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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사람> 2021 가을호 포엠리뷰
문예지에서 시를 읽는 의미
김광기
요즘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를 만나서 읽곤 한다. 그중에서도 인터넷을 통해서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읽는 것이 가장 손쉽게 시를 읽는 방식이 아닌가 한다. 기존에는 주로 시집과 문예지를 통해 시를 읽었던 방식과 달리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이 급속도로 많이 보급되어 시를 접하고 유통되는 상황으로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또 인터넷으로 시를 많이 접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시집과 문예지의 판매는 현격히 줄어들어 시집 출간 방식도 판매 방식에서 정부지원 방식이나 자비출간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나마 판매 방식을 이어갈 수 없는 문예지 같은 경우에는 주로 동인들이 뜻을 모아 출간하는 방식으로 바뀌거나 휴간 또는 폐간되는 경우가 많아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예지를 제작하고 보급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 문예지를 통해 시를 만나서 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종종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문예지에 실리는 시들은 다른 미디어에 노출된 시들과는 달리 시인이 가장 먼저 시를 발표한 신작시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보니 다른 매체에서 시를 읽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시, 신생아 같은 시가 문예지에 실린 시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날시적인 느낌이 강하게 배어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각고의 노력 끝에 탈고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시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시인에 따라 다소의 차가 있겠지만 시인들이 시를 쓰고 탈고하는 데는 대부분 몇 달에서 몇 년까지의 시일이 소요된다. 이렇게 세월을 견딘 시들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고 이러한 시들을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문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발표한 시들을 묶어 낸 것이 시인들의 개인 시집이라고 할 수 있으니 문예지에서 만나는 그 시인의 시야말로 어떤 의미로 독자에게 다가가는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를 갖고 있는 문예지가 세상에서 외면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문예지가 팔리지 않다보니 몇몇 문예지를 제외하고는 서점에서도 콘텐츠에 끼워 넣는 것조차 망설이고 있다. 인터넷이나 서점 등의 판매품 리스트에도 잘 들어가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보니 문예지에 실린 시인들을 중심으로 개별배포를 하거나 밀린 원고료로 대신 우송해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예지를 제작 배포하는 입장에서 이런 문예지를 왜 제작해야 하는지 매호마다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예지에 실린 좋은 작품들을 만나면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런 작품들을 차근차근하게 다시 읽어보고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들을 몇 편 선별해서 리뷰를 해보기로 한다. 이번 호에는 문학과 사람 2021 봄호에 발표되었던 시들 중에서 지연 시인의 「아침 춤과 저녁 춤은 약이 되니라」와 연명지 시인의 「당신은 서어나무입니까」, 김미소 시인의 「엄마」, 박민서 시인의 「악몽이 발견되었다」를 순서대로 읽어보기로 한다.
요양병원 할머니들이 머리를 밀었어요
신체를 한 부위만 남겨놓는다면 거리엔 무엇이 활보할까요
입이 귀가 손이 발이 홀로 걸어 다니면서 부위별로 다시 탄생하는
의도적으로 빌려오는 심장, 내가 밀어버린 것과 남아있는 당신의 것
서랍에서 화장지로 감싼 금니를 꺼냈어요 빠져버렸지만 빛나는 그것을 남겨야 할지 버려야 할지 당신과 함께 나눴던 농담들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이제 당신은 초점 없는 눈으로
햇빛을 간신히 식탁에 올리네요
혀를 빼고 손가락으로 빛을 닦네요 아침 춤과 저녁 춤은 약이 되니라 빛의 먼지를 한소끔, 멀리 떠날 수 있게 손가락에 춤을 발라 문지르네요
