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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형령주 제3권 제24장 승자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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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칠성(江南七省)의 한가운데서 돌풍(突風)이 일었다.
헛소문 같은 소문.
그것은 진회하에서 일어난 것이다.
- 화형선(火刑船)에서 무해성궁주(武海聖宮主) 무해성검 울지엽
의 장례식(葬禮式)이 치뤄지고 있다. 상주는 실종되었던 정벽이
다. 장례는 백 일간 계속될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었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진원(震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엄청난 사실이었다.
이치를 따지자면 울지엽의 장례는 무태군에 의해 삼대궁주로 임명
이 된 제갈유룡의 주관하에 무해성궁 내에서 치뤄져야 마땅할 것
이다.
전대 무해성궁주의 장례가 외지에서 치뤄지다니… 그것도 제갈유
룡이 공적으로 지명한 화형령주의 배 위에서.
그것은 무림사가 뒤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소문으로만 은밀하게 나돌던 무해성궁의 내분. 그것은 울지엽의
장례를 계기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또 한 차례의 파문을 일으킨 화형령주지선.
강호인들의 이목은 진회하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에 집중되고 있었
다.
안휘성(安徽省)의 서호(西湖).
동정에 비교하자면 천하의 어떤 호수가 그 크기를 자랑할 수 있겠
는가!
하나 아름다운 정취를 원하는 이라면 서호의 명경지수를 구경해야
할 것이다.
창궁(蒼穹)의 푸르름을 간직한 호수.
쏴아아… 쏴아아아…….
가을바람에 잔주름이 잡히는 서호의 물을 보며 흑의인 둘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유성이 흐르듯 두 줄기 빛살로 화해 대기를 가르는 두 사람.
한 사람은 아주 거대한 체구를 갖고 있고, 한 사람은 적당하고 보
기 좋은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거인이 워낙 거대해 앞선
흑의인은 삼척동자같이 왜소해 보였다.
거인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적당한 체구를 지닌 사람
은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빙차주는 꼭 온다! 내가 왔듯!"
흑의인의 목소리는 맑고 차가웠다.
"……."
뒤따르는 흑의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 서호를 등지고 세워진 고찰(古刹) 하나가 눈에 띄였다.
승려는 오래 전에 떠나간 듯, 썩어 가는 현판 하나가 시들어 가는
들풀 속에 누워 있다.
적운사(積雲寺).
한때 서호 일대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찰이었지만 돌림병으로
주지가 죽은 뒤 방치된 지 오래된 사찰이다. 대웅전의 기둥은 흉
하게 ㅆ어 뒤틀려 깨진 기와를 힘겹게 떠받들고 있었다.
스-윽- 슥-!
나직한 파공성이 들리며 허공 중에서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떨어
져 내렸다.
탁몽영과 무명노인. 꽤 먼길을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
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탁몽영은 문짝이 떨어져 나간 대웅전의 불상을 보며 가볍게 합장
을 한다. 차가운 안광을 뿜어내던 두 눈은 어느새 담담한 빛으로
바뀌었다.
무명노인은 탁몽영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자 석상으로 변해 한 자
리에 마냥 서 있을 뿐이었다.
탁몽영의 시선이 하늘로 향한다.
유리처럼 투명한 하늘. 그 푸르름에 몸이 녹아들어갈 정도였다.
그는 길게 숨을 끌어당기며 진기를 끌어올린다. 단해에서 장강의
물줄기 같은 진기가 만들어지더니 혈맥을 타고 사지백해로 뻗어
나갔다.
탁몽영은 광불화형전을 거친 다음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패배를
용납하지 않았다. 지난번 빙차주의 일장에 당한 것은 패배라 할
수 없었다. 심마에 현혹되어 전력을 다하지 못했고, 빙차주의 혼
신의 공력이 들어간 빙극신장을 맞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빙극신전의 진전을 얻은 빙차주. 그녀는 어찌 생각하면 화형령주
의 유일한 상대라 할 수 있었다. 천외마벽의 절기를 얻은 제갈유
룡은 이미 꼬리를 감춘 용이지 않는가!
탁몽영은 정오가 될 때까지 운기조식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오(正午)가 막 지날 무렵, 멀리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탁몽영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적운사를 향해 다가서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빠른 속도로
신형을 날리는 사람은 염소 수염을 매달고 있는 노인이었는데, 역
팔자로 치껴뜬 눈에선 살광이 뿜어지고 있었다.
"있군……!"
