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42년생으로 한국의 나이 계산법으로 금년이 산수(傘壽:팔순)가 되었다.
손이 귀한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부모 보다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가정의 염원 때문에 진학의 길도 정해져 버렸다. 당시에 교사는 군 입대가 면제되었기에 부모가 바라는 직장이 교사였다. 그래서 고향에서 제일 가까운 순천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정치적 변화로 사연이 바뀌어 예비군으로 편성되어 지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학창시절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맺어진 친구들로 동아리가 만들어졌고 형제보다도 더 자주 만나는 사이여서 네 것 내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 때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1960년에 졸업을 했는데, 그때 나이가 앳된 19세였다. 다행스럽게도 바로 초등교사발령을 받아 교직에 근무하게 되어 젊음을 불태워 사랑을 베풀었다. 40여년의 경력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한다’는 철칙을 깨뜨리고 사업을 한답시고 동분서주 했으나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고 부모님은 노쇠해져 장남의 도리로 고향으로 귀향하여 과학적인 영농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행스럽게도 아내가 사고로 몸져눕게 되자 모든 일을 접고 간병하다보니 외출이 줄어들었고 그러자니 무료한 시간을 없애고자 국민주주 신문사인 한겨레 주주가 되었고 시대변천에 따라 자매사로 인터넷 신문인 ⌜한겨레 :온⌟이 창설 되었기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저의 조상인 ‘어모장군 전방삭’ 공적을 비롯한 세상사에 대한 63편의 글을 올렸다. 이 글 마다 편집을 해주신 분이 한겨레 온 김동호 편집위원이시다. 그런고로 많은 인연이 쌓이게 되었다.
김동호 편집위원이 대만에 파견근무 시 한번 만나 뵙고 싶다는 말씀을 전해왔다. 아마도 그 때가 1년 전쯤 되었을까 싶다.
귀국하신 김동호 편집위원께서 11월 21일 일요일 찾아뵙고 싶은데 시간이 어떠냐는 연락이 왔다. 너무나 고마워 기꺼이 응답했다.
내 고향 벌교와 서울은 ‘한양 천리’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순천완주고속도로를 이용하면 396km이고 5시간 정도 소요된다. 제법 먼 길이다.
내가 쓴 원고 내용 중 제자들이 베풀어준 팔순 축하연이 하도 고마워 게재했는데 이를 잊어버리지 않고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다. 고마운 말씀이오나 손님 대접에 어긋나지 않겠느냐고 사양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인정어린 식사대접에 매우 흐뭇하고 즐거웠다.
벌교자랑인 홍교를 구경하고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평소에 낙안읍성 보기를 원했는데 소원이 이루어졌다며 기뻐했다. 이어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에 들렸으나 월요일에는 휴관이어서 내부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기념품이나 선물도 드리지 못해 마음 한구석이 서운했다. 그런데 며칠 후 ‘한겨레:온’에 ‘[김동호] 내가 만난 사람-(6) 시대의 어른이며 의로운 선비 전종실 주주’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내놓을만한 일이 없는 늙은이를 너무나 과찬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각박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인정 많고 예의 바른 분을 만나 늙은이의 가슴에 따스한 정이 흘러 생의 보람을 느껴 미소 지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