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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과정을 통해 내일을 봅니다.
김효래
길고도 길었던 나의 샨티학교 생활이 드디어 끝이 났다. 2019년에 고등학생이 되고 서산에 와서 학교 둘러보고, 입학식을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2021년에 졸업을 하고 바로 곧장 ‘청춘낭만연구소 HOSPITIUM'을 시작하였다. 원래는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던 남도현샘 (남샘)께서는 샨티 퇴직 후에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 하나 있으셨다. 경기도나 다른 지역에서 자리를 잡으셔서 청년들을 위한 학교 설립, 청년들과 소통하는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고 계셨다. 하지만 남샘께서 2년간 대표교사로 샨티에 더 근무를 하시게 되어서 약간의 계획이 달라졌다. 샨티학교에서 저 프로젝트를 병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의 동기 샨티 9기 졸업생 모두들에게 같이 해보자고 권유를 하셨고 그 중 다섯 명이 관심을 표하고 시작하였다. 학교의 일을 도와주면서 우리는 우리대로의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 되는 것 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샨티학교도 선생님들 수가 부족했고, 2022년 초반에는 학생 수 역시나 부족했다. 그래서 거의 샨티학교 보조교사 급의 업무들을 진행을 했고, 보조교사와 청춘낭만연구원, 청년과정 스태프 등 다양한 직책으로 불리었다. 최종적으로는 다은이와 예준형 그리고 나 까지 셋이서 청춘낭만연구원으로써 한 해를 마쳤고, 2023년에는 졸업한 재원이까지 네 명이 되어서 움직였다. 물론 우리의 대장인 남샘도 포함해서 말이다.
작년보다 올해는 더 바쁘게 지냈고, 다양한 활동들도 했었던 것 같다.
이번에 샨티와 작별을 하게 되면서 나는 재학생 때와 보조교사 때의 내 모습을 비교하며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어쩌다보니 샨티의 시작 년도와 끝내려는 년도의 장기이동학습 국가가 같았다. 그곳은 다름 아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2019년에는 트레킹 이동학습을 가야만 했고 인도 네팔과 스페인 중에 스페인이 결정되었고, 총 800km 정도 되는 구간을 순례를 했다. 그 당시는 뭣도 모르고 선생님들과 학교 측에서 하라는 대로 따르고 배웠기에 산티아고가 뭔지, 왜 이런 길을 사서 고생하며 걸어야 하는지, 벌써부터 피곤하고 불만도 가득했다. 하지만 막상 걷다보니 스스로 완주하고 해냈다라는 뿌듯한 감정이 들 때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렇게 다녀오고서 나는 산티아고 관련된 프로젝트들을 많이도 했다. 여행 스토리가 듬뿍 담긴 개인 자서전 책도 써보고, 산티아고 느낌의 카페에서 북 토크 콘서트도 열어보고, 독립 출판사에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며 산티아고 세미나 기획도 해봤다. 심지어는 고등 2학년 때 가상으로 창업을 해보는 프로젝트 수업 시간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해외에 김밥천국이 있으면 잘 될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살짝 빌려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마을 몇 군데에 한식을 판매하는 자판기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의견을 내어 진행을 했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도 알리고, 한국인 순례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바로 사 먹는다는 생각에 진행을 했었다.
