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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사유성(査流星)의 출도(出道)
①
소림사(少林寺).
소림사는 영원한 정도의 지주였다. 과거 대마성의 혈겁으로 천하가 암흑 속에 뒤덮였을 때, 분연히 일어선 것도 소림이었다.
그때 약관에 불과했던 청년기승(靑年奇僧) 천무(天武)의 힘으로 소림은 흩어진 정도제파를 규합했으며 정도맹을 만들었다. 그들은 마도타파(魔道打破)의 기치아래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투혼은 마침내 혈겁의 종지부를 찍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물론, 무림삼옹의 재등장과 신비문파인 제마천문의 힘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소림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은 가능했다.
그것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불혼애.
소림의 금역인 불혼애에서 기이한 국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백발승인이 거대한 불상 앞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
백발승인.
그는 바로 지난 날의 정도맹주이자 천하제일인 천무대선사였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결가부좌의 자세로 석불 앞에 앉아 있었다. 호흡이 멈춘 것으로 보아 깊은 삼매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천무의 등뒤에는 수십 명의 인물들이 부복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천하정도를 좌지우지하는 지고무쌍한 신분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소림의 방장(方丈)인 뇌정대사(雷霆大師)를 위시하여 무당(武當), 화산(華山), 아미(峨嵋), 곤륜(崑崙), 청성(靑城), 점창(點蒼), 공동, 종남(終南), 해남(海南), 개방( 幇)의 장문인들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무림구대세가의 새로운 가주들, 즉 무림구공자들도 함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북 십삼 개 성의 패주는 물론이거니와 제파의 영수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대마성과의 대회전(大會戰)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함께 모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이십 년만에 함께 모인것이다.
지금 그들은 단 일인, 과거에 천하제일인이자 정도맹의 맹주였던 천무대선사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
불혼애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휘이잉.......
살을 에이는 삭풍만이 그들의 옷자락을 날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침묵하던 천무대선사가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빈승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오. 맹주도 그 무엇도 아닌 파계승에 불과할 뿐이오. 여러분의 부탁을 들어드릴 수가 없음을 양해하시오."
중인들의 얼굴에는 일제히 안타까움이 번졌다. 뇌정대사가 이마를 땅에 대며 말했다.
"사숙! 재고하여 주십시오. 천하는 바람앞의 등불같사옵니다. 하루 하루 대혈겁풍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사숙께서 다시 나서주시지 않는다면... 강호백도는 머지 않아 피로 씻길 것이옵니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뇌정대사는 불호를 외우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천무대선사는 탄식을 했다.
"어허! 이 파계승이 무슨 힘이 있다고 대란을 저지시킬 수 있겠소? 천기는 천살과 적미성의 혈겁을 예고하고 있소. 빈승은 그 자리에 끼일 수가 없소. 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오. 더군다나......."
불현듯 천무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 앞에 채 완성되지 못한 불상이 드러났다.
"빈승은 이 마애불을 완성시키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겠다고 부처님께 맹세하였소. 나는 그 언약을 깨칠 수가 없소."
중인들의 얼굴에는 다시 한 번 안타까움이 스쳤다. 그들은 지금 천무대선사의 재출도를 청원하고 있었다.
중인들은 믿었다.
과거 대마성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천무가 아니라면 대혈륜궁의 대혈겁을 막아낼 자가 없다는 것을. 오직 천무만이 또다시 도래하는 혈겁을 막을 수가 있다고 중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무의 대답은 그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을 뿐이었다.
"아미타불. 뿐만 아니라... 지금의 혈겁은 단지 천살의 혈풍에 불과하오. 정작 무서운 것은... 바로 적미대혈성(赤眉大血星)의 저주이오."
"적미대혈성?"
"오오!"
중인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천무의 말뜻은 앞으로 닥칠 혈겁이 정작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닌가?
찰나지간 중인들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불혼애는 다시 죽음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휘리리링.......
