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설 때만해도 이렇게 황홀한 하루가 전개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김숭자회장이 송년회에서 펼친 공격적인(애교적인?) 회원늘리기
캠페인 덕분에 참가자가 21명이나 된다. 김승만 교장선생님, 배정운 수석부회장,
이종범 전어회장, 박근준 서예회장에 강일성, 장문영 명예회원까지 거물급이
총출동했다. 게다가 교장선생님은 간식용 과자봉지 한 개씩, 전어회장님은 아침
식사용 떡 한 상자를 돌리고 현총무는 귤, 김회장은 커피 서비스까지 하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회장 바꿀걸 그랬단 소리까지 나온다. 김고문이 듣다못해
나를 바로 옆에 앉혀두고 그런 소릴 해야겠느냐며 민심의 야박함에 혀를 찬다.
게다가 장문영회장이 경기고 동창회장이 되신 턱으로 저녁을 쏜다 하는데 김승만
회장이 오늘만은 안 된다며 저녁은 자기한테 양보해달라고 애걸하신다. 결국
장회장이 다음에 하기로 양보했는데 거물들이 이렇게 저녁사겠다고 줄을 서니
갑작스런 산악회 모시기에 회원들은 어리둥절이지만 하여간 띵호아!
인원이 많아 뒷좌석까지 자리가 다 찼는데 죽전에서 타신 장변호사님이 평소와
달리 뒷자리 사람들한테 인사를 안 오신다. ‘부마’가 되더니 목에 힘 들어갔다,
역시 권력이 무섭다, 는 쑥덕공론이 있었지만 장부마의 조용한 그림자 외조가
시작됐음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다 간파했다.
오랜만에 나온 김명용동문이 비도 오는데 산은 무슨 산이냐, 전어회장도 왔으니
오늘 모임은 전어회로 돌리자, 고 많이 듣던 레퍼토리를 되풀이하자 이런 촉촉한
날엔 군불 땐 뜨끈한 방에 들어앉아 술잔이나 기울이는 게 제격이라고 김택렬동문이
맞장구를 친다. 얼씨구, 마음에 드는 소리만 한다, 달마대사 전어회장님도 실눈이
되며 입꼬리가 귀쪽으로 올라간다.
이대장의 산행안내. 오늘 산행은 벌재에서 저수재까지 짧고 평탄한 코스로 선두
3시간, 후미 5시간 예상하는데 나도 안 가봤으니 별로 할말이 없다. 카페에 올린
산행안내를 잘 읽어보고 의문점은 김고문한테 묻기 바란다. 뭐 이런 황당한 산행
안내가 있나. 그래도 모두 박수.
문막휴게소에서 현총무가 커피를 사와 돌리더니 나중에 쓰레기 수거까지 한다.
말로는 총무가 쓰레기까지 치워야하다니 더러워 죽겠다면서도 표정은 즐거워
죽겠다는 우리 총무님.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창밖으로 환상적인 치악산의 설경이 펼쳐진다. 한참
설경에 취해 있는데 김고문이 요즘 ‘구라’를 못 풀어서 심심했는지 ‘유머’
한자리 풀어놓는다. 과부 재혼남 선택 기준 네 가지--돈만 많다, 돈도 많다,
힘만 세다, 힘도 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具(舊)총무가 “내가 바로
‘힘만 세다’다”라고 해 모두 폭소.
“문화산행 운운하더니 내가 잠시 안나온 사이에 산악회가 아주 저질이
됐구나.”(김명용)
10시 15분, 벌재. 비는 그치고 사방이 은백의 설원이다. 미리 아이젠 하고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밭을 향해 발을 뗀다. 어제밤 내린 신설이 발아래서
사각사각 부서진다. 가지마다 소복소복 핀 설화와 상고대. 끊임없이 이어지는
눈꽃 터널 속을 지나며 믿을 수 없는 행운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비만 그쳐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황홀한 설경을 선사해주시다니... 17산우들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음에 틀림없다. 오르막 내리막에 불평 한마디 없고
모두들 얼굴엔 눈꽃처럼 환한 미소를 품고 벙긋벙긋 입을 다물지 못한다.
12시 30분, 門福臺(1,074m). 오늘 산행코스중 가장 높은 곳이다. 크리스마스트리
보다 더 아름다운 눈꽃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는다. 여기서 저수재까지 1시간 30분.
910m 봉우리 하나 더 넘고 4시간만인 2시 20분, 사뿐히 저수재에 내려섰다.
2시 37분, 후미까지 전원 하산. “약간 미진하다”고? 아이고, 잘났다. 맨날 구시렁
구시렁 욕하더니 그래, 실로 얼마만에 들어보는 너그럽고 후덕한 산행후평이냐.
저수재는 충북 단양과 경북 예천이 갈리는 고갯길, 우리는 양반 고을 예천으로
간다. 유서깊은 전통 양반가옥인 예천 권씨 종가 草澗 宗宅을 보러간다. 윤재우
동문의 부인이 예천 권씨 종가 출신(?)이라니 동문의 처가를 방문하는 셈이다.
