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아론(脫亞論)이란?
1854년 서구열강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문을 연 일본은 아시아가 서구 열강에 식민지로 전락하는 이유를 아시아적 가치가 불합리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로 일본은 아시아적 가치를 버리고 전국민의 서구가치의 우선화에 힘쓰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제국주의처럼 식민지 경영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민지 경영을 정당화 하는 이론적인 받침이 되었던 것이 ‘탈아론(脫亞論)’이라고 할 수 있다.
탈아론을 주창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현재 일본의 1만엔권 지폐의 초상화로 나와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120년 전인 1885년 제국주의적 대외 팽창주의의 토대가 된 ‘탈아론’을 들고 나왔다. “일본은 아시아의 동쪽에 있지만 국민정신은 아시아의 고루함을 벗었다. 그런데 중국과 조선이 이웃에 있어 불행하다. 중국과 조선은 우리 일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서양 문명국 눈에는, 세 나라의 영토가 서로 접해 있어 같은 시각으로 일본을 평가한다. 그 영향으로 일본의 외교에 장애가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번영시킬 여유는 없다. 오히려 그 대오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여, 중국과 조선을 접해야 한다. 이웃 나라라고 해서 사정을 봐줄 수 없다.”
그는 19세기 말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시대에 일본을 이끌었던 계몽사상가이자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선각자였다. 학문의 길은 1854년 ‘난학(蘭學)’ 공부와 함께 시작된다. 난학은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알고자 했던 당시 학문의 총칭이다. 1858년, 5년간의 공부로 어느덧 난학의 대가가 된 그에게 10여명의 무사가 찾아온다. 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 즉 게이오대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난학이 더 이상 서양학문의 대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영학(英學)’에 매진했다.
영일·일영 사전 한 권 없을 때였다.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을 위해 일본 대표가 워싱턴에 갈 때,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호위함 제독에게 시종 신분으로 동행을 간청,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 1860년 1월, 38일 만에 도착한 샌프란시스코는 충격이었다. 이때 구입한 영어 사전은 일본 땅에 들어온 최초의 웹스터 사전이었다. 영어를 번역하려면 이에 맞는 일본어를 만들어야 한다. 자유, 권리, 연설, 토론 등이 그가 영어를 일어로 옮기면서 만든 단어들이다. 1861년 프랑스 영국 등 유럽 6개국을 돌아보는 1년여의 대장정과, 1867년 두 번째 미국행까지 경험하면서 비로소 서양의 실체가 보이는 듯했다.
존왕양이(尊王攘夷)가 판을 치던 시절, 서양학문을 연구하고 있었으니 주위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1862년부터 10여년간 밤 외출을 삼갈 정도로 암살공포에 시달렸고 실제 암살 시도도 있었다. 구미견문록 ‘서양사정(西洋事情)’(1866)의 출판은 진정한 후쿠자와의 등장이었다. 20여만부가 팔려나간 이 책으로 그는 일약 ‘전 일본인의 교사’가 됐고, 뒤이은 ‘학문의 권유’(1872), ‘문명론 개략’(1875)으로 ‘문명개화의 전도사’로 우뚝 섰다. 1882년에는 민간계도를 목적으로 한 ‘지지신보(時事新報)’까지 발간, 언론까지 영역을 넓혔으나 점차 민권론자에서 국익을 좇는 국권론자로 변신하면서 훗날 지지신보는 제국주의 논리를 가다듬고 이를 집권층에 주입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후쿠자와가 지지신보에 실은 2000여편의 사설은, 안으로는 격동기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이었고 밖으로는 자국의 국권팽창을 주장하는 나팔수였다. 1885년 3월 16일, 지지신보에 실린 ‘탈아론(脫亞論)’이야말로 중국·조선에 대한 후쿠자와의 생각이 거리낌 없이 드러난 사설이었다.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악우(惡友)들과 친할 경우, 오명을 벗을 수 없다. 아시아 동방의 악우들을 사절해야 한다.’ 물론 악우는 중국과 조선을 말한다. 이처럼 ‘탈아론’이 일제 대외침략의 이론적 발판이 된 것은 분명하나 당시 중국과 조선이 여전히 미몽(迷夢) 상태였다는 사실까지 간과해서는 안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조선의 지식인들
