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는 우리나라 전통주이다. 막 걸러냈다고 해서 막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막걸리는 서민들과 가깝고 고된 일을 할 때는 피곤함을 잊게 해주는 노동주이다, 그래서 농주라는 별칭도 얻었다.
맑은 빛깔의 증류주와는 달리 탁한 색깔 때문 탁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어쨌든 막걸리는 서민적이고 가격이 싸며 그 종류 또한 ‘술 익는 마을 마다’라고 노래한 시인의 표현처럼 마을 이름만큼 많은 종류를 가지고 있다. 술을 담그는 재료도 다양하다, 쌀, 옥수수, 보리쌀, 고구마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들 세대는 술을 담그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실제 담궈 보지는 않았지만 어깨 너머로 본 대강의 래시피는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다. 쌀 막걸리를 빚을 때는 먼저 쌀을 씻는다. 맑은 물이 나올 때 까지 씻는다. 그리고 쌀을 불린다. 불린 쌀을 채반에 얹어 물기를 빼 준다.
찜기가 없을 때니 솥 안에 들어가는 껍질을 벗기어 만든 흰 채반위에 삼베 보자기를 깐다. 그리고 물기를 뺀 불린 쌀을 붓고 김이 새어 나오지 않게 솥 뚜껑과 솥전 사이를 밀가루를 반죽하여 때운다.
큰 가마솥에다 고두밥을 짓는다. 고두밥을 양지바른 곳에 널어 적당히 마르면 누룩과 섞어 단지에 넣어 맑은 물을 붓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술 익는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다. 단지 위에 생겨나는 맑은 빛깔의 술이 청주다.
잘 익은 술 단지의 술을 막 꺼내어 두 가지로 된 받침대 위에 체를 올려 놓고 금방 걸러낸 술이 막걸리다. 어린 시절 술을 거르면 지게미가 남는데 지게미에 사카린을 넣어 먹은 추억이 새롭다. 알콜 기운이 남아 있어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에 어른들이 더 신나 했다.
6-70년대를 살아 온 나에게는 술과 관련 한 뚜렷하게 남는 기억이 또 하나 있다. 땔 감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석유와 연탄이 보편화 되지 않았던 시골 생활에 땔감은 고민 중에 하나였다. 해결을 위한 한 가지가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가지치기나 솎아 내기를 하는 작업을 공동으로 하였다. 우리 마을에 해당되는 산을 20여 가구씩 7개 반(班)을 나누어 반별로 ‘영’이라고 불리는 공동 작업을 했다. 모두가 어른들인데 5일장을 보러 간 아버지를 대신하여 반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중학교 1학년인 내가 참석을 했다. 또래 아이들보다 작았던 나는 공동 작업장에서 도토리 신세였다. 보다 못한 어른들이
“ 너는 낫질도 서투르니 심부름을 다녀 오너라” 어른들이 지고 다니는 지게의 끈을 조정하여 주며 양조장에 가서 술을 사오라는 것이었다. 술도가라고 불리던 양조장은 4km 정도 떨어진 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술도가는 공급독점권 때문에 1개면에 1개소로 한정되어 있었다. 양조장은 인구가 많거나 지리적 여건에 따라 분소를 두기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양조장에 도착한 나는 목이 몹시 말랐다. 술 만드는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짓궂은 양조장 젊은 직원이 막걸리로 목을 축이면 더 이상 목이 마르지 않다며 커다란 양조 통에서 긴 자루가 달린 고무 바가지로 휘휘 젓더니 막걸리를 떠 주며 마시라고 했다. 우리는 그 고무 용기를 ‘똥바가지’라고 불렀다. 막걸리를 처음 먹어 본 것은 아니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타는 목마름에 벌컥 벌컥 마셔됐다. 그런데 그 술은 막걸리를 만들기 전 원액으로 농축된 것이었다. 이름하여 ‘모래미’라는 것이었다. 보통 모래미 한통에 물 다섯 통을 희석하면 정상적인 막걸리가 된다고 한다. 공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하면 물을 많이 희석하여 싱겁다는 이야기가 당시 어른들의 유행어가 되었다.
1대5로 희석하는 원액을 벌컥 벌컥 마셔댔으니 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말 통을 지는 일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흔들거려 결코 쉽지 않았다. 조심조심 막걸리를 지고 간다고 너무나 힘이 들어 언덕배기에서 쉬어 간다는 것이 모래미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동지섣달 짧은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오전 새참으로 먹을 막걸리가 오후 새참 때가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았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니 답답함과 힘든 노동의 피로함을 잊으려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표정들이 기다림에 지쳐서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연세가 제일 많던 이웃집 할아버지가 반원들을 타일렀다.
“아무 일 없이 다녀 온 것만도 감사하제” 내심 몹시 걱정되었던 이웃집 할아버지 덕분에 몇 사람의 호된 꾸지람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그 날 이후로 ‘모래미’ ‘모’자만 들어도 경기를 할 정도로 트라우마가 생겨났다.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가지치기 공동 작업에 참여할 수 없어 어머니가 대신 참여를 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