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궐도>는 가로 6미터, 세로 3미터의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조선 최고의 궁중 회화걸작이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경복궁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궁 두 궁궐을 모두 16권의 화첩으로, 오른쪽 위에서 비껴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이라는 기법을 적용했습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이후 훼손된 창덕궁과 창경궁의 복원에 <동궐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창덕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에도 <동궐도>가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동궐도>는 당시 동궐(창덕궁, 창경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지요.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각 한 점씩 남아 있습니다.
<동궐도>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의궤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그림입니다. 누가 주문했고, 참여한 화가들은 누구이며, 제작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제작 시기를 궁궐 속 건축물이 새로 건립되거나 화재가 발생했던 기록을 근거로, 1828년에서 183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지요.
궁궐은 아무나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1급 기밀 공간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르는 왕실 암살 위협을 막기 위해 가구 하나도 함부로 놓는 법이 없었지요. 그런데 만약 <동궐도>가 외부에 유출되기라도 했으면 어땠을까요. 한 마디로 <동궐도>는 조선에서 가장 위험한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그림을 그리게 하였을까 궁금해집니다. 당시의 왕은 순조였으나 실제로 나라를 다스렸던 사람은 대리청정 중이던,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였어요. 즉 <동궐도>를 그리라 지시한 사람은 효명세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효명세자는 강력한 정통성과 성군의 자질을 일찌감치 보여 뭇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22살의 젊은 나이인 1830년 요절합니다. 만약 왕으로 30년 정도 재위하였을 경우, 청나라의 아편전쟁이나 일본의 흑선내항 같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른 사건들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러한 격동기에, 어린 나이에 즉위해 요절한 군주(헌종)나, 산에서 나무하다 갑자기 끌려온 군주(철종)가 아니라, 강력한 권력의지를 가진 정통성 있고 준비된 군주가 왕으로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게 남습니다만 다 부질없는 생각이겠지요.
그의 죽음으로부터 나름 개혁을 시도한 흥선대원군의 집권까지는 무려 34년의 시간이 있는데, 이 정도면 거의 일제강점기 수준의 시간이니, 조선을 일본마냥 열강 수준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식민 지배를 면할 체질개선 정도는 기대할만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2016년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배우 박보검이 효명세자 역을 맡아 유명해졌는데 그 때의 효과일까요,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는 효명세자의 수릉(綏陵)에는 아직도 젊은 참배객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