그리고 이번 2023년에는 장기이동학습 인솔교사로서 갔던 산티아고 길은 매우 달랐다. 단순히 이제는 학생 신분이 아니고 학생들을 케어하고, 인솔하고, 안전하게 잘 챙겨줘야 하는 교사의 신분이기에 다르다는 것도 있지만 이미 내가 산티아고를 다녀왔던 사람으로서 최신까진 아니어도 빠삭한 정보들을 잘 알고 있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전부 산티아고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유경험자인 나의 공도 매우 컸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하게 알려주고, 꿀팁이 있다면 전수해주고, 이럴 땐 어떻고 저럴 땐 어쩌면 좋은지 잘 알려주었다. 문뜩 2019년 때 남샘, 용수샘, 한결이형 세 분이 떠올랐다. 산티아고 인솔 교사셨고 지금 내가 교사로서 정신없이도 하고 있는 이동학습 준비 시간을 그분들도 가지셨을 테고 매우 힘드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들었지만 막상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더더욱 느꼈다. 내가 담당교사인 조의 아이들의 라인업을 듣고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았다. 매일같이 등교하기 싫어서 사투를 벌이는 친구와 최근에 학교의 규칙들을 어겨서 혼쭐이 쓰게 났던 두 친구가 나의 조원이었다. 이 친구들과 이번 이동학습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을지 부터가 걱정이었다. 그래도 정교사 선생님 두 분만 갔으면 이번 이동학습은 순조롭게 흘러가진 않았을 것 같다. 두 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고등부 보다 중등부의 비율이 더 많고 까불대고 사고뭉치인 파워풀한 아이들도 상당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또래는 당연히 아니고, 샨티학교 졸업한 선배이자 정교사 분들을 도와드리며 아이들과 여행을 가면 좋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조언도 해주고, 해당 국가를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도움이 크게 될 것이고, 선생님들도 조금이나마 덜 힘드시지 않을까 싶다. 작년에 카자흐스탄 갔었을 때도 청년 보조교사가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힘드셨을 것이다. 세 명의 보조교사가 붙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힘든 나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조는 이번 이동학습 때 좋지 못 한 평을 많이 들었다. 특히 초반에는 엄청났다. 분명 룰은 이렇다. 조원들끼리 같이 뭉쳐서 다니고, 주제를 정해서 얘기를 나누며 걷는 것 이다. 그런데 우리 조는 그것이 잘 안되었다. 한 명은 매우 뒤처지고, 한 명은 너무 앞장서서 가고, 한 명은 집에 가고 싶다며 눈물을 보였다. 아무리 내가 좋게 타일러도 대답만 잘 하고 그들은 실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여자 아이들은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겠는지 걷지 않고, 택시나 버스를 타고 목적지 마을로 이동하자는 의견을 많이 제시했다. 나는 긍정의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주며 의미가 있도록 최선을 다해 걸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 조의 다른 선생님 한 분께서도 많이 힘드셨는지 택시를 부르셔서 몇 번 타고 가셨다. 그래도 나는 절대 그런 식으로 순례를 안 하고 웬만하면 무조건 걸었다. 나에게는 다른 조원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정녕 맞는건가도 싶었다. 내가 학생 때는 전 구간을 다 걸었지만, 이번에는 짧게 맛보기 코스로 걷는 것이라 그닥 힘든 길도 없다. 그런데 택시를 탄 증거가 어쩌다보니 들려오면서 아이들이 부러워하거나 이건 아니다 라는 눈빛이 보였다. 당연히 같이 걸으러 온 것이고, 본인들도 편하게 이동하고 싶을텐데 말이다.
두 번째로는 아이들이 기본적인 규칙도 잘 지키지 못 했다. 다른 외국인 순례자 분들도 함께 사용하는 도미토리 숙소에서 아이들은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절연 활동을 사람 안 보이는 곳에서 하라고 했는데 장소선택을 잘 못했다. 게다가 술 까지 마시고 싶다는 아이들도 보여서 나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계속 이러니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진 않았고, 긍정적인 마음을 먹고 아이들을 좋게 타이르며 잔소리를 해댔다. 우리 조의 또 다른 교사이신 태언샘께서는 매우 착하시고, 화를 잘 못 내시며, 거절 하실 줄 모르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나라도 아이들에게 단호할 때는 단호하고, 이건 조금 아니다 싶을 때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아이들과 소통을 했다. 내가 이번에 이동학습 정식 인솔 교사로는 처음이라서 긴장이 많이 되었다. 카자흐스탄 때는 촬영팀으로 따라간 것이라 부담이 덜 되었다. 촬영하는 것은 내 전문 분야고 취미이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었고, 자신감도 넘쳐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조의 담당 선생님이 되는 것 이었다. 