바람만이, 오로지 인간이라는 존재의 희노애락을 알 길이 없는 바람만이 불혼애를 제 집처럼 휩쓸며 뛰놀 뿐이었다.
"아미타불.... 인간이 어찌 하늘의 뜻을 따를 수 있겠소? 빈승은 오직... 마애불을 완성시킬 뿐이오."
천무대선사는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아 버렸다.
"통촉하소서!"
"제발 그 뜻을 거두어 주소서!"
중인들은 일제히 읍소하며 이마를 땅에 대었다.
그것은 무림 이천년사 이래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천하백도의 지존들이 단 한 사람에게 이마를 땅에 숙인 일은 미증유의 대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불혼애를 짓눌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천무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져나왔다.
"허어......!"
천무는 이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빈승 한 가지 대안을 드리겠소."
"오!"
중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며 감탄했다. 그들은 감사와 찬탄의 눈빛으로 천무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천무의 말 한 마디. 그것은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대혈륜궁이 일으키는 피의 혈겁을 막을 재간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무대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이제 빈승의 시대는 지났소. 장강의 앞물을 뒷물이 밀어내듯이 말이오. 앞으로는... 젊은이들의 시대요. 따라서 새로운 정도를 이끌어갈 지주도 역시 새로 떠오른 태양이어야 하고 새로이 꿈틀거리는 신룡(神龍)이어야 하오."
"......."
중인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천무대선사의 말로 미루어 그는 자신을 대신할 인물을 천거함이 분명했다. 이윽고 천무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 한 마리의 용을 드리겠소."
천무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②
덜컹!
불혼애의 한쪽에 세워진 석옥의 문이 열렸다. 이어 안으로부터 한 청년이 서서히 걸어나왔다.
"......?"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앗! 신주......!"
"맞소. 신주제일룡이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불혼애의 석옥에서 나타난 청년. 그는 바로 천무의 제자인 신주제일룡 사유성이었다.
중인들은 술렁거렸다. 그때였다.
중인들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멋모르고 탄성을 내지르던 그들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 수록 역력한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이유는 자명했다.
그들은 사유성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한 마리의 용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사유성은 이제 고작 약관을 넘었을 뿐이다. 게다가 강호경력도 극히 미미했다. 한 가지 더 꼬집는다면 그의 능력 또한 미지수였다.
중인들은 검증되지 않은 그의 능력을 무턱대고 믿을 수 없었다.
강호의 백도제파의 지존들의 얼굴은 한순간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느닷없는 천무대선사의 불호성이 중인들의 고막을 때렸다. 뒤이어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년... 빈승이 출도했을 때 빈승은 달마칠십이절예(達磨七十二絶藝) 중 육십 종을 익혔소이다."
"......?"
천무의 말은 중인들을 의아케 만들었다. 그러나 천무는 내처 말을 이어갔다.
"또한 공력도 이백 오십 년 수위였소이다."
"......?"
중인들은 더욱 의아해 했다.
다음 순간 천무대선사의 음성은 약간 무거워졌다.
"그러나 지금 저 아이는 달마칠십이절예를 모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내공 또한 오 갑자가 넘고 있소."
"그... 그럴 수가!"
"미... 믿을 수가 없소."
중인들 사이에 경악의 파문이 일었다. 그 파문은 거세게 밀어닥치는 파도처럼 중인 전체를 휩쓸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긴 청년이 그 정도의 수위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천무대선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미타불.... 그는 당년의 빈승을 능가하오. 여러분이 그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자유이오. 빈승은 다만 용을 길렀을 뿐이오. 아미타불......."
천무는 불호를 끝으로 또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중인들은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천무대선사의 뜻은 명확했다. 바로 신주제일룡 사유성을 정도맹주로 천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도제파의 지존들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천무의 뒷모습과 사유성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망설이기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천무를 향해 다가가던 사유성의 검미가 푸르르 떨렸다. 바로 천무의 하얗게 센 백발과 백미(白眉)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윤기가 자르르 흘러내릴 정도로 검었다.