그는 두 사람을 멀리서 알아보고 신형을 세웠다. 그는 화형령주의
신위를 알고 있는 듯, 삼십 장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삼십 장. 일류고수에게는 아득한 거리겠지만, 초절정의 고수에겐
순간의 거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언성을 높였다.
"화… 화형령주냐?"
그가 크게 물었다.
"훗훗- 빙차에 네 번째 하인이 생겼단 말인가?"
탁몽영은 그가 다가서지 못하는 것을 비웃는 듯했다.
"노… 노부는 빙차를 위해 길잡이를 해 주는 사람이지 빙차의 하
인은 아니다. 아침 너의 수하가 보낸 도전장을 받고 이쪽으로 왔
다. 하나… 네가 속임수를 쓸 것 같아 노부가 먼저 와 기다리려
했던 것이다!"
노인은 손을 품에 넣었다.
죽립을 쓴 사람은 그가 무슨 짓을 하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품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들더니 허공 중으로 힘차게 던
져 올렸다.
핑-, 구슬은 백 장 허공을 꿰뚫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
다. 구슬이 터지며 자색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훗훗- 빙차주는 곧 오실 것이다!"
흑의노인은 꽤나 거칠게 말했다.
"흐흐- 너는 노부를 잊지 못할 것이다. 흐흐- 노부는… 네가 죽
인 어떤 사람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
"너는 닥치는 대로 살생했다. 너 때문에 과부가 된 여인은 수백이
고, 고아는 수천을 넘는다. 노부 흑의신군(黑衣神君) 같은 피해자
의 수는 수만 명이다!"
그의 별호가 흑의신군인 듯했다.
그는 오만히 서 있는 탁몽영을 보며 계속 욕을 해댔다.
"너의 살생은 대자대비하신 부처가 용서치 못할 악행이다! 네놈은
죽어 구천지옥을 헤매이게 될 것이다."
부처……!
탁몽영은 한순간 비수에 찔린 듯한 기분이 되었다.
흑의신군은 왜 부처 이야기를 했을까?
"네놈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다. 죽어 마땅하다. 빙차주가 너를 죽
인다는 것은 순리(順理)인 것이다! 너는 땅 속의 귀신조차 죽이고
싶어하는 악마 중의 악마다. 사람들은 네가 마종의 한패로 천외마
벽의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안다!"
"으… 음!"
"그리고, 네놈이 사상 가장 악랄했던 화형광불의 의발전인이라는
것도 안다. 하나- 너도 사람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
단순한 격장계(激將計)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구구절절 너무도 의미심장한 말들이었다.
'나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약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말만 골라하다니…….'
탁몽영은 흑의신군에게 큰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다.
단 한 번도 안면식이 없는 흑의신군, 그는 대체 누구이길래…….
탁몽영이 그의 정체를 궁금히 여길 때, 저 먼곳에서 말 움음 소리
가 들려 왔다.
따그닥- 딱- 두우- 두두-!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 위에 얼음
이 덮이며, 갈대 사이 사이에 서리(霜)가 내려앉는 것이 갑자기
겨울이 찾아온 듯하지 않은가.
눈과 얼음, 그리고 바람을 끌고 다니는 얼음마차.
두우- 히이- 잉-!
빙차는 눈보라를 일으키며 다가섰다.
세 명의 마부(馬夫), 그리고 언제나 닫힌 마차의 창문.
히이이- 잉-, 네 마리 한혈마는 큰 울음소리를 내며 적운사의
무너진 담벼락 곁에 멈춰섰다.
흑의신군은 재빨리 마차 뒤로 가서 숨었다. 말은 갈기를 흔들어대
다가 조용히 멈춰섰다.
적막…….
그러나 고요는 한순간 깨어졌다.
휘휙- 휙- 휙-!
천지인 삼노(三老)가 마차에서 떨어져 내리더니,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마차의 문 앞에 시립했다.
"차주- 약속대로 화형령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속하들은 최근 절기를 부단히 연마해 더 강해졌으니… 어지간하
시면 속하들에게 명령해 주십시오!"
나직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에 적운사가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삼노의 음성이 채 여운을 끌기도 전,
끼-익-, 마차 문이 주렴을 흔들며 활짝 열렸다.
눈같이 흰 옷을 걸친 여인이 허공을 밟으며 걸어나왔다.
두꺼운 면사를 써서 얼굴을 가린 여인. 빙차주인으로 알려진 여인
이 아주 천천히 땅으로 내려섰다.
