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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 얼(고성문화원, 2021)』에 소개된 묵희墨熙
도솔산인 2024. 7. 25. 14:31
『고성의 얼(고성문화원, 2021)』에 소개된 묵희墨熙
■ 묵근자 墨根子 묵희墨熙: 신필神筆이라 불리던 서예가
고성을 빛낸 서예의 인물로서는 단연 구한말의 묵희라는 인물이 있다. 자는 정회正晦, 호는 구절산인九節山人, 경산敬山, 묵근자墨根子로 불렸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한편에서는 신필神筆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글도 그림도 아닌 황칠이란 혹평을 받기도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 왜 신필이라 칭하는지 그 연유를 깨닫게 된다.
묵근자墨根子는 누구일까. 1981년에 간행된 『경허법어』에는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경상도에서 유명한 묵근자를 찾아가 만난 얘기가 실려있다. 경허가 묵근자가 앉아 있는 방안에 들어가자 묵근자는 경허를 보고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마주 보고 있다가 경허가 먼저 “묵근자! 묵근자! 내 그대의 성화를 들은 지가 오래더니, 과연 헛된 이름이 아니로군.” 하자 묵근자가 “네, 경허대사, 경허대사! 성망을 들은지 오래인데 바로 경허대사가 아니시오.”라 하고 서로 뜻이 통하였다. 묵근자는 바로 다인상을 차려오라고 분부하였고, 여러 날 동안 경허를 모시고 법담法談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경허가 해인사에 주석할 무렵 경남 고성 동해면 장기리의 묵희墨熙(1878?~1942?)라는 인물이 바로 그다. 그는 축지법을 하고 도술을 부리는 이인異人이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의 선대는 서울 점곡店谷에 살았으며 조부가 통영 통제사 아래 무관 벼슬을 지냈으나 정변으로 몰락, 삼족을 멸하는 수난 속에 유일하게 천애의 고아로 살아남아 통영의 어느 학자 집에 묵동墨童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묵희라는 성과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항시 그 선비의 먹이나 갈면서 먹빛에 젖어 있는 그를 드나들던 선비들이 농 비슷하게 성은 묵씨고 이름은 먹물이 말라 반짝거리는 빛날 희熙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곳에서 타고난 재주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한학에 조예가 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묵근자는 중국 출신으로, 통영에서 고성 동해면 용흥마을 일대에 거주했으며 묵근자의 형제는 모두 5남매로, 이중 여동생은 동해면 장기리의 제씨 집안에 시집갔다고 했다”고 했다. “1940~50년대에 묵근자의 묘가 동해면에 있었으나 비가 많이 와서 떠내려가 유해를 찾지 못했지만 유골을 보았다.”고 한다. “묵근자는 키가 크고, 상투를 틀어 망건을 하고 다녔다. 얼굴은 둥글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생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때, 그는 통영을 떠나 지금의 진양군 정촌면 동물리冬勿里 안락암安樂庵이란 동굴에 기거하면서 아랫마을 만석군의 대부호인 구기언具基彦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을 위한 양병養兵의 식량으로 암자가 있는 일대의 전답을 구씨가 사들였으며 경산敬山을 상해 임정의 연락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활동하던 중, 둘 다 체포돼 구씨는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고 경산은 3년여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게 되었는데 그가 풀려난 이면에는 경산의 필적을 본 일본 관리인들이 탄복하여 아부하여 글씨를 받아갔다 하니 필시, 감형減刑에 그의 글씨가 작용했을 터이다.
그 후, 그는 고성군 동해면 대초방 점골이란 곳에 서당 겸 집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작고하신 고성오광대의 조용배도 그에게서 수학을 했다고 한다. 묵근자의 글씨는 일본에까지도 전해져 가보로 소장되고 있으며, 동해면 장기리 군진고개에 있는 ‘창녕 조씨 열녀비문’과 1937년 4월 25일자 매일신보 기사 제자題字로 쓴 ‘광풍제월光風霽月’이 그가 남긴 글씨이다. 현재 남아있는 그이 작품으로는 1900~1910년을 전후한 것으로 고성 구만면 이회서당에 걸려 있는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초서체와 육경일금六經一琹 편액 등의 글씨다.
출처 : 『고성의 얼(고성문화원, 2021)』
■ 묵희(墨熙, 1875~1942)
묵희(墨熙, 1875~1942) 선생은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군진마을)에서 태어나 1900년대 초 문장력과 서예가 뛰어난 인물로 선생의 유문(遺文)이 일본에까지 전해져 소장되고 있으며, 일명 묵근자(墨根子),구절산인(九節山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190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전해지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구만면 이회서당에 보관중인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초서체 10폭 병풍과 육경일금(六經一琴) 편액작품 1937년 4월 25일자 매일신보의 제자(題字)『광풍제월(光風霽月)』등 3점이 확인되었으며, 최근 고성지역에서도 묵희(묵근자)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1937년 당시 매일신보에 선생의 글씨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전국적으로 인정받은 명필가였다.
