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에서 속죄 제물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유월절 날 마지막 만찬을 드시고 제자들은 찬미하며[시115편 118편] 예수님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셨다[막14:22~26].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로 노래하시고 죽음의 고통이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셨다.
이것도 또한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는 죽음의 고통을 달게 당하시는 하나의 표시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세 가지 장소를 정하여 간격을 두시고 기도하시었다.
열 한 제자가 함께 예수님을 따라 기도하러 갔으나 겟세마네에 도착하여 여덟 제자는 한 곳에 있게 하시고,
세 제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좀 더 들어가서 그들도 한 곳에 머물게 하시고, 예수님은 따로 자리를 정하여
홀로 기도하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성전의 제도와 같은 것이다. 구약 성전에는 백성들이 서있는 장소가 있고,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있고,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가 있었다. 이렇게 성전의 제도는 간격이 있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들어가신 장소는 구약의 진정한 지성소인 까닭이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 지성소에서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되시는 피땀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전의 지성소는 겟세마네 동산의 지성소에 대한 예언이었고, 겟세마네 동산의 지성소는
구약 성전 지성소의 성취였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은 우리의 신앙이 쳐다볼 지성소인 것이다.
※지성소[至聖所]는 구약에서 최상급 형태로 표현되며 성전안에서도 가장 안쪽의 지극히 거룩한 처소를 말한다.
이곳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서 언약궤가 놓여 있었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차례[대속죄일]만 들어 갈 수 있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가로놓여 하나님과 인간의 좁힐 수 없는 간격을 나타내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의
완성자이요,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해 가로 놓였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었다.[출26:33,34, 히9:1~28, 10:19~20].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지성소의 기도 소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거리가 돌 던질 만큼의 짧은 거리라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고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인 그들이 어찌 예수님의 그 큰 기도의 내막을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누가 예수님의 그 때의 심경을 알 수 있으며, 그 고통을 측량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은 하나님을 알되 완전히 다 알 수 없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에게 이루어진 일들은 제자들에게는 아주 짧은
거리에 있었던 일이지만 역시 다 알 수 없는 무한히 먼 거리에있었던 일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마26:39].이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고
자기는 지극히 낮추는 기도요, 하나님 앞에 자기를 극히 비천하게 처하면서 간절히 구하는
기도의 모습이시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
[눅22:44]. 이 말씀은 그의 땀에 피가 섞여 흘러 나왔음을 뜻한다. 사람은 극도의 고통이 심령에 일어나는 때에는
피가 땀구멍으로 스며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백성의 죄와 허물과 저주를 대신 걸머지셨으니만큼, 자기 백성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모두 다 몰려와서 오직 한 분 예수님께서 사람 되신 성품으로 그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으니 그 고통과 두려움 당하심을
말로 형언할 수 없으리라. 그 때에 한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예수님의 쇠약하신 몸에 힘을 도와서
대속의 사역을 위하여 그 괴로움을 계속적으로 받으실 수 있게 하셨도다[눅22:43].
이렇게까지 예수께서 하나의 천사에게 도움을 받으심도 이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낮아지신 미천한 생활의 한 방편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극도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장차 받으실 십자가상의 죽음을 심령으로 받으심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심령의 극심한 곤경 중에서도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도록 부르짖으며 기도 드렸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22:42]. 여기 이 잔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번만 있는 고통으로서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이 잔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대신 버림을
당하신 자리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찾으셨으나,
하나님은 그를 계속 외면하시고 버리심을 당하시는 고통스러운 일이 이 잔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해보지 못하는 특별한 고통의 잔을 받으신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당할 수 있는 고통과 두려움은 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없어지는 것이다[요일4:18/사랑 안에서 두려움이 없어짐].
그러나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통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당하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 아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통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번만 있었던 고통으로 그 고통의 깊이를 인류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독과 고통, 곧 이 잔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도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집앞에서 문을 닫아 잠그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음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때에 땅의 세계도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었고 배척하였다.
왜냐하면 땅에 있는 것들이 참된 선이라면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써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으니 땅에 있는 것들도
예수님을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 값을 담당하시며 받으시는 고통의 크심은 측량할 길이 없도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 우리를 위해 구속의 대 사업을 이루시려고 고통을 이와 같이 당하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죽을 때에 죽음의 고통과 싸우면서 그것을 받기 때문에 죽음의 맛을 그대로 다 보지 않고 건너 뛰어지나간다. 또 죽을 때에 다만 육신적 죽음의 맛을 조금 당해 볼 뿐이고, 영원한 죽음의 무서운 쓴 맛을 모르고 죽는다.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당하고 영원히 갈라져 지옥의 고통을 받음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죽음에 대하여 맛보는 정도는 초등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영원한 죽음의 십자가에 달려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이 맛보신 죽음은 사람이 맛보는 죽음의 정도와는 비교 할 수 없이 높고 깊고 크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하신 죽음의 고통은 컸던 것이다.
여기 겟세마네는 예수님께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한 속죄 제물이 되셨던 곳이요,
골고다는 예수께서 세상에 나타나도록 우리를 대신한 속죄 제물이 되신 곳이다.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외부적 세력으로 말미암아 된 일이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의 제물이 되신 것은 그가 몸소 친히 하나님에게 영혼을 드린 일이었다.
골고다에서는 예수님의 몸이 피를 흘리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비유하자면 예수님의 영혼이 피를 흘리신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마지막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자고 쉬라”[마26:45].
이것은 예수께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그 자신을 바치는 승리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영적 승리의 결과이다.
예수님은 이로써 이제부터 불안에서 완전히 떠나 태산같이 안정하신 태도로 모든 환난의 십자가를 겪어 나아가셨다.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아멘.
솔 향. 목 사 이 성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