궁장으로 틀어올린 머리카락 위에는 백색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가
현란한 빛을 내뿜으며 올라앉아 있었다. 팔에는 은환(銀環)이, 귀
에는 은색이령(銀色耳玲)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여인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보옥 부딪치는 소리가 영롱하게 울
려 퍼졌다.
'더 강해졌다!'
탁몽영은 벌써부터 암경(暗勁)을 느꼈다.
'빙극신전의 제자답다. 빙극신전 안에는 화형강불 무진법 선사가
남긴 절기를 능가하는 절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탁몽영은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말끔히 씻어 버렸다.
빙차주인은 아주 천천히 다가섰다.
"화형령주- 소문이 사실이었군? 어떻게 살아났지?"
"글쎄- 계집에게 죽을 운수는 아니었나 보다!"
"호호- 나는 여인이 아니다. 나는… 빙극신전주(氷極神殿主)일
뿐이다."
"여인이 아니라고? 핫핫- 그럼 나와 비슷한 데가 있구나. 사실-
나도 남자가 아니란다!"
"흐음, 말재주가 늘었군?"
그녀는 탁몽영의 말을 비웃는 말 정도로만 알았다.
"네가 왜 나를 찾는지 모르나… 사실 나도 너를 찾을 작정이었
다!"
탁몽영은 불의 무공을 얻은 사람이었으나 음성만은 차갑기 그지없
었다. 그의 목소리로 인해 구름이 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
다.
"너는 나의 명예를 건드렸다."
"호호! 황하 가에서 패한 것이 뼈에 사무치느냐?"
"패한 기억은 없다. 심마에 빠진 기억이 있을 뿐이지!"
"심… 심마(心魔)?"
빙차주의 얼굴을 가린 면사가 파르르 흔들거린다. 그녀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을 때, 예의 차가운 음성이 고막을 파고든다.
"너 따위는 알지 못할 사연이 있다."
"사연? 호호, 숯덩이를 굽는 하찮은 재간을 지닌 자답지 않군? 하
나- 일단 뼈를 묻고 나서 저승사자에게 말하도록 해라. 나는 몹
시 급하다."
빙차주인은 더 차갑게 내뱉은 다음 천천히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
녀의 몸에서 백색빙무가 뻗어 나왔다.
우르르- 릉-!
절정에 다다른 빙극신공(氷極神功)에 방원 삼 장 안이 한순간 꽁
꽁 얼어붙었다.
빙무가 뻗어 오자 탁몽영의 상체가 휘청였다. 빙무에 실린 힘이
막강해서라기보다는 빙차주의 냉막한 음성 때문이었다.
'문군(文君)의 목소리다.'
탁몽영의 얼굴이 죽립 아래서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설마… 진짜 사문군이란 말인가?'
그는 사문군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굴이 달걀같이 동그란 미녀. 눈썹이 길고, 콧날이 오똑했던 여
인. 그녀의 허리는 버들가지같이 한들한들거리지 않았던가!
웅장해 보이는 빙차주인의 목소리가 사문군의 목소리와 같다는 것
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얼굴을 확인해 보자!'
탁몽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꽈르르- 릉-, 빙무(氷霧)가 노도와 같이 일어나며 그의 전신을
압박해 들었다. 탁몽영은 재빨리 신형을 날려 빙극신장의 사정권
내에서 벗어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 너와 싸우기 전에… 나의 할아버지께 할 말이 있다!"
"할아버지? 무슨 딴소리냐?"
빙차주인은 불끈 화를 냈다.
"핫핫-."
탁몽영은 웃으며 무명노인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미동도 않고 서
있던 무명노인이 그가 다가섬을 느꼈는지 반응을 보인다.
탁몽영은 한껏 오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은 저희 조손의 장기가 아니
겠습니까? 한데 저 요사한 계집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군요?
할아버지께서 저 계집의 면사를 거둬 주신다면 저는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으으-!"
무명노인은 기이한 신음성을 발하며 둥둥 떠올라 공중에서 허리를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뇌전이 되어 빙차주를 향해 쏘아져 갔다.
휘이이- 잉-!
혼백마저 얼려 버린다는 빙극진기. 하나 무명노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빙무 속으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무명노인, 그는 혼(魂)은 사라지고 백(魄)만 남았기에 두려움을
모른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 그것은 무명노인을 흑의괴마로 만
든 절정의 공부라 할 수 있었다.
