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알림_2015.05.17.hwp
얽매이지 않는 삶.
종리원주 교화사 최경주
사람이면 누구나 복되고자 하고 장수하고자 하며 귀한이가 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일러 복되다 하고 무엇을 일러 장수하다 하며 무엇을 일러 귀하다 하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출세하면 복되다고 여기고,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살면 장수하다 여기며 남보다 높은 위치에서 서면 귀한이가 된 줄 안다.
만약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됨과 장수함과 귀함이 이런 것이고 이것을 들어주는 이가 한얼님이라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남보다 더 부유하고 더 장수하고 더 높은 이가 되기 위해 날마다 한얼님 앞에 성금을 받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정성은 우리가 내는 성금의 크기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신앙심도 형편이 좋아진 이들은 믿음이 갈수록 강건해진다 말할 것이고 형편이 예전과 다르지 않거나 나빠진 사람은 믿음이 자꾸 흔들린다고 할 것이다. 또, 잘살게 된 사람은 더 잘 살기 위해 성금을 더 많이 바치고 싶어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나마 내는 성금도 주저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척도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척도가 오직 물질로 증명되는 세상이 되면 우리 삶은 불안과 고통이 연속되고 한얼님께 얽매인 삶이 될 것이다. 평안과 자유가 나날이 이어지는 해방된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얼님께서 이르시는 복됨과 장수함과 귀함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얼님께서는 이르시는 복됨은 몸이 편안함(康寧)과 마음이 화순함(和順)과 덕을 좋아함(好德)이고 한얼님께서 이르시는 장수함은 순하게 받음(順受)과 전하여 이음(傳襲)과 향내가 흐름(流馨)이고, 한얼님께서 이르시는 귀함은 높은 알음(卓識)과 빛난 기림(榮譽)과 공적을 마침(完功)이다.
우선 복됨-강령, 화순, 호덕-에 대해 살펴보자.
몸가짐을 조심하여 허물이 없음을 강령이라 하며,
만물을 사랑하고 주어진 일을 삼가 공경히 받드는 것을 화순함이라 하며
어진이가 있으면 추천하고 양보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덕을 좋아함이라 한다.
장수함- 순수와 전습과 유형-에 대해 살펴보자.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순수, 순하게 받음이라 하고
아름다운 풍습과 전통을(덕업예술)을 후대에 전하는 것을 전습이라 하며
선함과 진리가 세세토록 이어지게 하는 것을 향내 흐름, 유형이라 한다.
끝으로 귀함-탁식, 영예, 완공-에 대해 살펴보자
익히고 배움이 넓고 큰 것을 탁식이라 하며
세상 사람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아끼어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영예라 하며
심기신 가달을 돌이켜 성명정 참으로 나아감을 완공이라 한다.
과연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을 싸고 계신 허허공공한 한얼님이시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복되고 장수하고 귀함에도 오로지 나만이 하는 것이 있고 남과 더불어 하는 것이 있고 한울과 합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이 편안함과 고난을 극복함과 높은 지식은 나만이 하는 것이 되고
만물과 만사를 사랑하고 공경하며 풍습과 전통을 아끼고 전하며 인(仁)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함은 남과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고
덕을 좋아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성명정에 나아감은 대덕대혜대력하신 한얼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 몸에 오로지 하는 것은 스스로 닦는 것이 되며, 남과 더불 하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가 되며 한울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한울의 조화를 기리는, 찬양함이 된다.
한얼님의 이르시는 복됨과 장수함과 귀함은 개인과 사회, 우주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진정 홍익(弘益) 이화(理化)의 모습이다.
종교는 나의 욕망을 절대자에게 빌어 채우는 데 있지 않고 욕망 너머에 있는 참된 나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 변화되는 것,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가장 먼저 ‘나’ ‘자기’‘자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자기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참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리나 되는 지 알 수 없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이 일 때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는 천지다. 재해의 말에 의하면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파도를 일으키기를 3천 리, 회오리바람을 타고 오르기를 9만리, 6월의 대풍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장자 소요유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참 멋있고 시원스럽다.
우리 모두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가 되는 것처럼 현재의 자신을 비우고, 죽이고, 부정하여 새로운 나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욕망에 얽매여 물질적 충족을 복으로 생각하며, 복만 빌며 사는 삶을 멈춰야 한다. 그런 삶은 만물의 영수라고 하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니다. .
우리가 가야할 길은 끝없이 넓은 우주 공간과 무한의 과거에서 시작되어 무한한 미래로 흘러가는 지대(至大)한 세계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삶이다. 사물에 얽매인 현실을 초월하여 대자연의 무궁한 품속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삶이다. 얽매임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의 삶이다.
성스러움을 성스럽게 대할 수 있는, 성스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