걱정이 컸다. 나는 예전부터 단호하게 말을 잘 못 하고, 거절도 못 하고, 해선 안 될 것을 하는 사람을 봐도 그냥 슉 지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내 자신이 조금 달라질 수 있도록 많이 노력을 했다. 아이들이 만만하게 보지 않게끔, 내 말을 잘 따를 수 있게끔 말이다. 실제로 한 사건으로 예를 들자면 어떤 학생이 나에게 와서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했다. 자기 SNS에 팔로워가 몇 명 줄었고 늘었는지 궁금하다는 이유였다. 나는 안 된다고 말을 했지만 앞전에 태언샘 폰으로 몇 번 봤었다며 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원래 규칙상으로는 아이들이 휴대폰을 갖고 가면 안 되며, 빌려서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어있다. 아주 가끔은 내가 직접 학생의 계정을 찾아줘서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것 까지만 했다. 하지만 계속 아이들은 휴대폰 금단현상이 와버린 사람들 마냥 SNS 하고 싶다는 말이 많았다. SNS를 안 하는 남학생은 본인이 좋아하는 게임이 내 휴대폰에도 깔려있어서 한 판만 시켜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잡고 태언샘과 따로 얘기를 나눴다. 그랬더니 힘들게 걷고 와서 쉬는 시간에 빌려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안 빌려주기도 뭐하고 거절을 잘 못 하시는 성격이시라며 빌려주셨다고 한다. 그래도 일단 정교사이시고 태언샘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으시겠거니 하고 나는 내 방식대로 정해진 법규와 방식대로 따랐다. 내가 고등학생 1, 2학년 때 태언샘과 비슷했다. 거절을 못 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던 그 당시의 내가 그대로 청년반을 했더라면 그냥 “그래, 조금만 쓰고 돌려줘” 이렇게만 말하고 냅다 빌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성장한 모습이 보이는 것이 있다면 딱 저거다. 단호해졌고, 안 될 때는 안 된다고 말 할 줄 아는 것. 바로 이거다. 이번에 촬영 담당이 내가 아닌 아이들이라서 이 부분은 매우 편했지만, 하나의 조를 맡아서 움직이는 교사는 진짜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동학습 짬바가 있는 지금의 졸업반 친구들이 고학년인 사유로 인턴십을 가야하기에 이번 이동학습을 같이 못 갔다. 작년에는 그 친구들이 있어서 더 수월한 조별 활동이 이루어 졌다고 나는 그렇게 봤다. 하지만 이번 아이들도 평균 나이대가 어린 아이들이라 그렇지 이 아이들도 샨티에서 더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면 더 대견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번에 이동학습을 다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직전에 마드리드에서 관광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유명하다는 솔 광장에 집결을 해서 조별로 명소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마지막까지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자는 관광 시간이었다. 그런데 즐거운 추억이라고는 잠시였다. 매우 큰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조원 아이 한 명이 사라진 것 이다. 처음에 솔 광장은 현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도로가 통제가 되었고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러 광장으로 집합을 했다. 우리 조도 어디 갈지 생각하다가 여학생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서 맛집을 찾아 향했다. 그런데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어느 순간 솔 광장은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서 걸어 다닐 수조차 없는 길이 되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굉장히 시끄럽고 정신없었다. 그러다가 내 뒤를 졸졸 잘 따라오던 한 친구가 어느새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멘붕이 왔다. 일단 태언샘께 먼저 상황을 알렸다. 계속해서 길가에 사람들은 넘쳐났고 하루 빨리 잃어버린 학생을 찾아야만 했다. 태언샘께서는 여자 아이들 데리고 맛집에 있을테니 내가 길을 다니며 찾아보라고 말씀하셨다. 일단 나는 그 친구 이름을 부르며 하염없이 찾아댔다. 사람들이 많아서 어디 멀리 가지는 못 했을거다. 사람은 계속해서 넘쳐났고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길을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크고 웅장한 스페인어 노래가 나오며 사람들은 국기 깃발을 들고 축제를 즐기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은 나를 좋지 않게 봤다. 