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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장애물을 뛰어넘는 믿음
2018년 6월 10일 / 대예배, 오후예배 / 마가복음 2:1-12
▶ 마 22:35-40 / 그들 가운데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선생님, 모세의 율법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3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그러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가는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40) 모든 다른 계명과 예언자들의 요구는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 강우중 교수(미주장신대 기독교윤리학)의 글이 감동이 되어 먼저 본다.
마 22장을 묵상하며 ‘과연 내 사랑을 나의 이웃은 필요로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아울러, ‘나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가져본다. 예수님의 방법으로만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며,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나를 사랑함은 ‘거룩함’의 회복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즉 주의 거룩한 날을 보내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매일의 일상이 ‘존귀한 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날을 귀하게 여겨서 내 멋대로 하지 않으며, 내 자신의 쾌락을 찾지 않으며, 내 기분과 생각대로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살아갈 때 그 때에 주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사 58:13, 14).
이 즐거움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나를 사랑할 때 그때야 나의 사랑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된 사랑을 통해 내 이웃에게 오래 참을 줄 알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교만과 무례함이 없으며, 나의 이익만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는 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다. 참된 사랑을 알아야 바르게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방법대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예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해 분명히 이해할 때 분명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이루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고 또 그럴 능력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고 연합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과 화해하며 연합해야 한다. 매일의 삶의 맥락에서 함께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 화해와 연합함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우리 각자의 삶과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만들어 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나의 책임을 발견하고, 행동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치, 함께 사랑하며 살아감을 매일의 일상에서, 사회적 맥락에서 생산해 낼 수 있는 기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노력해야 한다. 함께 살아갈 줄 아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 본문에 보면 한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증세가 심각하여 혼자 힘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옮기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물며 혼자서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중풍병자에게는 좋은 이웃이 있었다. 그들은 믿음이 있는 반면 중풍병자에게는 믿음이 있는지는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는 고침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을 전파하는 귀한 일꾼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이웃을 사귀느냐는 그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웃과는 많은 대화를 통해 의식과 취미를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 착한 사람과 사귀게 되면 착한 사람이 되기 쉽고, 악한 사람과 사귀게 되면 악한 사람이 되기 쉽다. 특별히 성도들은 누구와 사귀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과 사귀면 더욱 거룩해지고,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까지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과 사귀게 되면 신앙적인 도전을 많이 한다. “나도 한번 성경을 읽어 봐야지! 나도 한번 기도를 해봐야지. 나도 한번 예배생활을 제대로 해봐야지. 나도 봉사활동을 해야지. 나도 헌신해야지. 나도 목사가 되고 싶다.”
반면 어떤 사람은 친구를 잘 못 사귀어 그나마 있던 쥐꼬리만 한 신앙도 잃어버리게 되고, 세상과 가까워지게 된다. 그저 말끝마다 세상재미 타령이요 불평만 할 뿐이다. ‘믿어 보았자 소용이 없다. 이 교회는 이렇게 저 교회는 저렇고... 이 목사는 이렇게, 저 목사는 저렇고’ 그런 친구와 사귀게 되면, 한 자리에 있게 되면 하나님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세상과는 가까워지게 된다.
시 1:1-3 / 얼마나 복되랴! 못된 짓만 일삼는 자들이 남 짓누를 궁리나 하고 있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는 이는. 얼마나 복되랴! 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을 따라 살지 아니하는 이는. 얼마나 복되랴! 남 우습게나 여기고 제 잘난 체만 하는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아니하는 이는. 2) 얼마나 복되랴! 여호와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그 가르침을 밤낮으로 읽으며 늘 명상하는 이는. 3) 이런 이는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 같아서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나날이 푸르리니 하는 일마다 끊임없이 번창하리라.
이왕이면 늘 하나님과 동행(친구)하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욥, 요셉, 다윗, 다니엘처럼 되자.
▶ 중풍병자에게는 불행 중 다행으로 좋은 이웃이 있었다 / 그 이웃이 이 불쌍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 주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웃은 나를 예수님께 데려다 주는 사람이다. 세상의 어떤 친구보다 - 술친구, 돈 빌려주는 친구, 얘기해주는 친구들보다 - 예수님께 안내 해주는 친구가 가장 좋은 친구를 갖자.
