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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숲정이 성지와 순교자
순교의 땅 전주 지역에는 전동 성당, 풍남문, 치명자산(일명 중바위), 서천교, 초록 바위, 여산 순교 성지 등 곳곳에 순교자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숲정이’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머리’라고도 하고, 군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어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자부 이순이 루갈다, 조카 유중성 마태오 등 유항검의 가족이 처음 참수되면서부터 순교자의 피가 마르지 않았다.
숲정이 처형장이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에 이명서 성인의 손자 이준명이 숲정이 순교 터를 매입하면서였다. 그 후 1935년 전동 본당의 이학수 회장이 그 자리에 십자가 순교비를 세웠고, 1968년 순교 복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1984년 9월 2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된 숲정이 순교 터는 도시화의 물결로 1960년 전주교구에 의해 설립된 해성 중고등학교가 1992년 삼천동 신축교사로 이전한 뒤 그 자리에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래의 순교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내에 새로 성지를 조성하고, 본래의 순교 터에서 옮겨 온 토사를 그 위에 덮고 십자가와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순교의 영광을 기리고 있다. 현재 성지는 해성 중고등학교 체육관으로 사용하던 윤호관 앞에 조성되었는데, 윤호관 내에는 1997년 전주교구 설정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전주가톨릭신학원이 자리하고 있다. 2004년 6월에는 성 모자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마련해 축복식을 가졌다.
숲정이는 일찍이 유항검 일가가 순교한 이래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도 수많은 신앙인들의 유혈이 있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에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12년간 옥고를 치른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욥,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 등 5명이 참수됐다. 이곳에서 신유박해 때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성 마태오, 그리고 기해박해 때 순교한 5위 모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1866년 12월 13일(음력)에는 소양면 신리골의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손선지 베드로, 한재권 요셉과 성지동의 조화서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정원지 베드로 등 여섯 명이 치명했는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867년에는 김사집 필립보을 비롯한 수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치명하기도 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었건만 이처럼 많은 교우들은 초개와 같이 세상을 버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순교자는 한국 순교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이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며느리이기도 한 이 루갈다는 조선 왕조 태종의 14대손으로서 지봉 이수광의 8대손인 이윤하와 권일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터운 신앙의 가계에서 자란 그는 성모 마리아를 닮아 평생 동정으로 살기를 결심하지만 이는 당시의 풍속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순이 루갈다의 결심을 알고 있었던 주문모 신부는 호남 전교 길에 유항검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장남 중철 또한 동정으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혼사를 주선하여,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와 같은 동정부부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4년 동안 오로지 천주의 정배가 되리라는 의지로 정결한 생활을 해 온 이들 동정부부는 마침내 신유박해를 만나 부부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입게 되었다.
전주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 유중철 요한의 처 이순이 루갈다가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숲정이에서 참수되기 직전 옥중에서 친정으로 보낸 편지가 그대로 전해져 한국 천주교회사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다. 옥중에서 옥리의 눈을 피해 그의 여동생과 올케에게 쓴 편지 조각조각이 어느 교우 집에 곱게 간직돼 내려와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전문이 소개됐는데 그 구절구절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우리는 다 같이 천주를 위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맹세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나의 애정은 다른 감옥에 갇힌 남편 요한에게로 끊임없이 달려만 갔습니다. 10월 9일 나의 시동생이 끌려 나갔습니다. 얼마 후에 남편과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남편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소식에 안도한 이순이 루갈다는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기꺼이 순교의 영광을 택하였다.
“고문이 시작되자 나는 천주를 믿음으로써 목숨을 바치겠다고 확실히 말했습니다. 형리는 나의 정강이를 때리고 수갑을 채워 옥에 가두었습니다. 내가 순교자가 된다면 모든 나의 죄는 없어지고 천 배나 만 배나 되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복(福)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들 동정부부 순교자의 무덤은 지금 전주 시내 어디서나 잘 바라다 보이는 교동(校洞)의 치명자산, 시민들은 중바위(僧岩山)라고 부르는 산머리 양지바른 자리에 있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낮이나 밤이나’ 기도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0월 21일)]
전주 숲정이와 치명자산
'전주 숲정이'(전주시 진북동 1034-1번지)는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로, 일찍부터 중죄인들의 형장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터로 변모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때에는 이순이와 류항검의 가족이 순교한 이후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충청도 출신의 김대권(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과 경기도 출신의 신태보(베드로) 등 5명이 5월 29일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또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 6명이 12월 13일 이곳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숲정이는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사적지였다. 이곳은 신앙 선조들의 순교 열정과 함께 천상의 영복을 얻은 기쁨, 피로 적셔진 진토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 내내 신자들은 그 자리를 잊을 수 없었고, 신앙의 자유를 찾은 뒤에도 자주 이곳을 순례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이 숲정이 형장이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에 이명서 성인의 손자 이준명(아나돌)이 숲정이 순교 터를 매입하면서였다. 이후 1935년에는 전동 본당의 이학수(바오로) 회장이 그 자리에 십자가비를 건립하였으며, 1960년에는 이곳 이웃에서 해성 중고등학교가 개교하였고, 1968년에는 순교 복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또 1984년에는 숲정이 순교 터가 지방 기념물 7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시화의 물결로 1989년에 해성학교가 이전되고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래의 순교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내(진북동 1034-13번지)에 새로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전주시로 들어와 전주천 변에 있는 진북 초등학교를 찾으면 된다.