축제를 즐기고 있는데 방해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실제로 중간에 경찰 한 분이 나를 붙잡더니 신고가 들어왔다며 나에게 서툰 영어로 얘기를 했다. 대충 들어보니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배낭 맨 남자 한 명이 시끄럽게 뭐라고 외치면서 사람들 축제를 방해하고, 잘 자리 잡고 노는 사람들에게 비켜달라고 굴어서 나를 신고했다고 한다. 인상착의도 딱 내 옷 색깔이었다. 그래서 나는 번역기로 지금 상황을 설명하고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들은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축제 기간이기도 하고, 너무 바쁘다고 하고, 이따가 찾아준다고 한다. 지금 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스페인 경찰들은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학생 하나 찾느라고 스페인 현지 사람들을 뚫고 계속 한 바퀴 한 바퀴를 버겁게 돌았다. 숨이 안 쉬어지고, 배와 가슴쪽이 아프고, 죽을 것 같았다. 딱 이태원 할로윈 참사 사태가 떠올랐다. 여기도 사람이 많았고 서로가 밀면서 앞으로 가라는 둥, 질서가 정돈이 안 되어서 도미노 마냥 쓰러질 뻔 했던 상황 까지, 나도 압사사고를 당할 뻔 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들이 이렇게 힘든 고통을 느끼신 것이었다. 나는 태언샘께 계속 전화를 걸며 상황 공유를 드렸는데 태언샘께서는 다른 아이들을 케어하셔야 해서 나에게 계속 찾아보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런데 저 사람들 빽빽하게 많은 곳을 계속 돌아다니기도 싫었다. 이 축제가 끝나야지만 사람들도 없어지고, 학생을 찾기 더욱 수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학생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태언샘까지 찾기 시작하셨다. 그러다가 다른 조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고 모든 조원들과 모든 샘들은 이 학생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 뒤 일정 때문에 원래 계시던 교장선생님과 이사장님도 오셔서 학생 찾기에 도움을 주셨다. 원래 저녁 때 밥 사주시려고 서프라이즈 방문 예정이셨는데 이런 소식을 듣고는 한 걸음 빠르게 오셨다. 사람들이 확실히 빠지고 나니 거리가 한적해졌다. 솔 광장은 규모도 매우 크고 광장을 중심으로 여러 갈레의 길들이 있다. 어디로 얘가 사라졌는지 갈레길 하나 씩 다 돌아다녀봐야 한다. 관광을 즐겨야 할 모든 조원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저 친구를 내 앞에 두고 내가 맨 뒤에서 다녔어야 했는데, 다른 조와 달리 우리 조는 조 담당 교사도 둘인데, 너무 죄송한 마음이 컸다. 뒤늦게 하나의 소식이 들려왔다. 경찰서에 몽타주가 비슷한 사람 한 명이 앉아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즉시 가봤고 드디어 찾았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눈물이 났다. 서원이가 나에게 다가와 위로해주었고, 이사장님께서도 따뜻하게 달래주셨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 뿜으며 기뻐했다. 이 친구 말에 의하면 조원들과 떨어진 후에 현지인 한 분이 경찰서까지 안내해주시고 도와주셨다고 한다. 게다가 내 작은 보조가방 하나를 학생에게 맡겼는데 그 가방에 본인 여권이 있어서 경찰서에 우릴 기다리며 잘 있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번 이동학습 때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고, 잊혀 질 수가 없는 큰 사건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학생 때 산티아고 갔을 때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순례길 처음 시작 때 오르는 산맥에서 나와 남샘 그리고 중등부 두 친구가 꼴찌로 산맥을 오르고 있었다. 너무 배고프고 힘들어서 산 중턱에 있는 푸드트럭 앞에 서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쉬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자기는 다 먹었으니 먼저 천천히 올라간다고 했다. 그런데 혼자 빨리 간 것인지 암만 올라가도 보이지 않았다. 혹여나 거의 다 와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전혀 다른 길로 갔을까봐 조마조마 했다. 남샘께서는 나와 나머지 친구에게 먼저 내려가 있으라고 하셨고 다른 갈림길로 가보시겠다고 했다. 혹시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올바른 길로 향해서 샨티 친구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이 사건이 잃어버린 학생을 찾고 나서 문뜩 떠올랐다. ‘남샘께서도 얼마나 애가 타시고 걱정이 크셨을까, 나도 그런데...’ 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무사히 찾아서 다행이었던 우리 조는 다시는 또 잃어버리지 않게 신경 써서 잘 데리고 다녔다. 다른 조들도 한참동안 관광을 잠정 중단을 하다가 다시 하게 되었는데 진짜 너무 미안했다.