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瀚海)의 위치를 찾다.
○ 한해(瀚海)애 대해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하였고, 조선 사(朝鮮史)와 대륙 사(大陸史)의 원문(原文)을 번역(飜譯)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정확(正確)한 위치를 기록한 것은 없었다. 대략적(大略的)인 위치를 점 칠 수 있는 지리 지형(地理地形)과 방향(方向)등은 이미 논하여 왔는데,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섬서(陝西)의 마지막 구절(句節)인 서역(西域) 편에 그 위치를 밝힌 내용이 있어 소개하려 한다.
그것은 비록 산해 경(山海經)의 주석(註釋), 자치통감(資治通鑑), 당서(唐書), 통전(通典)등의 위치와는 조금 다르게 동쪽지방으로 이동(移動)된 것이어서 안타까운 것이나, 그래도 그 위치를 대륙 사(大陸史)에서 찾았다는 것이 보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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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섬서(陝西)편
《 본문(本文) : 瀚海在柳陳城東北.皆沙磧,若大風,則行者人馬相失.《宋史》:沙深三丈,不育五穀.沙中生草,名登相,收之以食. : 한해(瀚海)는 유 진 성(柳 陳 城) 동북(東北)에 있다. 모두 사적【沙磧은 사막(沙漠)을 말한다.】이며, 만일 큰 바람이 불면, 가는 자의 사람이나 말은 서로 잃어버린다. 송사(宋史)에 : 모래의 깊이가 3 장【1장(丈)은 약 3m】이며, 오곡은 자랄 수 없다. 모래 가운데 풀이 자라는데, 이름이 ‘등상(登相)’이다. 거두어 먹을 수 있다.》하였다.
【 참고(參考) :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기를, 사막(沙漠)을 칭하기를 : 한(漢)대에는 “막(幕)”, 당인(唐人)들은 “적(磧)”이라 하였다.】
● 위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한해(瀚海)”는 “유진 성(柳陳城)” 동북지방을 가리키고 있다. “유진 성(柳陳城)”은 어디에 있는 성(城)의 이름일까?
동서(同書)의 화 염 산(火焰山) 설명 편을 보면 : 《火焰山在柳陳城東,連亙火州.宋史:北庭北山中出砂.山中嘗有煙氣湧起,無雲霧至夕,光焰若炬火,照見禽鼠皆赤,或即此山也.丁谷山,在柳陳城北.中有唐時古寺及諸碑刻. : 화 염산(火焰山)은 유 진성(柳陳城)동쪽에 있는데, 화주(火州)와 서로 함께 연이어져 있다. (중략). 》
화주(火州)는 토 노 번(吐魯番)을 칭하는 말이다. 청사(淸史) 신강(新疆)편을 보면, 《 明 初 為 火 州 地 : 명나라 초 화주(火州) 땅이다.》라고 하였다.
● 위 본문(本文)에, 《 瀚 海 在 柳 陳 城 東 北. 皆 沙 磧 : 한해(瀚海)는 유 진성(柳陳城) 동북(東北)에 있으며, 모두 사적(沙磧) 땅이다.》라 했다. 또 화 염산(火焰山) 설명에 《火 焰 山 在 柳 陳 城 東 : 화 염산(火焰山)은 유 진성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화 염산(火焰山)은 토 노번(吐魯番) 북쪽지방에 지금도 그 이름 그대로 지도(地圖)에 그려져 있다.
이는 곧, 『화 염산(火焰山)은 화주(火州)주위에 있으니, 화주(火州) 서쪽에 유 진성(柳陳城)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곧, 토 노번(吐魯番)이 화주(火州)이니 토 노번(吐魯番) 서쪽지방에 “유 진성(柳陳城)”이 있게 되는 것이다. 토 노번(吐魯番) 곧 화주(火州) 서쪽지방은, 오노목제의 남(南)쪽 지방으로 이곳의 동북(東北)지방이면, 『준갈이 사막(沙漠)지대와 알타이산맥(山脈)간의 사막(沙漠)지대를 칭(稱)하는 말이 된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말하는 “한해(瀚海)”는 곧 “준갈이사막지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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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同書) “정주 성(庭州城)”편을 보면,
《 庭 州 城 在 火 州 北 四 百 十 里 : 정주 성(庭州城)은 화주(火州) 북 410 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또 《 통전(通典)을 인용하여, 開元九年,兼置北庭節度使,又置瀚海軍於州城內 : 개원(開元) 9년에 겸하여 북정절도사를 설치하고, 또 주(州) 성내에 한해(瀚海)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며, 이곳은 모두 사적(沙磧)지대라고 하였다.