그가 빙무 속으로 접근해 들어가려 할 때였다.
"어림 없다!"
빙차주인 뒤에 있던 폭풍검마제가 고함을 치며 떠올랐다. 그는 탄
지지간 십 장을 날아올랐고, 언제 뽑아들었는지 그의 오른손엔 황
홀한 검광을 날리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일초에 삼십육방위(三十六方位)를 날려 버린다는 폭풍마검식(暴風
魔劍式)이 펼쳐지자, 검파가 노한 검룡으로 변해 대기를 갈랐다.
하나, 무명노인은 검보다 빨랐다.
"우-!"
무명노인은 폭풍검마제의 검기를 뒤로 흘려보내며, 그대로 빙차주
의 빙무 속으로 몸을 집어던졌다.
꽈르르르- 릉-!
"물러가라- 화형령주의 종놈!"
빙차주인은 거만한 목소리로 외치며 손을 휘저었다. 빙옥을 깎아
만든 듯한 섬섬옥수에서 흰 기류가 뭉클 일어나 무명노인을 휘감
았다.
꽝-, 벼락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무명노인은 허공에서 잠시 멈칫
했다. 그의 옷은 얼음조각으로 인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변화가 없었다.
"우-!"
무명노인은 입을 딱 벌리며 더 바싹 다가갔다. 얼음조각이 우박처
럼 떨어져 내린다.
"이… 이럴 수가……!"
빙차주인이 아연실색해 할 때 검은 그림자가 그녀 얼굴 앞을 스치
고 지나가더니, 두꺼운 면사가 거침없이 찢어지며 검붉은 얼굴이
나타났다.
가뭄철 논바닥마냥 쩍쩍 갈라진 피부. 일그러진 오관(五官), 떨어
진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흰 이. 코는 일그러들었고, 눈썹은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옥에서 빠져 나온 야차의 얼굴이 이러할까?
그것이 바로 빙차주인의 얼굴이었다.
휙-!
무명노인은 면사를 들고 탁몽영 곁에 떨어져 내렸다. 아직도 몸뚱
이 절반이 얼음덩이에 파묻힌 채.
"주… 주인이 저런 용모라니-!"
"저럴 수가……!"
천지인삼노가 아연실색해 할 때,
"미… 미안하게 되었네!"
탁몽영의 죽립 속 얼굴 역시 처참하게 일그러들었다. 빙차주의 얼
굴이 야차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면사에 가려진 얼굴이
그가 보고자 했던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탁몽영은 착잡해 하며 면사를 집어던졌다.
휙-!
면사가 둥실 떠오르자, 빙차주인은 잔혹한 음성을 토해내며 손을
내저었다.
"호호- 미안한 일이 아니다. 나는 네게 고마워한다!"
꽝-, 면사는 허공에서 재가 되었다.
빙차주인의 눈에선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잘 갈린 비수의 날에서
발하는 빛처럼.
그 독랄한 한광에 묻혀 눈가에 이슬로 매달린 한 방울 눈물이 있
다는 것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빙무는 더한층 거세졌다.
"호호- 자칫했으면 너를 얕잡아 보고 패할 뻔했다. 호호- 너의
할아버지인지 종인지 하는 자 덕에 너의 진짜 실력을 눈치채게 되
었으니 왜 고마워하지 않겠느냐-!"
말뜻과 어조는 판이했다.
저주하는 목소리. 증오심이 방울이 되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듯했
다.
"검(劍)-!"
빙차주인은 손을 번쩍 쳐들었다.
얼굴 피부와는 달리 희디흰 팔뚝이 나타났다. 그녀의 다섯 손가락
은 새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나의 얼굴을 보이게 하다니… 찢어 죽이리라……!"
빙차주인은 너무도 노여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의외로 마음이 약하군!"
탁몽영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지난번에는 내가 심마에 빠져 결투를 망쳤는데… 이번에는 저 계
집이 추한 얼굴 때문에 심마에 빠졌군."
그는 고개를 젓는다.
'면사를 벗긴 죄로 죽이지 않고 떠나야겠다. 흠… 광불화형전을
모독한 죄로… 옷만 태우고 떠나자.'
그는 천천히 광불화형수(狂佛火刑手)를 일으켰다. 손바닥의 광불
화인은 아주 작았다. 반경이 반촌(半寸). 그것이 없어지는 순간,
탁몽영은 완전한 광불화형수를 얻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나,
구성 수준의 현재 상태로도 무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진기로 인해 핏빛으로 달아올랐으나, 아직 열기는 일어
나지 않았다.