어느 조는 관광지 루트까지 다 짜놓은 모양인데 우리 때문에 몇 군데를 못 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후 햄버거로 식사를 하는데 자리가 없어서 여자들은 태언샘과, 되찾은 학생은 나랑 자리를 앉았다. 나는 계속 그 트라우마가 가시질 않았고 놀란 마음이 진정이 안 되었다.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찾아서 다행이지만 이런 일이 처음이었어서 더 그랬다. 그러더니 이런 말을 하더라. “효래샘 너무 죄송해요. 제가 잘 따라다녔어야 했는데, 그래도 제가 멀리 안 가서 다행이에요. 어서 뭐라도 좀 드세요.” 그러자 나는 말했다. “너가 죄송할 것이 뭐가 있어... 너를 앞에두고 내가 맨 뒤에 있어야 했는데... 생각이 내가 짧았네.” 암만 나도 인솔자로 갔지만 내가 사람 많은 외국에서 길을 잃어버렸다라고 생각했을 때 정말 아찔하고 끔찍하다. 진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있다면 어떠한 장소를 가던 간에 자세히 정보를 알아보고 가보자는 것 이다. 아무도 그 광장에서 축제를 한다는 정보를 모르고 단지 유명하다 라는 것만 알고서 출발을 했다. 점차 사람들이 늘고 있었지만, 더 늘어나서 걸어 다닐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될 것 같다면 즉시 다른 장소로 가서 관광을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혹은 전 날이나 당일 날에 그곳에는 일정이 있고 없고를 알고 가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왜 당연한 방법을 뒤늦게 알았는지 이것 역시 후회가 크게 된다. 그래도 사람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거나, 더 큰 문제가 발생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이 학생은 트라우마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금방 괜찮아지고 아무렇지 않다는 말에 정말 다행이었다. 다음 해에도 샨티에서 잘 다녔으면 좋았겠지만, 다른 사유로 다니지 않게 된 부분이 나로써 매우 아쉽다. 애증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큰 사건은 숙소 내에서 벌어진 폭력사건이다. 프랑스에서 머물 때 어떠한 사건이 있었고 우리 조 한 학생이 밤에 나에게 와서는 전화기를 빌려댔다.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한다. 보통은 주말에만 부모님께 통화를 시켜주는데, 당연히 안 된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도 다 부모님과 통화하고 싶을텐데 말이다. 그러더니 나에게 와서 자기가 지금 맞고 왔는데 맞은 부위가 심각하다고 했다. 누구에게 어디서 어떻게 맞았는지 이야기를 듣고 나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었다. 현주샘이나 태언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은 맞는 거고 일단 나는 이 학생이 걱정되고 아프다고 하니 빠르게 연락만 드리라고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그 후에 선생님들도 알게 되었다. 원래 이 학생은 눈 쪽이 좋지 못 했는데 가격을 당해서 상태가 더 나빠졌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 후로는 약 처방을 받고 내가 약 먹을 시간, 안약 넣을 시간에 잊어버리지 않게끔 불러서 도와주었다. 때린 사람도 화가 나서 때렸겠지만 폭력은 당연히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한 규칙이니까.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는 나중에 사과는 했지만 혹시나 몰라서 붙어있게 두지 않도록 웬만해서는 떨어져서 앉게 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많아서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만 갔다.
그래도 끝내 이동학습을 성황리에 잘 마쳤다. 다사다난 했던 순간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귀국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진짜 보통일이 아니구나, 내가 학생 때 계시던 선생님들 리스펙 존경합니다.’ 딱 이거다. 더군다나 힘든 여정지로 힘든 아이들과 힘든 나날이 있었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끝날 때 까지 다 끝난 것이 아니다. 후속작업이 남아있다. 아이들이 여행 에세이도 써야 하고, 여행 영상도 제작해야 하고, 학기말 성장발표회 준비까지 있다. 그래도 일단 귀국을 했으니 아무 생각 안 하고 1주 반 가량을 최고로 행복하고 놀면서 쉬었다. 그리고 쉬는 기간이 왜 이렇게 후다닥 지나가는 것인지 당최 모르겠다. 복교 후 아이들이 다 쓴 글도 하나하나 봐줬다. 여행 에세이를 출판했던 사람이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출판사에서 인턴십도 해본 경험이 있어서 전문가 포스로 자세히 봐줬다. 게다가 여행 영상 제작도 전부 초보들이라 영상 프로그램 활용법을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영상까지 다 만들고 성장발표회까지 다 끝내니 후련하고 행복했다. 나와 이동학습을 함께 갔던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에 남아줬으면 한다.
