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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체험(성령체험, 신비체험)의 성격과 유익 ♡♡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정상체험 또는 신비체험이라고 한다.
♡ 신비체험에 관한 견해들
일반적으로 전통적 교회는 신비체험이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방언, 환상, 꿈, 황홀체험 등을 신비주의 현상이라면서 말씀에 바로 서지 않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잘못된 경험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이런 사람들은 성경 인물들이 이런 경험을 한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성경 인물들이 이런 경험들을 한 것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 기록을 위한 것이며, 이제는 완성된 성경을 갖고 있으므로 교회 시대의 신자들이 이런 경험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필자가 잎에서 밝힌 사람들의 신비체험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상체험들' 참조).
비판자들을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주저한다. 인정하자니 자신들의 신학을 부인하는 것 같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그 많은 사람들의 실례를 부인하는 것 같아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결국 그들의 신학은 자기들이 신비체험 하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경, 역사적 사례 및 오늘날 신자들의 경험이 이런 신비체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체험은 체험한 자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체험이지만 무체험자에게는 달 나라 이야기 같아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 두 종류의 무체험자
무체험 자에도 두 부류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체험을 하지는 못했지만 신실한 신자들의 체험을 인정하는 자들과, 한동안 체험을 추구하다가 체험하지 못하여서 극렬한 반대자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요즈음 한국에서도 방언을 포함한 신비체험을 한 신자가 70~80퍼센트라고 하는데 나머지 무체험자 중에서도 극소수가 목숨(?)을 걸고 이런 체험을 반대하기도 한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성령 소멸자'라 하고(살전 5:19). 이런 현상을 귀신이나 마귀장난이라고 폄훼하는 자들은 '성령 모독자'라고 한다.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9-22).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막 3:28-29).
- 신비주의 정의의 어려움
저명한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인 찰스 핫지도 신비주의를 제대로 정의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자유주의자들은 성령의 조명을 믿는 보수 복음주의자들을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반면,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기록된 말씀과는 달리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을 신비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를 다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이 의도하는 말 그대로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오늘날 교회 내에는 팽배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방언하고 신유하고 예언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는 등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그 자체가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것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필자는 ‘불건전한 이성주의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신실한 주의 사자들이나 신자들이 체험하는 신령한 것조차 부정하는 자들을 달리 표현할 말이 어디 있는가?
따라서 여기에서는 애매 모호한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불건전한 신비주의와 건전한 신비주의의 차별이 무엇인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 성경이 말하는 신비
성경에서 신비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미스테리온(μυστηριον)이다. 미스테리온이 사용된 몇 구절들을 예로 들어 보자.
먼저, 미스테리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복음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미스테리온)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그러나 성경에서 미스테리온이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의미하는 말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유대인이 완악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미스테리온)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불법의 비밀(미스테리온)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고 있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살후 2:7).
-보통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사람도 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미스테리온)과 모든 지식을 알고”(고전 13:2).
그렇다고 인간의 노력으로 소수만이 가지는 특수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은사나(고전 12:10; 14:24, 25), 신앙의 성숙으로 인해 말씀을 보다 깊이 깨닫는 것 등을 말한다.
신앙이 성숙한 자가 초신자보다 성경의 내용을 더 많이 알고 의미를 더 깊이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방언하는 자는 그 내용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내용의 비밀을 아신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미스테리온)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 예수님의 재림 때에 우리들의 몸이 홀연히 변하는 현상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라”(고전 15:51).
이처럼 성경에서는 인간의 이성이나 채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만이 아는 일들을 비밀(미스테리온)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미스테리온의 의미를 적어도 두 가지로는 구별해서 이해야 한다.
S. 모티어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S. Motyer, “Mystery,”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 740).
“드러나고 숨겨진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 (미스테리온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물론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두 가지 측면과 부합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에게 모든 지혜 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알려 주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은 측량할 수 없고 그 방법은 찾지 못할 정도이다”(롬 11:33).
♡ 신비체험과 신비주의
이처럼 신비주의라는 말을 제대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보수복음주의자인 윈프리드 코르두안도 신비주의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정의를 제시한다.
