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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응시는 문구멍으로 안을 몰래 들여다볼 때 두려움이 느껴지는 순간처럼 늘 타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그 가능성을 이른다
(라캉) 그 타자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대상으로 보는 ‘응시’가 가능해진다.주체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은 이미 늘 주체를 그 뒤에서 주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응시하고 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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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 용어로, 내가 보는 타인이 나에게 보내는 시선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대상이 되는 상황의 이율배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세미나 1: 프로이트의 기술 에세이》(1953~1954)에서 응시에 대해 처음 거론하였다. 라캉은 이때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응시 개념을 주요 전거로 삼았는데, 응시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regard'가 영어로 번역될 때 사르트르는 'look'으로, 라캉은 'gaze'로 각기 달리 번역되었다.
사르트르의 응시 개념
사르트르에게 응시는 문구멍으로 안을 몰래 들여다볼 때 두려움이 느껴지는 순간처럼 늘 타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그 가능성을 이른다. 이렇게 타자는 나처럼 주체이고 그렇게 나와 연결되어 있다. 주체는 타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 놀라고 수치심을 느끼고 그 자체가 된다. 이 지점에서 라캉은 그만의 응시 개념을 발전시키는 대신 시선의 의미로 해석되는 응시가 꼭 시각 기관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르트르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라캉의 응시 개념
1964년 유명한 개념인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 a'가 만들어지고 난 뒤에야 라캉은 사르트르의 것과 완전히 구별되는 그만의 응시 개념을 만들어냈다. 사르트르가 '응시'와 '보는 행위'를 뒤섞었다면 라캉은 둘을 구별하고 떼어놓았다. 즉 응시가 보는 행위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시각충동의 대상은 응시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응시는 더 이상 주체 편에 속하지 않고 대타자에 속하게 된다.
사르트르가 '대타자를 보는 것'과 '대타자에게 보여지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상호성이 있다고 봤다면, 라캉은 응시와 시선(eye) 사이에 이율배반적 관계가 있다고 파악하였다. 보고 있는 시선은 주체의 것이지만 응시는 대상의 것이기에 이 둘은 일치할 수 없다. 즉 내가 당신을 보는 그 자리에서 당신은 나를 볼 수 없다. 주체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은 이미 늘 주체를 그 뒤에서 주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응시하고 있다. 시선과 응시 사이의 분열은 곧 시각의 영역에서 표현된 주체의 분열 그 자체에 해당한다.
영화 비평
응시 개념은 그 뒤 1970년대 기호학자 겸 영화비평가 크리스티앙 메츠(Christian Metz)의 정신분석적 영화 비평이나 페미니즘 영화 비평에 널리 활용되었다. 그러나 라캉의 응시 개념을 영화 비평에 사용하는 것은 개념적 혼동에 빠지기 쉬웠으며, 대체로 사르트르의 응시 개념이나 푸코의 판옵티콘에 대한 설명과 뒤섞여 쓰였다.
라캉의 신조어 가운데 자주 언급되는 용어인 응시는 상징계로 진입한 죽음충동이 시각의 영역에 나타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본능과 그것의 변천」에서(죽음)충동은 현실로 진입하면서 파편화되어 욕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사도-마조히즘이나 몰래 훔쳐보는 관음증과 보여 지는 노출증의 쾌락은 나르시시즘적인 충동이 삶충동의 모습으로 변형된 것이다. 라캉에게도 충동은 상징계에 진입하면 부분충동(partial drive)이 되어 욕망의 대상(a)이 된다. "물위에 뜬 깡통도 우리를 보고있다"는 그의 유명한 말은 재현의 상이란 바라봄과 보여 짐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긴다는 의미이다.
라캉은 응시를 프로이트의 분석에 나오는 아버지의 꿈에 비유했다. 아들의 죽음을 지킨 아버지가 옆방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아들은 불에 타며 "아버지 제가 불에 타는 것이 안보이세요?"라고 묻는다(S11: 70). 꿈을 깨는 순간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것을 본다. 그러기에 죽은 아들의 말은 아버지의 응시요, 오브제 아이다.
그는 꿈을 연장하고 싶다. 죽음이 화려한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응시이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꾸고 깨었을 때 그는 장자가 나비꿈을 꾸는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가 반문했다. 라캉은 이 꿈을 응시로 풀어낸다(S11: 76). 나비는 장자가 되고 싶고 갖고 싶은 오브제 아이다. 장자와 나비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이다.
