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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답사(釜山 機張郡 踏査 )
(광주민학회.2023. 6. 28)
학송(學松) 송태종(宋泰鍾)
먼 길이라 7시에 출발한다고 한다. 일찍 서둘렀으나 시내버스가 늦어 택시를 탔다. 차중에서 오늘 일정을 확인하여 보고. 자료를 보니 기장군은 부산시의 동북쪽에 있고 1995년 경남 양산군의 동부출장소가 분리되어 부산시에 편입되었다고 하며, 울산에 접하고 있는 시 속의 군으로 되었다고 한다. 8시 39분에 섬진강 휴게소에서 15분 휴식하고 또 달려서 9시 55분 김해 진영복합휴게소에 도착하였다. 모두 잠을 설쳤는지 잠을 자는지 차내는 조용하고, 나는 차창 밖 경치에 취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진영 휴게소는 넓이가 전라도 휴게소의 10배는 된 듯하였다. 물동량이 많은 탓이리라.
시가지를 통과하는 듯하여 부산에 들어왔는가 하고 물어보니 사천시라고 한다. 이 곳에서 부터 회장님의 오늘 일정 안내 있었다.
어느덧 시가에 들어 온 듯하더니 교통 안내판에 일광(日光)이라는 표시가 있어 무심코 얼마전 윤석열 대통령께서 일광횟집에서 식사한 것으로 친일이라고 했던 생각이 났다. 일광해수욕장에 가는 길에 삼성대를 만났다. 차에서 내려 길이 50m 높이 4m 정도 되는 언덕으로 가니 1,5m 정도 되는 돌에 삼성대(三聖臺)라 큰 글자로 새겨있다. 삼성대의 유래는 모른다고 한다. 고려시대 부터 이어온 명칭으로 삼성는 환웅 환인 단군이냐, 목은 도은 야은 이냐 등 세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일광해수욕장 쪽에 평지를 만들면서 다 깍아 내고 겨우 형체만 남았다.
名勝名區守志重(명승명구수지중)
悽慘物慾世波容(처참물욕세파허) .
명승 명구를 지킬 뜻이 중요하지
처참한 물욕과 세파가 허용 됬네
이 삼성대는 귀양온 윤선도(尹善道)을 찾아온 동생들과 이곳에서 이별한 곳으로 시 두수를 지었는데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려 있다고 하며 그를 기념하고자 시비(詩碑)를 자연석으로 크게 세워 놓았다.
贈別少弟二首 公庶弟善良
(自註:金鶴仲秋念五日 送至三聖臺而作 )
若命新阡隔幾山(약명신천격기산) 운명을 따르면 얼마나 산이 막히며
隨波其奈赧生眼(수파기내난생안) 세파를 따르자니 얼굴이 붉어지네
臨分情有千行淚(임분정유천행루) 이별을 당하여 오직 천길의 눈물만이
灑爾衣裾點點班(쇄이읭거점점반) 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아롱진다
我馬騑騑汝馬遲(아마비비여마지) 내 말은 달리고 너 말은 느린건만
此行那忍勿近隨(차행나인물근수) 이 길 어찌 차마 따라 오지 말라 하랴
無情最是秋天日(무정최시추천일) 제일 무정 한 것은 가을 해이니
不爲離人駐所時(불위리인주소시) 혜어지는 사람 위해 잠시 멈추지 않는구나
자기의 처지와 형제간의 이별이 얼마나 애절한 마음으로 표현 되었는가. 차운을 붙여본다.
光陰倏忽我心遲 (광음숙홀아심지)
忍耐修身結果隨 (인내수신결과수)
異域他鄕滄海上 (이역타향창해상)
白鷗同伴待還時 (백구동반대환시)
세월은 빠른데 내 마음이 늦은 것을
참으며 수신하면 결과는 따라오네.
이역 타향의 푸른 바다위에서
갈매기와 벗하며 돌아갈 때 기다리소.
