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많이 가진 자도, 잘난 사람도, 권력자도 장삼이사인 우리들과 다를 바가 없다. 생자필멸이란 그 말이 내겐 한참 뒤에나 현실로 다가올 줄 알았었다. 그 죽음의 문턱에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나고 보니 산다는 게 새삼스럽다.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밀려오던 그날, 3월11일에 나에게도 쓰나미가 밀려왔다. 참아내기엔 너무 심했던 통증의 쓰나미가.
외출했다가 귀가하여 TV를 켜보니 일본이 그 지경이었다. 흠……저럴 수가........ 남의 일 같지 않게 공포와 전율이 느껴졌다. 이른 저녁식사를 하는데 H스크린골프의 공군사관학교 출신 이사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요즘 왜 그리 안보이십니까?" "어...그러네....좀 있다가 갈게."
근래에 클럽을 잡아본 지가 열흘이 넘었다. 어쩌다보니 약속이 어긋났고 구미에도 다녀오고 차일피일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장갑만 주머니에 하나 넣고 H스크린으로 갔다. 금요일 오후인지라 별로 손님이 없고 이사장이 단골인 강사장, 손사장과 한게임 중이었다.
휴게실에서 마침 배달되어온 저녁식사로 중국음식을 시켜먹던 셋은 내게 요즘 바쁘신 모양이라는 둥 인사가 오갔다. 내가 TV를 켜니 일본의 그 난리가 방영 중이다. 식사를 하던 셋은 그제야 그걸 보고는 젓가락질을 멈추며 놀란다.
"저게 뭐꼬?" "어....쓰나민가 그거 아인교?" 춘장이 묻은 입들을 다물지 못한다. "허어....셋이서 내기골프 삼매에 아직 이 난리를 못 본 모양이네."
빈 방에 가서 웻지 샷을 몇 개 날려보고 드라이버도 두어 개 쳤다. 마침 김사장이 들어선다. "어? 오랜만이네, 한 게임 해야지?" 이 사람은 나보다 두 살 적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김사장은 내가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것으로 알고는 말을 막 깐다.
나는 경어를 쓰고....묘하게도 다른 사람들도 그걸 보곤 아무 말이 없으니 웃기는 상황이었다. 에라이 지랄 같은 세상살이, 장유유서가 좀 뒤집어진다고 무슨 큰일나나..... 나이 적은 이가 날 지보다 젊게 봐주니 한편으론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스크린골프 실력은 나보다 한 수 아래이다.
김사장은 별명이 국제상사 사장이다. 옛날 고무신 공장 월급날 줄 서서 돈 타듯이 누구나 돈을 따먹기에 붙은 별명이다. '줄을 서시오....' 한 홀이 끝나면 스트록 내기 돈을 나눠주느라고 김사장이 하는 말이다.
그렇게 돈을 잃고 나면 한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또 짠하고 나타는 것이다. 어떨 땐 신들린 듯이 공을 잘 치기도 하는데 그게 자기 실력인 줄 아는 모양이다.
나는 거의 내기를 하지 않는다. 돈 따는 게 싫진 않지만 돈 잃기가 더 싫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쳐도 재미있는데, 맨송맨송하게 그게 뭐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김사장과 내길 해도 따면 나는 돈을 돌려줘버린다.
그렇게 부담없이 스크린골프를 치다보니 어느새 평균타수가 81타. 이른바 스크린 싱글핸디캐퍼가 되었다. 프로모드로 백티에서 친 결과이고 스크린라운드 횟수도 어느덧 120회가 넘었다. 아이콘이 갈매기인 프로 등급이고 34만 명 중에서 상위 10% 안에 든다. 그렇지만 필드에 나가면 10타 이상 더한 보기플레이가 쉽지가 않다.