한 가지 재미난 기억이 문뜩 떠올랐는데 산티아고 길 중간중간에 내가 학생 때 갔었던 2019년 해의 낙서들을 길 가다가 발견 한 것이 너무 추억이고 재밌었다. 막상 인솔 교사로서 힘들게 일 하고 있으니 동기들과의 추억들도 떠올랐다. 당시 우리 조 중에 윤수라는 친구가 낙서하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피레네 산맥에 이 낙서를 보고 빵 터졌다. ‘짬주, 횰애, 노아, 싸움신, 유랑 다녀갑니다.’ 우리 조의 공식 별명(?) 이라고 할 수 있는 호칭들이다. 순간 눈물이 다 났다. 이것 외에도 두 번의 윤수 낙서를 봤다. 정말 재밌었다.
그리고 올해 이번에는 글 쓰는 과제가 유독 많았던 것 같다. 다른 청년반 사람들은 작년이랑 비슷하지만 난이도만 어려워졌다고 느낄 수 있는데 나는 전혀 아니다. 일단 작년에 나는 학교 홍보 업무에 집중을 했었고, 별도의 다른 업무들이 많아서 과제를 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과제를 할 시간이 났었기에 같이 참여를 했다. 그런데 이거 참 큰일이구나 싶었다. 내 장점이 글을 잘 쓴다는 것 인데 뭐가 큰일이냐고? 쓰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샨티에 입학하고 나서 글쓰기와 사진 촬영을 좋아해서 학교 카페에 학교 행사나 일상 등의 소식을 전하는 게시물을 많이 올렸다. 그때마다 좋은 평의 칭찬을 많이 듣곤 했다. 그런데 이번의 과제는 주제가 쥐어지면 그것에 대한 감상평이나 논문을 쓰는 방식이었다. ‘미생이나 슬램덩크에 담긴 성장과 관련된 동기부여가 가능한 인지발달 도식 (schema) 연구’ 라는 과제를 시작으로,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착각 책을 읽고 논문쓰기’ 과제도 굉장히 애를 많이 썼고, 샨티학교 이사님이시자 ‘죽음과 친해지는 삶’ 책을 쓰신 한석훈 교수님께서 평가해주신다는 시험같은 과제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 과제는 ‘인간의 삶에 반드시 능동성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것이 왜 필요하며, 능동성의 삶에 줄 수 있는 영향에 대해 기대하는 바와 더불어 청년과정 기간 중 능동적인 판단을 했던 경험과 평가를 기술하시오.’ 조금 길지만 이런 주제였다. 이렇듯 남샘께서 주제를 쥐어주시거나, 참고용으로 읽고 시청해야할 자료들도 보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보통 내 자서전을 쓰거나 내가 지어내는 창작물 혹은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소식들을 설명하는 글을 쓰는 데에는 자신이 있지만 저런 어렵거나 생각이 많아지는 주제는 글쓰기가 어렵다. 솔직히 누가 글쓰기를 좋아 하겠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과제는 진짜 다시 생각해도 짜증나는 과제였다. 나랑은 거리가 먼 주제고, 작년에 인문학 발제를 해왔던 사람은 수월 할망정 나는 결코 다루기 조차 어려웠다. 아무리 책들을 계속 읽어보고, 인터넷을 찾아봐도 머릿속에 입력이 전혀 되질 않았다. 막판에 남샘과 차근차근 이야기 해나가며 공부를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주제였다. 학생 때 했던 발제시간은 그래도 이런 난이도의 어려움은 아니었다. 그 당시 왜 남샘께서는 이런 어려운 발제 주제를 내주시는지 의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 껌이었다. 물론 자유적으로 주제를 잡고 발제문을 쓸 때는 더 좋았지만. 아무튼 내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힘들었던 과제였다. 그 뒤로도 계속 배운 내용을 훑어보고, 관련 책들도 시간 날 때 다시 읽어봤지만 정의랑은 다시 미팅하고 싶지 않다. 이 과제 제출 기간이 2개월 정도였는데 1년을 줘도 나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미생 과제 때는 너무 수월했다. 어릴 적에 드라마로 미생을 본 적이 있어서 그렇다. 그래도 기억이 확실히 나진 않아서 다시 처음부터 정주행을 했다. 어릴 적에 봤을 때는 그냥 재미로만 부분부분 봤었는데 제대로 보니까 현실 판이 따로 없다. 샨티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처음에 어리버리 했으며 실수도 많고, 일도 제 때 안 하고,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생겨도 상사의 말씀에 존중도 안 하고 무조건 내 말만 맞다고 판단했었다. 