그가 진기를 일으키고 있을 때, 폭풍검마제가 긴 옥갑 하나를 마
차 안에서 꺼내 왔다.
"주인… 여기 신검 대령했습니다-!"
옥갑의 길이는 네 자였다.
옥갑 뚜껑이 열리자 한기와 함께 백광이 일어났다.
빙극절명신검(氷極絶命神劍)
그 안에는 검신(劍身)뿐인 한옥검(寒玉劍)이 들어 있었다.
너무도 차가워 만지기만 해도 몸이 얼어붙는다는 죽음의 보검.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그것을 몸에
지니는 것만 해도 큰 위험이다. 피가 얼어붙을 테니까!
하지만, 빙극신전 사람에게는 그 검을 쥔다는 것 이상의 용기백배
할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착-!
빙차주인은 옥같이 흰 손으로 검자루를 쥐었다.
우르르- 릉- 꽈르르- 릉-!
빙무가 회오리 치면서 무서운 바람이 일어나며, 폭풍검마제는 강
기에 휘말려 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일검(一劍)으로 승부를 내리라.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죽을 싸움
이니… 길게 끌지는 않겠다!"
그의 옷자락엔 어느새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슈- 슉-!
빙차주인은 검을 안은 채 날아올랐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십 장
허공에 걸렸다.
피이이- 잉-!
검기가 폭사되면서 백색의 검화가 연이어 피어 올랐다. 하늘이 온
통 흰빛으로 물들었다.
보라-, 백색의 검강이 하나로 뭉치어 들면서 거대한 얼음기둥으
로 화하는 것을!
쩌억- 쩍-!
땅거죽이 입을 벌리듯 갈라졌다.
빙설천지. 빙극절명신검의 냉기로 인해 천지간의 모든 것을 얼음
으로 화했고 곧 부서져 무수한 은편으로 날리웠다.
"할아버지 일 리 밖으로 떠나십시오!"
탁몽영은 무명노인에게 말하며 손을 품안에 넣었다.
슷-, 그가 손을 빼내는 동시에 갑자기 검 하나가 그의 손에 쥐어
졌다.
없던 검을 허공에서 끄집어내는 듯한 동작. 그것은 천 년간 피맛
을 잃고 잠들어 있던, 여래혈검환(如來血劍丸)이 풀리는 동작이었
다.
피이- 잉-!
검환은 두 자 다섯 치 길이의 혈검(血劍)이 되며 열류(熱流)를 흘
려 보냈다.
검이 흔들리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핏빛 검기가 뿌려지며 불상
(佛像)이 허공에서 떠다니는 듯한 환각이 만들어진 것이다.
위이이- 잉-!
혈불(血佛)은 탁몽영의 몸을 뒤덮었다.
핏빛 부처의 그림자가 그의 몸에 드리워질 때, 탁몽영은 무아경
(無我境) 속에 빙극절명신검의 검명(劍鳴)을 들으며 혼신공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르르르- 릉- 꽈르르- 릉-!
십 장 길이의 화무(火霧)가 솟구쳤다.
우르르- 릉- 꽝-!
그의 진원지기(眞元之氣)가 검을 타고 흘러나오며 주위 환경을 이
상하게 변화시켰다.
부그르르-, 호수물이 끓어오르며 얼음으로 덮였던 갈대밭에 불이
붙었다. 빙굴이 한순간 열양지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불길이 점점 커질 때,
"하아아- 앗!"
빙차주인은 기합소리를 내며 검과 몸을 한데 합했다.
우이이- 잉-, 그녀의 몸은 십 장 길이 검강(劍 ) 안에 감춰졌
다.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흰 무지개랄까? 얼음을 뿌리며 나는 백
색설룡(白色雪龍)이랄까?
빙차주인은 소리와 빛으로 몸을 감춘 채 탁몽영의 머리를 향해 작
살처럼 떨어져 내렸다.
새- 액-!
매서운 소리, 그것은 검파(劍波)보다 늦었다.
소리가 날 때, 두사람의 검기는 허공에서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우르르- 릉- 꽈꽝- 꽝-!
핏빛과 흰빛, 두 가지 빛이 섞이면 분홍빛이 되리라!
하나,
꽈르르- 릉- 우르르르- 릉-!