또한 이곳은 회골(回鶻)의 다섯 성(城)이 있었으며, 이 땅에는 “여러 회골(回鶻)”들이 살았다고 하였다. 원나라 시에는 “외오아”의 땅이며, 원사(元史)에서는 상도(上都) 서북 6천리에 회골의 다섯 성(城)이 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당(唐)의 북정도호부가 있던 곳이며, 명나라 때는 화주(火州)에 속한 곳이라고 설명한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의한 “한해(瀚海)”는 “현 신강(新疆) 천산산맥 북쪽지방의 준갈이사막지대를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최근세기 이것은 다시 동쪽으로 이동되어 “고비사막”지대를 “한해(瀚海)”라고 지도에 표기하고 있다. 현재의 해설에서는 5-6천리 동쪽지방으로 이동되어 하 북 성(河北省) 남쪽바다를 “한해(瀚海)”라고도 한다. 또는 외몽골에 있는 “바이칼 호”를 “한해(瀚海)”라고도 하는 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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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한해(翰 海=瀚 海) 또는 북해(北海)』의 남쪽지대가 바로 『발해(渤海)』지방이라는 것이다. 또한 발해는 현재(現在)의 만주(滿洲)라 지칭하는 현 동북(東北)삼성(三省)지대와도 전혀 관련이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지만 『북해(北海)나 한해(瀚海)는 조선사(朝鮮史)와 관계있는 것이지 대륙 사(大陸史 : 현 대륙 사)와는 관계가 없다. 』
○ 동서(同書)의 “골 리 간(骨利幹)국” 편을 보면, 《骨利幹國在翰海北.亦鐵勒諸部,產良馬,其地北距海,去京師最遠.又北渡海,則晝長夜短,蓋近日出處,所謂煮羊胛適熱日已復出者.唐貞觀二十二年來貢,以為玄闕州. : 골 리 간(骨利幹)국은 한해(瀚海)의 북쪽에 있는데, 또한 철륵(鐵勒)의 여러 부도 있었다. 좋은 말이 생산된다. 그 땅의 북쪽은 바다와 떨어져 있으며, 경사(京師)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또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낮은 길고, 밤은 짧다. 가까이에서 해가 나오는 곳이며, 소위 양(羊)의 어깨뼈가 적당히 익을 때, 해가 이미 다시 나온다. 정관 22년 와서 조공하니, ‘현 궐(玄闕)주’라 하였다.》
위 글로 보면, 현 신강성의 “준갈이” 사막지대의 북쪽 곧 <알타이산맥과 당노오납산맥>이 있는 러시아 땅을 말한다. 카자흐스탄 북쪽에 있는 벨루하 산【해발고도 4508m】의 북방지대를 일컫는 말이다.
동호(東胡)=동이(東夷)=조선(朝鮮)=숙신(肅愼)은 북해(北海)=한해(瀚海)의 남(南)쪽과 동(東)쪽에 있었기 때문이며, 선비산(鮮卑山)이나 유도 산(幽都山)은 바로 북해(北海)에 있었다. 광활(廣闊)한 사막(沙漠)지대와 춥고, 어둡다는 삭막(朔漠)지대와 큰 호수(大 澤)가 있는 곳이며, 방위(方位)로 보면 중원을 기준, 서북(西北)방 지역을 말하고 있으며, 이곳 내에는 유도 산(幽都山)과 선비(鮮卑)산도 있고, 금산(金山)도 있었다. 이 지역은 가축(家畜)을 키울 수 있는 곳이며, 유목 족들이 살아가던 곳이다.
● 위에서 설명하는 것은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기록에 의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대입(代入)한 것이므로, 평소의 주장과는 조금 다르나, 근접(近接)한 곳이므로 그대로 설명하였습니다.
2012년 01월 17일 <글쓴이 : 문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