응시는 왜곡된 상이다. 라캉은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에서 가운데 아래쪽에 길쭉한 모양이 남근처럼 보이지만 약간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해골이라고 말한다. 지젝은 여기에서 "비스듬히 바라보기"(looking awry)라는 제목의 책을 쓴다. 해골이 욕망에 의해 남근처럼 보이는 것이 오브제 아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욕망의 대상은 바로 응시에 의해 태어난 상이다. 제우시스와 패러시오스의 그림내기에서도 새가 포도나무에 날아와 앉는 것은 새를 유혹하는 그림 속의 미끼(lure) 때문이다(S11: 103).
시각상에 나타나는 얼룩인 응시는 연인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노출증인 "부풀리기"로 나타나고, 적을 전복하기 위해 닮는 "흉내내기"(mimicry)로도 나타난다. 그러기에 그림의 목적은 객관 재현이 아니라 화가와 관객의 응시가 만나 서로의 응시를 낮추는 것이다. 문학작품 역시 저자와 독자가 서로 만나 응시를 길들이는 장이다. 절대적인 단 하나의 해석을 거부하는 입장이다.(권택영)
<들뢰즈: 차이와 반복>
2장의 1절의 주요한 내용은 '응시하는 정신'으로부터 나온다. 상상에 의해 ‘수축’되는 현재에서의 과거와 미래의 수동적인 종합, 그것을 만드는 기억과 반성에 앞서는 ‘응시’를 말하는 들뢰즈는 응시로 인해 발생하는 자아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간다.
(행위자를)응시하는 자아는 수축을 하며 이 자아는 응시를 통해 만들어진다. 다시말해, “우리는 어떤 응시들이고, 우리는 어떤 상상들이다(…)우리는 오로지 응시하기 때문에 비로소 실존한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수축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한다.” 자아가 있고 그것이 응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가 자아를 생기게 한다. 이렇게 훔쳐내는 악타이온적 응시는 행위하는 자아를 '관조하며 이는 작은 자아들이다.
응시하는 정신은 반복에서 차이를 훔쳐낸다. 그리고 참된 반복은 상상으로부터 나온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라캉의 응시 이론부터 들뢰즈의 촉지적 시각까지
최소현
예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무한 부딪힘이다. 라캉은 ‘응시이론’을 통해서, 메를로 퐁티는 ‘상호 신체성’을 통해서, 들뢰즈는 ‘촉지적 감각’을 통해서 이를 증명해내고 했다. 상상력의 층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교류를 통해 무한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예술을 철학자들은 어떻게 밝혀내고자 했을까.
라캉(Jacques Lacan, 프랑스의 철학자·정신분석학자)의 이미지 이론인 ‘왜상’은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어떤 형태가 재변형되어 보이는 방식이다. 분명하게 보이지 않던 이미지가 어떤 매개 과정을 거침으로써 분명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홀바인의 〈대사들〉에서 시선의 다른 방향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정면에서 본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
대사들 부분
라캉은 ‘보임’의 감각이 나뉘어 있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시각과는 달리, ‘응시’는 보이지 않는 시선이다. 내가 볼 수 없는 또 다른 시선, 그것이 응시이다. 〈대사들〉에서도 예측하기 어려웠던, 그래서 그것을 발견했을 때 왠지 모를 두려움이 동반했던 응시가 존재한다. 〈대사들〉의 정면 앞,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동안 사선의 방향에서 해골은 형태를 갖춘 채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나는 보는 주체인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언제 어느 순간에나 ‘보는 주체’ 일 수 있을까?
사실 라캉이 겨냥했던 것은 르네상스 시각 모델의 기초인 ‘원근법’의 내적 균열이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그림 내부 소실점을 가정하고 외부관찰자의 시선을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원근법은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고 한다. 그것은 단일한 시각으로만 보려는 자의 고집적인 시각이기에 불완전하고 자가당착에 맞닥뜨리게 된다.
주체의 완전한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에 따르면, 오히려 주체의 시각 이전에 타자의 응시가 선행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빛을 통해서 대상을 본다. 하지만 빛은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도처에 빛이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보는 사물이 먼저 빛을 되쏘며 우리를 응시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응시는 우리가 알 수 없고, 길들일 수 없다.