김사장은 나보다 한두 등급 밑이고 골프존 등위도 9만등 정도이다. 핸디를 좀 주고 쳐야 되지만 한사코 안 받는단다. 나이처럼 골프실력도 지가 나보다 낫다고 스스로 믿는 모양이다. 배판 없이 한 타에 천 원짜리로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가야CC. H스크린 골프방 매장 시합이 진행되고 있는 코스이다. 1번홀 392m 파4홀. 그린까지 높이가 25m 있어서 장타자가 아니면 애초에 2온은 난망한 홀이다.
김사장의 티샷이 OB가 났다. 흠, 첫 홀부터 웬일이람......난 OB만 안 내면 되겠네. 그런데 가슴이 왜 이렇게 답답한 느낌이 들지? 오르막이고 긴 홀이라서 이럴까......? 한번 연습 스윙 후 티샷을 했는데 에게게 티샷이 150m 밖에 안 나갔다.
김사장이 속이 타는지 피우던 담배를 탁자에 걸쳐두고 3번째 타수를 치는데 담배냄새가 역하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김사장의 두 번째 티샷은 140m.
네 번째 타수인 3번 우드샷은 그린사이드 벙커에 빠진다. 내가 세컨 샷 셋업을 하는데 가슴이 꽤 답답해졌다. 3번 우드샷이 타핑이 나면서 100m 남짓 밖에 안 나갔다. 4번 아이언샷이 그린 앞쪽 엣지에 떨어지고 가슴에 상당한 통증이 왔다.
왜 이러지....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내 가슴이 왜 이러지. 김사장은 다섯번째 샷도 그린을 오버하여 6온이다. 나는 15m 칩샷....넣으면 파 붙이면 보기이다.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져온다......퍼팅이 짧아 3.5m 앞에 멈췄다. 평소라면 무난히 넣을 거리를 또 미스했다.........더블보기. 김사장은 트리플보기이다.
그런데 더 이상 공을 칠 수 없을 만큼 통증이 밀려왔다. 아.....이게 혹시.....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그 심근경색이 아닐까. "119 좀 불러 도라....." 가슴을 싸안으며 말하니 김사장이 놀라서 주인인 이사장을 부른다.
통증은 강약을 거듭하며 왼쪽 등, 팔까지 아파온다. "괜찮습니까?......119 불렀으니 좀 참으시고.......물이라도 좀 드릴까요." 김사장과 이사장이 내 등을 두드리는 등 어쩔 줄 몰라 한다. "내가.....왜 이러지.....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119 구급차는 왜 이렇게 안 오지....금요일 저녁이라서 차가 막힐까. 복도로 나와 창을 열고 바깥 공기를 들이켰다. 그래도 통증은 여전하다. 물을 좀 마셔도 아무런 차도가 없다.
잠시 후 119대원 셋이 올라왔다. 남자 대원 2명, 여자 대원 1명이다. 환자가 걸을 수 있다는 전갈을 듣고는 들것도 없이 맨손으로 올라왔다.
"어느 병원으로 가실랍니까? 서동 세양병원이 제일 가깝고 남산동 침례병원이 그 다음입니다." 겉보기엔 환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지 갸우뚱하며 묻는다. "침례병원으로 가주이소."
지인들 병문안이나 장례식장에 가본 적이 있는 침례병원을 선택했다. 구급차 안의 침상에 누우니 통증이 더 심했다. 의자에 기대앉으니 한결 견딜만했다. 여자대원이 혈압을 잰다. 160에 120이란다. 평소보다 수축압 이완압 모두 40이 높다.
침례병원이 왜 이렇게 멀지..... 이 구급차는 싸이렌이 고장인가. 다른 구급차는 신호도 무시하고 막 추월해 달리던데 이 차는 왜 이렇게 굼벵이일까. 10여분 만에 도착한 침례병원 응급실에 내 발로 걸어서 들어갔다.
의료진들이 다시 혈압을 재고 뭔가 찍고 하며 상태를 체크하더니 심근경색이니 보호자에게 연락을 하라고 한다. 아내는 구미에 있다고 하자 부산엔 아무도 없냐고 묻는다. 연산동에 누님과 자형이 있다고 하니 직접 연락을 하라고 한다. 자형에게 상황을 알리고 아내와도 통화를 했다. "여보, 내가 갑자기 심근경색이 와서 지금 부산 침례병원 응급실에 있는데....."