바로 뒤편이 일광해수욕장(日光海水浴場)이다. 송도해수욕장 같이 시가와 접하고 널따란 사장에 길이도 아득하며 동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댄다. 아직 개장을 하지 않아서 물놀이 하는 사람은 없다. 북쪽 끝에 난계 오영수 문학비와 최벽호 벽화거리가 있다고 하나 멀리서 발라보고 말았다. 입구에 시맨트 바위 위에 꼬마가 있는 조각품이 아름다웠다.
벌써 11시가 넘었다. 다음은 고산의 적소였던 죽정리로 향했다. 차로 나오면서 차창으로 일광횟집을 얼핏보았다. 11시 20분에 도착한 죽성리는 해녀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마을이라고 한다. 바닷가 돌출부에 황학대(黃鶴臺)가 있고, 안내판에
--고산 윤선도는 기장에서 7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중략) 1916년 당시 국사로 전횡을 하던 정치세력 들의 죄상을 밝히는 병진소(丙辰疏) 올린 것이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어 1년을 보낸후 기장으로 유배되었댜. (중략)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를 활학대라 이름짓고 이 곳을 매일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백사장은 모두 매립으로 사라지고 방파제 가에 이 황학대만 솟아있다. 황학대는 누런 바위언덕으로 주변에 나리꽃이 한창 피려고 하고 있고 정상에 창송이 울창하다. 황학대에 오르는 나무계단 입구의 안내판에
--황학대는 바다에서 보면 누런학이 날개를펴고 있는 모습이며, 18세기 고지도와 차성가에 기록되어 있다.--(후략)
30여 나무게단을 올라가니 정상에 커다란 자연석 비 앞에 고산의 황금상(黃金像)이 앉아있고, 주변의 노송과 어울려 운치가 있으며, 사방을 둘러보니 바다와 산과 마을이 조망된다.
시비에 새긴 시는 영계(鳴鷄)라는 시다.
物性雖偏塞(물성수편색) 물성이 치우치고 막혔으나
稟賦有明處(품부유명처) 부여 받은 것은 쓸모가 있네.
吾人固晨靈(오인고신령) 사람은 새벽에 신령이 있다하나
時夜誰及汝(시야수급여) 밤의 때를 누가 너를 미치랴.
氣至自咿喔(기지자이악) 새벽 기운에 스스로 꼬끼오 울고
若灰管應呂(약회관응려) 내 몸의 재기 율려로 읊조린다.
鳴應扶桑鷄(명은부상게) 부사의 닭을 따라 운다고 하나
實性無稽語(실성무계어) 실로 황당 무계한 말이네.
矧肯聽人假(신긍청인가) 더구나 사람 가짜 닭소리 듣고
雷同失常敍(뇌동실상서) 뇌동하여 상도를 잃을 수 있나
乃知孟嘗客(내지맹상객) 이제 알겠네, 맹상군 식객이
適與汝同學(적여여동학) 때 마침 너와 지조 같이 했음을
客能欺田文(객능기전문) 식객이 전문을 잘 속인 것이여
非文欺秦去(비문기진문) 전문이 진을 속이고 떠남 아니네.
느낌이 있어 읊어 본다.
黃鶴臺登松樹籬(황학대등송수리)
孤山坐像對詩碑(고산좌상대시비)
九年歲月靑春送(구젼세월청춘송)
東海滄波每樣悲(동해창파매양비)
황학대 올라서니 소나무 울타리고
고산의 황금좌상과 시비를 대하네.
구년의 세월로 청춘을 보냈나니
동해의 푸른 파도 항상 슬퍼했으리.
멀리 바닷가 저편 바위 위에 죽성드림성당이 보인다. 드라마 셋트로 만든 성당이라고 한다. 회장님이 차에서 신부(神父)가 없는 유일한 성당이라고 했다. 땀을 흘리며 걸어가 보니 아담한 간이 성당에 주변 경치가 좋아 관관객을 위해 도로와 포트존 등 시설을 갖추어 뒀다.
