한 뭔가가 있을 거야. 사냥개가 눈에 보이지도 않은 흔적을 추적해 내는 것처럼 말이지. 알아듣겠니? 그것도 바로 이런 종류의 일이지. 자연계에서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이렇게 할 수는 있겠지. 만일 그 부나비의 암컷이 수컷만큼 많이 있었다면, 수컷도 그렇게 예민한 후각을 갖게 되진 않았을 거야. 그것들은 짝을 찾는 일에 여러 대를 걸쳐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후각을 갖게 된 거야. 짐승이나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기의 모든 주의력과 온 의지를 어느 한 곳에 집중시킨다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될 거야. (데미안이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p. 71-72
* 언덕 위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다는 건 실로 위풍당당한 일이야. 그런데 그 잔악한 도둑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감상적이고 종교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니? 그는 죄인이고, 누가 봐도 수치스런 행동을 하던 자인데 이제 와서 그렇게 쉽게 개심을 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다니 말이야. 무덤을 코 앞에 두고서 그 따위 회개가 무슨 소용이 되니?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건 한갓 감상적이고도 교화적인 배경을 가진 담콤한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야. (데미안이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p. 77
* 나는 한 번도 베아트리체(나는 봄날의 공원에서 내 마음을 끄는 한 젊은 처녀를 만났던 것이다.)와 말을 나눈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신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내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내게 성스러운 전당을 열어주었고, 나로 하여금 사원의 기도자가 되게끔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주막집 순례와 밤에 방황하는 버릇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다시 홀로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며 즐겨 독서를 하고 산책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돌발적인 전향으로 나는 숱한 조소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사랑하고 숭배할 대상을 가지게 된 것이었으며, 이상이 되살아났고, 예감과 신비롭게 아롱진 어스름이 생활을 채워가지 시작했다. p. 101
* 이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는 내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 놓았다. 어제까지는 조숙한 풍자꾼이었던 나는 성자가 되려는 희망을 품은 사원의 하인이 되었다. 나는 내 몸에 베어 있던 나쁜 생활습관을 청산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고 먹고 마시는 일에서나 이야기나 옷차림까지도 여기에 부합되도록 신경을 썼다. p. 102
* 술꾼들이나 건달의 생활이 어찌 보면 모범적인 시민의 생활보다는 훨씬 더 생기있는 것인지도 몰라. p. 109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p. 116
* 아프락사스는…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가진 일종의 신의 이름……. p. 118
* 신은 단지 인위적으로 구분된 세계의 절반만을 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그것은 공적이고 허용된 ‘밝은 세계’였다). 그러나 사람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경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악마까지도 겸한 새로운 신을 갖거나 아니면 신을 숭배함과 동시에 악마도 숭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p. 118
* 우리들의 내부에서와 자연의 내부에서 존재하는 신은 동일한, 불가분의 동일한 신이며 만일 외부의 세계가 붕괴되면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그것을 재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과 강, 나무와 잎, 뿌리와 꽃 등 자연의 모든 형성물의 원형은 우리 가운데 미리 형성되어 있는 것이며, 그 본질은 영원하고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영혼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33-34
* 당신이 죽이고 싶은 어떤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형상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오.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해 있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우리를 흥분시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오! p. 144
* 우리의 눈에 보이는 사물이란…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오. 우리가 우리의 내부에 갖고 있는 것 이외의 현실이란 없는 것이오. p. 145
* 깨달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란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부에서 견고하게 되어 어디를 가든지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일 이외에는 어떤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p. 163
* 자기의 운명 이외에는 전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미 동류한 없는 거야. 그는 아주 고독하고, 주변에는 싸늘한 세계의 공간밖에는 없는 거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거요. p. 166
* 그는 유럽의 정신과 현 시대의 특징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어디를 가도 단합과 집단행동이 지배하고 있을 뿐 어디에도 자유와 사랑이 지배하고 있는 곳은 없다고 말했다. 학생단체와 합창단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공동체는 강제적인 결속이며, 불안과 도피와 절망감에서 나온 공동체이며, 내부는 썩고 낡아 붕괴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었다. p. 174
* 우리의 사명은 이 세계에 한 개의 섬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삶의 방식의 또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p. 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