'사부님!'
불현듯 사유성의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 순간 사유성의 귓전에 장중한 천무대선사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니, 그것은 전음보다도 두 단계 더 높은 혜광심어(慧光心語)였다. 혜광심어는 마음으로 뜻을 전하는 불문절예였다.
..... 네 뜻대로 하거라. 허허... 유성아. 너는 젊다. 무한한 미래가 네 앞에 펼쳐져 있다. 이 사부는 너의 길을 일러줄 뿐이다. 네가 비를 만나 승천하는 용이 되고 되지 않고는 오로지 너의 힘에 달려 있다.
그 순간 사유성은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사부!'
...... 내 말하지 않았느냐? 네 뜻대로 하라고. 지금이 바로 너의 뜻을 펼 때다. 다만 명예는 뜬구름같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명심해라.
천무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사유성의 눈에서 점차 강렬한 신광이 흘러나왔다. 그의 가슴이 격동으로 인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천무는 확실히 그를 믿는 것이었다.
그는 내심 외쳤다.
'해내겠습니다. 사부님! 이 사유성이 천하제일인인 사부님의 제자로서 정도를 수호하는 수호신이 되어 사부님의 명예를 더욱 빛내드릴 것을 다짐하겠습니다.'
사유성은 앞으로 걸어갔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사유성은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그 누구든지 그를 마주대하면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제 사유성의 전신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뻗쳤다. 그것은 어쩌면 달마칠십이절예가 만들어낸 기도일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사유성은 우뚝 선 채 중인들에게 두루 포권을 했다. 그의 그런 태도는 결코 오만하지도, 경솔하지도 않았다. 이어 그는 입을 열었다.
"여러 선배님들. 소생 사유성이 감히 한 마디 하겠습니다."
중인들은 숨을 죽였다.
"소생은 제 일대의 정도맹주이신 사부님으로부터 대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소생이 할 말은 과거 사부님께서 하신 일과 같을 것입니다."
찰나지간 중인들은 안색이 변했다.
사유성의 말은 스스로가 정도맹의 맹주가 되겠다는 뜻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각문각파의 지존들과 패주들의 얼굴에서 서서히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불신의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이때 한 인물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사소협. 소협의 의지는 가상하오. 그러나 이 일은 천하무림의 인명이 달린 대사요. 결코 장난이 아니란 말이오!"
그는 바로 강서(江西)일대에서 비룡보(飛龍堡)라는 문파를 거느리고 있는 철혈비룡(鐵血飛龍) 송파(宋巴)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불만과 불신을 토로하고 있었다.
사유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반문했다.
"송대협께서는 지금 소생이 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사유성의 반박이 끝났을 때였다.
번쩍!
돌연 사유성의 눈에서 태양보다도 강렬한 기운이 뻗쳤다. 그 눈빛을 받은 순간 송파는 자신의 동공이 파괴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으으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하며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사유성은 신광이 반짝이는 눈으로 중인들을 둘러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소생이 감히 말하건데 지금의 정도무림은 지나친 안일주의와 이기심으로 인해 침체되어 있소이다. 이때 분발하여 뭉치지 않으면 대혈겁에 결코 맞설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철저히 마도들에게 농락당하고 말 것이오!"
다시 한 사람이 일어섰다. 그는 개방의 장문인 신풍마취개(神風魔醉 ) 백리천후(百里天候)였다. 그는 침통하게 말했다.
"사소협, 그렇다면 소협에게 방도가 있단 말이오?"
찰나지간 사유성은 두 눈에 강렬한 신광을 뿜었다. 이어 그는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홍수는 흙으로 막고, 싸움은 장수로 막으라고 했소이다."
"그... 그럼?"
"소생 비록 무림경력 미천하나 무림을 마도의 손에서 건져낼 자신이 있소이다."