그렇다고 해서 네 사람이 쉽게 뜻을 정하고 행동한 것은 아닐 것이다. 혼자 생각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데, 네 사람이 의기투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들은 믿음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추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의견이 좁혀져서 행동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좀 바쁘고 힘들지라도 예수님께 이 병든 친구를 데리고 가자!”, “아니,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예수님께 데리고 간다는 말인가?”, “아닐세. 들것을 만들어 맞들면 되지 않겠나.”
점점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그들 사이에 오고갔을 이런 대화를 상상하면서,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껴본다. 그래서 네 사람들이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약 1:5 /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알고 싶거든 하나님께 여쭈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후하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결코 여러분을 꾸짖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 믿음의 길이나 좁은 길에는 항상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 /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는커녕 얼굴조차 뵙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생각 끝에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 없다며, 지붕을 뜯고 이 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집들은 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나무를 걸친 다음 짚을 썰어 넣어 이긴 진흙으로 평평하게 덮었다. 비가 많이 오지 않기 때문에 진흙지붕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집 바깥에는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네 명의 친구들은 이 계단을 이용하여 지붕에 올라갔다.
예수님은 이 네 사람의 믿음을 즉 중풍병자를 긍휼히 여기며 힘과 정성을 다해 여기까지 온 것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의 병을 고쳐주셨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➊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➋ ‘그냥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➌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나름대로 찾자.
1.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병자를 예수께 데려갈 수 없을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두 가지 반응이 가능했을 것이다.
1. 포기하는 것이다 / 들것을 내려놓고 한숨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친구로서 할 만큼 다 했네. 자네도 보다시피 더 이상 어떻게 하겠는가? 더 도울 수 없어 미안하네.”
그렇게 했다고 누구하나 탓할 수 없다. 여건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상황이 어려울 때, 실패자가 취하는 가장 쉬운 선택은 포기하는 것이다. 상황이 힘들어질 때 ‘포기는 맨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는 이 말을 꼭 기억하자.
2. 또 다른 반응은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 4절에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라는 구절이 있다. 어떻게 지붕을 뜯을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일을 되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바늘구멍만한 가능성이 보일 때 그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99%의 불가능성을 보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1%의 가능성을 보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이다.
지붕을 뜯는 행위를 예수님은 뭐라고 평가하셨는가? /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 ” 예수님은 지붕을 뜯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평가하셨다. 믿음을 가진 자만이 1%의 가능성을 보고 지붕(장애물)을 뜯는다. 예수께로 가기만 하면 반드시 치유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이 막으면 지붕 위로 → 지붕이 막으면 뜯어내고 → 사람들이 비난하고 고함을 질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계신 쪽의 지붕을 뜯어내어 → 들것에 뉘인 이웃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그 결과 원하는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고자 할 때에 제일 먼저 막히는 곳이 사람의 벽이다. 인간만사가 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생활도 사람으로 인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사람으로 인하여 문제가 되기도 한다. 처음 믿으려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은 믿고 싶지만 주변 사람들의 체면 때문에 용기를 못내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먼저 믿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그만두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게으름의 벽을 뚫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모두가 사람들의 벽입니다. 직장이나 경제여건이 신앙생활하기에 적합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육신의 연약함들이 벽이 되기도 한다. 잘못된 습관에 가로막히기도 한다. 의심이나 부정이 습관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믿음은 ‘할 수 있다!’이다(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 막 9:23) 지붕을 뚫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얻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믿음으로 달려가지만 예수님과 그들을 가로막는 벽들은 많았다. 생각처럼 단번에 예수님께로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간절함과 사모하는 믿음을 그 어떤 벽도 막을 수 없었다. 지붕을 뚫는 이 믿음이 사람들의 벽을 뛰어 넘고, 환경의 벽을 넘어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하였다. 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하실 일만 남았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네 죄는 용서받았다. …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네 병이 나았다.’