한편 류항검과 가족들이 순교한 뒤 남아 있는 노비와 인척들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초남리 너머에 있는 재남리(김제군 이서면과 용지면의 경계 마을) 바우배기에 합장하였다. 그후 전동 본당이 설립되면서 재남리 공소는 이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초대 본당 주임 보두네 신부는 자주 이 공소를 순방하는 도중에 바우배기의 류항검 가족 무덤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914년 사순 시기에 당 주인이 무덤을 이장하도록 권고하자,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파묘를 하여 순교자 7구의 유해와 이름이 적힌 사기 접시를 확인하게 되었다. 류항검과 부인 신희, 아들 문석과 조카 중성, 제수 이육희, 그리고 동정부부 류중철과 이순이였다.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7구의 순교자 유해를 작은 항아리에 각각 담고 이름을 써서 달았다. 그런 다음 전동 성당을 지을 때 재목을 구하기 위해 사두었던 성당 동쪽 기린봉(306m) 자락에 있는 '치명자산'(전주시 대성동 산 11번지)에 이들 일곱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으니, 그때가 1914년 4월 19일이었다. 이어 1949년에는 전동 성당 신자들이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건립하고 교구장 김현배 신부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가졌으며, 1984년에는 이 지역이 지방 기념물 69호로 지정되었다. 전주교구에서는 이를 계기로 치명자산 개발 계획을 세운 뒤 198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95년 기념 성당을 완공하였다.
지금까지 이곳 사적지에서는 크고 작은 기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그것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발된 류항검, 류중철, 이순이 등의 시복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도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될 것이다. 석양이 질 때 드러나는 이곳 언덕의 기념 십자가 옆에 있는 바위는 순교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과 비슷하다. 이처럼 치명자산은 더 많은 양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해 오늘도 전주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그곳에 서 있다. [차기진, 사목, 1999년 11월호]
전주 숲정이 성지와 순교자
한국 순교자의 꽃, 유중철 · 이순이 동정 부부와 수많은 순교자들의 치명 터
전주 숲정이는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로 일찍부터 중죄인들의 형장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가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터로 변모하였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의 가족 등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치명터이다. 현재 성지는 본래 치명터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새로 조성되었다.
현재 전주 가톨릭신학원이 위치해 있는 숲정이(윤호관) 성지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정이’ 혹은 ‘숲머리’라고도 하는데 신유박해 때 1801년 12월 28일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의 처 신희, 유관검(柳觀儉, 1768~1801, 세례명 불명)의 처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일명 유희, 1782~1802, 루갈다) 등 유항검 가족이 처음으로 처형되면서부터 순교자들의 처형이 이어졌다.
숲정이 순교자 중 이순이는 전주 감옥에서 순교한 유중철(柳重哲, 1779~1801, 요한과 동정 부부로 살았던 순교자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며느리이기도 한 이 루갈다는 성모 마리아를 닮아 평생 동정이기를 결심하였다. 루갈다의 결심을 알고 있었던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는 호남 전교 길에 유항검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장남 중철이 역시 동정으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혼사를 주선,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와 같은 동정 부부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4년 동안 정결한 생활을 해 온 이들 부부는 마침내 신유박해를 만나 순교의 영광을 입게 되었다.
유항검 일가가 순교한 이래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도 수많은 신앙인들의 유혈이 있었다. 1839년 5월 29일에는 13년간 옥고를 치른 신태보(申太甫, ?~1839, 베드로),
이태권(李太權, 1782~1839, 베드로), 이일언(李日彦, 1767~1839, 욥), 정태봉(鄭太奉, 관명 만보, 1796~1839, 바오로), 김대권(金大權, ?~1839, 베드로) 5명이 참수됐다.