현재 이회서당에 보관중인 선생의 대표작인『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초서체 친필 10폭 병풍 작품은 신암 허격 선생의 부친인 성재 허홍 선생과 묵희 선생이 젊은 시절 교류하며 성재 선생의 자택을 방문해 쓴 작품으로 전해지며 그 시기는 1900~1910년대로 추정된다. 그리고, 묵희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1942년 작고하였다.
출처 : 고성군청 홈페이지 고성의 인물
■ 서예가 묵근자(墨根子), 묵희(墨熙 1878-1938?) 거제 장목면 출신
일제강점기 시절,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에 묵근자(墨根子)라는 거사가 살았다. 그의 본명은 묵희(墨熙 1878-1938?)이다. 그의 호는 경산(敬山) 또는 구절산인(九節山人)인데, 축지법을 하고 도술을 부리는 묵근자(墨根子, 墨君子)로 더 알려진 이인(異人)이었다. 그는 서당 훈장을 하면서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전해오는 작품은 그 수량이 적은 편이다. 묵근자의 글씨는 일본에까지도 전해져 소장되고 있으며, 경남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 군진고개에 있는 '창녕조씨 열녀비문'의 글씨가 묵희 선생의 것이다.
묵희(墨熙) 선생의 글씨로는, 1937년 4월25일자 매일신보 기사 제자(題字)로 쓴「光風霽月(광풍제월)」이 있고, 이회서당에 편액되어 있는 「六經一琴(육경일금)」이 있다. 육경과 거문고, 즉 군자가 문사철(文史哲) 못지않게 예(藝)와 풍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묵근자(墨根子)는 초서체(草書體)의 신필(神筆)로 알려졌으며, 그의 유작(遺作) ‘六經一琴’에 대하여 근세의 명필(名筆) 청남(菁南) 오제봉(吳齋峰) 거사(居士)가 평하기를 “六經一琴의 글씨는 무심(無心)의 경지(境地)에서 우연히 사출(寫出)된 것이다”라며 극찬하였다.
묵희(墨熙) 선생은 그의 조부님 즈음 때, 중국 청나라에서 건너와 거제시 장목면(그의 선산이 있었다)에서 귀화해 살다가, 젊은 시절 경남 통영을 거쳐, 이후 고성군 동해면에 정착하여 살았던 유명한 서예가였다. 그의 청년시절 통영 입자방(笠子房)에 근무할 때부터 글씨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후 합천의 유학자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하생이 되고부터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유명한 서예가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성씨 묵(墨)도 중국 백이(伯夷)의 성씨인 묵태씨(墨胎氏)의 ‘墨’을 취해 직접 사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전국적인 호적 정리 時). 아마 그는 선조들로부터 중국말과 한문을 직접 어린 시절부터 배우고 익혀 남달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 다음은 일제강점기 시절, 거제도의 유학자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 선생이, 묵희(墨熙) 선생이 거제도 선산(先山)에 방문했을 때 잠시 만난 후, 묵희에 대한 짧은 기록을 그의 문집에 적어 놓은 글이다.
⇨ 통영에 묵희(墨熙)라는 어떤 사람이 나와 비슷한 연배인데 일찍이 장목리에 있는 선산(先山)을 찾아왔다가, 지나가던 나와 잠시 만났다가 갔다. 그 후에 윤규상(尹奎祥)이 학문을 배우려고 갔던 연고로, (거제도) 윤규상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내왕했다. 그 사람이 오니 지나는 사람이 의심이 많아 물으니, 장목리 김극련이 장목에서 말했다. “(그가) 통영으로 옮겨 갔을 때는 성(姓)씨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장목에서 왔던 이유로 성(姓)씨 목(木)과 소리(音)가 비슷한 묵(墨)으로 (성을) 삼고 통영 사람이 되었다. (그가) 입자방(笠子房)에서 일하면서, 항상 벼루에 먹을 갈고 있었던 이유로 (입자방이) 묵서방(墨書房)이라 부르며, 이로써 성(姓)이 묵(墨)씨가 되었다”전한다. (사실은) 묵희(墨熙)가 일찍이 유람하다가 합천출신 유학자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하생이 되었고,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성씨인 묵태씨(墨胎氏)를 얻어 백이(伯夷)의 후예가 되었다. 정애산(鄭艾山) 어른이 그 마음을 보내면서 글씨(서예)를 권면케 했다한다.[統營有墨熙者 一人與余同年 嘗訪其先山於長木里 而過余暫逢而去 其後尹奎祥往受學 故累訪奎祥 而來往焉 其人來歷人多疑論 長木里金克連有言 自長木而移去統營時 姓無可考 而自長木來 故因姓木而音相近 而爲墨云統營人云 遊於笠子房常常磨墨 故謂之墨書房 而因姓墨云 熙嘗遊於鄭艾山載圭門 以伯夷姓墨胎氏 故爲伯夷之後裔 艾山丈以其意贈書奬之云]
출처 : (N) 해암 고영화 - <서예가 묵근자(墨... : 카카오스토리 (kakao.com)
묵희(墨熙, 1875~1942) [편집중]
