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
생물학(生物學, 영어: biology)은 생명현상과 살아있는 생명체의 물리적 구조, 화학적 과정, 분자적 상호작용, 생리적 메커니즘, 발생 및 진화에 대해 연구하는 자연과학이다.[1] 과학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일관성 있는 분야로 통합하는 특정 공통 개념들이 있다. 생물학은 세포를 생명체의 기본 단위로, 유전자를 유전의 기본 단위로, 진화를 생물 종들의 출현과 멸종을 추진하는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항상성으로 정의되는 안정되고,[2]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변환시키고, 부분적으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킴으로써 생존해 가는 개방계이다.[3]
생물학의 하위분야는 연구 방법과 목적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생물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생화학,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탐구하는 분자생물학, 세포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다루는 세포생물학, 기관이나 조직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생리학, 환경에서 다양한 생물 개체들이 맺는 관계를 탐구하는 생태학 등이 있다.[4] 이론생물학은 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정량적인 모델을 만드는 반면, 실험생물학은 제안된 이론의 타당성을 테스트하고, 생명체의 기초가 되는 메커니즘과 약 40억년전 생명이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체가 어떻게 출현하였고, 생물 체계의 복잡성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경험적인 실험들을 수행한다.[5][6][7]
역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생물학의 역사입니다.
1665년 로버트 훅이 저술한 《마이크로그라피아》에 수록된 그림
에른스트 헤켈의 생명의 나무 (1879)
생물학(biology)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βίος"(bios, "life", "생명"이란 뜻)와 접미사 "-λογία"(-logia, "study of", "-학(學)"이라는 뜻)로부터 유래되었다.[8][9] 생물학이라는 용어의 라틴어 형태는 1736년에 스웨덴의 과학자 칼 폰 린네가 그의 저서 《Bibliotheca botanica》(영어: Bibliography of botany, 식물학의 문헌)에서 "biologi"를 사용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생물학이라는 용어는 1766년 크리스티안 볼프의 제자인 미하엘 크리스토프 하노브의 《Philosophiae naturalis sive physicae: tomus III, continens geologian, biologian, phytologian generalis》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다시 사용되었다. "생물학(독일어: Biologie)"이란 용어의 최초의 독일어 사용은 린네의 저서의 1771년 번역본에서였다. 1797년에 테오도르 게오르그 아우구스트 루스(Theodor Georg August Roose)는 《Grundzüge der Lehre van der Lebenskraft》라는 책의 서문에서 "생물학(독일어: Biologie)"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칼 프리드리히 부르다흐는 1800년에 형태학, 생리학 및 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연구라는 보다 제한된 의미로 생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생물학이란 용어는 독일의 박물학자이자 의사인 고트프리트 라인홀트 트레비라누스가 자신의 저서 《Biologie, oder Philosophie der lebenden Natur》(전6권, 1802년~1822년)에서 현대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10]
“ | 우리의 연구 대상은 생명(독일어: Lebenslehre)의 다양한 형태와 발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조건과 법칙, 그리고 그것들을 초래하게 한 원인에 있다. 우리가 생물학(독일어: Biologie)이라는 이름이나 생명의 교리로 나타낼 과학은 이러한 연구 대상들과 관련된 과학이다. | ” |
| — 고트프리트 라인홀트 트레비라누스 |
현대적인 생물학은 비교적 최근에 발전되어 왔지만, 생물학에 관련되고 그 안에 포함되는 과학은 고대부터 연구되어 왔다. 자연철학은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의 고대 문명에서 연구되었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의 기원과 자연 연구에 대한 접근 방식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11][12] 의학에 대한 정식 연구는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년경~370년 경)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생물학의 발전에 가장 폭 넓게 공헌을 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322년)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History of Animals)와 그의 자연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준 다른 작품들, 그리고 이 후에 생물학적 인과 관계와 생명의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좀 더 경험에 근거를 둔 작품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설한 리케이온 학원의 후계자인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학에 대한 일련의 책들을 저술했는데, 이는 고대에 중요한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에도 영향을 미쳤다.[13]