사유성의 입에서 거침없이 확고한 말이 쏟아져나왔다. 그때서야 비로소 중인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그들은 새로운 눈으로 사유성을 보기 시작했다.
당대의 후기제일인이라는 신주제일룡 사유성을. 그는 또한 천하제일인 천무대선사의 수제자가 아닌가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사유성은 중인들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때가 적기이다!'
그는 결심을 굳혔다.
사유성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소생이 여러분들께 한 가지 언약을 하겠소이다. 정도맹주는 필히 용맹은 물론이려니와 무엇보다도 강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
중인들의 얼굴에 의아로움이 어렸다. 사유성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이 명예를 걸고 전 무림의 공적(公敵)인 사풍객을 제거하겠소이다. 그것으로서 소생이 스스로 시험대에 오르겠소이다."
"사... 사풍객을!"
"오오!"
사풍객. 그 자야말로 공포의 상징인 대살성(大煞星)이었다.
사유성의 선언은 중인들을 대경실색케 만들고도 남았다. 중인들은 모두 격동과 흥분을 금치 못했다.
이제 사유성은 정도무림의 영수들을 향해 확실히 선언한 것이다. 무림구대세가를 멸망시키고 전 중원을 사풍인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어 전율케 만든 대살성 사풍객을 자신의 손으로 제거하겠노라고.
만일 당금무림에서 사풍객을 제거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 자야말로 대협사의 칭호를 들어 마땅할 터였다. 또한 그야말로 가장 적합한 정도무림의 맹주감으로서 손색이 없을 터였다.
사유성의 말은 그 효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그 효력은 즉시 나타났다.
"옳소!"
"정말 가상한 일이오!"
중년인들은 마침내 환성을 울렸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찬동을 표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부르르.......
천무의 백발이 세차게 떨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사유성이 뱉어낸 말 때문이었다.
중인들을 향한 사유성의 선언. 그것은 천무의 가슴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준 것이다.
'사... 사풍객... 그 애와 유성이?'
천무는 내심 경악하며 부르짖었다.
그는 너무나도 어긋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처음으로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니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싶었다.
사풍객 백천강.
그는 바로 자신의 핏줄을 받은 아들이었다. 또한 신주제일룡 사유성은 그의 애제자였다. 자신의 핏줄을 받은 자식과 애제자가 원수가 되어 검을 겨룬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안돼!'
천무는 내심 외치며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사유성의 눈과 그의 눈길이 마주쳤다.
"......!"
천무는 사유성의 눈을 직시했다.
사유성의 눈은 투혼과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천무는 확연히 깨달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애제자인 사유성의 욕망과 불타오르는 투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한편 사유성도 스승의 눈을 직시했다. 그러나 사유성은 스승의 눈빛이 말하는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다.
뜻밖에도 천무의 눈빛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스승의 눈빛은 애통스러움을 가득 담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것은 사유성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유성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곧 시선을 돌렸다. 이어 자신을 향해 열광하는 중인들을 향해 겸손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그것은 바로 능력을 지녔다고 믿는 자가 취할 수 있는 여유로운 행동이었다.
③
포고문(布告文).
한 장의 포고문은 전 무림을 경악과 흥분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 포고문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사풍객에게 고한다. 그대가 진정한 무인이라면 도전에 응하라! 마에는 웅(雄)과 졸(卒)이 있다. 그대가 진정한 마웅(魔雄)이라면 도전에 응하리라 믿는다. 때는 사월 사일, 장소는 동백산(桐柏山) 천장대(千丈臺)다.
신주제일룡 사유성이 그대와 대망의 일전(一戰)을 나누기를 희망하노라!
그러한 내용을 적은 포고문이 중원 각처에 나붙었다. 마침내 무림은 들끓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무림구대세가를 쓰러뜨린 희대의 대살성 사풍객과 천하제일인 천무대선사의 수제자 신주제일룡 사유성의 싸움 때문이었다.
