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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1975년까지[11]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이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함께 양대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군대가 남베트남에 파병되어 북베트남과 싸웠지만 북베트남을 지원하던 소련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제한적인 작전만을 펼칠 수 밖에 없었고,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조직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들에 의해 고전하게 된다. 결국 미국에서 크게 일어난 반전 운동과 여론에 밀려 미군은 철수하게 되었고, 미국의 군사적 명성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 미군의 철수 이후 남베트남은 고전하다가 북베트남에게 패망하였다.
한국군이 미군에 합세해 파병된 전쟁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에 이어 대한민국이 경험한 대규모 전쟁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을 참고할 것. 당시 대한민국에서 썼던 명칭은 월남전(越南戰)이며 지금도 국군에서 만든 자료에서 월남전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창작물에서는 M16을 든 미군 병사가 UH-1 헬리콥터를 타고와 정글 속에서 베트콩과 싸우는 이미지로 대표되고 있으며, 미국이 실패한 전쟁이라는 점 때문에 우울한 분위기와 전쟁에 회의적인 시각이 강한 편이다. 미국 국내에서는 히피 문화가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하였다고 보며, 베트남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후유증과 사회부적응 문제 등이 크게 대두되었었다.
2. 상세[편집]
베트콩(Vietnamese Communists, V.C.)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 산하의 무장단체를 이르는 말인데, 이들은 북베트남 정부 및 군부의 지시를 받는 조직으로 기존의 친미적 성향의 남베트남 정권을 무너트리고 공산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에 통일시키는것이 목표였다. 참고로, 베트콩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운 베트민(Viet minh)과는 엄연히 다른 조직이다.
베트남 전쟁의 배경은 길게는 19세기부터, 짧게는 2차대전 이후인 1950년대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건들은 사실 상당히 긴 시기 동안 발생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이 남베트남에 첫 원조를 시작하고부터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진 거의 10여년 가까운 시기가 있었다.
참고로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베트남쪽에서는 우리가 미국 쳐들어가서 전쟁 일으켰냐면서 아메리카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물론 미국의 시선에서) 걸프전이나 이라크 전쟁, 남오세티야 전쟁, 그리고 우리나라 6.25 전쟁을 영어로 한국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르듯이 지명에서 명칭을 따오는 용법도 흔하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게 틀린 건 아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얻을 것도 명분도 없는 전쟁에 오랫동안 발이 묶여있는 상황이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과 비슷하다 해서 The Quagmire라는 약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이 단어는 '엉망진창'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맨발의 민병들이 미군의 첨단 공군기를 격추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났으며 상당한 재정 적자를 일으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라고 선언하게 만든 전쟁이다.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고, 그로인해 실질적으로 베트남 국민들의 생각이나 사상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방식인 민주주의에 의해서 뽑힌 대통령을 지지하고, 또한 그들의 부패를 묵과함으로써 베트남 내부의 분열을 조장했고, 그와 더불어 자신들과 상관없는 나라에 전함을 주둔시켰던 것으로 그들의 분노를 사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2차 통킹만 사건의 경우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결국 어떤 이유에서던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견해서 군대를 파견하는 행위는 베트남전을 시작으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보여졌고, 그로인해 미국 내부에서도 반전의 목소리가 컸었다.
'출구 전략(Exit Strategy)'도 베트남 전쟁에서 나온 말이다.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도, 지속하기도 애매해진 미국이 굴욕적이지 않으면서도 별 피해 없이 전쟁을 끝내고 빠져 나오기 위해 찾던 전략을 출구 전략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용어가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베트남을 한국 한자음대로 월남으로 표기했는데, 특히 남베트남을 정통으로 보았으므로 남베트남 정권을 그냥 월남, 또는 자유 월남이라고 했다. 북베트남은 월남(베트남) 독립 동맹(월맹)의 불법 정권으로 취급해 그냥 월맹이라고 불렀다. 비슷하게 대한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중국 공산당의 불법 정권으로 취급해 중공이라고 불렀고, 중화민국이 통치하는 대만을 자유중국이라고 불렀었다. 대만에서도 과거에는 같은 용법으로 중국 본토를 중공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당시를 다룬 한국군의 각종 자료에서도 이 용법을 현재까지 변경 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이후 북베트남(월맹)이 남베트남(자유 월남)을 무너뜨리고 통일한 뒤에 세워진 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부터 '베트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12] 이에 따라 마치 이전의 '월남'과 단절된 신생 국가처럼 취급하게 되었다.3. 배경[편집]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이후 이번엔 미국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끼어들었다. 미국은 이 지역의 복잡한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남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같은 편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주의화 되고 말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하고 있었고[13], 남베트남을 보호하는 데 적극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 예견은 도리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현실화되었다.)