더군다나 해야 할 일이 기본적으로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도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점차 실수도 줄고, 상사와 소통 할 때도 무조건 내 말이 옳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존중해 드렸다. 나중에는 일 들이 익숙해져서 인가 후딱 끝내버리려는 일들도 있고 재밌는 일들도 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교사이고, 청년으로써 점차 배워나가며 성장한 것 같았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힘들더라도 끝까지 버텨라.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다." 이 대사였다. 지금도 내 인생 명언이기도 하다. 내가 당시 칼럼으로 썼던 글을 요약하자면 어떤 사람이던 힘든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다. 하지만 난 한 번 시작한 일은 결과가 어떻든 꼭 끝을 봐야만 하는 사람이다. 무책임하니까, 해보겠다고 한 일을 중간에 끝내버리는 거니까. 나도 솔직히 지금 너무 힘들다.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주변에서는 항상 이 소리를 나에게 하신다. “너무 힘들면 직장 상사나 교장샘께 얘기 드리고 쉬엄쉬엄해. 무리하면 큰일 난다.” 하지만 난 해내고 만다. 어떤 일이 던 안 힘든 일이 없다.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재미를 찾게 되고 어쩔 때는 일 하기가 즐거워지는 순간도 다가온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일 할 맛이 나질 않을 텐데, 내가 하고 싶고 즐겁고 편한 일을 하면 힘들어도 할 맛이 난다.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 외에 미생에서 나온 수많은 장면들과 명언들로 인해 배울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드라마 등장인물들 중에 나랑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도 있었고, 나보다 대단한 사람들도 있었고, 내가 피하고 싶은 상대의 사람들도 있었다. 한 회사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미생 엔딩으로 마음 맞는 사람들과 다시금 뭉쳐서 하나의 회사를 꾸려 나가는 장면인데, 나도 익숙하고 편한 장소 즉, 내 모교인 샨티학교에서 마음 맞는 9기 동기들 둘, 샨티학교에서 스승이셨던 샘들과 같이 일을 하니 매우 좋았다. 학생 때만 해도 내가 샨티에서 근무를 한다는 것이 상상조차 안 되었다. 물론 주변에서 나는 샨티 선생님을 하면 잘 하겠다는 말은 많이 하시고 추진과 권유는 주셨지만 말이야 쉽지 정말 내가 할 수 있을지 의문점도 들었다. 하지만 어찌저찌 하다보니 근무를 하게 되었지만... 아무튼 이번 글쓰기 과제를 통해 점점 내가 글을 더 잘 써지는 것 같다는게 한 눈에 크게 보였다. 책도 다양한 분야로 읽게 되고, 이렇게 글을 써보는 훈련을 하니 점차 느는 것 같다. 내가 지금부터 책도 더 읽고, 글도 더 다양하게 쓰고 계속해서 연습하고 노력을 하다보면 나중에는 정의랑도 친해 져서 글로 다뤄 볼 수 있겠지?
이 밖에도 나는 다양한 활동들을 올해 했다. 우선 할 사람이 없어서 흐지부지 되버린 비누공방 수업을 내가 직접 공부하고, 연구해서 재가동 시켰다. 세 명의 친구들이 기꺼이 해보겠다고 와줘서 너무나도 좋았다. 각자의 개성대로 예쁜 색과 향, 천연 재료들을 넣고 만든 비누를 선물하고, 판매하고 했던 추억이 있다. 그리고 세 가지 캠프를 올해 했던 것이다. 학생 때 캠프 참가만 해봤지 내가 기획해서 했던 것은 난생 처음이다. 첫 번째는 채샘과 함께 갔던 태국 끄라비 캠프다. 이 때는 내가 기획자는 아니지만 이번 년도에 캠프 하나를 맡아서 진행 한다고 들었기에 캠프 인솔 교사로서는 또 어떻게 하면 되고, 이동학습과는 뭐가 다른지 체험도 해볼 겸, 채샘께서는 어떻게 캠프를 운영하시는지 궁금해서 갔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나라로 놀러 가고 싶어서 간 목적도 물론 있지만...^^ 그 다음 캠프는 내가 직접 기획해서 가는 주제 별 캠프였다. 나는 ‘문화’라는 컨텐츠를 갖고 사진 출사 캠프를 기획했었다, 서산 깡촌에만 있는 무료한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투어를 하며 사진들을 각자 개성 있게 촬영하여 전시회를 여는 것을 목표로 했다. 기획한 대로 다 안 흘러갔지만 나의 첫 캠프 기획 데뷔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각 캠프마다 정교사 샘들께서 같이 가주셔서 안심도 되었다. 그리고 여름방학 때 다른 샘들 없이 오직 나 홀로 기획해서 놀러가는 캠프를 기획했다. 주제 별 캠프와 달리 이번이 진짜 찐이구나를 느꼈다. 