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실록 > 숙종 23년 정축 > 1월 10일 > 최종정보
숙종 23년 정축(1697) 1월 10일(임술)
23-01-10[03] 반역 모의에 관련된 이절ㆍ유선기 등은 복주되고 이익화ㆍ장영우 등은 귀양 보내다
날이 저문 뒤에 이절(李梲)ㆍ유선기(兪選基) 등이 상변(上變)하기를,
“어느 날 이영창(李榮昌)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갑자기 묻기를, ‘그대가 장지(葬地)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스승을 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이란 중은 바로 운부(雲浮)로서, 당시 나이 70세로 송조(宋朝)의 명신(名臣)이었던 왕조(汪藻)의 후손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서 표류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공명(孔明)과 유기(劉基)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였습니다. 그가 불경(佛經)을 승도(僧徒)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로는 옥여(玉如)ㆍ일여(一如)ㆍ묘정(卯定)ㆍ대성(大聖)ㆍ법주(法主) 등 1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전수(傳受)시키면서 팔도(八道)의 중들과 체결(締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ㆍ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절이 유선기에게 말하기를, ‘이영창이 갑자기 흉악(凶惡)한 말을 지껄이니 형적(形迹)을 상세하게 탐지(探知)하여 처치(處置)하는 방도를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11월 초3일에 이영창이 이절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 무리가 큰 일을 경영(經營)하려면 최상중(崔尙仲)ㆍ최상성(崔尙晟)의 【최상중 등은 바로 전 병사(兵使) 최운서(崔雲瑞)의 첩(妾)의 아들인데, 이절의 세전 노자(世傳奴子)로 숨은 것을 찾아내고 인해서 속(贖)바치도록 허락은 하였지만, 문권(文券)을 아직도 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속(贖)바치게 하는 문권(文券)을 먼저 내어 주고, 이어 함께 의형제(義兄弟)를 맺어 같이 새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므로, 이절 등이 허락하였습니다.
4일에는 이영창이 최상중의 형제와 같이 이절의 집에 와서 문권을 내어 줄 것을 청하고, 그들과 함께 맹세하며 밤이 새도록 요망스런 말을 하였고, 이튿날 아침에는 유선기를 시켜 종이를 접어 둥글게 만들도록 하고, 그 가운데다 하나의 황(黃)자를 쓰고, 황(黃) 자의 획(畫) 가운데 가늘게 ‘의(義)를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마음으로 맹세하며 함께 나라를 세운다.’고 쓰므로, 유선기가 말하기를, ‘황(黃) 자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이영창이 말하기를, ‘일찍이 보니 운부(雲浮)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맹세할 때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영창이 이어 그의 성명(姓名)을 써서 착명(着名)한 뒤에 네 사람에게 밀어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여기에 의거하여 나열하여 쓰라고 하므로, 그의 말대로 각자가 쓰자, 이영창이 말하기를, ‘동시에 향(香)을 피우고 꿇어앉아 절을 하고, 의(義)를 맺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절(李梲) 등이 그대로 따르니, 이영창이 둥글게 접은 종이를 유선기에게 주고는, 파(罷)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뒤 유선기가 이절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김경함(金慶咸)ㆍ김정열(金廷說)과는 정의(情誼)가 형제와 같으니 함께 일을 의논할 만하다.’