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행에서 먼저 발견한 것은 내 머리 속에 온갖 쓰레기가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지나간 세월을 통해 내 안에 누적된 내용은 다름 아닌
약간의 지식(知識)과 알 수 없는 편견(偏見)들뿐이었다.
마치 뿌연 흙탕물처럼 머릿속에 온갖 잡념과 지식 덩어리 같은 것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 상태로는 무언가를 더 집어넣는다 해도 맑아지기는커녕 더 혼탁해질 것만 같았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내 안의 흙탕물이 가라앉고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덜어내기 연습(練習)’은 머리로 하는 지식탐구에서 벗어나
온몸으로 하는 체득(體得)의 과정이었다.
그동안 스스로 통찰(洞察)의 깊이가 깊어지지 못했던 것은 그 어떤 지식이나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작업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는 과정만으로도 내 안의 불필요한 아집(我執)과 걱정 등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제 입문과정을 마무리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일상생활 속 상속의 시간을 통해
향상일로(向上一路)의 길을 걸어가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과도 새롭게 대화하고 내 신앙의 뿌리도 다시 다듬어 보고자 한다.
오랜 기간 동안 내 눈을 덮고 있던 그 깊은 슬픔의 비늘이 조금씩 벗겨져 나가니 새로운 하늘이 보일 것도 같다.
- 본문에서 발췌
입문과정을 마치며:
덜어내기 연습(練習)
목동거점모임 희천希天(요한 보스코) 거사
(希天: 稀有한 因緣을 살려 天國에 이르기)
태어나자마자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지금까지 천주교(天主敎) 신자로 살아왔다.
때로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기도 했으나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교회 안에서 교회의 영양분을 받아먹으며 성장했다.
그 세월이 무려 사십 여년이 되자 뭔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어온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왔다.
그것은 내 신앙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큰 요소 하나를 꼽으라면 성경에 대한 부분이었다.
바로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보여주는 그 경전 말이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과 구원(救援)의 여정을 그려준 바로 그 책이 큰 기쁨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혼란(混亂)과 분열(分裂)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더구나 그 경전을 읽고 깨달음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과 교파들이 서로 싸우며 비난의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았기에,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가슴 속에 깊은 슬픔만 쌓여 갔다.
단순히 의견이 다름에서 오는 실망 정도가 아니라,
그냥 이렇게 다투며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슬픔’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고의 경전을 읽는다고 해도 알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마치 입문과정에서 투과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은 모두 이 경에서 나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이라는 화두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핵심이 되는 내용은 문자로 기록된 경에 다 쓰여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유사한 이유로 타 종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려고 여러 해에 걸쳐
불교경전 및 교학 공부도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경을 읽는다 해도 깨닫기 어려운
‘그것’을 찾아서 새로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선도회(禪道會)와 인연이 닿았다.
바로 선불교의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현대 사회의 이러저러한 맥락에 대해 고민하는 선수행 단체다.
더구나 절집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닌 나와 같은 재가자(在家者)들의 수행 공동체였기에 눈길이 갔다.
바로 이곳에서 선수행을 한다면 경전에 매몰되어 버린 현대인들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구원의 섭리(攝理)이자 법계(法界)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법경(法境) 법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시작된 선수행에서 먼저 발견한 것은
내 머리 속에 온갖 쓰레기가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지나간 세월을 통해 내 안에 누적된 내용은 다름 아닌
약간의 지식(知識)과 알 수 없는 편견(偏見)들뿐이었다.
마치 뿌연 흙탕물처럼 머릿속에 온갖 잡념과 지식 덩어리 같은 것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 상태로는 무언가를 더 집어넣는다 해도 맑아지기는커녕 더 혼탁해질 것만 같았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내 안의 흙탕물이 가라앉고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덜어내기 연습(練習)’은 머리로 하는 지식탐구에서 벗어나
온몸으로 하는 체득(體得)의 과정이었다.
그동안 스스로 통찰(洞察)의 깊이가 깊어지지 못했던 것은 그 어떤 지식이나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작업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는 과정만으로도 내 안의 불필요한 아집(我執)과 걱정 등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화두참구 과정에서 자주 지적받은 내용은 “머리로 풀어내려 하지마라!”였다.
쉽게 말해서 그동안 세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배워온 지식이나
잔머리 따위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머리를 끄덕여 보지만 이 또한 머리로만 알았다고 한 것일 뿐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실제로 화두참구의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상념(想念)이나 어떤 통찰 같은 것도
알고 보면 머리로 짜낸 생각인 경우가 많았다.
결국, 눈을 감고 화두를 들고 명상에 잠겨있는 것 같으나,
계속 머리로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매일 매일 다리를 틀고 앉아 내려놓기 연습과 화두 참구를 일 년 이상 한 후,
그동안 가슴 깊이 쌓여있던 그 ‘깊은 슬픔’이 상당 부분 사라져갔다.
온갖 논리적인 개념과 분석의 틀을 들이대면서 경전의 내용을 놓고 벌였던,
토론의 과정에서 누적된 앙금 같은 슬픔 말이다.
도저히 서로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고, 더 이상 합의된 진리의 장에 다가설 수 없을 때마다 느꼈던 슬픔 말이다.
바로 그 슬픔이 안개처럼 조금씩 사라져 간 것이다.
그렇다고 일상(日常) 속에서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든가 무슨 신비스러운 일이 생긴 것은 없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그런 것은 없고 또 그런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만 더 자명해질 뿐이었다.
굳이 언어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대감은 줄어들고 간절함은 더해가는 과정이었다.
여기에 더해 조바심은 장애물이고 남과의 비교는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수행을 하나의 성취대상으로 삼는 것은 더더구나 금물(禁物)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성경(聖經)이 조금씩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읽고 또 읽어도 들어오지 않았던 내용들이 드디어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성경을 읽는다기보다는 성경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성경을 놓고 벌였던 수많은 토론의 시간을 떠올리면서 나와 이웃의 삶과 연계된,
새로운 성경읽기가 필요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경전이 기록되기 이전의 우리네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발견이었다.
간화선 수행을 시작한 지 일 년 반 정도가 지난 후
법경 법사님께 보낸 글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오늘도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서 빨래를 널고 다 마른 빨랫감들을 개었다.
이 시간은 내가 일상의 틀 속에 갇혀 있다는 한계를 발견하는 시간이자,
내 삶의 하루하루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또한 나도 모르게 머리로 짜낸 헛된 망상(妄想)은 버리고, 선수행을 통해 통찰한 내용을
상식의 체로 걸러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냄새를 맡으며 무심히 빨랫감을 만지작거리는,
이 상속(相續)의 시간에서 알 수 없는 거룩함을 느낀다.”
이제 입문과정을 마무리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일상생활 속 상속의 시간을 통해
향상일로(向上一路)의 길을 걸어가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과도 새롭게 대화하고 내 신앙의 뿌리도 다시 다듬어 보고자 한다.
오랜 기간 동안 내 눈을 덮고 있던 그 깊은 슬픔의 비늘이 조금씩 벗겨져 나가니 새로운 하늘이 보일 것도 같다.
2018년 12월 26일 희천(希天) 합장
원문과 더 많은 내용을
선도회(선도성찰나눔실천회)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seondohoe.org/1131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