강릉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여러 관광지도 가보는 캠프였다. 무엇보다 올 여름을 알차게 보냈다고 느끼게 만들어주는 캠프로 기획을 했다. 이 캠프도 물론 변수가 있었지만 성황리에 잘 끝냈다.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못 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미성년자 숙박 동의서였다. 주제 별 캠프 때는 내가 서울 용산에 살기에 그 쪽 부근의 아는 지인 분들을 통해서 숙소를 잡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판 모르는 분들이 운영하시는 곳으로 갔었기에 학생들이 보호자 없이 자는 것을 동의를 받아야만 했다. 사장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고 나서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래도 사장님께서 각 집의 부모님께 통화 연결을 하셔서 동의를 받으시고 금세 해결이 되었다. 다음번에는 꼭 이 점을 유의하고 신경써서 캠프를 기획해야겠다고 한 가지를 느끼고 배웠다. 그리고 내 청년반 생활 2년 동안 수 많은 업적들이 있지 않는가! 샨티학교 카페 리뉴얼을 시작으로, 학교 복도에 졸업생들 소개 배너 제작과, 카자흐스탄 여행 영상물에, 1년차 때 나온 청년반 자서전 까지! 가만 돌이켜보면 정말 추억이 방울방울 남고 뿌듯한 일들을 많이 했다. 후회는 없다. 잘 해냈다고 스스로가 느낀다. 이 업적들은 2022년에 내가 출간한 ‘나는 샨티학교 교사다’ 책에도 나와 있으니 짧게 생략하겠다.
나는 이제 샨티학교 청년반을 떠나는 입장으로써 청년반도 계속 샨티에서 유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교사 만큼은 아니어도, 학교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고, 선생님들을 도와드리고,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크게 성장해나가고 배울 점도 많이 생긴다고 본다. 다행히도 재원이와 이번에 졸업하는 영진이가 청년반을 하겠다고 하여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대를 이어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도전정신이라고는 1도 없던 나였는데, 어느 순간 생겨버렸다. 나는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 하기 익숙한 것, 애 쓰지 않고 편하게 끝낼 수 있는 것만 하기 좋아했던 사람이다. 사실 어떤 사람이나 누구나 다 그렇다. 이제 정말 샨티와 작별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재학생 시절을 졸업 할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났다. 왜? 곧바로 청년반 시작 동시에 샨티를 떠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작년 12월 말 성장발표회가 끝나고 다과회 시간에 부모님들께 마지막 인사를 정식적으로 드렸다. 내가 26일에 군 입대가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픈 관계로 퇴소를 하고 어쩌다보니 이번 수료식 때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정말이지 같이 마무리를 지을 수 있어서 기쁘다. 학부모님들께서도 나에게 말씀하신다. 군대를 다시 안 가게 된다면 샨티에 남는 것인지, 특별한 사유 없으면 몇 년만 더 효래샘으로 샨티에 계셔주면 안 되는지, 솔직히 내가 샨티에서 큰 공을 때때로 세우기도 한다. 아이들도 나랑 못 지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5년이라는 너무 긴 시간동안 샨티에 있었다. 남샘께서 전부터 기획하고 계시는 청년 학교 프로젝트도 같이 해보고 싶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다리가 좋지 않아서 다니고 있는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고 진료기록지를 병무청에 제출해야 한다. 그래서 서산에 계속 있기는 무리다. 굉장히 아쉽고 유감스러운 소식이지만 병무청에서 공익 근무나 군면제 판정을 주더래도 나는 샨티에서 더 근무 할 생각이 없다. 이제는 샨티를 편하게 놀러가고 싶고, 졸업하고 한 번도 불려보지 못 한 ‘9기 졸업생 선배’ 호칭 한 번 들어보고 싶다. 샨티야 정말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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