미국은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14] 물론 나름 자유진영에서 구 식민 체제의 해체를 통해 공산세력과 맞서고자 했던 만큼 미국의 지원이 공짜는 아니고, 남베트남을 독립시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그건 미국 입장이고, 북베트남과 베트콩 입장에서 보면 구 식민세력을 아무 생각없이[15] 지원한 또 다른 적이다.
덧붙여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호찌민이 프랑스와 중국을 경계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16] 호찌민은 일찍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8차례나 서한을 보내 독립을 지지해주길 호소했으나 <불간섭> 소리만 들으며 묵살당했다. 아이젠하워 정권도 마찬가지로 호찌민 정권과의 교섭을 일체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 수립을 방해할 시 미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1954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약속을 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부터 군사 훈련, 무장 등 일련의 원조가 시작된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고딘디엠으로 자주 잘못 불림)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남베트남에서의 테러 행위 및 폭력선동이 이어졌고,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 개발에 돌려지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된다. 예컨대 베트남은 농경국가인데 농업용 비료 수입에는 고작 200만 달러를 쓰면서, 사치품인 양담배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행태를 보여줬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누가 두목인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킨다.
이때문에 기껏 안정되었던 치안도 다시 악화되고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국민 여론도 악화되었다. 이틈을 타 공산당이 크게 세력화된다. 1960년 12월에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이렇게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 명의 군세로 확대된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어리버리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무기고가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조차 감당할 여력이 안되어서 1963년의 압박 전투는 2,000 명의 정부군이 200여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4. 초기 교전[편집]
당시 전쟁 녹음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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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다.
전쟁은 시작은 보통 통킹만 사건으로 보지만, 그 이전에도 양측은 1960년대초부터 서로의 후방에서 게릴라 침투공작을 벌이며 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직접적인 발단은 1964년 8월 2일 벌어진 통킹만 사건이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통킹만 사건을[17] 명분으로 하여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하게 된다. 1964년 8월 5일 오전 11시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다.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 작전이다. 미 해군 항공모함의 전폭기들이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실시했다. 북베트남 해군의 대공포가 미국 해군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2기를 격추했다.폭격 실시 2일 후에 미국 의회에서 통킹만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피어스 애로우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11월 1일 베트콩이 미국 공군 기지를 공격하여 B-57 폭격기 등 항공기 27대가 파괴되었다.
이후 이에 대한 다소 애매한 보복전 성격인 미군의 배럴 롤 작전이 벌어진다. 목표는 라오스에 존재했던 호찌민 루트 타격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라오스 정부군을 돕는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다만 직접적으로 라오스 국경을 넘어서 폭격을 하는 것은 협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간에 조명탄에 의존해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공격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틈타 베트콩이 미군 장교 막사를 연달아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미군은 확전을 원하지 않는지 이에 대한 보복전을 펼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콩은 미군에 대한 일련의 보복전을 이어나갔다. 1965년 2월 7일 베트콩은 미국 육군의 푸레이쿠 기지를 습격해 8명을 전사시키고 헬기 7대를 파괴했다. 이에 분노한 존슨은 즉각 30대의 미국 공군 전투기(A-1, F-100)를 동원해서 북베트남군 병영을 공습을 지시했다(플레이밍 다트 작전 1). 사흘 후인 2월 10일 베트콩이 쿼논의 미군 기지를 습격해서 미군 23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다음날인 11일과 19일 보복 공습을 실시했다(플레이밍 다트 작전 2). 이어 20일 미군은 남베트남 공군과 합동으로 대규모 폭격을 실시하려 했으나 남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소요로 작전이 4차례나 연기된 끝에 3월 2일에야 실시되었다. 이것이 롤링썬더 작전이다.