그 승부에는 무림의 향후 운명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림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만일 사유성이 사풍객을 꺾는다면 그는 대혈륜궁에 대적하기 위해 결맹된 정도맹의 맹주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믿었다. 아니, 그들은 진심으로 기대했다.
사유성은 틀림없이 사풍객을 꺾고 무림맹의 맹주가 될 것을. 그리하여 또 한 번 약관의 나이에 천하정도의 대주(大主)가 탄생할 것을.
태실봉(太室峯)은 소림사가 있는 숭산의 소실봉과 마주한 영봉(靈峯)이었다.
그 태실봉 정상에는 거대한 거북이의 등을 닮은 거암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거암 위에 한 인영이 가부좌를 튼 자세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인영은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를 지난 듯했다.
절륜한 용모를 지니고 있는 인영. 그는 다름아닌 사유성이었다.
"......."
사유성은 말을 잊은 듯했다. 해가 뜨고 지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그러나 그는 석상처럼 미동도 없었다.
휘... 이이잉.......
삭풍이 얼음조각을 날리며 휘몰아쳐 왔다.
태실봉 정상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혹독한 추위가 때늦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때는 꽃피는 삼월이었다. 중원 전역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그러나 태실봉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태실봉에서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모든 것이 꽁꽁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
어둠이 물러가며 먼동이 터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번쩍!
한순간 사유성의 눈이 신광을 발했다. 그것은 바로 멀리 대별산 봉우리로부터 시뻘건 태양이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어슴프레하던 사유성의 전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놀랍게도 사유성은 상체를 벗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기이쩍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유성의 전신이 여러 겹의 살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었다.
산 사람의 몸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 사유성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동사(凍死) 한 것은 아니었다.
눈(眼). 사유성의 눈은 살아 있었다.
그의 눈은 대별산 봉우리를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쏘아보았다. 찰나지간 사유성의 눈에서 형용할 수 없는 결의의 빛이 투사되었다. 그 눈빛은 태양을 녹일 듯이 강렬했다.
잠시 후였다.
사유성은 태양을 쏘아보던 눈을 거두었다. 이어 그는 자신의 무릎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무릎에는 한 자루의 검이 가로 놓여져 있었다.
"이긴다... 꼭 이길 것이다!"
돌연 사유성의 입술가에 얼어있던 살얼음이 툭툭 떨어지며 그의 음성이 들렸다.
그는 동백산 천장대의 결전에 임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사유성은 단전에 맞닿아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무릎 위에 놓인 검을 쥐었다. 검을 쥔 그의 옥수에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
사유성은 신비한 운무로 가득 뒤덮여 있는 숭산의 웅자를 내려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투혼(鬪魂)을 더욱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소림의 살아 있는 신화가 되어야 한다. 결코 패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때였다. 사유성의 눈에서 태양보다도 더 강렬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달마칠십이종절예는 영원하다. 달마선사께서 소림에 들어오신 이후... 소림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사유성은 운해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하계의 산봉과 중원천하를 내려다 보며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나 사유성은 무림 제일인이 되어야 한다. 아니... 영세제일인이 될 것이다. 열 살 때 제독부를 떠나 소림으로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부는 나에게 욕망을 버리라 했지만 욕망을 품지 않은 새는 높이 날 수 없다. 나는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붕(鵬)이 될 것이다."
불현듯 사유성의 옥수(玉手)가 움직였다.
스르르... 릉.......
찰나지간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검날은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으며 칠색의 무지개를 허공에 휘뿌렸다.
천추신검(天樞神劍).
그 검은 상고신병(上古神兵)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가(査家)에서 수백 년 간을 이어온 신병으로써 사가의 영물이었다.
"후후후... 천추! 너로 하여 사씨가문은 찬란한 명가의 기틀을 잡게 되었다. 이제 너는 나 사유성으로 인해 다시금 천하제일의 검으로 추앙받게 될 것이다."
사유성은 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돌연 검명(劍鳴)이 태실봉 정상으로부터 울려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번쩍!