어려운 상황은 보통사람과 믿음의 사람을 구별한다. 어려운 여건은 보통 집단과 믿음의 집단을 구별한다. 불경기는 보통사업가와 믿음 가진 사업가를 구별한다. ‘여러분은 쉽게 포기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1%의 가능성이라도 발견하여 상황을 헤쳐 나가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2. 그냥 돌아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가정이지만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조차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 사람들이 있다면 병 고침을 받은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그들은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저런 방법도 있었구나!’, ‘병을 고쳤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저렇게 손으로 만지듯 체험했으니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의 반응을 보자(12절) /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들것을 가지고 걸어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다 깜짝 놀라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서로 말하였다.
여기에서 관객과 주인공(팬과 제자)이 갈라진다. 관객은 사건을 보고 놀라고 박수를 친다. 그러나 주인공은 사건을 몸으로 체험하고, 박수를 받으며, 영광을 얻는다. 관객과 주인공의 차이가 어디 있는가? 관객은 앉아있고, 주인공은 나선다. 그게 차이점이 아닐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도리이며 의무이다 /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넓고 깊은 것이다.
창 1:27-28 /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따라 당신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28) 그들에게 이렇게 복을 내리셨다. ‘딸 아들 많이 낳아 그 후손들이 온 땅 위에 퍼져라. 땅을 정복하여라. 내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와 땅 위에 기어다니는 온갖 짐승들을 다스릴 권한을 너희에게 주마. 너희는 그것들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여라.’
창 9:1, 7 /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 내리시며 이르셨다. ‘자식들을 많이 낳아라. 자꾸 불어나 온 땅을 가득 채워라. 7) 너희는 자식을 많이 낳아라. 크게 불어나거라. 온 땅위에 퍼져라. 땅을 가득 채워라. 구석구석 차지하고 살아라.’
창 12:1-2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➊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➋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➌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창 13:8-18 / 관객인 롯과 주인공인 아브람 / 그래서 아브람이 롯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서로 한 핏줄이 아니냐? 그러니 네 가축 떼를 치는 목자들과 내 가축 떼를 치는 목자들이 서로 싸워서야 되겠느냐? 9) 그러니 우리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무 쪽이든 네가 원하는 곳을 골라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고 또 네가 오른쪽으로 간다면 내가 왼쪽으로 가마.’ 10) 롯이 둘러보니 소알까지 펼쳐져 있는 요단 들녘에는 물이 매우 넉넉하였다. 이때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기 때문에 요단 들녘은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매우 기름져 보였고 또 애굽 땅과 같이 비옥해 보였다. 11) 그래서 롯은 이러한 요단 들녘에 마음이 끌려 요단 들녘을 차지하기로 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아브람과 롯은 이렇게 해서 헤어져 살게 되었다. 12) … 롯은 요단 들녘에 있는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다가 소돔 가까이에 자리잡게 되었다. … 14) 아브람과 롯이 서로 헤어져 살게 된 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아브람아,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아라. 15) 네가 지금 둘러보고 있는 땅을 내가 모두 너와 너희 후손에게 주겠다. 앞으로 영원토록 이 땅이 너희의 차지가 될 것이다. 16) 또 내가 네 후손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하겠다. 땅의 티끌만큼이나 많게 할 것이다. 사람이 땅의 티끌을 모두 셀 수 있다면 네 후손이 얼마나 되는지도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겠다. 17) 그리고 온 땅을 사방으로 왔다갔다 해보아라. 내가 그 땅을 모두 네게 주겠다.'
마 28:18-20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눅 24:47 / 그리고 내게 돌아오는 사람은 모두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 구원의 도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행 1:6-8 /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에 사도들이 물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때가 언제인가는 아버지께서 정해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 302장 1.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2.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속을 한번 헤아려 안보나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3.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4.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3. 이제 우리는 이렇게 하자
1. 개개인이 믿음에 서 있다면 공동체를 위한 믿음까지 이어져야 한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 /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이웃이다. 사실 이 기적은 그 병자 자신의 믿음보다도 그를 데려온 네 사람의 믿음이 더 귀하고 커 보인다. 소문을 들은 것도 그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병자를 데리고 온 것도 그 사람들이었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열심도 그 사람들의 것이었고, 지붕을 뚫고 협력했던 정성도 그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야말로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이웃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귀하게 보신 것이다.