1866년 12월 13일에는 소양면 신리골의 정문호(일명 계식, 1801~1866, 바르톨로메오), 손선지(1820~1866, 베드로),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베드로)과 성지동의 조화서(1815~1866, 베드로),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정원지(일명 원조, 1846~1866, 베드로) 여섯 명이 치명했는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성인품에 올랐다.
◆ 고마운 은인 오사현
숲정이에서 처형된 분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사람은 향리(鄕吏) 신분인 오사현이라는 외교인이었다. 그는 성지동과 인접한 유상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성지동은 1840년 대에 형성된 교우촌이었고, 대성동 신리골 역시 이 무렵 형성된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오사현은 이 두 마을이 신도들의 교우촌인줄을 모르고 지냈다. 성지동과 대성동 신리골에 사는 신도들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일상생활의 몸가짐은 누구나 본받을 만큼 모범적이었다. 오사현은 두 마을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내밀히 알아 본 결과 놀랍게도 나라가 금하고 있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의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종교가 참 인간됨을 가르치는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향리의 신분으로 천주교도들을 관가에 고발해야 했지만 그러지를 않고, 오히려 자기도 언젠가는 천주교를 믿겠다고 내심 다짐하고는, 그들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을 숨겨 왔다. 그는 훗날 진안 서촌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입교한 후 착실히 수계범절을 하다가 선종했다. 그리고 평소 성지동에 사는 조화서 성인과 각별한 친분을 맺고 지냈다.
오사현은 마음으로 아끼던 천주교도들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자 신도들을 구명하기 위해 전주 감영으로 찾아가 평소 친분이 있는 관원들을 만나서 그들이 살아 날 방도가 없을까 물었다. 관원들의 대답은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당장 풀어줄 뿐 아니라 압수한 재물도 돌려주겠는데 저들이 막무가내로 죽기를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오사현은 신도들을 살려볼 요량으로 그들이 갇혀있는 옥으로 찾아가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배교하라고 했다.
오사현만 아니라 영장도 처형 직전까지 여러 번 설득했지만, 신도들은 끝까지 유혹을 물리치고 체포된 지 여드레만인 1866년 12월 13일 참수 당했다. 목격자 오사현의 아들 오순보의 말에 의하면 순교자들이 참수될 때 목에서 흰 피가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처형장에 있던 거지들이 시체의 옷을 벗겨 가려고 몰려오자 오순보는 거지들을 쫓아내고 여섯 순교자의 머리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관졸들의 양해를 얻어 잘려진 머리를 각자의 몸에 차례대로 맞추어 놓고 거적으로 덮어 주었다. 오사현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지 나흘 만에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 개와 일꾼 열두 명을 사서 형장으로 갔다. 그는 여섯 순교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대(將臺. 군지휘소) 건너 범바위(현재 鎭北寺가 있는 곳) 아래 도랑가에다가 가매장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무덤 앞에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 올때 달고 나왔던 명패를 세워 놓았다.
■ 순교자
◆ 복자 이순이 루갈다 (1782∼1802년)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경도(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녀와 남매간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16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루갈다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주 신부의 주선으로 전주 유중철과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다음해 9월 루갈다는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남편 요한이 동정 서약을 어기려고 할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결과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녀가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간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 복자 유중철 요한 (1779∼1801년) : 유중철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으로부터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7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 영성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로부터 동정을 지키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신부는 전주에 사는 요한을 생각하고는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그 결과 1797년 10월 요한과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해 9월 요한은 아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9월 중순에는 요한의 아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 포졸들은 유문석을 가족들에게서 떼어내 형인 유중철 요한에게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당시 요한의 나이는 23세였다.
◆ 복자 유중성 마태오 ( ? ∼1802년) :유중성(柳重誠)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후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집안에서는 유항검과 유중철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 유배지로 가며 사람들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쳤다. 그러자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였다.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1801∼1866) : ‘계식’으로도 불렸던 정문호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고향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무렵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정착하였는데,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지만, 미처 소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손선지,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된 뒤 12월 13일에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며 진심으로 순교를 기뻐하였다고 한다.
◆ 성 손선지 베드로(1820∼1866) : ‘승운’이라고도 불렸던 손선지는 충청도 임천(林川)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샤스탕)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혔다. 신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나, 관장에게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강요당하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손선지는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다가,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4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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