(Winfried Corduan, Mysticism,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1).
"신비체험은 자아 의식에서 벗어 나거나 자아 의식에 더 이상 몰두하지 않은 경험을 말한다."
-로렌스 하타브 Lawrence J. Hatab.
"신비주의는 실체-즉 하나님-를 이해하는 것이다."-에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신비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이고, 직접적이고, 비추상적이고, 중보자가 없는 지식을 얻는 것을 말하며, 지식이 너무나 직접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도 부른다."
- D. D. 마틴D. D. Martin.
마빈 콜은 신비주의를 좀 더 자세히 정의한다.
“우주에는 (우리의 인식을 초월하지만 자극시키는)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데 이는 통상적인 감각 기능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신비적인 요소가 인류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신비주의자란 이러한 신비적인 요소를 믿거나 체험한 사람을 말하며,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믿음이나 체험은 너무나 귀중한 것이 되어서 그 사람은 그러한 믿음이나 체험을 표현하고 평가하는 삶을 산다."
한편 윌리암 제임스는 좀 색다르게 신비주의를 평가한다. 그는 신비주의의 주요 특징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신비 체험을 말로 제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Ineffability].
둘째, 신비주의자들은 신비 체험을 통해 순수 ‘지성적인 지식(noetic quality)을 얻는다.
이 두 가지 만으로도 신비주의의 요건을 갖추기에 충분하지만 제임스는 두 가지를 더 추가한다.
이러한 체험은 '일시적이며' '수동적"이다(transiency and passivity). 즉 신비 체험은 통상적으로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며 개인이 자의로 그 체험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의를 살펴 본 후 코르두안은 신비 체험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한다.
첫째, 신비 체험은 연합(unity)의 체험이다.
둘째, 신비 체험을 통해 얻는 지식은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성으로 제대로 포착하는 것은 물론 말로 제대로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코르두안은 신비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신비주의자는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으며 초월적인 체험을 통하여 절대자와 직접적인 교제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에블린 언더힐은 보다 체험적으로 신비주의를 설명한다.
언더힐은 신비체험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절대자의 임재체험을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에까지 확장되고(롬 1:20), 초월적인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증가되는데, 신비체험은 이 3가지 중 한두 가지를 동반하거나 모두를 동반하기도 한다.
♡ 기독교 신비체험과 세상의 신비체험
어떤 목회자는 “성경적 신비체험은 인정하지만 신비주의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는 하다. “~주의”(~ism)는 그것만이 진짜라는 패쇄적이고 편협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언어는 완벽하지 못하다. 칼뱅주의와 웨슬레안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등, 이 세상에는 “~주의”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는 좁은 의미의 ‘전문 술어’가 아니라 설명을 위한 ‘분류’ 또는 ‘사상의 한 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왜냐하면 필자가 신비주의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신비주의가 기독교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비체험을 하지 못한 신자 중에도 훌륭한 신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필자가 말하는 신비체험은 이전의 "여러 가지 정상체험"에서 밝힌 기쁨체험이나 황홀 체험, 계시체험, 능력체험 및 자연경이체험 등을 말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런 체험을 가끔은 하지만 자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체험을 한두 번 한 사람들도 재경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사람들이 많다.
또한 이런 체험을 한 후에도 자신의 이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보고 이런 체험의 무용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필자도 하나님이 주시는 초월적 상태를 경험한 것은 신학교 입학 후 돈 문제로 인해 성경 구절을 간절히 암송하다가 7일간 정상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한참 후 마음훈련을 통해 6개월간 정상체험을 한 적도 있다.
7일간의 체험을 한 한참 이후에 하나님은 나를 앞 뒤가 꽉 막힌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으신 후 강한 기쁨과 웃음을 6개월 정도 주신 적이 있다.
상황적으로 보면 울고 절망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웃음으로 인해, 일 할 때나, 기도할 때나, 길 거리를 걸을 때에도 나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출 것같이 기쁨과 웃음이 솟아나서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러다가 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짧은 6개월 동안 내가 평생 웃은 것 보다 더 많이 웃었던 던 같다. 주변 사람들이 나의 모습을 감지했다.