되 돌아 오면서 바다를 보니 조그만 바위 두 곳에 갈매기가 모여 앉아 목화송이가 활짝 핀 것 같다.
멀리 산 중턱에 보이는 유명한 죽성리 해송(海松)을 보러간다. 마을 길을 물어서 돌고 돌아 언덕을 따라 도로를 타고 오른다, 풀 언덕을 지나서 소나무에 도착하였다. 멀써 회장님과 최교수는 와 있었다.
약 300년 된 소나무 다섯 그루가 모여 멀리서 보면 거대한 한 나무로 보이나. 도착하여 보니 아름드리 가지가 땅에 늘어진 특이한 명물임에는 틀림 없다. 나무는 늙어 거대하여 지면 신이 붙는다고 한다. 이 나무도 신앙의 대상이 되어 나무 사이에 당집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보호되고 있는 듯하다. 건너 보이는 곳이 왜성이라고 하나 사유지가 되어 관광을 할 수 없다고 한다.
萬古風霜經驗身(만고풍상경험신)
自然信仰有靈神(자연신앙유령신)
人間老齡尊敬事(인간노령존경사)
智慧無窮恨不伸(지혜무궁한불신)
만고 풍상을 경험한 몸은 .
자연 신앙의 신령함이 있네.
인간 늙은이 존경할 일이니
지혜 무궁한데 못 펴 한이네
12시 10분이 되었다. 점심을 먹으러 대변항 방파제회식당을 찾아가니 12시 50분이다. 식당 들어가기 전에 부두에서 멸치 터는 것을 목격했다. TV에서 보았으나 현장은 처음이다. 더운 날씨에 더운 옷을 입고 7명이 점심 시간이 넘었는 대도 털고 있다. 중 노동이다.
網打漁夫膏汗流(망타어부고한류)
無心觀客樂看遊(무심관객락간유) .
炎天勞動增生計(염천노동증생계)
但只歸船未足愁(단지귀선미족수)
그물 터는 어부 기름땀 흐르니
무심한 구경 꾼 놀이로 즐기네
더운 날 노동으로 생계 도우니
단지 만선을 못할까 근심하네.
식당에서 멸치찌개와 회를 먹었다. 멸치회 소 20,000원, 찌개 소 20,000원이다. 담박하고 맛이 있다.
기장의 유일한 섬 죽도가 있다 해서 찾아 나섰다. 대변항 해안가가로에 승용차가 가득하여 걸어서 가기도 힘들다. 거대하게 설치된 연죽교를 지나 죽도를 건너 바라보고 가니 죽도 입구는 막혀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 해안가만 돌다 버스를 겨우 찾아 승차했다.
이곳의 지명이 대변이어서 대변초등학교가 있었는데 학생들 놀림이 되어 용암초들학교라 개명했다고 회장님 말씀이 있었다. 학교 정문 옆에 척화비(斥和碑)가 있으나 차창으로 보고 지났다.
다음은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로 향한다. 용궁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2시 40분이다. 이 곳은 승용차가 완전 주차되어있어. 버스는 제 2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서 용궁사로 향했다. 상가지역의 인파를 혜치고 가니 보기 싫은 중국산 사자상(獅子像)이 처음 맞는다. 2m가 넘는 키의 12지신상(地神像)이 역사상(力士像)과 즐비하게 서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용궁사를 뒷 길을 지나 곁에 있는 시랑대(侍郞臺)를 먼저 최교수가 안내를 한다.