고 하므로, 이절이 직접 가서 청하여다 그들과 함께 서로 의논한 뒤에 또 이영창을 불러다 시험삼아 탐지하여 물어 보니, 흉악하고 요사스런 말이 한결같이 전일(前日)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가지고 김정열을 시켜 병조 판서에게 먼저 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영창이 동행하기를 요구하기에 용궁사(龍宮寺)에 가서 금강산(金剛山)에서 왔다는 중 묘정(卯定)을 보려고 하는 즈음에 이익화(李翊華)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마침 왔습니다. 그러자 이영창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일을 함께 할 만하다.’고 하면서, 함께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으며, 밤에 이익화와 같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흉악한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이익화가 운부(雲浮) 및 이른바 진인(眞人)의 사주(四柱)를 물으니, 이영창이 말하기를, ‘운부는 정묘생(丁卯生)이고, 이른바 진인은 기사년(己巳年) 무진월(戊辰月) 기사일(己巳日) 무진시(戊辰時)에 태어났다.’ 하니, 이익화가 말하기를,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중국 장수인 묘생(卯生)의 사람이 중국에서 와서 팔방(八方)을 밟고서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운부(雲浮)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기사년 무진월 기사일 무진시에 태어났다면, 바로 뱀이 변하여 용(龍)이 되는 격이다. 숭정 황제(崇禎皇帝)의 사주(四柱)에는 뱀이 변하여 용이 되는 격이 하나였으나, 천자(天子)가 되었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그런 격이 둘이나 있으니 참으로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진년(辰年)과 사년(巳年)에는 성인(聖人)이 나고, 오년(午年)과 미년(未年)에는 즐거움이 대단하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이 진인(眞人)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영창이 말하기를, ‘이른바 진인은 세 번 변화하는데, 지금은 고성(高城)의 진재(鎭材)인 용장(勇將) 정학(鄭涸)의 집에 있으며, 더러는 운부(雲浮)가 머물고 있는 옥정암(玉晶菴)에 있기도 한다. 그런데 운부가 정학 및 그의 아우 정신(鄭愼), 그리고 최헌경(崔憲卿)ㆍ유찬(柳鑽)ㆍ설유징(薛有澄) 등을 시켜 서로 번갈아 가면서 호위(護衛)하게 한다. 그리고 중 묘정(卯定)ㆍ일여(一如)ㆍ옥여(玉如)ㆍ무변(無邊)ㆍ현성(玄聖)ㆍ일안(一鴈)ㆍ해안(海鴈)ㆍ도강(渡江)ㆍ월강(越江)ㆍ혜일(惠一)ㆍ도운(道運)ㆍ도영(道英)ㆍ계탄(戒坦)ㆍ성주(聖珠)ㆍ명근(命根)ㆍ금벽(金碧)ㆍ인징(寅澄)ㆍ능흡(能洽)ㆍ세운(世雲)ㆍ원정(元井)ㆍ헌일(憲日)ㆍ죽무(竹茂)ㆍ지평(地平)ㆍ천성(天成)ㆍ은상(銀象)ㆍ초룡(草龍)ㆍ직수(直守)ㆍ흑수(黑守)ㆍ희담(希淡)ㆍ황헌(黃憲)ㆍ장계(藏季)ㆍ운극(雲極)ㆍ한무(漢茂)ㆍ법징(法澄)ㆍ풍열(楓悅)ㆍ설제(雪霽)ㆍ신원(新元)ㆍ개혜(開惠)ㆍ자징(字澄)을 기내(圻內)와 여러 도의 각 사찰에 나누어 보내어 3월 21일에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는 입장에 있는데, 강계 부사(江界府使) 신건(申鍵)ㆍ상토 첨사(上土僉使) 신일(申鎰) 및 이영창의 아우 이동백(李東伯), 이영창의 외숙인 김문하(金文夏), 김화(金化)에 살고 있는 부자(富者) 지대호(池大豪)ㆍ엄준길(嚴俊吉)ㆍ진융종(秦戎宗)과 함경도에 살고 있는 술사(術士) 주비(朱棐), 춘천에 살고 있는 용장(勇將) 최흥복(崔興福), 수원에 살고 있는 역사(力士) 한이태(韓以泰), 용인에 살고 있는 거사(居士) 조종석(趙宗碩), 부사(府使) 홍하신(洪夏臣)ㆍ양한석(楊漢奭), 금성(金城)에 살고 있는 충의(忠義) 안석명(安碩明) 등 3형제와 강거사(康居士)라고 부르는 사람, 그리고 전 군수(郡守) 임동정(林東靖), 수원 군기 감관(水原軍器監官) 임필흥(林弼興) 등도 흉역(凶逆)에 참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영창이 또 이절에게 말하기를, ‘산인(山人)이 오면 특별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고 하더니, 조금 있다가 와서 말하기를, ‘운부(雲浮)가 중 한 명을 보내어 「진인(眞人)이 멀지 않아 보개산(寶盖山)에 당도할 터이니 그대들 네 사람은 내일 아침 일찍이 일제히 와서 모이도록 하라.」고 하였다.’ 하고는 혜찰(惠察)이란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중을 데리고 와서 처음으로 운부의 소식을 전하기를, ‘우리들의 일이 이미 모두 이루어졌는데, 경중(京中)의 경영(經營)은 지금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가?’ 