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님이 제안하셨던 것처럼 저희 가정교회이야기를 시간 나는 대로 올릴까 합니다. 대형교회들의 입장에서는 한 구역만큼도 안 되는 교우들이지만, 우리는 일당 백, 아니 일당 만은 된다고 자부하면서 행복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학교에서부터 목회현장까지 여러 교회에서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이야기를 다 하려고 했는데, 그래봤자 너무 식상한 이야기이고 대책 없는 이야기일 뿐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생략하고 어떤 이유로 가정교회를 결심하게 되었는지 신학적인 견해부터 밝히고 현재 우리교회의 모습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목사란, 구약시대의 제사장이나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이기 전에 예수처럼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본받고자 하는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고 역사 속의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 있는가? 나는 예수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동안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용감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공부하게 된 분야가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였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가면 그만이지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구주가 되셨다. 이를 믿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참 쉬운 것을 왜 이렇게 어렵게 고민해야 하고 공부하려고 애쓰는 것인지...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이 구원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생활 모습은 분명 변화가 찾아 올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십자가처형이란 당시 로마의 가장 극악한 형벌입니다. 십자가형은 아무에게나 집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망친 노예나 반로마투쟁을 벌인 사람, 정치적인 사범에 대한 처형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당했다면 당시 유대의 형벌인 돌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고 예수님처럼 사는 제자가 되고 싶다면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 현장을 생생히 보고 느끼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의 예수는 분명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기에 종교적인 견해를 덧붙여 구약이 예언한 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을 한마디로 하자면, ‘하나님나라 운동’이라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고 선포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수많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해주고 있으며, 치유와 나눔(오병이어) 등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까지 예루살렘성전을 통한 율법으로 억압하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율법이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굴레를 씌우고 죄인을 만드는 악으로 변질 되었다고 예수께서 한탄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인해 죄인의 굴레를 둘러 쓰게 된 가난한 민중들은 영원히 죄인의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늘 왕따 당하고 사람구실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을 예수님은 받아주시고 한 번도 나무람 없이 친구로 맞아주셨던 것입니다.
참고로, 요한의 세례운동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요단강에 나와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 죄를 씻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예루살렘성전의 대속행위를 대신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요한의 행적은 당시 역사기록자인 요세푸스도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세례운동을 가장 경계하고 그냥 둘 수 없었던 세력은 누구일까요? 예루살렘성전세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에 예수님이 동참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복음서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돈 바꾸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질 하셔서 내쫓으시고 기구(제사용)를 가지고 지나다니는 것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곳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은 어떤 모습을 설명합니까? 십일조를 현금으로 내는 사람들에게 이방 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성전에서 사용가능한 화폐로 환전하는 상인들입니다. 비둘기파는 자들은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할 짐승을 팔던 자들로 이들은 성전 근처에 엄청난 규모의 농장을 소유하고 여기에서 제물을 생산해내던 농장주들과 관계가 있는 장사꾼을 의미합니다. 또한 기구를 가지고 다니는 자는 사제들로 성전제사를 집전하던 자들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상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위협세력은 예루살렘성전세력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전을 신앙의 고향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새 예루살렘을 꿈꾸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만.
예수님이 목숨 걸고 당시 예루살렘성전세력과 일전을 치르셨는데, 지금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내팽개치고 예루살렘성전과 똑 같은 행태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유대교인지 기독교인지 자신의 정체성도 모른 채 어쩌면 예수님 당시와 똑같이 하나님을 예배당에 가둬놓고 안식일을 부활시켜 ‘주일성수’, 십일조를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십일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곳 게시판에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유창윤 교수님이 그리워집니다. 강의를 들었던 존경하는 교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셨던 예수님은 어디가고, 가난하고 소외된 밑바닥 인생들을 친구삼아 주던 예수님은 어디가고, 이미 폐기되었어야 할 율법의 끄나풀로 지금도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공갈치면서 사람들을 얽매고 있으니...