그래도 이때까진 교전 수준에 머물렀고, 대규모 지상전투 수준으론 확전되지 않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북베트남에 위협을 주어 그들의 남베트남 병합을 저지해보려는 수준에 머물렀고 전면전으로 확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65년 3월 30일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폭파 테러로 2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터져버리고 만다. 결국 사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베트남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1965년 11월 14~18일에는 두 번의 큰 전투가 플레이미 서쪽에 있는 베트남 공화국 중앙 고원인 이아드랑에서 일어났다. 이아드랑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 되었던 미군은 약 4일 간의 전투에서 우수한 화력을 동원하여 북베트남군 170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미군또한 3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5. 연합군 결성과 미국의 참전
초기에 양측은 보복전 수준의 교전을 지속하며 전면전으로의 확대는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 3월 30일 사이공의 미 대사관 폭파 테러로 상황은 순식간에 일변했고, 본격적인 베트남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의 대규모 증강이 이루어지며, 호주, 뉴질랜드, 한국, 태국, 필리핀이 전투병을 파병하고 대만 등 다른 서방 자유주의 국가들은 비전투병 등을 파병하였다. 한편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은 무기원조[18]나 유격대 등으로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베트콩(+ 북베트남, 소련, 중국을 비롯한 비공식 몇몇 국가[19])
VS
미국 + 남베트남(+대한민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대만 기타 연합군)
쉽게 이야기 하자면 이런 구도의 대결이었다. 우리가 흔히 베트콩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아닌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과 기타 저항세력들이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는 지역으로 베트콩에 의한 기습+북베트남군의 공격이 벌어지는 양상이 베트남전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거의 내전 양상을 보였다고 보면 된다.(무기야 북베트남이 제공했겠지만) 물론 이런 행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명백한 북-남 베트남간 휴전협정 위반. 남베트남 측이 제네바 회담에서 약조한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의 이행을 거부했는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통일한다는 미명 아래 테러와 폭력행위를 선동하고 호치민 루트를 통해 물자와 군사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미 공산화가 완료된 북베트남과 같이 선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전쟁 발생전까지 지도부는 전쟁 발생 가능성을 "설마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하는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응오딘지엠의 다음 정권이나 역시 독재정권인 티우 대통령은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북베트남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하는 등, 유비무환을 잊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북베트남도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적을 얕보고 우습게 보는 나라는 결국 망하게 된다.
5.1.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편집]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한국도 전투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한국군은 대한민국 육군의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와 수도 사단 맹호부대, 그리고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가 주축이었다.
6. 전개[편집]
196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국 공군의 1966년 6월 29일의 하노이, 하이퐁 유류저장고 폭격으로 크게 확산된다. 7월 17일에 북베트남은 전 국민과 군대에 비상동원령을 선포하였고 중국은 각종 전쟁물자와 무기, 후방 기지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물론 1966년 1월에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기에 비공식적으로는 지원이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때부터 진짜로 엄청난 물자와 장비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8월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이 30여만명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으나, 미국은 10월에 발표한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 공동성명발표를 통해 전쟁의 조기 종결을 계획하고 있었다.
6.1. 게릴라전과 호치민 루트[편집]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까닭에 아무 무리없이 상황이 종료되리라 정치인들은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돌아갔다. 펜타곤은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익숙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투였다.[20]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베트콩은 땅굴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싸우고 싶을 때 나타나고, 불리할 때는 숨어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적이었다. 그래서 이 정글 숲의 풀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 사용한 농약이 현재 사용이 금지된 그 유명한 고엽제다.
이 새로운 전장과 새로운 형태의 전투 덕분에, 미군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탄복을 입고 M16소총을 든 미군이 UH-1 헬리콥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적과 싸우는 전형적인 베트남 전쟁의 장면이 계속 펼쳐졌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몰래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미국에서는 <호찌민 루트>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소련 등은 주변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립으로 두고 오로지 전쟁은 베트남 국내에 한정한다는 협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암묵적으로 미국 특수부대가 양 국가에 있는 호찌민 루트를 타격한 흔적이 보이지만, 정규적 공격을 감행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캄보디아나 라오스는 막을 능력도 없고, 자기들한테 크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묵인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캄보디아의 군부에 공작을 벌여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아누크 국왕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사라지자 오히려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같은 공산계 게릴라가 준동해, 캄보디아의 정국은 더 혼란에 빠져버려 호찌민 루트를 막는 것은 더 어려워져 버렸다.