하면서 이어 세 사람의 손을 잡고 의논하며 서로 말하기를, ‘머지않아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고는 떠났습니다. 실정과 형적(形迹)이 대단히 놀랍기 때문에, 별무사(別武士) 김체건(金體乾)으로 하여금 이영창 및 그의 아우 이영만(李榮萬)과 그의 종 중길(仲吉)과 그의 처(妻) 선옥(仙玉) 등을 뒤쫓아서 체포하여 구속시키고 결박하여 두고 달려와서 고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부 당상(禁府堂上)ㆍ양사 장관(兩司長官)ㆍ좌우 포도 대장(左右捕盜大將)에게 명하여 상변(上變)한 글 가운데에서 이른바 결박하여 구류(拘留)한 중 혜찰(惠察)과 이영창(李榮昌)ㆍ이영만ㆍ중길(仲吉)ㆍ선옥(仙玉) 등을 즉시 잡아다 내병조(內兵曹)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문초하도록 명하였다. 국청에서 또 이절(李梲) 등이 바친 입장 문서(立張文書) 6도(度), 책자(冊子) 1봉(封)을 봉하여 바쳤다. 【입장문서는 바로 이절 등이 바친 책자로, 바로 상변한 글에서 이른바 병조 판서(兵曹判書)에게 써서 보고했다는 것이며, 그 가운데 요사스럽고 흉악한 말은 상변한 글과 대략 같았다.】
그리고 김정열(金廷說)과 김경함(金慶咸) 및 문서(文書) 가운데 이름을 쓴 장영우(蔣永祐)ㆍ장한경(蔣漢卿) 등을 잡아다 가두었다. 이영창의 공초(供招)에는 요사스럽고 흉악한 말을 이절 등 여러 사람에게 돌렸으며, 혜찰(惠察)의 공초에는 그가 한 짓은 모두 이영창이 교사하고 유인한 데서 나왔다고 하였으므로, 국청에서 서로 대질(對質)시켜 궁문(窮問)하고, 장영우 등 여러 사람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자고 계청(啓請)하였다. 그리고 최상중(崔尙仲)과 최상성(崔尙晟)을 잡아오도록 청하였다. 이영창이 대질할 때에 말이 막히는 데가 많았으며, 혜찰의 경우는 이영창이 드러나게 교유(敎誘)한 흔적이 있었다. 그래서 국청에서 이영창을 형추(刑推)하도록 계청하고, 또 이절 등과 최상성의 형제를 대질시킬 것을 청하고, 또 이익화(李翊華)를 잡아오게 하였다. 이영창이 두 차례의 형추를 받고서야 비로소 자백[承欵]하였는데, 【자백한 공초 내용은 상변(上變)한 글과 대략 같았다.】 공사(供辭) 가운데 끌어댄 중 운부(雲浮)ㆍ풍열(楓悅)ㆍ묘정(卯定)ㆍ옥여(玉如)ㆍ일여(一如)ㆍ혜일(惠日)ㆍ정학(鄭涸)ㆍ유찬(柳鑽)ㆍ정신(鄭愼)ㆍ최헌경(崔憲卿)ㆍ신건(申鍵) 등 11인을 국청에서 계청(啓請)하여 모두 잡아오게 하였으며, 정학의 형제는 북변산(北邊山) 외진 곳에 숨어 있다고 하여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함께 체포하여 송치하도록 하고, 그 밖에 끌어댄 승인(僧人)과 적인(賊人) 등도 본도(本道)로 하여금 널리 기포(譏捕)를 더하도록 하였으며, 이영창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서 여러 죄인들이 잡혀 오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영창의 공초 안에서 또 말하기를, ‘최상중이 복직(卜直) 【바로 속언(俗諺)의 담부자(擔負者)이다.】 이 되었으므로 최상성에게 먼저 시행해야 한다는 말을 일찍이 언급(言及)하였더니, 두 사람 모두 응락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다시 최상성 등을 추문하니, 최상성은 ‘이영창의 말을 길에서 들었는데 종을 추쇄(推刷)하는 일인 줄 여겼다.’고 하였으며, 최상중은 ‘원래 들은 바가 없다’고 말하므로, 이어 이영창과 대질(對質)시킨 뒤에 최상성 형제가 연달아 형신(刑訊)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장한경(蔣漢卿)은 이절 등의 흉서(凶書) 가운데 장한경을 시켜서 중들의 종적(蹤迹)을 가서 탐지하도록 했다는 말이 있다고 하여 곤형(棍刑)을 집행하도록 청하고, 혜찰(惠察)은 국청(鞫廳)에서 결죄(決罪)하여 석방해서 보내도록 청하자, 임금이 결죄하지 말고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죄인이 자복한 뒤에는 고발한 자는 으레 목에 씌운 칼을 풀어 주나, 이번의 경우는 앞질러 석방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여 목에 씌운 칼을 풀어 주는 것이 적당한가의 여부를 국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였는데, 국청에서 말하기를,