“이것 봐라. 신기하네. 상황을 초월하는 기쁨이 진짜 기쁨이구나.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빌 4:4)고 한 말이 이해가 되네.
사도 바울 정도의 영성이라면 바깥이든 감옥이든 어디든 심령천국을 누렸겠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기독교에서는 이런 체험을 '정상체험,' '성령체험 ' "위기체험'이라고 부른다.
심리학에서는 '의식의 변형 체험,' '아하 체험,' '브레이크아웃 체험,' "법열法悅 체험'(불교), '쿤달리니 각성 체험'(요가)이라 부른다.
심리학이나 세상 종교도 신비체험을 자주하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여긴다.
그러나 세상 체험의 외양은 기독교 체험과 비슷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체험이 아니라 인위적인 체험, 마귀가 주는 체험일 수도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체험을 했다는 세상적 마음수련이나 뇌호흡 관련자들의 간증을 살펴보면 ‘갑자기 머리가 빠개지는 듯이 아프다가 어떤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강한 악령이 그 사람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음수련 중 ‘갑자기 두려움이 임하더니 그 다음에 잠잠해 지더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나름대로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고 몸도 낫고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지만 눈에 두드러지는 증상은 죽어도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더구다나 이전에 이런 훈련에 접했다가 기독교 마음훈련을 하던 중, 마귀의 공격으로 인해 힘들었다는 간증을 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귀의 고도 전략의 희생자들이다. 마귀는 영적·정신적·세상적 축복은 어느 정도 준다.
마귀는 고등종교를 통해 때로는 윤리도덕적으로도 흠없는 삶을 살게 하거나,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게 하거나, 온갖 희한한 영적 능력과 체험을 하게 하거나, 무소유와 무집착으로 인해 일반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종교인을 생산한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죽어도 예수는 못 믿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에 세력들이다.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 4:5-8).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잀 4:3).
♡ 마음훈련과 정상체험
기독교 마음훈련을 어느 정도 하면 ‘나와 하나님이 하나되는 '정상체험’을 수시로 할 수 있으며 정상체험을 연속적으로 체험하는 '고원체험'(plateau experience)도 자주 할 수 있다.
이때의 하나됨은 존재론적 하나됨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됨을 말한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분이다(롬 6:5-7). 그러나 부부가 결혼했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서로가 연합과 하나됨의 축복을 누리는 것 아니라 서로 노력해야 하듯, 신자도 신분적으로 예수님과 연합되었다고 해서 항상 연합의 축복을 체험하고 누리는 것은 아니다.
연합의 축복을 실제로 누리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말씀과 기도 등의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개신교는 말씀과 기도는 강조하면서도 막상 말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하나 되는 연합 체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비판 일변도의 태도를 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하나님과 의미있는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중가일로에 있다. 마음훈련과 임재훈련을 제대로 하면 나와 하나님이 하나되는 체험을 수시로 할 수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나와 하나님이 하나 되는 체험이야 말로 ‘정상 체험’의 최고봉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우리가 어떤 것과 하나될 때 누리는 ‘몰입 체험’은 결국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 되는 체험을 누리는 것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몰입 체험'은 자신과 무엇·자신과 사람이 하나 되는 체험과 동일한 즐거움과 보람과 만족과 의미를 누리는데 정도의 깊이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 정상체험의 유익
첫째, 정상체험은 또 다른 회심 체험이다.
이 사실은 안토니 후크마가 잘 지적했듯, 진정한 신자라도 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거듭나는 급격한 회심 체험에 버금가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성경의 다윗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윗은 비록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지만(삼상 13:14), 밧세바를 성폭행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살인 교사한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너무나 끔찍한 죄로 인해 그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처절하게 회개했다. 이런 일은 불신자나 신자의 급격한 회심 체험은 부흥기에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둘째, 정상체험을 통해 신앙이 급성장한다.
