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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역하라 고전 3:9
서론) 왜 하나님과 동역해야 하는가?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역했을 때는 승리하였지만 자신들만의 힘으로 나아갔다가 실패하는 장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리고를 정복하고 작은 아이성을 만났을 때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자 그들은 패배하였습니다. 이후 아간을 심판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들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이 있을 때 모세의 두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기도의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밀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손이 내려오지 못하게 하여 아말렉을 진멸하기까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일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고전 10:11, 개정)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11, 개역)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땅에서의 삶을 승리하는 삶이 되게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동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을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의 최선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 139:16, 개정)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 139:16, 새번역)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하여서라도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과 동역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을 잠언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 29:26, 개정)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기 위하여 반드시 하나님과 동역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우리(주의 종들)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들을 가리켜 밭이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킹제임스 흠정역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3:9, 킹흠정)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니라.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하였을까요?
성도들로 하여금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비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 일행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하였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고전 3:6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행한 것은 바로 말씀을 심고, 말씀이 자라도록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역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제자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결과로 제자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요 15:3, 개정)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깨끗하다는 것은 제자들이 이미 거듭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13:9, 개정)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요 13:10,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또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4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힘쓰셨던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 4:23, 개정)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막 1:38, 개정)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마 11:1, 개정)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이 말씀들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기를 힘을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동역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사도들처럼 동역하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하나님과 동역하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여러분들이 모세처럼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동역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심령에 말씀을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심령에 심겨진 말씀은
1. 양식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하시며 물리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영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을 먹으면 육체의 힘이 나듯이 영의 양식을 먹으면 영적으로 힘이 나서 영의 활동을 힘있게 잘 하는 것입니다.
2. 어두운데를 비치는 빛과 같습니다.
(고후 4:6, 개정)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즉 계시가 임하면 우리들의 마음에 빛으로 충만하여 우리들이 어떻게 행할 것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시 32:8, 개정)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3. 문제를 해결하여 평안을 안겨다 줍니다.
(빌 4:6, 개정)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개정)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의 응답이 어떻게 올까요? 바로 말씀으로 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들의 삶에는 기적과 은총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간증해주고 있고 성경에서 이를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을 때 풍랑이 일어나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깨우며 도와달라고 간구할 때 “예수님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막 4:39, 개정)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처럼 문제해결의 응답은 주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진정으로 동역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심령에 말씀을 심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면서도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자녀들이 있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타겠습니까? 그처럼 우리들의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들이 세상에서 고생하며 찌들린 삶을 살아갈 때 속이 타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들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들이 기도를 해야만 할까요?
1. 우리들이 구할 때 응답을 받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생활로 인해 제한을 받으시는 것 같다. 누군가가 하나님께 해 달라고 구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케네스 해긴 『하나님과 동행하기』 오태용 옮김. 서울: 베다니출판사, 2017. p. 204.)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생각은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께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7:7, 개정)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8, 개정)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2. 우리들이 기도할 때 마귀의 억압에서 우리들이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도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눅 18:7, 개정)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8, 개정)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원수 마귀는 성도들이 억압당하고 잘못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생각을 집어넣어서 괴롭히기도 하고 실제로 성도들을 짓누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 불쌍한 크리스천은 너무나 경황이 없어서 제 목소리조차 가려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 못 어귀에 가까워졌을 무렵에 마귀 하나가 살짝 따라붙어서 하나님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얘기를 속삭였는데, 크리스천은 그 말들이 모두 제 속에서 나왔다고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한없이 사랑하는 분을 모독하고 있다는 생각(실제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은 그때까지 겪었던 그 어떤 어려움보다 크리스천을 더 심하게 괴롭혔다. 사악한 생각을 당장 걷어치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귀를 막아서 마귀가 속닥거리는 거짓말을 잠재우거나 잡소리의 근원을 파헤치는 것조차 힘들었다.”
(존 버니언 지음. C. J. 로빅 편집. 『천로역정』 최종훈 옮김. 서울: 포이에마, 2022. pp. 134-135.)
만약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이 들었던 것처럼 이런 소리가 들리거든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곧 사라질 것입니다.
(약 4:7, 개정)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벧전 5:8, 개정)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개정)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3. 우리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6-28절을 보겠습니다.
(롬 8:26, 개정)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정)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개정)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전에도 가르친 것이지만 다시 가르칠 필요가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본문을 문맥에 의거하여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의 내용과 관계없이 한절만 뚝 끌어다가 인용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인용이 아닌 것입니다. 문맥의 흐름에 맞게 인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로마서 8장 28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들의 삶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들은 로마서 8장 28절을 되뇌이며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그러겠지 하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고난들이 다시 말씀드리면 피할 수 있는 고난들이 성도들에게 수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기도를 하기만 했더라면 피할 수 있는 고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지 않았기에 쓰라린 고난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28절을 문맥으로 이해를 해보십시다.
28절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말씀이 아니라 26절부터 시작되어진 말씀을 이어받아서 생겨난 것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에서는 28절을 이렇게 직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 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선을 위해 협력한다는 것을”
이어서 카리스 종합주석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주석하였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 ‘데’(δε)가 들어있다. 이것은 ‘그러나’(but)를 의미하지만 ‘그리고’(and)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본절에서는 앞절과 관련해서 볼 때 ‘그래서’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무력한 성도들을 위해서 탄원하시며 중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름을 받은 믿는 자들은 그 뜻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카리스 종합주석 제 15권 로마서 1-8장 서울: 기독지혜사, 2007. p. 709.)
본절에서는 앞절과 관련해서 볼 때 ‘그래서’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카리스 주석에서 밝힌 것처럼 28절은 앞절의 영향을 받아서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지금 로마서 8장 26절, 27절에서 성령의 도우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 8:26, 개정)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정)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바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기도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은 그 결과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내용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기도하는 것이 없이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열심히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도우심의 기도는 방언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일들을 알 수가 없어서 어떻게 무엇으로 기도할지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기 때문에 마땅히 기도할 바를 기도하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들의 삶에는 합력하여 결국에는 선을 이루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합니다.
(암 3:3, 개정)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개역개정판 성경은 양자 사이에 의견이 나누어지는 상태이기는 하나 서로 뜻이 일치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본절을 번역했지만 원문으로는 양자 사이에 아예 약속 자체 즉 의견 교환 자체가 일어나지 못하는 관계 단절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표준 새번역은 이런 의미를 살려 "두 사람이 미리 약속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같이 갈 수 있겠느냐?"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삶의 과정에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일치시키지 못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의지조차 없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옥스퍼드 원어셩경대전 077 : 아모스 . 나훔. 서울: 제자원, 2008. p. 174.)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의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오늘날 강단이 세속화 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면 안되겠지만 강단에서 찬송인도하는 어느 기도원 집회를 보노라니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고 그저 사람들의 흥을 돋구려는 욕구만으로 찬송인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강단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장단을 맞추고 들고 뛰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어느 찬송인도자는 흥을 돋구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가 예배자가 되어 찬송인도하다가 하나님의 임재앞에 눈물을 참으며 소리없이 우는 인도자를 보았습니다. 그 예배에서는 회중들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임재를 앙망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것이 보여졌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잊어버리듯이 주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말입니다.
찬송가 535장의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1.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2. 문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 면류관은 그 이마 둘렀네
이처럼 기다리심 참 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내 죄라
3. 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쏘냐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주님의 임재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해야만 합니다.
고전 3:9, 한글킹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라" 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따로 일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역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한 주를 새롭게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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