“이절(李梲)ㆍ유선기(兪選基) 등은 이영창(李榮昌)과 마음을 같이하여 의형제를 맺고 밤낮으로 모였으며, 맹세를 같이하는 글에 반역의 마음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김경함(金慶咸)과 합하여 한마음이 되어 이제 상변(上變)하였으나, 그것도 처음에는 양성[醞釀]시키는 대로 따라 성취시키려고 하였다가 뒤에 드러날까 두려워서 발설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 세 사람은 결단코 목에 씌운 칼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김정열(金廷說)의 목에 씌운 칼을 먼저 풀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또 국청(鞫廳)에 하교(下敎)하기를,
“극적(劇賊) 장길산(張吉山)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往來)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陽德)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陰凶)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李榮昌)의 초사(招辭)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道)에 은밀히 신칙(申飭)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니, 국청에서 청하기를,
“여러 도에다 은밀히 유시를 내려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별도로 방략(方略)을 베풀게 하고 널리 기찰(譏察)을 더하며, 또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은밀히 군문(軍門)과 포청(捕廳)에다 분부하여 후한 상(賞)과 높은 벼슬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으로 일깨워서 안팎이 한마음이 되어 틀림없이 체포하는 데 기약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영창이 끌어댄 승인(僧人) 혜일(惠一)과 풍열(楓悅)을 잡아왔다. 혜일을 이영창과 대질시키니, 이영창이 또한 교유(敎誘)한 흔적이 있었으며, 풍열 역시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이익화(李翊華)를 이절(李梲)과 대질시키니, 역시 서로 다투면서 변명하므로, 모두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 얼마 지나 전 첨사(僉使) 홍기주(洪箕疇)란 자가 또 상변(上變)하여 말하기를,
“지난해 겨울에 김정열(金廷說)이 말하기를, ‘이영창(李榮昌)이란 자가 있어 멋대로 요사스럽고 흉악한 말을 하였는데, 그때 주비(朱棐)의 이름도 그의 입에서 나왔으니, 시험삼아 문천(文川)에서 가서 사정(事情)을 탐문(探問)해 보십시오.’ 하므로, 정말로 문천(文川)에 내려가서 이 말을 군수(郡守) 조석(曹錫)에게 말하고 편지를 보내어 주비(朱棐)를 맞아보니, 그의 사람됨이 바보 같기도 하고, 미치광이 같기도 하며, 그가 말하는 것도 거짓말 같기도 하고 사실 같기도 하였습니다. 인하여 그로 하여금 마음속에 품은 것을 써내라고 하였더니, 써낸 것이 무릇 일곱 차례였었는데, 그 요사스럽고 흉악함이 극도에 달했으므로, 즉시 올라 와서 고발하여 알립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주비(朱棐)를 잡아다 추문(推問)하니, 주비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지난해 겨울에 문천 군아(文川郡衙)에서 홍기주를 만났었는데, 홍기주가 말하기를, ‘학포(鶴浦)로 옮겨 가려고 하는데 누구와 같이 사귈 만하겠는가?’고 하기에, 약간인(若干人)을 써서 주었더니, 또 말하기를, ‘영흥(永興)의 원[倅]도 본고을의 인물(人物)을 알고 싶어하니, 모름지기 향임(鄕任)에 적합한 사람을 나열하여 쓰라.’고 하기에, 또 본고을 사람 수십여 명을 써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 한계(寒溪)의 도인(道人) 정혜(鄭惠)의 술업(術業)이 신비(神秘)하다는 말과 청륙포(靑陸浦)에 귀신인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사람이 있는데, 정가(鄭家)의 사당(祠堂)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는 말을 모두 홍기주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른바 일곱 차례 썼다는 문서(文書)는 모두 거짓으로 쓴 글이었으며, 그것도 더러는 그가 직접 쓴 것을 인하여 미루어 덧붙인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홍기주와 면질(面質)시킴에 미쳐서는 두 사람 모두 조석(曹錫)으로 증거를 삼으므로, 국청(鞫廳)에서 조석을 잡아오도록 청하였다. 