춤을 침으로 믿고 사는 나에게 손가락으로 바닥을 궁굴리면서 빛의 살갗을 입으로 부르네요
바리캉으로 밀어버린 기억을 뉘어 놓고 당신은, 당신을 닮은 당신들은 바람의 도르래를 굴리며 밥 차를 기다려요
밀어버린 털처럼 희망이 다시 올라온다는 듯 빛을 깨끗이 춤으로 씻어주면서
- 지연, 「아침 춤과 저녁 춤은 약이 되니라」
삶과 죽음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는 곳에서 빛과 먼지를 대비시키고 정적과 춤의 역학을 구상화하여 꿈을 꾸듯 시간을 다시 재생산하는 것 같은 이 시의 현실성은 환상적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가 인도하는 대로 무념 무상한 상태로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요양병원에서 여성성을 상징하고 있는 신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할머니들의 머리를 싹 밀어놓고 보니 신체의 상징성이 제거된 머리통만 보이는 것에서 사람의 몸에서 신체의 일부만 생각하게 된다. 신체의 각 부위가 인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각 부위의 상징성을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은 그저 신체의 일부로만 보이는 각각의 요소들만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요소들이 살아있고 살아있다고 가정하고 화자인 ‘나’는 ‘나의 것’과 ‘너의 것’이 한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서랍에 있던 ‘금니’는 수많은 말을 함께 나누었던 ‘말’이 함께 머물렀던 ‘금니’였지만 지금은 말의 의미와는 별개로 그저 빠진 ‘이빨’로 덩그러니 화자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다. 화자는 지금 ‘이빨’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빨에서 생성되었던 ‘농담’을 들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 의미들을 새기다가 마치 빠진 이빨처럼 덜렁 눈앞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노인의 머리를 바라보며 힘없는 노인의 눈에 비칠 것 같은 식탁 위의 햇빛을 응시하고 있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틀니일 것 같은 ‘혀’를 닦으며, 먼지를 닦으며 손가락의 율동을 춤으로 형상화하며 빛과 먼지 그리고 그것을 조화시킬 수 있는 율동(움직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춤을 침으로 믿고 사는 나에게 손가락으로 바닥을 궁굴리면서 빛의 살갗을 입으로 부르”며 “바리캉으로 밀어버린 기억을 뉘어 놓고 당신은, 당신을 닮은 당신들은 바람의 도르래를 굴리며 밥 차를 기다”리는 희망이 경쾌하게 이 공간에 작동되고 있다. “밀어버린 털처럼 희망이 다시 올라온다는 듯 빛을 깨끗이 춤으로 씻어주면”서 말이다.
눈 위에 발자국도 없이 엽서가 왔다
이번 주말에 서어나무 숲에 다녀가지 않겠니
우리가 모르는 긴 시간 동안 서어나무는 해풍의 중심에 서 있었다 볕이 떨어지는 흔한 저녁이면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관절마다 바람의 숨결을 묶어주었다 돌아나올 수 없는 오래된 혈관들이 구불거렸다 별일 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등진, 약간의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당신은 서어나무 입니까
바람의 한 동작마다 바다의 눈물들이 그렁거린다
비틀린 가지마다 아버지의 수첩에서 가져온 서사들이 가득하다 서어나무의 통증이 깨어나는 밤 해풍이 가르랑거리며 몰려다닌다 우리가 멀리 밀어냈던 새벽.
아낌없이 아침을 닫는 나직한 목소리
눈앞의 고통만 보면 바다가 보이지 않아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렴
- 연명지, 「당신은 서어나무입니까」
위 작품 속에서 중심 소재로 쓰이는 서어나무는 서나무라고도 하며 나무이름의 유래는 서쪽에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주로 산지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서어나무는 표고버섯 재배용 골목으로 사용하지만 참나무에 비해 생산량이 적어서 땔감용으로 많이 이용된다. 꽃은 5월에 피고 미상꽃차례(미상화서尾狀花序)를 이루며 피는 모든 꽃들이 수꽃이든가 암꽃 1가지로만 이루어져 있다. 또 암술과 수술은 한 꽃에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연원을 갖고 있는 서어나무를 표면에 내세우는 「당신은 서어나무입니까」에서는 뚜렷한 효용성과 특이할 만한 개체의 특성이 보이지 않는 면을 암시적으로 작품의 바탕에 깔고 화자의 특이할 것 없는 이력과 생의 역사를 담담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서사는 일반적이지만 평범하지 않고 바람 따라 흐르는 것 같지만 바람에 역행하고 있는 듯하다.