흰빛과 붉은빛이 섞이는 자리는 온통 새까맣게 물들었다. 흙이 뒤
집혀 이십 장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서호의 물이 광풍에 휩쓸린
듯 날뛰었고, 일 리 안의 모든 것이 뒤집히고 파괴되었다.
그 와중, 신음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으으- 윽- 역시 빙극신주다웠다!"
화형령주 탁몽영이 검환을 손에 쥐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것이었
다.
빙차주인은 털썩 쓰러져 있었다.
빙극신검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고운 가루로 화해 허공에 뿌려
진 후였다.
"나… 나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으으- 어이해 죽이지 않았을
까?"
빙차주인은 허망히 중얼거렸다.
'남자- 과연 여자는 남자보다 모자라는 존재란 말인가?'
그녀는 피눈물을 흘렸다.
천지인삼노는 광풍에 휘말려 수십 장 밖으로 날아가서 몸을 휘청
이고 있었다.
그들은 속하된 자들로서 주인을 잘 받들어야 하나, 지금은 자신의
몸 걱정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들이 피를 토할 때… 탁몽영이 멀리 사라질 때…….
파팍-, 땅바닥에서 흙이 다시 한 번 튀어 오르더니 검은 그림자
하나가 바람같이 떠올랐다.
"적중했다. 지둔마공(地遁魔功)으로 몸을 숨긴다는 계략은!"
흑의신군이 아닌가?
한데, 전과 달리 기도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비록 목소리에 담
긴 음험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는 밖으로 나오는 즉시 빙차주인 쪽으로 다가갔다. 빙차주인은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참아내며 몸을 세우고 있었다.
흑의신군이 간교한 눈빛을 던지며 바짝 다가설 때, 한 줄기 냉광
이 폭사되었고, 흑의신군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뼛속까지 얼어붙게 하는 냉광, 그것은 노여움이 가득한 빙차주인
의 눈빛이었다.
"물러가라-!"
그녀가 화를 낼 때,
"함께 가자. 네 도움이 필요하다. 알겠느냐?"
흑의신군은 입가에 조소를 띄우며 한 걸음 다가갔다.
"화형령주에겐 패했지만… 조롱받을 신세는 아니다."
빙차주인은 이를 악물며 손가락을 튕겼다.
설화빙옥신지(雪花氷玉神脂)-!
시전되면 눈꽃이 피어 오르고 상대의 미심혈에 얼음 구멍을 뚫는
다는 빙극신전의 절예였다. 그런데 지금은 파공성만 들릴 뿐 눈꽃
은 내리지 않았다. 하나, 그 위력은 감히 피하지 못할 정도였다.
스르륵-, 얼음 같은 지강에 몸을 꿰뚫리기 직전 흑의신군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빙차주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흑의신군이 너무 신묘했기 때문일
까?
"유령환환보… 그것은 천외마벽에 적혀 있다는건데……."
빙차주인의 눈빛이 흐트러질 때, 허공 중에서 흑의신군의 냉막한
음성이 들려 왔다.
"좋아! 역시 아는 게 많은 계집이로군. 후후… 지금은 힘을 아껴
야 할 때다. 놀아 줄 시간을 충분한데 바람빠진 공처럼 되면 곤란
하거든."
흑의신군은 빙차주인의 바로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소매가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분홍빛 기류가 뿌려졌다.
"으으- 음-."
빙차주인은 밀려오는 졸음에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쿵-
그녀가 쓰러지자,
"이 놈- 이제껏 무공을 숨기고 있었구나?"
폭풍검마제가 바람같이 날아들어 흑의신군의 등에 일장을 가했다.
꽈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났다.
"어이쿠- 손목이 으스러지다니… 으으- 주… 주인만한 고수였단
말이냐?"
손목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사람, 폭풍검마제는 흑의신군을 쓰러
뜨리기는커녕 자신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흑의신군, 그는 화형령주와 빙차주인만한 고수였던 것이다.
"흐흐-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 다음부터는 노부를 주인으로 잘
모시라는 의미에서!"
흑의신군은 그제서야 옷자락을 툭툭 털어냈다.
천지인삼노는 아연실색했고,
"따라와라-!"
흑의신군은 혼절한 빙차주를 안아들고 훌훌 떠올라 사라져 갔다.
박살난 채 뒹굴고 있던 빙차는 어부(漁夫)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서호의 어부들은 그런 소문을 사방에다 흘렸고, 그것은 화형선의
장례식과 더불어 두 가지 놀라운 소문이 되었다.
첫댓글 재미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