내가 바라볼 수 없는 선행된 응시의 존재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을 느낀다. 마치 누군가 나를 열쇠 구멍 안에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가능케 하는 또 다른 시선, 그것은 나의 상상 속에서 작동되는 타자의 현전이다.
라캉은 타자 아래에서 대상이 되는 존재를 대상 a(object a)라고 명명했다. 대상 a는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존재한다. 대상 a가 존재하는 환상은 타자성의 장소이다. 환상 안에서는 주체가 자신의 주관성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과 부딪치면서 만들어진 타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타자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대상으로 보는 ‘응시’가 가능해진다. 이순간이 주체와 대상이 동일시되는 순간이다. 라캉은 그런 환상을 예술이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환상의 스크린인 예술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는 주체, 대상 a가 출현한다. 그래서 라캉은 불가능한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을 진리로까지 격상시켰다.
환상-예술에서 공존 불가능한 ‘욕망하는 타자’와 ‘대상으로서의 주체’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동일성이 성취되는 순간은 현실과 공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 짧은 순간 속에 진리는 잠시 동안만 빛을 발하다 사라진다. 이것을 라캉은 환상의 횡단이 발생하는 순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순간은 필연적으로 쾌락의 순간인데, 그 이유는 주체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장소를 찾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주체가 자신의 장소를 순간적으로 획득하는 감성적 충격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성을 경험하게 되고 대상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재발견해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예술은 때론 각성과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렇듯, 계속해서 유동하는 환상의 횡단 아래에 일종의 행위가 되는 회화를 라캉은 ‘응시에 호소하는 미술’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
세잔을 언급한 학자가 여기 또 있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프랑스의 철학자)는 세계내의 체험을 근원으로 하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지각 능력의 선차적 문제로 ‘몸’에 집중했다. 세계를 지각한다는 것은, 의식 이전에 신체가 먼저 타인과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세계와 나, 그리고 타인이 신체적 상호교류를 통해 세계의 다양성을 체험하는 것으로 불확정적인 상태에서 부딪히는 끝없는 탐색을 통해 의미를 창출해내는 활동이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화가는 자신의 신체를 동반하여 작품을 만든다. 말하자면 예술가가 그리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 삶 전반을 통해서 세계를 경험해 온 것이다.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수한 것들을 화폭 위에 (들뢰즈에 표현에 의하면) 채우는 것이라기보다, 비워내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는 자신이 세계에 참여하면서 발생되는 사유에 대한 가시화, 그리고 또 다른 사유를 촉발시키고 부딪히게 하는 열려진 장으로서의 작품을 창조해내야 한다. 이것이 예술가만이 가진 자유이다. 한마디로 예술가는 세계와 더불어 존재론적 감각 공동체를 가지고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 감수성을 표현하는 자이다. 그렇기에 예술가가 창조하는 예술은 보이는 것을 표현하면서도 존재론적으로 보이지 않는 심층의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한편 들뢰즈(Gilles Deleuze, 프랑스의 철학자)는 이것을 ‘감각–세상에 있음’이라고 불렀다. 개인은 감각 속에서 형성이 되고, 감각을 주면서 다시 감각을 받는 존재라고 한다. 들뢰즈의 이론 안에서도 개인의 신체는 주체이자 대상이 된다. 그림 안에서 관객은 화가가 느끼는 감각을 받는다.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자의 교류가 가능해지는 것이며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상호신체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감각은 촉각, 시각, 청각과 같이 신체 전체에 걸쳐 있다. 그리고 이 감각들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소통한다. 위대한 화가는 시각적 감각을 통로로 모든 감각 영역에 걸쳐 대상의 생생한 힘(들뢰즈에 따르면 ‘리듬’)을 포착한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세잔이 언급된다.
세잔은 빅투아르 산을 바라보았을 때도 색채들을 변조해내면서 시각적 닮음보다 더 깊은 닮음을 묘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대상을 작가 자신이 신체적으로 소통하고 체험한 더 깊은 닮음이다. 그의 그림은 우연과 선택의 중첩이다. 화가의 손에 의해 잠재된 형상이 도출되고 화가의 선택의 연쇄가 시각적 전체를 다시 방향 짓는다. 그리고 이 같은 방식으로 인해 마침내 회화적이라고 불릴 수 있게 된다.