“볕이 떨어지는 흔한 저녁이면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관절마다 바람의 숨결을 묶어주”듯 “돌아나올 수 없는 오래된 혈관들이 구불거”리며 “별일 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등진, 약간의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는 “당신은 서어나무입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처럼 ‘서어나무’는 화자와 동일화된 삶의 내력을 되짚으며 “바람의 한 동작마다 바다의 눈물들이 그렁거”리고 있는 것과 같은 심상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연원이 되고 있는 아버지의 서사가 가득 고여 있는 “서어나무의 통증이 깨어나는 밤”에는 “해풍이 가르랑거리며 몰려다”니며 바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듯도 하다. “눈앞의 고통만 보면 바다가 보이지 않”으니 바람에 역행하지 말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라고…
담장 밖으로 먹구름이 지나간다 빗물처럼 흘러내린 건 엄마였다 말했지만, 거짓말 또 거짓말 젖은 어깨로 서성이면 넘어지지 않는 울타리가 된 기분, 장화가 놓여 있다 사람이 빠져나간 웅덩이는 자주 고인다 슬픔은 왜 맨발로 떠도는 걸까, 이별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양을 세어 본 지 오래된 불면, 내일도 구름은 방치될 거야, 양 대신 구름을 몰고 다니면 은닉 같아 잉크 한 방울 스며드는 기분, 암막 커튼이 닫히고 양들이 돌아오지 않는 밤에 대해 생각했지 숨바꼭질일까? 수수께끼일까 떠나간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떠나간 한 사람의 뒷모습만 각인된다 동공이 점멸되듯 희미해질 때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그루밍 같아 삼켜야만 하는 결벽의 방식, 물 먹은 장화 속을 보는데 머리카락이 자란다 거짓말 또 거짓말 메아리처럼 파문이 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 김미소, 「엄마」
위의 시 「엄마」에서는 슬픔을 겪는 한 방식에 대해서 듣고 있는 것 같다. 슬픔을 이렇게 겪으며 새기고 있지만 슬픔을 슬픔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화자가 겪는 고통은 전혀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의 농도는 짙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장화’에 빗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작은 범위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한 지경의 슬픔 덩어리가 화자의 가슴에 고여 응고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슬픔은 수시로 각인되어 문득문득 돋아 나오고 슬픔에 고여 있는 빈 공간보다는 그 슬픔을 빠져나간 맨발 같은 시린 존재의 의미에 대해 더 집중하고 안타까워하며 그 이별이 된 경위를 풀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화자는 그 이별이라는 슬픔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 슬픔의 깊이에 빠져 있지만 그것이 내가 아닌 타자라고 하면 어떤 아픈 이별을 한 경우일지라도 자신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 한다. “잉크 한 방울” 같은 슬픔이 번져나가서 온 천지를 새카맣게 물들이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하며 화자는 “떠나간 한 사람의 뒷모습만(을) 각인”시킨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슬픔의 농도도 마치 몸단장(그루밍) 같은 제스처로 보일 정도로 인식되어 “삼켜야만 하는 결벽의 방식, 물 먹은 장화 속을 보는데 머리카락이 자란다” 한다. “거짓말 또 거짓말 메아리처럼 파문이” 일듯 자책하는 시공간을 울리는 소리,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그 소리 뒤에는 ‘슬픔은 딱 그만치이니 더 이상 확장시키지 말라’는 다시 말해 더는 ‘슬퍼하지 말라’는 화자 엄마의 말소리가 울리고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생긴 주름은 그림자의 무덤
심장에서 황톳물 뱉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울먹한 표정의 생생한 얼굴 하나가
내 얼굴을 따라다닌다
악몽이 발견되었다
휘어져 오는 바람이 손에 잡히지 않아
무작정 바람을 꺾었다
보이지 않는 온도는 누구의 이름인지
너의 손에 가려진 여러 개의 가명들
이름 너머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
웃거나 울 때는 숨어야 할 표정이 없다
옛날 얼굴을 버리는 것은
불안을 화석처럼 덮어버리는 일
내 얼굴을 쓰다듬다 보면
오래 잊고 있었던 비명이 되살아난다
더렵혀진 숫자가 기억 날 때
날벌레들이 바람에 몰려다닐 때
다정하지 못한 먹구름이 갈라지는 소리를 듣는다
옛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얼굴 속으로 모두 숨어버린 탓
사진처럼, 옛말 하는 인사처럼, 돌아오지 않는 표정들
난 누구하고 살았을까
충혈된 망막에는 어떤 얼굴도 없다
- 박민서, 「악몽이 발견되었다」
위의 시 「악몽이 발견되었다」에서는 혼몽의 시간들 속에서 화자가 자신과 대면한 것들과 자신이 위치한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갖게 한다. 아마도 그것은 평소에 화자가 잘 풀어내지 못하던 숙제 같은 자신에게 내재된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로잡지 못하는 문제 같은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화자에게 있어서 ‘악몽’ 같은 것들이지만 그것을 화자는 ‘악몽을 꾸었다’ 하지 않고 “악몽이 발견되었다” 한다. 그러니 그것은 화자가 어쩔 수 없이 닥치는 상황이 아니라 언젠가는 화자가 풀어야 할 숙제같이 의식적으로 늘 품고 있었던 일들이기도 하다.
