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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카하시신지님의실천!팔정도! 원문보기 글쓴이: 오로지팔정도
현상계에 육체를 가지고 있는 상상단계*빛의 천사
인간의 지상에 있어서 목적은,
각자의 마음의 조화와 지상낙원,
즉, 불국토, 유토피아의 건설에 있습니다.
이 목적은 인간 자신이 신불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신과 인간을 떼어놓는 이제까지의 사상에서는 이러한 목적에 위화감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신과 인간을 분리한 것에, 인간의 미신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신불의 자식인 이상, 신불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신불의 자식인 인간이 왜 동물처럼 타락했는가.
그것은 오랜 세월, 지상에서의 생활에 휘들려진 결과입니다.
‘응아’ 하고 이 세상에 나오는 찰나,
인간은 저 세상에서의 생활을 잊습니다.
잊어버리는 이유는 전세, 과거세의 복습, 속죄,
그리고 저 세상에서의 생활의 경험을, 어떻게 살릴까 하는 마음의 수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고 있어서는, 그 수행의 목적은 거의 상실됩니다.
시험에서 컨닝은 안되는 것처럼...
그럼 왜 이런 구조가 있는가 하면,
그것은 긴 인간의 역사,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쌓은 여러 가지의 죄,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원죄,
이것의 청산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지금부터 2억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는 모두 다른 천체에서 이 지상에 내려왔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조화가 되어, 지상은 불국토 그대로 였습니다.
사람들의 연령은 5백세, 천세를 유지하고, 나이도 안먹고,
저 세상 이 세상을 자유로이 왔다 갔다 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는 인간에게는 원죄라고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결혼해서 자식이 생겨도, 그 자식은 저 세상의 생활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손이 자손을 낳으면서,
지상의 생활에 익숙해진 인류는, 점차 저 세상과의 교통이 단절되고,
오관, 육근에 휘둘리게 되었습니다.
즉 죄를 짓기 시작했다. 죄를 지으면 당연히, 그 죄의 속죄를 해야 합니다.
뿌린 씨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불(神佛)의 자식이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인간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태어날 때에,
저 세상의 생활, 전세(前世), 과거세를 잊도록 된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수행이 목적으로 된 것입니다.
수행이란 마음의 조화, 신불(神佛)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수행입니다.
동시에 2억년 전의 불국토, 신의 나라를 다시 만드는 것.
지상에 내려온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목적, 이것이 인류의 사명이고 책임인 이유입니다.
인류에게 이 두 개의 목적을 자각시켜,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빛의 천사가 이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은 신불(神佛)의 명(命)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이신 아버지의 명(命)에 의해, 사랑을 설교했듯이,
빛의 천사는, 우주의 원리, 인간의 자세, 자비와 사랑의 신리를 설법하기 위해서...
석가의 정법(正法)은 우주의 원리, 자비와 사랑입니다.
인간이 소우주라는 것의 자각. 소우주이기 때문에 대우주와 일체가 되어,
모든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한 개의 점에서 대우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통해서, 소우주와 대우주는,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불의 자식이고, 우주는 신불(神佛)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현상계에 있어서 빛의 천사는, 신불의 명(命)에 의해서
각자의 마음의 눈을 열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철학이 되고 학문이 된 그 잘못을 시정하고,
2,500여년 전에 설법되었던 석가의 정법,
마음의 신리를 다시 지상에 되살리기 위하여, 그 예언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불의 명을 받아 빛의 전달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빛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마음은, 전생윤회라고 하는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상념, 여러 가지 죄를 거듭해 왔습니다.
상념대라고 하는 껍질 속에 각자의 마음은 매몰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때문에 보통은 90%의 잠재의식은 특수한 사람이 아니면 열 수 없다고 하는 상태로 된 것입니다.
열려도 동물령이나 지옥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하물며 수호령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우선 불가능합니다.
그런 상황에 떨어져 있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빛의 전달자로서 각자의 마음 각자의 수호령을 끌어내어,
상념대, 표면의식을 움직이도록 하는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천사의 말을 한번이라도, 두 번이라도, 보다 많이 들음으로써,
상념대에 균열이 생겨 창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표면의식이, 천사의 말을 들음으로써,
상념대의 깊은 곳에 있는 수호령이,
그 사람의 상념대의 정화와 표면의식에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천사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시원하고 산뜻했다,
팔정도를 행하자, 사람들에게 전하자, 라고 하는 자각은
전부 수호령의 이러한 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천사의 마음이 대우주의 마음을 마음으로 해서이며,
각자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마음을 명심하여 지키는 수호령과 자유롭게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틀려서는 곤란한 것은,
각자의 상념대와 표면의식은, 좋든 나쁘든,
그것은 각자 자신의 일로서, 그러한 의식을 억지로 바꾸려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의식은 각자의 의식이고, 그 자유, 그 의사는 신불이 주어서,
각자가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신불이라 할지라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만한 특권을 인간 각자가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자의 수호령도, 각자의 표면의식, 상념대가,
이것을 맞아들이는 자각이 나오지 않는 한,
자유로울 수 없고, 표면의식에 얼굴을 내밀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표면의식이랑 상념대가, 수호령을 맞아들이고 싶다고 기원해도
그 사람의 환경, 의식의 조화도, 그밖에 여러 가지 사정에서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영도(靈道)가 열렸다' 그것 자체에 대해서 평가는 할 수 없습니다.