************************************************************************ 젊은 여의사가 내 병과 시술에 대하여 설명을 해준다. 관상동맥의 혈관이 하나 막힌 위중한 상태로서 당장 처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시술은 동맥을 통해 막힌 혈관을 뚫어 주는 것으로 잘못될 수도 있다. 본인이 시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면 당장 시작할 것이다.....등등.
심장 수술을 받아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들이미는 노트북 컴퓨터에 두 번 사인을 내손으로 직접 했다. 수술실로 향하는 이동 침대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쩌다가 내가 이 모양이 되었을까.......................
시술을 시작하기 전에 의료진들이 미션 계통의 병원답게 기도로 시작한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 시술이 무사히 마치기를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다른 의료진들과 함께 나도 조그맣게 아멘 이라고 중얼거렸다. 불현듯 내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맺히며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마취도 없이 손목의 동맥을 통해 카데터를 삽입하여 시술을 하는 중에 의료진들의 자기들끼리의 대화가 다 들린다. "조금 더 넣고......R2도 준비해." "OOO씨, 교회 다닙니까?" "저는.......성당 다닙니다." "담배 많이 피시나요?" "아뇨......15년 전에 끊었습니다," ".............................................." "음, 이젠 뚫는다....,,조금 더.......그렇지, 됐어."
채 30분이 안 되어 시술이 끝나고 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레지던트가 시술전의 심장과 시술 후의 심장 영상을 보여준다. 관상동맥 중에 제일 굵은 혈관이 뚝 끊겨 있다가 시술 후엔 아래로 나무뿌리처럼 연결된 것이 확연하다. 그렇게 나는 살아났다.
중환자실에 사흘을 더 입원했던 건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서였다. 90-50에서 맴돌던 혈압이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130-80으로 올랐다. 한두 시간 후에 일반 병실로 옮기고 일주일 째 되던 날 퇴원을 했다.
진단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상세원인 불명의 급성 심근경색증. 고혈압이 아니고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으며 168cm 키에 60kg 체중, 당뇨병도 없고 등산도 자주하는 편이며 육고기를 많이 먹는 편도 아닌지라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적은 모양이었다.
작년 가을 건강 검진 때 콜레스테롤 숫치가 좀 높고 고지혈증 위험이 있다고 한 것이 원인이라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혈전으로 혈관이 막히면 심장이 제 기능을 못하고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는 큰 병이 심근경색이라고 한다.
또 하나 원인은 내겐 근친들의 가족병력이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72살에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별세. 아버지가 66살에 심근경색으로 별세. 사촌 누나가 46살에 저녁식사 후 속이 안 좋다며 침대에 누웠다가 사망. 사촌 형이 60살에 백부께 외국 다녀온다고 절 하다가 갑자기 사망.
퇴원한 지 일주일 만에 외래로 검진을 간 날 담당의사에게 물었다. "저.......스크린골픈 해도 되나요?" 모니터 바탕화면에 자신의 티샷 이미지를 띄워둔 의사는 씩 웃으며 말했다. "힘든 건 당분간 안 하시는 게 좋은데요……" "스크린 골프는 그냥 스윙만 하는 건데.......추운데서 걷는 것도 없고요."
보아하니 필드만 나가는 분 같아서 조르듯 재차 물었다. "그렇담 괜찮겠지만 자주 하진 마시고,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는 절대로 같이 치진 마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참 나도 어지간히 골프 마니아인 모양이다. 아내에겐 이젠 절대로 골프 같은 건 안 한다고 해 놓고선 얼씨구나 하고 한 달도 채 가기 전에 또 스크린 골프를 치러 갔다. 경주신라CC에서 내 스크린골프 핸디 만큼인 81타를 쳤다.
그렇지만 육식과 결별을 하듯 머잖아 스크린골프와도 헤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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