이후 생물학은 중세 이슬람 세계의 학자들에 의해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식물학에 대한 저술을 남긴 알 자히즈(al-Jahiz, 781년~869년),[14], 아부 하니파 디나와리(Al-Dīnawarī, 828년~896년),[15][16] 해부학과 생리학에 대한 저술을 남긴 알 라지(Rhazes, 865년~925년) 등이 있다. 의학은 특히 그리스 철학자의 전통을 토대로 연구하는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 잘 연구되었고, 박물학은 특히 고정된 생명체들의 계층 구조를 당연하게 여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주해 1]
생물학은 안톤 판 레이우엔훅에 의한 현미경 성능의 극적인 개선과 함께 빠르게 발전하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이 정자, 세균, 적충류, 미생물들의 다양성을 발견한 것은 이 시기였다. 얀 슈밤메르담의 연구는 곤충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현미경적인 해부와 염색의 기본적인 기술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17]
또한 현미경 관찰 기술의 발전은 생물학적 사고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초에 많은 생물학자들은 세포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1838년 독일의 식물학자 마티아스 야코프 슐라이덴은 "모든 식물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식물 세포설을 주장하였다. 1839년에 독일의 의사이자 생리학자인 테오도어 슈반은 "모든 동물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동물 세포설을 주장하였다. 슐라이덴과 슈반은 "세포는 모든 생물의 구조적 단위일 뿐만 아니라 생명활동이 일어나는 기능적 단위"라는 세포설을 제창하였다. 1855년에 독일의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루돌프 피르호는 "세포는 기존의 살아있는 세포로부터만 만들어진다"라고 주장하였다. 로베르트 레마크와 루돌프 피르호의 연구 덕분에 1860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세포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18][19]
한편, 분류학 및 분류는 박물학자들이 초점을 기울인 연구 분야였다. 칼 폰 린네는 1735년에 자연계에 대한 기본적인 분류체계를 발표했으며, 1750년대에는 그가 분류한 모든 종에 학명을 부여했다.[20]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은 생물 종들을 인위적인 범주로 취급하고, 생물의 형태를 변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고, 심지어 공통 조상의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비록 뷔퐁은 진화를 반대했지만, 그는 진화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뷔퐁의 연구는 라마르크와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미쳤다.[21]
진지한 진화적 사고는 일관성 있는 진화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연구에서 시작되었다.[22] 라마르크는 진화가 동물의 성질에 대한 환경적 스트레스의 결과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기관을 더 자주, 엄격하게 사용할수록 기관이 더 복잡하고 효율적이게 되어 동물을 환경에 적응시키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라마르크는 이러한 획득 형질이 동물의 자손에게 유전될 수 있다고 믿었다.[23] 영국의 박물학자 찰스 다윈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생물지리학적 접근법, 찰스 라이엘의 동일과정설 지질학, 멜서스의 인구 증가에 관한 저술, 그리고 자신의 형태학적 전문 지식과 광범위한 자연 관찰을 결합해서 자연선택에 기초한 보다 성공적인 진화론을 만들어냈다. 이와 유사한 증거와 추론을 바탕으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도 독자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24][25] 비록 논란의 대상이었지만(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음), 다윈의 이론은 과학계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어, 급속하게 발전하는 생물학의 중심축이 되었다.
19세기말 멘델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정리하여 유전학의 기초를 쌓았다. 멘델의 이론은 한동안 외면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자적인 실험들을 통해 재발견되어, 생물학자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1940년대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동안 집단유전학의 발전으로 진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되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초의 실험들은 유전자로 알려진 형질 전달의 단위를 가진 염색체의 구성 성분으로 DNA를 지목하였다. 1953년에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과 함께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모델 생물에 대한 연구는 분자유전학 시대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생물학은 분자 영역에서 크게 확장되었다. DNA가 트리플렛 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 후에 마셜 워런 니런버그, 하르 고빈드 코라나, 로버트 윌리엄 홀리는 유전 암호를 해독하였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일반적인 인간 게놈 지도 완성을 목표로 1990년에 시작되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2003년에 완료되었으며,[26] 추가적인 분석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생물학의 축적된 지식을 인간과 다른 생물들의 기능적, 분자적 연구로 통합하려는 세계적인 노력의 첫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