우리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이루어 가는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조그만 라이트를 들고 어두움 밤에 길을 찾아가는 것에 비유한다면 정상 체험은 조명탄이 대낮같이 환하게 밝힌 길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정상체험을 통해 희미하고 어렴풋하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의 존재와 영적인 실상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진다.
그런 사람은 밑바닥이 없는 죄의 깊이를 통곡하고 동시에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감격으로 인해 회개와 기쁨의 눈물이 뒤범벅이 된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능력을 받는다.
정상체험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 재미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일을 사모하고 열심을 낸다.
필자는 보통 신자가 10년 걸려서 이룰 신앙을 이런 체험을 통해 1년 내에 이루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어느 신자는 신앙생활을 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복음의 핵심에 대한 정확한 이해, 하나님과 영적인 실상에 대한 이해, 말씀에 대한 이해, 헌신과 열심을 볼 때 십여 년 신앙생활을 한 사람 못지 않았다.
셋째, 정상체험을 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활기 차게 신앙생활 한다.
정상체험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영적충전 체험이다. 정상체험을 통해 우리는 잠시 지상의 관심에서 하늘의 신령한 것을 강도 높게 체험하고 새로운 영적충전을 받는다.
정상의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골짜기에 내려 왔을 때 우리는 더욱 자발적이고 기쁨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상업무에서 벗어나서 며칠간 휴양지에 여행 갔다 온 사람과 같다. 물론 일에 피해가 갈 정도로 무리하게 장기간 휴식을 떠난다면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한 휴식은 일에 새로운 활력을 더해 준다.
넷째 정상체험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다.
정상체험은 위기체험(Crisis experience)으로 불리기도 한다.
필자가 신학교 다닐 때 7일간의 정상체험을 통해 재정 위기를 극복했듯, 위기체험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 사례가 많다.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정상체험을 통해 로마의 황제가 되고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공인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단체적으로 볼 때, 1907년 한국 장대현 교회의 부흥운동은 다가 올 일제의 압정을 견뎌내는 원동력이 되었고 미국 제2차 대각성운동(1850~1900)은 다가올 남북전쟁(1861~1865)을 이겨낼 원동력이 되었다.
다섯째, 정상체험을 통해 사역의 능력을 공급 받는다.
요한 웨슬리, D.L. 무디 및 수많은 사역자들이 정상체험, 즉 성령체험을 통해 능력을 공급 받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자가 되었고 지금도 활기차게 사역하고 있다.
여섯째,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유지한다(계 2:4-5).
제도나 전통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뜨거움과 강렬함을 늘 맛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일곱째, 하나님의 비밀에 동참한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5).
필자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면서 실컷 즐긴 후 조용히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서 내가 궁금한 질문들, 하나님이 나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에 영적 귀를 조용히 기울인다.
때로는 직접적인 내적 음성으로, 때로는 성경 구절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신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려주신다.
이 비밀은 성경의 기록을 벗어나는 비밀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은 되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미쳐 깨닫지 못한 비밀, 지혜와 계시와 창조의 영, 사업이나 사역의 새로운 방향, 구체적인 지식이나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신다.
여덟째 정상체험을 통해 '돌파'가 일어난다.
평소에는 잘 해결되지 않는 가난, 질병, 채무, 실패 및 불화 등의 문제가 즉각 해결되거나 해결의 시발점이 된다.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사 10:27).
마지막으로, 세상적 부요보다는 영적 부요를 더 사모한다(계 3:17-18).
하나님과의 몰입 체험이 주는 풍성함과 영광스러움을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비교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정상체험은 누가 할 수 있는가?
정상체험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회심과 동시에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회심 이후에 하는 경우가 많다.
첫째,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다(사도행전 2:1-4;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행 2:17).
둘째,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자가 받는다(시 107:9; 눅 11:13; 고전 14:1 등).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마음훈련을 하면서 정상체험을 사모하고 구하면 정상체험을 자주하게 된다. 정상체험을 연속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고원체험이라고 한다.
셋째, 안수나 임파테이션(은사전이)을 통해 할 수 있다(롬 1:11; 사도행전 8:17; 19:6).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 1;11).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요즈음 필자는 물론 은사사역자들의 안수를 통해 정상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