화가의 손적인 표시는 구성적 질서를 깨뜨린다. 그것은 자유로운 색채 표현으로 더욱 잘 나타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빛이나 명암법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시각적 전체 속에서 새로운 닮음을 생산하는 데 적합하다.
쉴 새 없는 움직임으로 형을 해체하고 광학적 공간을 단절하는, 손적인 시도를 들뢰즈는 ‘눈으로 만진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촉지적 시각’을 통해 눈의 종속을 벗어나게 된 손이 회화에 움직임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상적 형태를 해체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얼룩과 터치가 수반된다. 이처럼 감각의 상호교차 속에서 회화에 움직임을 부여함으로써 보이는 대상에 보이지 않은 힘을 포착해내는 것, 이것이 순수한 형상의 힘으로의 상승을 가능하게 한다.
회화는 결정적이지 않은 영역까지 재현한다. 회화 안에는 존재하는 것이 있고, 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회화는 상상의 영역 안에 자리하며 무궁한 가능성이 된다. 손적인 의지로 말미암아 화가의 우연과 선택은 예측될 수 없다. 하지만 이 우연과 선택이 결국 더 깊은 닮음을 재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보고 아는 것과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 사이에 필연적인 간극이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세잔의 그림이 우리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우리가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몸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나의 기억으로 대상을 만졌을 때 세잔처럼 관찰될 수 있다는 것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라캉의 이야기를 빌려, 우리는 결코 언제 어디서나 보는 주체일 수 없다. 우리는 때로 대상이 되기도 하며 그 차이로 인해 삶을 욕망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화가의 그림 안에 보이지 않은 힘을 발견해냈다면, 우리는 시각을 넘어 다른 감각으로 회화를 바라보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참고자료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제욱시스에 대한 파라시오스의 승리를 ‘시선’(levoir)에 대한 ‘응시'(le regard)의 승리로 해석한다. ‘시선’과 ‘응시’의 의미를 간결하게 설명해보자. ('시선'과 ‘응시'라는 번역어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딱히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ㅜㅜ) ‘시선'은 한 마디로 카메라처럼 어떤 장면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응시'는 욕망의시선이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시선’이 아니라 ‘응시'다. 카메라처럼 어떤 장면이나 대상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볼 수 없다. 심지어 멍때리는 순간조차도 그러하다. 가령 어떤 일행이 길을 지나가던 한 사람을 동시에 쳐다보았다고 치자. 모두 같은 장면을 보았을 터이고 물리적으로는 이들의 망막에 동일한 장면이 맺혔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시선은 같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시각적 경험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행인의 옷차림, 어떤 사람은 생김새, 어떤 사람은 주변 정황에 주목하였을 것이다. 눈은 물리적으로 카메라 렌즈처럼 주변의 시각적 정보를 담지만, 본다는 것은 단지 눈의 활동이 아닌 우리의 뇌가 이미 개입함으로써 특정한 부분을 도려내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이것이 응시의 의미이다. 그래서 라캉은 이러한 응시를 욕망의 눈, 혹은 욕망의 시선으로 부른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돌이지만, 단순한 돌로 볼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제욱시스의 그림은 카메라처럼 새의 '시선'을 유도하였지만,파라시오스의 그림은 욕망하는 인간, 제욱시스의 '응시’를 겨냥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말에서 봄과 응시라는 두 단어는 의미적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단지 잠깐 보는 것과 오래 보는 것, 시선의 강도에 따라 봄과 응시라는 두 가지의 양태로 나뉘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봄과 응시는 강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한다.
프랑스어와 영어에서는 봄과 응시의 단어의 의미적 구분이 뚜렷하며 또한 병행될 수도 없다. 영어에서는 see와 watch, 불어에서는 voir와 regarder의 차이가 그것이다.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see와 voir는 나의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시선이 대상에 닿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watch regarder는 내가 1. 일차적으로 감각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며 2.이차적으로 그것을 내면에서 의식하거나 반성하는 활동까지를 포함한다.