“갑자기 생긴 주름은 그림자의 무덤/ 심장에서 황톳물 뱉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울먹한 표정의 생생한 얼굴 하나가/ 내 얼굴을 따라다닌다” 하며 “악몽이 발견되었다” 하는데, 전제된 상황이 ‘악몽’처럼 느껴지는 것은 화자가 자신이 처한 답답하고 우울한 상황을 ‘악몽’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그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자신의 입장과 거쳐 온 시간들을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렵혀진 숫자가 기억 날 때/ 날벌레들이 바람에 몰려다닐 때/ 다정하지 못한 먹구름이 갈라지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자신의 온전치 못한 지난 시절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얼굴 속으로 모두 숨어버린” “사진처럼, 옛말 하는 인사처럼, 돌아오지 않는 표정들”처럼 애석한 현실 속에서 화자는 진정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자신의 삶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그러면서 “난 누구하고 살았을까/ 충혈된 망막에는 어떤 얼굴도 없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애초에 화자가 악몽처럼 지난 세월을 풀어내서 해몽을 하려 했던 것처럼 이 시에서 비쳐지는 여운과 같은 시적의지는 악몽을 풀어낸 앞으로의 진로를 제시하려는 데에 있다.
이번 호에서는 신진 시인을 중심으로 시를 읽었다. 시를 쓴다는 것이 그렇게 짧은 시기에 그 맛을 충분히 우려낼 수 없다는 취지에서 그동안 중진 중견 시인들의 시를 중심으로 시를 먼저 읽는 습성이 있었으나 특히 이번 호에서는 신진들의 시가 인상이 더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면의 한계가 있어 더 많은 시인들의 시를 읽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다음에 시를 더 읽을 기회가 있다면 인상이 깊은 시인들의 시를 좀 더 집중적으로 읽는 기회를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이제는 어느 정도의 시장흐름이나 독자들의 기호에 맞춰 신작시 중심보다는 독자들에게 더 가깝게 자주 접할 수 있는 작품(발표작)을 반복적으로라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 의미로 앞으로의 문예지 편집방향이나 출판기획 방향을 신작시를 중심으로 편집하는 정기간행물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보다는 발표작을 중심으로 독자에게 집중적이고 반복적으로 다가가는 무크지 같은 편집방향 방식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예전 현실 비판적 정기간행물들이 정치권력에 의해 줄줄이 폐간을 당하던 시기에 새로운 돌파구로 무크지 발행 방식으로 한국 문학을 전개하곤 했었는데 요즘 독자들의 외면으로 대다수의 정기간행물의 문예지들이 폐간을 감수해야하는 시기라 할 수 있으니 이제 다시 무크지 발행 방식으로 작품의 집중도와 선호도를 높여 문학으로의 관심을 끌어들일 시기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김광기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수료.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 작품활동 시작.
시집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과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등의 저서가 있음.
1998년 수원예술대상, 2011년 한국시학상 등 수상. <문학과 사람>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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