믿음은 홀로 고독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개개인이 하나님과 독대하는 가운데서 신앙은 시작되지만 서로 돌보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데서 믿음의 축복이 오며, 믿음은 예배와 교제와 헌신을 통해 바르게 성장한다. 이웃을 위해 수고의 땀을 흘리는 것이 신앙의 향기이다. 이웃을 위한 기도, 이웃을 위한 봉사, 이웃을 위한 눈물 한 방울까지 하나님께서 결코 헛되게 보시지 않으신다. 그것이 곧 우리 자신들에게 복의 열매가 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2. 공동체를 위한 믿음이 서 있으면 뜻을 정하고 헌신하여 복음전파를 위해 전진해야 한다.
갈렙처럼 도전하라 / 도전한다는 것은 비록 새로운 기록을 세우지 못했을지라도 삶의 태도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준다. 즉 무언가에 도전하는 사람은 삶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도전 그 자체도 좋은 것이다. 헤브론 산지는 지형이 험하고 요새가 많아 가나안 정복사에서 가장 전쟁하기 어려운 곳이다. 거기다가 갈렙이 달라는 지역인 ‘기럇아르바’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인인 아낙 자손 가운데서도 가장 덩치 큰 사람들이었다(수 14:15). 또한 헤브론의 또 다른 이름은 ‘기럇아르바’인데, 그 뜻이 ‘네 개의 도시’이다. 이 헤브론은 아주 크고 견고한 네 개의 요새로 된 도시국가였던 것이다.
갈렙의 도전은 한마디로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었다. 갈렙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만 하면 비록 그곳이 험한 산지일지라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 그들을 쫓아내리라’고 했다.
도전할 상대가 어떻고, 지금 자신의 형편이 어떻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상대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아무리 자신이 85세 노인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갈렙처럼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상대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갈렙의 도전은 과거 이스라엘의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실패를 회상하며 앞장을 서는 공동체의 지도자로서의 자세였었다. 지도자의 역할은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항상 먼저 그리고 앞장을 서는 것이다.
♬ 545장 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후렴>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2. 이 눈이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이 맘에 의심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 소원 주안에서 이루리
3. 주님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무슨 일이 있을까
세상 사람들과 성도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세상 사람들은 보는 것이 전부요 귀로 듣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지만, 성도는 그들이 보고 듣는 것 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이 하나 더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특징이다. 리더는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 누구보다 투철해야 한다. 그 결과의 차이는 엄청났다. 85세 된 갈렙이 누구 한 사람 도전조차 못한 것을 이루고 말았던 것이다.
갈렙과 같은 위대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네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중풍병자를 달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예수님께서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베푸셨다. 기적은 협동이 이루어지는 곳에 자주 나타난다. 네 사람 중 한사람이라도 ‘그냥 돌아가자. 헛수고다.’라고 했더라면 그날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협동하여 예수께 가기 위하여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 내렸다. 그러니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말이 너무 많다. 이론도 많다. 이론이 많다 보니까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싸우는 것을 보면 교회들이 본질을 잊어버리고 부수적인 일 때문에 싸운다. 이를테면 절차나 형식 때문에 갈등한다. 오늘 교회들이나 가정들 그리고 나라도 다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3. 리더는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교회, 사회, 가정 등)의 잘못된 폐단(弊端)을 극복하려면 개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러해야 하겠지만 공동체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것이 필수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됐어도 세상을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세상은 험하고 악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리고 영적 무기를 주셨다. 영적 무기에는 말씀과, 기도, 찬양 등이 있다. 그 중에 기도는 정말 중요한 영적 무기이다. 흔히 기도를 하나님과 대화라고 말하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라는 동일한 무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차가 있다. 어떤 사람은 효과적으로 활용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 놀라운 무기를 받고도 활용하지 않아 무용지물로 썩히고 있거나 제대로 활용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기도 응답과 관련해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응답의 다양성’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듣고 응답하시는 게 분명하지만 그 응답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되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응답하시는데 ➊ 우리가 기도한 그대로 수락해 주신다. 여기에서도 금방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거나 또는 응답해 주시기도 한다. 그럴지라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으려는 응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다니엘 2장처럼 응답이 올 때까지 열심을 다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➋ 보편적으로 기도한 대로 수락하시지만 시간을 두고 기다리라는 응답도 있다(Yes, but wait.). 예수님께서 금방 고쳐 주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주님, 주님이 아끼는 사람이 매우 위독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영광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곧 그들에게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 더 머물렀다가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시고 이어서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이 들었다. 이제 내가 가서 그를 깨워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은 너희를 위해 아주 잘된 일이다. 너희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로 가자.’ 하나님의 응답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다. 조급한 것도 탈이지만 느릿느릿 하는 것도 탈이다.