그렇다고 남베트남이 그래도 제정신을 가지고 있었냐면 절대 아니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에서 주로 공세를 펼치는 세력은 북베트남군이라기보다는 남쪽에서 양산된 베트콩이다. 물론, 북베트남에서 지원병력이나 지도를 위한 간부, 싸움을 위한 물자를 계속 내려보내기는 했지만 자국 내에서 반란군이 발생하는 실정이니 자국 통제도 제대로 못했던 셈이다. 더 막장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무기들이 암시장에서 떠돌다가 북베트남군/베트콩의 손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
6.2. 북베트남 공격 금지[편집]
전투 대상이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 내의 베트콩 세력이었고, 미군의 신분 역시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의한 인도적 원조군>이라는 애매한 신분이었고 "북베트남을 직접 침공하면 소련이나 중국이 끼어들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짐!" 하는 입장이었던지라 무슨 일이 있어도 북베트남 영토로 지상군이 쳐들어가지는 못하게 못이 박힌 상태였다.[21]
물론 그린베레를 비롯한 특수부대는 잘만 들어갔지만 특수부대는 성격상 절대로 주공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숫자도 적어서 국지전에서는 강력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큰 도움을 줄 수 없다.[22] 대신에 Operation Rolling Thunder 등의 북폭이라 불리는 항공 공세 작전은 수차례 했지만, 결정적으로 밀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몇십 년이 걸려도 남베트남을 어떻게든 군사력으로 통일할 목표를 세운 상태에서, 미국이 뭔 짓을 해도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북폭이 하노이를 비롯한 북베트남 대도시에 B-52를 동원해 융단 폭격을 가한 작전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북베트남의 주요 도시에는 소련제 SA-2 지대공 미사일 포대가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술기도 아닌 대형 전략폭격기의 작전은 불가능했다.[23] 흔히 생각하는 융단폭격은 어디까지나 밀림지대, 특히 호찌민 루트 제압을 목적으로 행해졌을 뿐, 도시와 민간지역에 대한 폭격은 어디까지나 군수공장이나 철도망 같은 전략목표에 대한 조준 폭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폭이나 부수피해로 인한 민간인 사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미군이 압도적인 공군력을 동원해 일방적으로 북베트남 인민을 학살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당장 베트남 전쟁동안 미국 공군/해군 항공대의 교환비는 역대 최악이었던 것으로 이름 높기도 하고... 이는 F-4로 대표되는 미국 공군의 병크, 즉 미사일 만능주의로 달렸던 결과였다. 이 착각은 심각해서 한국전쟁 시기 12대 1까지 벌어졌던 교전비는[24] 베트남 전쟁 3 대 1, 2 대 1을 거쳐서 MIG-21이 등장할 때에는 0.85 대 1까지 밀리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최종적인 교환비는 F-4 1대당 북베트남기 3.67대로 돌아오긴 하지만. 즉 오히려 밀리는 상황까지 진행된 것이다.
더구나 베트남의 북부 영토는 중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오폭 시 중국을 폭격하게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북부 국경지대는 애초에 폭격 불가. 이래서야 중국 국경을 통해서 들어오는 물자 지원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 외에 하이퐁 등 북베트남의 주요 항구에 대규모로 기뢰를 살포했고 이 자체는 효과를 보긴 했지만 전쟁의 전체 판도를 바꿀 수준은 아니었다. 즉 폭격을 통해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능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6.3. 전쟁을 끝낼 수 없는 상황[편집]
처음부터 이 전쟁은 미국이 스스로 전쟁을 포기하기 전에는 끝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호찌민 루트의 존재, 남베트남의 막장 상황, 북베트남 침공 금지 등 발목을 잡힌 상황에서 미국은 북베트남군의 실질 전력도, 전쟁수행 능력도 제대로 손상시키지 못하고 끌려다니기만 했다.
남은 것은 수행의지의 약화, 즉 더 이상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북베트남이 전쟁을 포기하고 강화 협상을 요구하거나, 혹은 북베트남인들이 전쟁 피해로 인해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이것이 반정부 활동으로 이어져서 내부 혼란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전쟁을 포기하는 쪽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것마저도 실패했다.
위에서 언급한 호찌민의 발언처럼 북베트남의 통일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고, 전면 침공이 아닌 간헐적인 공중 폭격만으로 정부 수뇌부들의 수행 의지를 꺾기는 힘들었다. 폭격만으로 북베트남의 수행의지를 꺾으려면 태평양 전쟁 당시 도쿄 대공습 수준으로 북베트남을 불태우고 갈아엎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소련제 무기로 촘촘히 구축된 북베트남의 방공전력은 미군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미국은 이렇게 뻔히 보이는 막대한 피해를 무릅쓸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를 위한 국내외의 명분 역시 미군의 편이 아니었다. 이미 전쟁의 정당성을 상당히 잃은 미국이 북베트남을 정말로 갈아엎었다간 친미 우방국들조차 격렬하게 비난하며 등을 돌릴게 뻔했다. 국내의 반전 여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북베트남 정부의 내부 통제 능력 또한 남베트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미군은 특수부대를 이용해서 북베트남 내의 반공 세력이나 소수 민족 세력을 포섭, 북베트남 정부에 대한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시도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전쟁은 북베트남 정부의 지속적인 지시와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지역에서의 베트콩 게릴라들의 일방적인 게릴라전으로 흘러갔고, 미군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첫댓글 정희야. 머리말로 [세계사]를 선택해 줘.
달았습니다
정희야. 방학 재밌게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