예수님이 지금 한국교회의 실정을 보신다면 어떠실까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예수님의 유업을 이뤄야 할 텐데, 오히려 기득권층에 빌붙어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더욱 억압하며 쥐어짜고 있으니,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자 교인들 피땀 어린 헌금을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늘에 쌓아야 복 받는다고 사기 공갈로 인정사정없이 갈취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범죄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교회개혁을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직접 현장에서 느낀바 에 의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결코 변화되지 않을 집단입니다. 정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뜻을 관철할 그런 징그러운 인간들을 도무지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내부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면 밖으로 나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교회운동이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되었기에 스스로 제도권을 박차고 나와 몇 안 되는 가정이지만 함께 시작했습니다. 말이야 쉽지 자기 밥줄을 쉽게 내던지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가정교회를 꿈꾼다는 것이 처음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전에 있었던 교회에서 저와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동참해 주셨습니다. 현재 네 가정이 모이고 있습니다. 교우들 다 해봐야 열 명 안팎입니다. 그래도 목사라서 말씀인도와 성서공부는 제가 맡고 있습니다. 초기부터 성서학당을 열어 성서공부를 시작해서 한동안 계속했습니다.
가정교회를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철저한 성서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가정교회를 희망하는 분들은 기존교회에 대한 실망과 염증 때문에 결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성서적으로 왜 무엇이 어떻게 그릇되어 현재처럼 변질되었는지 신학적으로 정확히 아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문제인줄은 아는데 성서에 근거해서 어떤 것이 잘 못되었는지 정확한 논거를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성서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특히 교회의 전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성막, 성전, 회당 등)공부했습니다. 이러한 성서공부를 매주 수요일마다 계속했는데, 요즘은 다들 생업이 바빠서 못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감사할 일은 일 년여 계속되는 모임에 참으로 많은 변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분이 확신을 갖고 신앙이 성숙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실 때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교우들이 행복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이런 것은 아예 언급조차 않습니다. 참고로 가정교회를 시작하면서 교우들에게 분명히 밝힌 것이 있습니다. 시작은 이렇게 했지만 나중에는 더 많은 교우들이 참여하고 여러분들이 성숙했다면 그 다음엔 각자의 가정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더 많이 모여서 더 큰 교회를 이루려고 애쓰기보다 민들레 홀씨처럼 각 가정마다 교회를 이루고 이웃과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참, 재정이 필요할 텐데 이를 어떻게 충당할지 궁금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목사가 밥벌이를 교회를 통해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그것 빼고 나면 무슨 재정이 크게 필요하겠습니까? 처음에는 여러 목적(선교, 구제 등)으로 헌금을 하기로 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소홀합니다. 저 또한 교우들과 똑같이 주중에 일해서 살림하고 있습니다. 큰 벌이는 아니지만 이것저것 다양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맞벌이를 하면 아무리 적다해도 둘이 버는 것이라 낫더군요. 몇 몇 분의 후원도 빼놓을 수 없는 큰 힘이기도 합니다. 물론, 노회나 총회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쪽의 물질적 도움은 원하지도 않습니다.
교회개혁, 목사가 움직이면 더 쉽겠지요. 아직 순수한 신앙인들이 많기에 좋은 목사를 만난다면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대다수의 목사들은 하나같이 교회 대형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목사님 빼놓고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결단해야만 합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여러분이 현재 문제 있는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원래 나가던 교회 출석 안하면 죄가 된다고 하셨던가요? 부모형제나 인간관계 때문에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요? 그곳을 안 나가게 되면 밥줄을 놓는 일입니까?
결정적으로 교우들이 움직이면 교회개혁 이룰 수 있습니다. 뭐가 두렵습니까? 폼 나는 교회출석하면 인생 성공합니까? 구원이 교회(예배당 출석)에 있던가요?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예수님이 직접 일러주셨던 부분을 설교했던 자료를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