죽림리 야트막한 동산을 배경으로 선 번듯한 한옥에는 大踈齋라는 현판을
비롯해 집안 곳곳에 한문 글씨가 붙어있어 서예반 회원들이 특히 관심깊게 구경
한다.
다음은 재산세를 낸다는 소나무 石松靈. 보은의 정2품 소나무보다 더 잘생긴
반송 한그루가 은은한 석양빛에 수려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서있다. 주인이
죽으면서 근처의 토지를 물려줘 토지를 소유한 소나무가 됐다는 것. 등기부상의
소유주가 소나무이기 때문에 재산세를 낸다는 김고문의 설명에 소나무가 어떻게
권리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 왕년에 고등고시 합격했다는 사람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 민법도 안 배웠냐, 장변호사한테 물어보자, 떠드는데 장변호사님은
등기부를 봐야 알겠다고 발뺌. 이 정도로 오늘 문화행사는 끝내고 이제 목욕하고
밥먹으러 가자. 목욕문화와 음식문화가 진짜 문화다.
예천온천 매표소. 현총무 하는 짓 좀 보소. 단체 손님 데리고 오면 총무는 원래
공짜라며 매표소 아가씨한테 “내가 총무다, 이 돈보따리 봐라”, 한사람 목욕값
아끼려고 진짜로 돈보따리까지 내보인다. 짠돌이 현총무의 눈물겨운 시위 덕에
20명만, 그것도 경로 요금 3천원에 온천욕을 한다. 산행하면서 한 목욕 중 가장
싼 값에 하는 온천이다.
지난 산행때 기자가 한 묵타령 때문에 저녁은 청포묵 식당에서. 경북내륙의 한우가
좋다니 불고기 전골도 빠질소냐. 녹두부침과 노가리 무침에 청포묵 비빔밥, 약간
짠 것이 흠이긴 하나 경북출신 구총무가 특히 입에 맞다며 좋아한다. 주류석에선
박근준회장이 가져오신 발렌타인17로 폭탄주가 오가고, 비주류석에선 이종범회장의
와인으로 여학생들이 축배를 든다.
산행 후 예천에서 권씨 종가와 석송령 두 곳 다 보자고 회원들이 우기자 곧 해도
질 텐데 문화행사를 두개 다 해야겠느냐, 한개만 하고 빨리 올라가자는 이대장
말에 “출발을 뭘로 아냐, 오늘 9시 전에 출발 안한다. ‘출발’은 빨리 가자고
깝치는 사람이 아니라 회원들이 여유있게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람”
이라며 스스로 ‘문화출발’을 자처했던 김출발. 술이 거나해지자 “7시 10분 전
출발!”을 선언했는데 현총무가 6시 45분에 모두 일어나라고 독촉하자 “느그는
우째 5분을 못참노?” 탄식한다. 결국 오늘도 우리는 김출발이 정한 시간보다 더
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고보면 스스로 ‘머리좋고 게으른 사람’임을 자처하는
김출발의 고단수에 또 당한 거다.
문막휴게소에서 김명용동문이 산 아이스케키 물고 영동고속도로를 쌩쌩 달려 9시
30분에 귀경.
예상치 않았던 설경, 지성의 양식 문화행사, 입이 즐거운 식도락, 말 못해 죽은
귀신 없다 시종 일관 웃겨주는 친구들.... 어떻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What a wonderful life!!!
참가자(21명): 강일성, 구명회, 김명용, 김숭자(장원찬), 김승만, 김영길(유수자),
김윤기(김계숙), 김종남, 김택렬, 박근준, 박정수(노순옥), 배정운, 이정수,
이종범, 장문영, 최영철, 현해수 (노순옥 기)
PS: 12월 23일 산행은 동지 다음날로 해가 짧기 때문에 코스가 짧은 오전약수-
도래기재 구간(산행계획표 48번)으로 대체했습니다. 아침식사는 이번과 마찬가지로
각자 해결하고 교통시간 단축을 위해 죽전팀은 전철8호선 복정역까지 와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노기자 아우님, 수고했어요. 이렇게 생생한 글을 올리다니. 곽교수님, 정말 한 번 와 보시라니까요...
이제부터 모두 설화,상고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해주시기를!그리고 김승만회장님 덕분에 잘먹었읍니다.자주 사주시기를....
빠르고 멋진 산행기, 감사합니다. 소생 감기+ 버스 멀미, 출발점 벌채에 막상 도착하자 온통 눈 덮인 산이라 Stay냐 Go냐 망설이다 일행속에 끼였는데 결국 모두들 건강하시고 정열이 넘치는 회원님들 덕택으로 눈꽃 축제의 영광을 얻었읍니다. + 문화 산책!!! 감사합니다.
집안에 상사(喪事)가 생겨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삼우제에 가 있으면서도 17산행구간의 날씨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토록 즐거운 산행이 되었다니 안심이되기도 하고 약간 배도 아픕니다. 불참하여 거듭 죄송합니다.
내 고향을 방문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산행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흙을 한번도 밟지 않은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