또한 프랑스어에서 regarder는 응시하다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관계가 있다'라는 뜻으로서 일상적으로는 'Ca ne me regarde pas(그건 나와 관련 없다).'라는 표현에 자주 쓰인다. 직역하면 '그것은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라는 이상한 문장이지만 이를 통해서 regard라는 시선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어에서 단지 주체 중심적인 감각능력을 의미한다.
첫댓글 응시/한영희
묘지 울타리를 가르는 찔레나무들
언제부터 그 아래 살았는지 모른다
어젯밤 어깨를 들썩이던 여자가 축축함을 내려놓고 간 후
의자는 전염병에 걸린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어둠이 걷히기 전에
아기 눈빛 같은 이슬을 모아 세수를 마쳐야 한다
환경미화원의 빗자루는 나의 넓은 품을 달래줄 것이다
따스한 햇살로 아침밥을 지어먹고
밤사이 뭉친 근육을 풀어줘야 한다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을 덜어내기 시작하면
나는 만삭의 배가 불러온다
겉옷의 색이 점점 야위어 간다
더운 바람은 계절도 없이 불어오지만
체온은 비석아래 쌓여가는 먼지를 닮았다
허물어져 가는 몸에서 꽃을 피우고
나비가 내려와 노란 꽃가루를 털고 간다
목련꽃봉오리 피워 물었던 가지에서
내부수리 중 푯말이 숨을 쉰다
*2018 투데이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895
응시 / 길상호(1973~ )
빨랫줄의 명태는
배를 활짝 열어둔 채
아직 가시 사이에 박혀있는 허기마저
말려내고 있었네
꾸덕꾸덕해진 눈동자를
바람이 쌀쌀한 혀로 핥고 갈 때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네
꼬리지느러미에서 자라난 고드름
맥박처럼 똑.똑.똑.
굳은 몸을 떠나가고 있었네
마루 위의 누런 고양이
한 나절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네
빨랫줄을 올려다보는 동안
고양이는 촉촉한 눈동자만 남았네
허기를 버린 눈과 허기진 눈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참 비린 한낮이었네
열 개의 입을 가진 불의 응시 / 김연아
야생 당나귀와 까마귀들이 지나간다
내 눈을 끌고
내가 갈 수 없는 장소까지
차가운 벨벳 냄새가 창으로 파고든다
내 핏속으로 검은 수액이 흐른다
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거야,
어떤 예언은 내 안에서 남발된다
모르는 얼굴이 나를 버리는 꿈을 꿨다
그런 밤이면
나에게서 네가 스며 나온다
말이 되지 못한 그림자는
내 몸을 차지하고 내 피를 흘린다
너의 깊은 내장 속에 무엇을 숨겼나
창이 창이기를 그만두고
네 안에 타오르는 늙은 소녀들
열 개의 입으로도
불리어질 수 없는 이름들
불의 혓바닥 아래서
나는 돌들과 함께 지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손
나의 외침은 안개와 밤의 해변으로 쓸려갔다
말할 수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훼손되지 않는다
불의 안쪽에는 여전히 눈동자가 있다
한 눈에는 밤이,
한 눈에는 낮이 소용돌이친다
응시/유종순
어둠속에서 어둠 가득 어둠을 끌어 안은
그러나 결코 어두워지지 않는
새벽보다도 더 빠르게 한낮의 태양보다도 더 완전하게
어둠을 분해하고 벗겨낼 줄 아는
눈 무서운 눈
눈 실아있는 눈
눈 타오르는 눈
시각장애인 안내견/정호승
지하철을 탄 시각장애인 안내견 곁을
노숙자 한 사람이 낡은 허리를 구부리고
손에 든 모자를 내밀며 지나간다
아무도 동전한닢 넣지 않는다
전동차는 수없이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시각장애인 안내견만이 천천히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천원짜리 지폐 한장을 모자에 넣어주고
다시 주인 곁에 앉아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동호대교를 달리는 차창 밖에 초승달 하나
한강에 몸을 던진다
*상황을 굽어보던 시각장애인 안내견 '만이' 노숙자의 가난에 "지폐 한장을 넣어준다. 그리고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나'를 바라보는 개의 시선을 기억하라. 이것은 다름 아닌 시인의 '자기응시'의 시선이다. 이는 자신에 대한 도덕적 검열의 시선이기도 한데, 이 시선에 의하여 시인은 스스로 검열관이 되기도 하고 검열 대상이 되기도 한다.(김영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