■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지만 워낙 그곳에서도 착실하게 하니까 교도소장이 총무 일을 맡긴다. 죄수들을 잘 돌보는데 그 중에 전직 고위관리 출신인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수석 보좌관)을 돌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꿈을 꾸고 고민하는 것을 보고 꿈을 해석해 주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은 필요한 성품뿐 아니라 때를 따라 활용할 수 있는 각양 은사들도 겸비해야 함을 볼 수 있다. 요셉의 해석대로 떡 맡은 관원장은 처형되고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된다. 출옥하면서 요셉에게 꺼내 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잊어버린다. 요셉이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글자 그대로 감감무소식이다. 그런데 만 2년 후에(창 41:1) 바로 왕이 꿈을 꾸고, 그 뜻을 몰라 전전긍긍할 때 요셉을 기억한 술 맡은 관원장을 통해 바로 왕 앞에 서게 된다.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고 국가적인 재난을 대비하는 정책까지 조언한 요셉은 그 자리에서 애굽의 총리로 추대된다. 그리하여 애굽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만일 요셉의 요구대로 즉시 출옥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자유민이 됐을지 모르지만 이방 땅 애굽에서 그가 무엇을 했겠는가? 하나님께서 2년을 지연시켰지만 타이밍을 맞추시고 가장 좋은 결과를 이뤄주셨다.
➌ 거절이다(No). 우리가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에 옳지 않거나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거절하신다.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면 거절하신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은 순수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다. 저들에게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욕심으로 구하는 게 아니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보다 덜 좋다고 판단하시면 거절하십니다. 바울의 경우입니다.(고린도후서 12장) 육체의 가시(고질적인 안질)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응답하셨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완곡하게 거절하신 겁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많은 은사와 능력을 받았는데 가시조차 없으면 자칫 교만해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면 그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연약한 상태로 지내면서 주님을 더욱 의지함으로 능력을 계속 받는 게 낫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❹ 거절하되 다른 대체물을 주신다(No, but the other.). 성경의 예를 들면,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한 경우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윗은 장군 출신으로 전쟁터에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는 데 합당치 않다고 하시며 아들 솔로몬에게 허락하시겠다고 하셨다.
■ 1942년 11월 보스턴 대학 미식축구팀은 연말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한 경기만 승리하면 우승입니다 상대팀은 약체라 모두 우승을 점쳤다. 그러나 팀원 가운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럴수록 겸손히 최선을 다하자며 함께 기도했다. 하나님께 승리를 달라고. 그러나 주의 뜻대로 인도해 달라고 간구했다. 팀 관계자들은 우승을 확신하고 대대적인 파티 준비를 했다. 그런데 경기 결과는 참패였다. 모두 경악했다. 선수들은 파티를 할 기분이 아니라 서둘러 귀가했고, 응원하던 사람들도 실망한 나머지 흩어졌다. 파티는 취소됐다. 다음 날 조간신문에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파티하려고 했던 그 장소에 간밤에 화재가 나서 무려 49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거절하신 게 오히려 감사한 케이스였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일까? 내 생각이나 내 뜻대로 기도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고 그 뜻대로 힘써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수락의 응답을 받을 수 있고, 그 이상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Yes, and more.). 이보다 더 좋은 응답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기도할 때 무조건 내 뜻과 내 생각을 갖고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음성을 듣고 기도하는 것이다. 말하는 기도(Speaking Prayer) 이상으로 듣는 기도(Listening Prayer)가 중요한 이유이다.
나 혼자만을 사사로운 기도에 머물지 말고 기도의 지경을 넓혀야 한다. 그래서 이웃을 위한 기도가 너무 귀한 것이다. 이를 도고(禱告 Intercession)한다. 기도를 알라딘의 요술 램프 혹은 ‘금 나와라 뚝딱’ 하는 도깨비 방방이로 오해하지 말자.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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