푸른 검광이 마치 한 마리 창룡(蒼龍)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사유성의 머리 위로 십 장까지 치솟았다.
츠츠츠.......
뒤이어 검광은 마치 살아있는 유룡처럼 태실봉 정상을 한 바퀴 맴도는 것이었다.
놀라웠다.
그것은 바로 달마어기배검술(達磨馭氣輩劍術)이었다.
달마칠십이종절예 중에서 이제껏 천하제일인들에게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던 검도의 최고 절예가 신주제일룡 사유성에 의해 펼쳐진 것이다.
위이이잉.......
검광은 살아 있는 푸른 용같았다. 그것은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며 태실봉 위를 한 바퀴 휘돌았다.
사유성은 두 손을 합장한 채로 눈을 뜨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꽃같았다.
휘리링... 위잉.......
푸른 검기에는 사유성의 손이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기는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심령제어검술(心靈制御劍術)이었다.
그 경지는 천무조차 이르지 못했던 최고의 경지였다. 결국 사유성은 달마어기배검술을 완전히 전성한 것이다.
슈악!
푸른 검기는 만천폭우의 검광을 폭사하며 사유성의 손으로 돌아왔다. 사유성은 돌아온 천추신검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는 이 순간부터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오로지 승리와 거대한 포부가 있을 뿐이었다.
"으하핫핫! 이긴다! 꼭 이길 것이다! 나 사유성의 천하가 시작될 것이다. 으하하핫!"
사유성은 마음껏 웃으며 외쳤다. 그의 웃음은 광소와도 같았다. 사유성의 웃음소리는 끝없이 퍼져나갔다.
혈영(血影)이었다.
일신에 짙은 핏빛 혈의를 입은 청년은 대별산의 한 단애(斷崖)위에 우뚝 서 있다.
그는 바로 혈륜공자 백천강이었다.
"......!"
백천강의 눈은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잔혹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휘리링.......
삭풍이 백천강의 혈의를 감싸며 휘몰아쳤다.
백천강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쪽지가 찢어질 듯이 펄럭이며 뒤집혀졌다. 찰나지간 종이 위에 쓰여진 글씨가 드러났다.
포고문(布告文). 그것은 바로 사유성이 그에게 보낸 도전장이었다.
"크크크... 마에는 웅과 졸이 있다고? 마웅이라면 도전에 응하라고?"
문득 백천강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그는 손바닥을 비볐다.
스스스.......
종이는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그것은 땅으로 떨어질 찰나적인 시간조차 없었다. 가루가 된 종이는 형체도 없이 삽시간에 허공 중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백천강의 입에서 조소가 터졌다.
"크크ㅋ! 어리석은 자. 감히 사풍객에게 도전장을 띄우다니... 그러나 나는 그의 속셈을 잘 알지. 그가 내게 도전장을 보낸 것은 정도맹주감으로서의 신뢰를 얻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크ㅋ... 그 다음에는 대혈륜궁과 대적을 하겠다는 것이지."
돌연 백천강의 눈에서 혈광이 뻗쳤다. 그는 내처 광소를 터뜨렸다.
"크크! 사유성. 내가 지금까지 너를 건드리 않은 이유를 아느냐? 그것은 네가 천무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룻강아지는 잡지 않는다. 크ㅋ! 나는 네가 좀더 크기를 기다려 왔다. 이유는 너를 철저히 무너뜨리기 위해서다. 푸하핫! 그것도 모르고 도전을 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
백천강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느덧 그의 눈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천강이 마경(魔境)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좋다. 너의 도전을 받아 주겠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백천강은 말을 멈추었다. 한 점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 돌연 백천강은 천지가 떠나갈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크크크...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철저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나는 잠시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쓰겠다. 놈을 완벽히 무너뜨리기 위해!"
휘이이... 잉!
한순간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팟!
백천강의 모습은 광풍에 휘날리듯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굿,,,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