영도가 열렸으니까, 저 사람은 조화되어 있다,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도는 열려있지 않아도, 의식이 높은 사람도 있고,
거꾸로 영도가 열려 있어도 저급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영도(靈道) 그 자체는 여러 가지 사정이 가미되어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불의 계획이고, 빛의 천사의 상황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동시에 이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의식 그 자체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든 신리를 깨우친 천사의 말씀을 듣는 것에 의해,
상념대를 덮고 있었던 각자의 지금까지의 사고방식, 상념, 교양, 덕성에 변화가 일어나,
기성관념에 각종의 의문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그러한 의문은 마침내 회(回)를 거듭할수록 점점 풀려 갑니다.
그러나 의문 그 자체는, 각자 각각 다르고, 점점 고차원화되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문의 연속, 그리고 그 회답의 거듭됨은 마침내 마음에 통합니다.
의문은 천사의 말을 청문하는 것에 의해 생기고, 스스로 실천함에 의해,
사실과 이론의 일치라고 하는 해답으로 뒷받침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문과 행동은, 끊임없이 표리일체로 되어있는 것이 이상적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의문의 해답이 사실로 되어 나타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호령이 그 사람의 의식을 닦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는 직접적으로,
그렇지 않을 때에는 간접적으로 해답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어떤 사람이 신리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신리를 듣는 시기가 그 사람의 인생, 이제부터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운명의 기로에 서 있는 경우는,
그 해답은 직접적으로 됩니다.
요컨데, 아주 차근차근 알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애게 신리가 신리다운 충분한 근거를 가르쳐 나갑니다.
간접의 경우는 어느 정도 그 신리도 알고, 옛날처럼 오관이나 육근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보면,
이번에는 손을 대신하고 물건을 대신해서,
보다 고차원의 의문을 제시하고,
그 해답을 스스로의 의식(意識)으로 깨우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풀리더라도 틀립니다.
수호령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을 보고 있어서,
각자의 생활을 온종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의식상태, 혼의 상태가 어떠한 지에 따라, 여러 가지로 지도합니다.
그 방법은 사람마다 각양 각색입니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영도가 열렸다고 하는 것은, 천사의 빛이 그 사람의 의식에 들어간 것이고,
동시에 안으로부터 빛이 바깥으로 나온 것을 의미합니다.
상념대에 창이 열린 그 전형(典型)이 영도(靈道)입니다.
영도를 보통은 영능이라고 부르는데,
영능이 열리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물론이고, 병의 원인, 내일 일어날 일, 떨어져 있어도 천사와 대화할 수 있고,
따라서 전화도 필요없습니다.
천사 자신은 관자재해서 (가만히)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진 여러 가지 일들을 압니다.
어떤 사람과 같은 경우는 3시간이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즐긴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몸은 집에 있으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만 있으면 영화관은 굶어버리지만
이것은 수호령의 존재와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것으로 일년내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영능은 이러한 장점을 갖고 있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의식의 작용과 상념대의 진동인데.
본인에게 욕망이 생기고 거만하게 굴고 교만한 기분이나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하면,
위험한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수호령은 빛을 명심하여 지키고 자비와 사랑이 밑천이어서
거만하게 굴거나 교만한 기분과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재의식이 있는 곳에 닿은 듯이 그것은 전자적(電磁的) 작용으로
수호령은 그 사람의 의식에 작용하기 때문에 교만한 기분은 수호령이 활동할 곳을 잃습니다.
즉 수호령은 그 사람에게 붙어 있지 않고 떠납니다.
그러나 상념대의 일부는 열려있습니다.
수호령은 그 사람으로부터 떨어질 때에 그 상념대의 열린 곳을 막습니다만,
그 틈에 동물령이나 마왕이 들어갑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만한 기분은 이러한 동물령이나 마왕과 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의식이 이것들을 끌어 들입니다.