후쿠자와가 그의 문명개화론을 조선에 이식시키는 과정에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 다수 개화 지식인이 그와 밀착했다. 갑신정변에도 후쿠자와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 있다. 배후에서 정변을 기획하고 지휘한 것도 사실상 후쿠자와였고, 정변 실패 후 김옥균의 탈출을 도운 것도, 망명객을 반겨 맞은 이도 후쿠자와였다. 일본에서 김옥균의 아이를 낳은 일본 여성도 그의 하녀였을 만큼 김옥균에게 후쿠자와는 정신적 스승이었다. 유길준은 실제로 제자였다.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1881년 5월 일본을 방문했을 때 후쿠자와는 유길준이 게이오기주쿠에서 1년 반 동안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유길준은 게이오기주쿠가 받아들인 첫 외국인이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머릿말에서 “남들이 이야기한 찌꺼기만을 주워모았다”고 실토할 만큼 ‘서양사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출판사도 후쿠자와가 설립한 ‘교순사(交詢社)’였다.
박영효와의 첫 만남은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이뤄졌다. 박영효가 후쿠자와의 식견에 감탄하고, 후쿠자와가 조선에도 시사신문 같은 신문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1883년 10월 조선 최초의 신문이 탄생한다. ‘한성순보’다. 후쿠자와는 제자인 이노우에 등을 인쇄기까지 지참시켜 조선에 파견, 한성순보 발간을 사실상 관장했다. 그렇다보니 청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이 강조되고 일본의 영향력 증대를 시도하는 사설이 많았다. 춘원 이광수는 그를 가리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해 내린 위인”이라며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를 꿈꿨다.
과거 역사 속에서 탈아론의 사용은 어떻게 되었나?
후쿠자와는 일찍이 "문명론의 개략"(1875년)에서 단호하게 천명하였다. “문명은 곧 독립이다.” 일본이 서구를 모델로 삼아 문명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의도는 일본의 독립에 있었다. “오늘날 일본인을 문명의 길로 나서게 하는 것은 오직 일본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나라의 독립은 목적이며, 국민의 문명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주창했다. 하지만 일본의 시대적인 상황이 그의 사상을 탈아론으로 변화를 시키게 된다. 이렇게 변모된 후쿠자와의 사상인 “탈아론(脫亞論)”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결정할 정도로 일본 안에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1945년 일본 패전 후에는 일본 지배층의 사상적 재무장 지침서로 변신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받은 탈아론의 영향은?
한국과 중국 모두는 일본의 탈아론에 따른 제국주의 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학자들은 탈아론에 따른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대해서 긍정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주장과 부정적인 측면의 주장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의 주장은 거의 대부분이 일본의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이 정당하였음을 설명하고, 도리어 중국과 한국이 일본에 의해서 많은 발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부분에서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 침략이 아닌 다른 방법을 추구하였다면 이는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선택하였고, 이는 일본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국가 모두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조선의 강제 침략과 수탈, 전쟁에 따른 강제 징용, 타국의 국모 시해, 위안부 문제, 남경의 대학살 사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상처가 남게 된다.
현대 속에서 보이는 탈아론은?
<혐한류> 요즘 상당히 이슈가 되어 있는 문제이다. 이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계심리와 서양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등감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같은 기류의 바탕에는 메이지 유신 시절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이 작용한다. 탈아입구론은 서양 제국주의를 이기는 길은 서양이 일본을 조선, 중국과 똑같이 보지 않도록 이들로부터 떨어져 서양을 닮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화 <혐한류>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한결 같이 서양인의 외모를 닮았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 만화 등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이 높은 코와 큰 키 등 러시아인들보다 더 유럽적인 특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기 시작했으며, 이 역시 탈아입구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