조석은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홍기주가 와서 주비(朱棐)에게 불측(不測)한 마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광은군(光恩君)과 신 대장(申大將)이 그로 하여금 탐문(探問)하도록 하였다고 하므로, 정말 주비를 불렀으며, 홍기주가 주비와 같이 별처(別處)에서 이틀 동안 묵었습니다. 그 뒤에 홍기주가 주비가 점을 쳤다는 해도점(海島占)을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주비가 울릉도(鬱陵島)가 이미 왜지(倭地)가 되었지만 청하여 맞아 올 수 있다고 하였다.’ 하기에, 다시 주비에게 삼만위(三萬衛)의 일에 대하여 점(占)을 치도록 청하자, 주비가 즉시 엽전을 던져 점괘를 만들었는데, 대체로 주비의 말에 이르기를, ‘삼만위(三萬衛)는 영흥(永興)에 있으며, 지역이 넓고 높아, 만약 토적(土賊)의 근심이 있게 되면 동지(同志)들을 규합하여 거느리고 삼만위(三萬衛)로 들어가면 된다.’고 하고, 또 손수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것들을 여러 장의 종이에다 써서 홍기주에게 보이기에, 그 자리에서 참여하여 보았습니다. 그 밖에 주고 받은 대화의 내용은 전부 홍기주가 주비를 자랑하는 데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하므로, 국청(鞫廳)에서 다시 주비(朱棐)와 홍기주를 면질하도록 청하였다. 주비가 말한 일곱 차례 썼다는 문서(文書)는 그가 스스로 썼으며, 한계 도사(寒溪道士)에 대한 말은 양양(襄陽) 사람 송시한(宋時釬)에게서 들었다고 하였는데, 다시 추문(推問)하기에 이르러서는 주비가 그 사실을 도로 숨기므로, 열 차례의 형신(刑訊)을 받다가 죽었다. 송시한(宋時釬)은 자신이 요망스런 말을 지어냈다고 자복하였으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홍기주와 조석(曹錫)은 국청에서 청대(請對)하여 자복을 받아 감단(勘斷)하도록 청했는데, 그 또한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다. 그리고 이영창(李榮昌)이 증거로 끌어댄 신건(申鍵)을 잡아 왔는데, 역시 사실이 저절로 밝혀졌으며, 그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모두 기포(譏捕)하려 하였지만, 그런 사람이 없으므로, 국청에서 다시 추문하도록 청하였다. 이영창이 초사(招辭)를 변경하여 말하기를,
“중은 떠다니는 구름 같기 때문에 운부(雲浮)로 중 이름을 허위로 지었고, 이형징(李衡徵)ㆍ윤두서(尹斗緖)ㆍ윤창서(尹昌緖)가 찾아와 심단(沈檀)의 집에서 함께 앉아 있었으며, 심단의 아들 심득천(沈得天)과 윤두서가 은전(銀錢)을 두둑히 주자, 이형징이 정성(鄭姓)의 사람과 옥여(玉如)ㆍ정학(鄭涸)ㆍ최헌경(崔憲卿) 등의 이름을 지어내었으며, 일여(一如)와 혜일(惠一)은 일찍이 서로 아는 사이이며, 풍열(楓悅)은 이름이 알려진 중이기 때문에 빙자(憑藉)하여 말했으며, 묘정(卯定)의 이름 역시 자신이 지어내었습니다.”
하였으므로, 국청에서 공초(供招)를 변환(變幻)하였다고 하여 형신(刑訊)을 가하도록 청하고, 일곱 차례에 이르도록 형신하자 죽었다. 이에 먼저 가두었던 여러 죄인(罪人)들을 감처(勘處)하였다. 이절(李梲)ㆍ유선기(兪選基)ㆍ김경함(金慶咸) 등은 복주(伏誅)되고, 이익화(李翊華)ㆍ장영우(蔣永祐) 등은 먼 곳에다 귀양보냈었으며, 혜일ㆍ각선(覺禪)ㆍ풍열(楓悅)ㆍ일여(一如)ㆍ신건(申鍵) 등은 석방하여 보내고, 김정열(金廷說)은 석방하여 보낸 뒤에 논상(論賞)하려 하였다가, 다시 고발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여 논상하지 말도록 하였다.
[주-D001] 상변(上變) : 급변(急變)을 상고(上告)함.[주-D002] 공명(孔明) : 제갈양(諸葛亮).[주-D003] 유기(劉基) : 명나라 초기의 전략가.[주-D004] 묘생(卯生) : 12지지(地支) 중 묘년(卯年)에 출생한 사람.[주-D005] 숭정 황제(崇禎皇帝) : 명나라 의종(毅宗).[주-D006] 진년(辰年) : 12지지 중 진(辰)에 해당되는 해.[주-D007] 형추(刑推) :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며 신문함.[주-D008] 향임(鄕任) : 향리(鄕吏)의 악폐를 방지하고 수령을 보좌하기 위하여 두었던 좌수(座首)ㆍ별감(別監) 등 향청(鄕廳)의 직임(職任).[주-D009] 토적(土賊) : 어떤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도둑의 떼.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조명근 (역) |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