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란(寒蘭)의 품격
베란다에서 풍기는 향이 은은하다. 몇 년 전에 선물로 받은 한란(寒蘭)인데 그때는 꽃이 피었었지만 그 후론 꽃을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아주 풍성하게 피었다.
겨울에 꽃이 피는 특성 때문에 한란(寒蘭)이라고 한단다. 여러해살이식물인데 길쭉길쭉한 초록색 잎 사이로 올라온 꽃대는 길이가 50㎝ 정도이며 밤색 계열의 꽃이 7송이나 피었다.
다른 꽃에 비해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귀하다고 생각하니 자주 들여다봐진다. 다른 해에는 겨울에 추워서 얼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거실에 들여놓았었는데 왠지 이번엔 베란다에 그냥 두었었다. 그런데 저리 예쁜 꽃을 피우다니. 난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추위를 겪어내야만 하는 과정도 필요했던 걸까.
꽃말이 ‘귀부인’이다. 과연 모양에 딱 어울리는 꽃말이다. 남들 눈에 썩 뜨이지 않지만 은은한 멋이 풍기는 여인과 딱 어울리는 꽃인 듯싶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가는 꽃이다. 팔랑개비 같은 꽃잎 앞에 다소곳이 들어앉은 꽃심, 하얀 바탕에 갈색 얼룩무늬가 자신의 존재를 각인 시켜주는 듯 선명하게 찍혀 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내심엔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위엄이 서려 있다. 차분하고 당당하면서도 섬세한 마음을 갖춘 귀부인의 자태다.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살아가는 마음이라면 어느 정도 평정심을 품고 사는 것이리라. 스스로 평정심을 갖추고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터이니 어떤 야유나 시기심 섞인 말들에 대해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 큰 걱정 없이 살고 있다지만 소소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때가 종종 있다. 나와 맺어진 인연들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의심스럽기도 하고 매몰차게 뿌리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도 남아 있다. 괜스레 울컥해지고 서러워지기도 한다. 이럴 때 무언가 내 자신을 잡아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다행히 요즘은 저 귀부인 같은 한란이 있어 그 역할을 해 주는 것 같다.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과 눈 맞춤하고 있으면 코끝을 통해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향기로 찌푸려졌던 마음이 서서히 맑아진다.
마음의 감정을 들끓게 하는 것과 가라앉혀주는 것의 차이는 뭘까. 감정이입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점만 쌓여가는 요즘에 때맞춰 피워준 한란이 고맙다. 깊은 호흡으로 내 안에 가득 담아 두었다가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 주면 좋겠다.
나는 그런 꽃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