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된 배지
정경희
갑자기 추워진다는 일기예보 들으며 또 한 계절이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무료하게 보이는 것이 싫어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녔다. 어느 날 하루쯤은 일상에 쉼표 찍듯 집안 살림살이 정리를 한다. 욕심 없이 살겠다며 필요 없는 물건 버리는 것이 나의 정리이다. 그래도 버리지 못하는 작은 종이 상자 하나가 몇 년째 화장대 서랍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왼쪽 옷깃에 달려 있던 내 직장의 배지가 담겨 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교복에 배지를 달았다. 통상적으로 ‘뺏지, 빳지’등으로 불렸는데 국어사전에 의하면 ‘배지’가 맞는 말이다. 배지하면 기관의 상징으로 대외적 의미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직원들의 소속감과 결속을 다지기도 한다. 학교 다닐 때는 그 의미를 생각조차 않았다. 선생님이 아무리 설명해도 귓등으로 흘렸다. 교문 통과할 때마다 주머니에서 꺼내 달 뿐이었다.
내가 다니던 직장에도 배지가 있었다. 공모를 통해 여러 직원의 의견을 모았다.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쳐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미래를 형상화 하여 기관을 상징하는 심벌마크를 만들었다. 심벌마크를 금속으로 작게 배지로 만들었고, 직원들은 자신이 속한 기관에 자부심 느끼며 배지를 달고 다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인들은 배지하면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 의원을 떠올린다. 내가 우리 기관의 금빛 반짝이는 배지를 달고 나가면 지인들은 한번쯤 관심을 보인다. “ 이게 뭐고, 국회의원이가?” 아닌 줄 알면서 한마디씩 던진다. “글자는 우리 기관의 이니셜이고, 무엇무엇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남들은 여전히 관심이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딘가에 소속된다. 가족이 되고, 어떤 학교의 학생이 된다. 성인이 되면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울고 웃으며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다. 더욱이 직장은 내 의지대로 간 곳이고 삶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십년이 넘는 직장생활이라고 하면 모두 놀란다. 한번쯤 다른 곳으로 뛰쳐나갈 생각 할 법도 한데 한 우물만 판 셈 이다. 지금은 나를 지켜주던 직장의 울타리는 없어졌다. 당연히 배지 달고 나갈 일은 더 없다.
살림살이 정리 하는 날은 작은 종이상자를 열어본다. 몇 개나 되는 배지들이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다. 거울 앞에서 왼쪽 옷깃에 배지를 갖다 대었다. 금방 세탁소에서 찾아온 정장 옷은 어디가고 후줄근한 옷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나이든 아줌마가 있다. 거울이 잘못된 것인가 싶어 목 빼고 살피는데 얼굴의 잔주름만 보일 뿐이다. 내 인생 고비고비 힘겨운 일들까지 알고 있는 배지가 나를 위로한다. 즐거움만 추억으로 간직하고 다 버리라고 한다. 단출한 삶 살겠다고 헌 옷 버리는 것처럼 쓸데없는 감정은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직장이라는 큰 울타리 없어진 자리에 찬바람이 들어올 것 같다. 이제는 내 힘으로 울타리를 엮어야 할 차례이다.
(20241118)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