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구산 성지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龜山) 마을은 팔당 부근 한강변에 위치하며 순교자들의 숨결이 170여 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내에 시원스레 뚫려 있는 강변도로와 중부 고속도로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교통상의 편리함도 구산 성지를 찾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이다. 구산 성지 또는 구산 마을이라고 할 때 어느 곳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고 해도 미사리 조정 경기장 하면 “아, 그곳!”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 마을은 먼저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분인 김성우 안토니오(金星禹, 1795-1841년)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 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구산 마을은 김성우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순교자들의 묘소를 가족 묘지에 이장 · 보존해온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200여 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지켜온 교우촌으로 도시화로 인한 급변속에서도 한마음으로 신앙 안의 일치를 잃어버리지 않고자 노력해 왔다.
6.25 전쟁 당시 구산 마을은 원로 신부들의 피신처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낮에는 곳곳에 무성하게 자란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숲 사이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저녁에 살금살금 나와 지친 몸을 쉬었다고 한다.
쭉 뻗은 강변도로와 그 아래 미사리 조정 경기장은 구산 마을을 향하는 순례자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하지만 정작 도로 건너편 구산 마을은 도시화의 풍랑 속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 시골 성당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구산 성당이 소리 없이 파묻힌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1836년 모방 신부가 설립한 구산 공소를 모태로, 1979년 신장 성당에서 분리 · 승격해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생가터에 설립된 구산 성당과 그 인근 부지가 2009년 시작된 ‘미사 보금자리’ 재개발 사업에 포함되어 이전을 강요당했다. 무분별한 경제논리에 역사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당 존치를 위해 노력한 구산 성당은 201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말까지 옛 성당의 원형을 보존한 상태로 220m 가량 떨어진 새 부지로 성당을 통째로 옮기는 대역사를 이루어냈다. 국내에서 최초로 콘크리트 건축물을 하루에 10m 정도씩 옮기는 이전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교우촌의 역사와 문화재적 가치를 지키는 좋은 사례가 되었다.
구산 성당에서 걸어서 15분 남짓 거리에 조성된 구산 성지 또한 무분별한 개발과 도시화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다. 1980년 로마 교황청이 세계 순례성지로 지정하고, 2001년 그 역사적 ·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 지정된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순교자 8명이 출생 · 순교한 후 묻힌 곳이며, 최근까지도 그 후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하지만 현재 성지를 포위라도 하듯 고층 아파트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야트막한 언덕 모양의 성지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형형색색의 도자기 작품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성모자상)이 보인다. 독특한 외형의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은 구산 성지 초대사제인 고(故) 길홍균 이냐시오(1931-1988년) 신부가 꿈에서 본 성모님의 모습을 토대로 고 김세중 프란치스코(전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 화백이 조각해, 지난 1983년 축성된 것이다.
성모상과 함께 성지 안을 돌아보면 오른쪽으로 ‘안당문’(安當은 안토니오의 중국어 음역)이라 적힌 자그마한 기와 대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순교자 묘역과 성당이 보인다. 순교자 묘역에는 김성우 성인과 2015년경 가족 묘지에서 모셔온 순교자, 구산 출신 순교자 등 9위의 무덤이 진묘와 의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고 안당문을 들어서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순교자들의 묘소 앞에서 잠시 눈을 감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택했던 그들의 풍모를 그려본다.
양반의 자제로 태어나 유복한 살림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김성우가 신앙의 험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그는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방 신부를 모시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그는 1840년 1월경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요지부동의 굳은 신앙에 결국 그는 이듬해 4월 29일 47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당 왼쪽으로 청동 빛의 고색창연한 십자가의 길 14처상이 보인다. 굽이굽이 말려 올라간 소나무들의 푸른빛이 십자가를 진 예수를 향해 시퍼렇게 날선 창을 겨눈 병사들의 청동 빛에 어우러져 섬뜩할 정도로 처절했던 순교 당시의 고통을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성지 한 가운데는 넓은 잔디광장과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 성지와 관련된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세운 기둥들이 묵주기도 길 사이로 높이 솟아 있다.
유서 깊은 교우촌이며 순교자들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힌 구산 마을과 구산 성지는 급격한 도시화와 무분별한 개발 정책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순교의 얼이 살아 있는 곳이다. 현재 구산 성지는 신앙 선조와 순교자들의 삶을 체득 · 체화하는 수련마을인 신앙선조 영성마을 건립을 위해 애쓰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7일)]
구산, 김성우 성인의 고향
구산 성지 성당 내부.모방 신부가 방문한 공소 중에서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으로는 거북뫼 곧 ‘구산’(龜山,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로 현 하남시)이 있다. 이곳은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으로, 그는 1830년경에 셋째 아우인 윤심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둘째 아우 덕심(아우구스티노)은 입교를 망설이던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 3형제의 신앙 실천과 전교 활동은 실로 눈부셨으니, 얼마 안 되어 구산 마을 전체는 하나의 교우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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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그가 남긴 한 마디는 다음과 같이 순교를 각오한 단 한 마디였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8년 6월호]
성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1795-1841년)
김성우 안토니오는 1795년에 경기도 구산(현 경기 하남시 구산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미 여러 대 이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꽤 부자소리를 듣고 지냈다.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1798-1841년)
김만집은 김성우 성인의 첫째 동생으로, 자는 덕심(德深) 또는 치영(致英)이고, '만집'은 그의 보명인데, 교회사의 기록에는 '덕심'이라는 자로 나온다. 비록 형제들보다는 늦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아우인 김문집(베드로)과 사촌 김주집(金胄集,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留守)의 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문집(金文集) 베드로(1801-1868년)
김문집은 김성우 성인의 둘째 동생으로, 자는 윤심(允深)이며, '문집'은 그의 보명이다. 맏형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둘째형인 김만집(아우구스티노)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성희(金聖熙) 암브로시오(1815-1868년)
김성희는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로, 자는 희백(喜伯), 세례명은 암브로시오였다. 그의 세례명은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훗날 족보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전주 이씨 범회의 딸이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김문집의 아들인 경희의 5남 교익(敎翼, 토마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최지현(崔址鉉, 1818-1868년)
최지현은 경주 최씨로, 자는 군실(君實)이다. "좌포도청등록"(左捕盜廳謄錄)에는 그의 세례명이 휘두(揮斗)로 나오는데, 이것이 정확히 어떤 세례명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김경희(金敬熙, 1823-1868년)
김경희는 순교자 김문집의 외아들로, 자는 치선(致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1823년(순조 23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장성한 뒤 순흥 안씨 진환(鎭煥)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첫 부인이 일찍 사망하면서 전주 이씨 종태(從台)의 딸과 재혼하게 되었다.
심칠여(沈七汝) 아우구스티노(1832-1868년)
심칠여는 구산 신자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오지 않던 순교자이다. 그러나 "좌포도청등록"에 따르면, 구산 태생으로 1859년 무렵에 이웃 마을에 살던 신자 심성일(沈聖一)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1864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성인 주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김차희(金次熙, ?-1868)
김차희는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자는 희선(希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부인은 광산 김씨였다. 그는 부친 김만집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1년 남한산성에서 옥사로 순교할 때 12세 전후의 어린 아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로는 종형 김성희(암브로시오)를 따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편 침술을 배워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의 침술은 인근에 잘 알려질 정도로 능통하였다고 한다.
김윤희(金允熙, 1834-1868)
김윤희는 김성우 성인의 사촌 김주집(스테파노)의 장남으로, 세례명은 알 수 없다. 김주집은 기해박해 때 김문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약 18년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겪다가 1858년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윤희도 일찍부터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구산 성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