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가톨릭
‘깨끗하다, 잘산다, 밤이 아름다운 도시, 쇼핑의 천국, 편리한 교통 시설, 태형(笞刑), 사자 머리에 물고기 몸통을 한 멀라이언상,’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싱가포르는 말레이 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서울시 면적보다 조금 넓은 크기의 섬과 54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열대 우림형 기후로 고온다습하며 건기와 우기 구분 없이 비가 연중 스콜형으로 내리는데, 11월부터 1월 사이에는 몬순의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비가 많이 오고 기온도 비교적 낮다.
자원도 없고 국토도 작지만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의 경제 선진국이기도 하다. 동 · 서양과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를 관통하고 남아시아와 대양주를 연결하는 요충지라는 지리적 이점에, 지진, 태풍 등 자연재해가 없는 여건이 싱가포르를 물류중심지로 만든 토대가 되었다.
2012년 10월 말 현재 인구는 530만, 그 가운데 140만 명이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이다. 중국계 75%, 말레이계 13%, 인도계 9% 외에 유럽인과 현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라시안과 아르메니아계, 아랍계, 유다계 등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산다. 따라서 종교도 불교(57%), 이슬람교(15%), 그리스도교(15%), 힌두교(4%)등 매우 다양하다.
종교자유가 철저히 지켜지는 싱가포르에서는 각 민족 고유의 종교활동이 왕성하다. 성당과 교회는 물론 힌두 · 이슬람 · 불교 · 도교 사원 등 종교 건축물들이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러한 풍경은 다른 나라에서 잘 볼 수 없는 싱가포르만의 특색이라고 본다. 이들의 문화적 자유와 평화로움이 무척 부럽다.
종교문화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족이 어우러져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독특하고 다양한 음식문화도 함께 체험할 수 있고, 아랍 스트리트, 리틀 인디아, 차이나타운, 말레이 빌리지, 홀랜드 빌리지 등 이색적 분위기를 풍기는 지역들을 방문함으로써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가톨릭교회의 역사
싱가포르 교회는 역사적으로 말레이 반도의 교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싱가포르는 말라카 제국(현 말레이시아)에 속하였는데, 1511년 알부끄르끄 장군이 이끄는 포르투갈 병력이 말라카를 점령하였을 당시 8명의 군종신부도 함께 왔다. 포르투갈은 점령 후 교회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514년 부활절에 첫 성당이 완공되었고, 성모신심이 뛰어났던 알부끄르끄는 이를 ‘주님 탄생 예고성당’이라고 이름 지었다.
예수회 신부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1545년 9월에 말라카를 방문하였고 이후 8년 동안 적어도 네 번을 더 방문하였다. 성인은 그가 방문했던 아시아 도시들 중 말라카에서 가장 많이 사목하였다. 말라카 교구는 1557년에 바오로 4세 교황에 의해 설립된 이후 줄곧 성장하였다.
그러나 1641년 네덜란드가 말라카를 점령하면서 가톨릭 전례를 금지하고 5년 내에 모든 가톨릭교회 건물들을 허물거나 훼손하였다. 박해가 계속된 146년 동안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신자들을 사목해 온 신부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인도의 고아에서 온 신부들이 많았다.
싱가포르에서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영국 동인도회사의 행정관이던 래플스 경이 이를 막고 자국 상인들을 보호하려고 1819년 투마섹 섬(지금의 싱가포르)에 영국 기지를 설립하면서, 상인들에게 중요한 기항지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래플스의 이름을 딴 거리와 건물, 학교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1821년경 말라카에서 온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야곱 신부가 싱가포르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1821년 12월에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분인 앵베르 주교가 프랑스를 떠나 임지인 중국으로 가는 길에 싱가포르에 들러 미사를 집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25년부터는 포르투갈 선교회 소속 핀토 신부가 싱가포르에 머물게 된다.
1830년에는 섬 전체에 가톨릭 인구가 300명이 되었고 이후 1838년까지 200명이 더 증가하는 등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1832년에 프랑스 선교사 비쇼 신부가 현재의 착한 목자 주교좌성당이 있는 자리에 성당을 설립하는 등 당시 많은 성당이 지어졌다. 중국계와 인도계 공동체에서도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다. 1853년에 세랑군 지역의 조주계 중국인들을 위하여 동정 마리아 탄생 성당이 세워졌다.
1888년에 로마 교황청은 옛 말라카 교구를 재건하여 전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1894년에는 수녀원이 설립되고 1925년에는 페낭에 있는 대신학교에서 사제수업을 받게 될 싱가포르 젊은이들을 준비시키려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소신학교가 설립되었다(현재 대신학교로 운영). 1935년 이후 가톨릭신문이 창간되고, 많은 선교단체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톨릭의 성장이 멈추었는데, 중국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 태생 신부들이 싱가포르로 옮겨왔고 전쟁 후 다른 선교단체들도 들어왔다. 이렇게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가톨릭 인구가 늘어나자 교황청에서는 1955년에 북쪽의 페낭과 중심부의 쿠알라룸푸르 두 교구를 더 설치하게 된다.
싱가포르는 1959년에 영연방에 속한 자치 국가가 되었다가, 1963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에 합류했으나 1965년 8월 9일에 탈퇴하여 독립된 공화국이 되었다. 영국은 1971년 싱가포르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인구가 늘고 도심 근처에 새 주거단지가 형성되면서 교회들도 새로 지어졌다. 1973년 2월에 교황청에서는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의 영역에 두지 않고 따로 대교구로 독립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싱가포르 가톨릭교회와 한인 공동체
싱가포르 교회는 2012년 10월 기준으로 총인구 531만 2,400명에 신자수는 19만 2,615명(약 3.6%), 성당은 31개이다. 교구사제 71명, 수도사제 71명, 수사 35명, 수녀 166명, 신학생 12명이다. 유치원 16개, 초등학교 19개, 중고등학교 16개, 주니어칼리지 1개를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 한인 공동체는 1982년 당시 착한 목자 주교좌성당의 주임신부였던 발헤체 신부의 미사 주례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997년 9월 23일 춘천교구에서 초대 신부를 파견하기까지, 약 15년간 스스로 공동체를 키워왔다. 10여 명으로 시작되었던 공동체가 현재는 신자 수 1,000명이 넘는 큰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2012년 11월부터 한인 공동체는 동정 마리아 탄생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한인 신자들도 열심이지만, 싱가포르 신자들은 에어컨이 없는데도 주일미사 때마다 성당 밖에까지 사람들이 꽉 찰 정도로 미사 참여도가 높다. 주교좌성당에 머물 당시 직장인들을 위한 평일미사가 매일 오후 1시 15분에 있었는데, 점심시간인데도 성당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이들이 미사에 참여했다. 바쁘게 살아가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모습이다.
* 김수창 루도비코 - 춘천교구 신부로 싱가포르 한인본당에 파견되어 사목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6월호, 김수창 루도비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