「조선 영조 9년(1733년)에 나이 59세에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강등되어 내려온 권적(權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암행어사인 박문수의 호남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 벌로 이곳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한양에서 떵떵거리는 고관대작 생활을 하다가 동해 남단의 보잘것없는 마을의 사또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울분과 서러움에 휩싸였겠습니까? 그는 이런 울분을 달래려고 그랬는지 빼어난 경치에 반했는지 이곳을 자주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때 이조참의(吏曹參議)였다고 바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적으면서 벼슬 이름인 시랑(侍郞)을 따서 '시랑대(侍郞臺)'라고 새겼습니다.
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
이 사람은 이조참의로 지내다가 여기에 왔노라.
시랑대란 석 자를 푸른 바위에 새겨
천추의 긴 세월 동안 남아 있게 하리라.
그 이후로 이곳을 시랑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러 시인(詩人)들의 시(詩)가 음각 되었다 하여 기대하고 따라 갔더니 군사시설에 막혀 출입금지로 아쉽게 돌아섰다.
용궁사로 들어간다. 밀린 인파로 후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오는 상태라 경사진 후문으로 들어가니 처음 맞은 곳이 광명전(光明殿)인데 커다란 와불이 있고 주변에 나한들이 서립하여 있다. 나는 광명전은 다른 절에서 보지 못 했고 무식하게도 와불의 의미도 몰라 둘러보며 주럼으로 혜아려 보려 하였다.
極樂堂前滿?? (극락당전만? ?) 극락당전에 ? ? 가득하니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부처 털 금색이 하늘에 비친다.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사람이 한 마음 이름 낼려면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경각에 둥근 것이 끝없는 공이다.
해동용궁사는 망망한 동해를 바라본 절로서 대웅전(大雄殿)이 중앙에 자리하고, 앞 바위 돌출부에 석탑이 있다. 오른편에 용궁단(龍宮壇) 그 오른편에 원통문(圓通門)을 통해 올라가면 높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바다를 응시하고 내려다 본다. 나는 올라가 관음보살릉 뵙지 못했다. 용궁사에는 복탁화상(福橐和尙)이 2명 계시는데 대웅전 옆 화상은 금색으로 거대하고, 입구 벽에있는 화상은 1,5m 정도로 귀여여워서 사람들이 불록나온 배를 만저서 검게 변했다.
별도 바닷가에 계시는 금색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보려면 약사불전(藥師佛殿)을 지나가야한다. 이 약사불은 두 향나무 사이에 모셔있어 쌍향사불(雙香師佛)이라 게액되였고 왼손에 약을 들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약사전에서 나와 언덕에서 용궁사를 바라보니 해변의 바위 언덕에 여러 층의 단을 만들어 전각들을 세웠고 높다랐게 서있는 관음보살 입상이 돋보이며, 바다에 떠있는 듯 보이는 석탑은 잘 어울리나. 오른편 언덕에 여러개 조탑은 눈에 거슬린다. 지장보살을 왜 바닷가 바위에 모셨을까를 생각하니 혹시 동해에서 죽은 혼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절을 올리고 있다.
滄波東海積冤魂(창파동해적원혼)
四部衆生痛恨存(사부중생통한존)
觀世地藏風雪裏(관세지장풍설리)
尋人慰勞慰安恩(심인위로위안은)
푸른 동해에 원혼이 쌓였고
모든 사람들은 통한이 있네.
관세,지장보살은 사시 사철
찾는 사람 위로, 위안을 주네.
정문으로 나오는 층계는 가파르다. 중간 벽에 다섯명의 동자불을 세우고 학업성취불(學業成就佛)이라고 써있어 세태을 방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중간에 복탁화상의 배를 한번 만저보고 나오니 일주문(一株門)이다.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라 게액된 일주문은 화려한 용문으로 단청이 되었고, 곁에 관음성지(觀音聖地)라는 비석과 두 아이를 않고 있는 자애로운 어머니상이 있고, 앞에 커다란 석탑이 서있다.
4시가 되었다. 주차장에서 수박을 나눠 먹고 광주로 향하며 오면서 함안휴게소(5. 30) 주암휴게소(7.00) 집에 도착하니 8시 20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