같은 종류끼리 모인다.
동물령이나 마왕이 독기를 내뿜어서, 수호령이라도 이런 경우 손을 쓸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능력자는 보통 사람보다도 석가의 정법을 항상 실천하도록 명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사는 그 사람에게 영능을 열어주는 쪽이 좋다고 볼 경우는, 열어줍니다.
그러나 자비와 사랑이 본인에게 통하지 않고,
그것을 악용하면, 모처럼의 자비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각자는 각각 주체성을 가진 신불의 자식입니다.
각자에게는 자유와 창조가 주어져서,
그 의사에 따라서는 비록 신불이라고 할 지라도 움직이는 것 불가능한 것입니다.
태양은 지상에 무한한 빛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이것에 감사하고 선용(善用)하는지
또는 당연시하고 악용하는지는
각자에게 맡겨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점을 각자가 확실히 명심해두지 않으면 큰 일이 됩니다.
이것은 영능력자의 기본입니다. 동시에 정법을 실천하는 자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동물령의 빙의 등, 긴급한 사태에 대해서,
천사는 2차적 3차적인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긴 안목으로 본 경우, 그러한 과정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이 꿈에서 깼을 때 똑똑히 자각됩니다.
그리고 그 빙의작용이 그 가정을 파괴한다고 보이는 경우는,
즉각 동물령, 마왕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상념대의 창을 닫아버립니다.
영능 그 자체는, 깨달음에로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좀 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깨비의 목이라도 잡은 것처럼 신이 나면,
엉뚱한 잘못을 저지르고 천사의 자비를 원수로 갚은 것처럼 됩니다.
매우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부분입니다.
어쨌든 영능이라고 하는 것에는,
이처럼 단점이 있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천사의 빛을 구하는 그 동기는 무엇일까.
또 천사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빛을 주는 것일까.
우리들의 목적은, 한마디로 말하면, 안심한 생활.
그것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런 것이다.
통상 『심행(心行)』의 속에 쓰여져 있는 마음의 조화 그리고 불국토를 만드는 것보다도,
눈앞의 이해에 몰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눈앞의 이해와 마음의 조화, 불국토가 일치되는 것이야말로...
따라서 우선 양자의 일치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 되도록, 아픈 사람은 쾌유를...
그것은 직업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건강상으로도,
행복한 것이야말로 정법이 믿어지는 이유입니다.
안심한 생활은 이러한 현상적인 이익에 연결되어서만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정법이라는 것은 이러한 현상적 이익과 일치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정법은 순환의 법칙이고, 자비와 사랑이라고 하는 행복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환은 전부가 돌고 돌아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도, 육체도, 에너지의 집합체입니다.
우주도 공간도 에너지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TV의 채널을 돌리면 여러 가지 화면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전파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에너지를 모체로 해서 공간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념행위도 이와 같은 모양으로, 감사의 생각은 감사로서,
바른 행위는 그것에 응답하는 보답과 장려로서 본인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법 그 자체는 현상이익에도 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원운동을 그리며 순환하고 있습니다.
원(圓)인 이상 360도 회전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태양은 둥글고 지구도 원형(圓形)입니다.
다른 별들도 전부 원형입니다.
사각이나 삼각은 없습니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고 있습니다.
우주는 정법 그 자체의 모습으로 순수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구조도 그림으로 나타내면 동그라미가 됩니다.
원자의 세계도 원자핵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음외전자가 뱅글뱅글 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작게는 원자부터, 크게는 우주까지, 전부가,
정법에 비추어서 원운동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전부 원운동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도 핵을 중심으로, 5명의 분신이, 원운동을 그리면서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한개가 빠져도 생명체로서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 육체가, 원활히, 원운동을 그리며 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정법에 비추어, 정법에 딱 들어맞는 생활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소우주이고 각자에게는 자유와 창조, 의사(意思)가 주어져 있으니까,
그 상념, 행위는 각자의 자유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런 만큼 정법에 반하면 질병이나 사업부진, 여러 가지 고민을 안도록 되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은 법(法)이고, 법(法)은 또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태양이 정법대로 열, 빛을 지상에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지상에서의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태양은 무언(無言)중에, 우리들에게 삶의 태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정법을 이해하고 자비와 사랑에 살아요--''라고.
빛의 천사는 그 정법의 존재를, 맹목적으로 된 사람들에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이익도 정법을 이해하고 실행한다면,
자연히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상이익, 좋습니다.
정법에 따른 삶의 태도 즉 "자비와 사랑뿐---"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의 일상생활 전부가 정법으로부터 동떨어지지 않는
삶의 태도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음의 지침 - 다카하시 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