본관은 고죽(孤竹), 자는 정회(正晦), 호는 경산(敬山), 일명 묵근자(墨根子),구절산인(九節山人)이다. 묵희(墨熙) 선생은 경남 거제 장목면 출신이다. 젊은 시절 경남 통영을 거쳐, 이후 고성군 동해면에 정착하여 살았던 유명한 서예가이다. 묵희 선생의 생몰년은 기록마다 상이하다. 거제 유학자 김계윤(金季潤 1875∼1951)의 명계유고(明溪遺稿)에 '자신과 동년(同年)[統營有墨熙者 一人與余同年]'이라는 기록이 있어, 생몰년은 고성군청 자료를 좇았다.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 선생의 『명계유고』그에 대한 기록이다. "그가 통영으로 옮겨 갔을 때, 거제 장목에서 왔던 이유로 성(姓)씨 목(木)과 소리(音)가 비슷한 묵(墨)으로 (성을) 삼고 통영 사람이 되었다. 그가 입자방(笠子房)에서 일하면서, 항상 벼루에 먹을 갈고 있었던 이유로 묵서방(墨書房)이라 부르며, 이로써 성(姓)이 묵(墨)씨가 되었다고 전한다.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성씨인 묵태씨(墨胎氏)에서 묵(墨)을 취하고 고죽(孤竹)을 본관으로 삼았다. 묵희(墨熙)가 일찍이 유람하다가 합천 출신 유학자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하생이 되었다. 정애산(鄭艾山) 어른이 그 마음을 보내면서 글씨(서예)를 권면케 했다한다."
고성문화원에서 발간한 『고성의 얼(고성문화원, 2021)』 에 "통영을 떠나 지금의 진양군 정촌면 동물리(冬勿里) 안락암(安樂庵)이란 동굴에 기거하면서 아랫마을 만석군의 대부호인 구기언(具基彦)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을 위한 양병(養兵)의 식량으로 암자가 있는 일대의 전답을 구씨가 사들였으며 경산(敬山)을 상해 임정의 연락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활동하던 중, 둘 다 체포돼 구씨는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고, 경산은 3년여 옥고를 치렀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그에 대한 기록은 확인 되지 않는다.
190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전해지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구만면 이회서당에 보관중인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초서체 10폭 병풍과 육경일금(六經一琴) 편액작품, 1937년 4월 25일자 매일신보의 제자(題字)『광풍제월(光風霽月)』등 3점이 있다. 최근 고성지역에서도 묵희(묵근자)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1937년 당시 매일신보에 선생의 글씨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전국적으로 인정받은 명필가였다. 묵근자의 글씨는 일본에까지도 전해져 소장되고 있으며, 경남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 군진고개에 있는 '창녕조씨 열녀비문'의 글씨가 묵희 선생의 것이다.
1981년에 간행된 『경허법어』에는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경상도에서 유명한 묵근자를 찾아가 만난 얘기가 실려있다. '경허가 묵근자가 앉아 있는 방안에 들어가자 묵근자는 경허를 보고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마주 보고 있다가 경허가 먼저 “묵근자! 묵근자! 내 그대의 성화를 들은 지가 오래더니, 과연 헛된 이름이 아니로군.” 하자 묵근자가 “네, 경허대사, 경허대사! 성망을 들은지 오래인데 바로 경허대사가 아니시오.”라 하고 서로 뜻이 통하였다. 묵근자는 바로 다인상을 차려오라고 분부하였고, 여러 날 동안 경허를 모시고 법담(法談)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세간에 구전으로 떠돌던 천왕봉 의병 석각의 실체가 최근 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소장 김종식)에 의해 밝혀졌다. 천왕봉 석각 명문은 세로 16자 25줄로 전체가 392자, 앞부분(20줄)은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을 기술하고, 뒷부분(5줄)은 천왕(天王)을 상징하는 지리산 천왕봉의 위엄을 빌어 오랑캐(日帝)를 물리쳐 밝고 빛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는 내용이다. 이 명문은 묵희가 찬(撰)하고 권륜(權倫) 썼다. 청하(淸河) 권병국(權秉局)의 『청하일감(淸河日鑑)』에 묵희가 지은 「청하일감서(淸河日鑑序, 1924)」와 「청하호서(淸河號敍, 1923)」 2편과 7언절구 '답간기(答簡寄)' 한 수가 실려있다. 명원정사(明源精舍) 계해년(1923) 3월 9일 향사록 초헌관에 묵희의 이름이 있다. 위 기록으로 미루어 묵희 선생은 1923년~1924년 사이 지리산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작성중)
注 입자방(笠子房) : 흑립이나 벙거지, 삿갓, 패랭이 등을 만들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