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이었던 어제 정말 대설이 내려 전국에 교통대란이 일어났습니다.
해질 무렵, 술 생각난다는 친구 말에 집을 나서 중앙시장으로 향하는 길,
50분여 걷는 동안 거북이 걸음 하는 차들을 보며 걷기의 유용함을 느꼈습니다.
공평하게도 그 친구가 봉곡에서 걸어오는데 50분, 저도 50분.
약속장소로 가면서 이런 궂은 날 만날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친구도 술도 엄청 좋아하긴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오늘 아침 환경연수원 녹색사관학교 수료식 준비하러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길이 얼어붙어 걸어서 연수원까지 가야 하니 말입니다.
차 타고 가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 길가의 설경이 좋았습니다.
먼저 와서 눈싸움 하는 아이들을 보니 기분이 더욱 좋아졌습니다.
눈 온 뒤의 질척거림, 녹을 때의 지저분한 모습, 빙판길로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눈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게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제게는 눈을 보면 설렘이 남아있습니다. 무작정 걷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며칠 전, 눈이 많이 내렸던 날 아침 금오산에 갔다가 큰 낭패를 당할 뻔 하였습니다.
아니 낭패를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등산을 하자던 친구가 그날 아침 눈 덮인 금오산 등산을 종용하기에
일을 잠시 미뤄두고 금오산으로 향했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눈 덮힌 금오산은 장관이었습니다.
평일이었지만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산을 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등산로 곳곳에 데크가 설치되어 편하기도 하였고
돌계단 길에서는 이미 다져진 눈이 미끄러워 몇 번이나 미끄러지기도 하였지만
그리 힘든 산행길은 아니었습니다.
아이젠도 박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가끔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광경도 좋았고
멀리, 햇빛을 받아 빛나는 눈 쌓인 봉우리도 멋졌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계곡 쪽의 바위에 쌓인 눈이 소담스러워 좋았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나목과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 눈을 진 커다란 바위,
말 그대로 설국이었습니다.
해운사의 독경소리를 들으며 바로 위의 대혜폭포에 다다르니
장관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긴 고드름 사이로 조금씩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
고목의 가지에 듬뿍 쌓인 눈, 올려다보는 계곡 사이로 파란 하늘과
하얗게 빛나는 바위들, 가슴에도 담고 카메라에도 담았습니다.
카메라에 담았던 풍경이 망막에 맺혀졌던 장면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날의 장관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폭포에서 사진 찍고 주변 경치 감상한 후 할딱고개 쪽으로 올라가려는데
연수원에서 긴급 호출이 왔습니다.
오랜만의 겨울 산행 정취를 뒤로 하고 중간에 내려와야 함이 아쉬웠지만
연수원 녹색사관학교 수료식을 앞두고 있던 참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해운사를 지나며 갑자기 배변감이 느껴졌지만 마음이 급하기도 하고
일행에게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하여
‘30분만 참으면 되는데’ 하는 생각으로 그냥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15분 여 지나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참기 어려운 상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는 화장실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엉덩이를 뒤로 밀고 괄약근에 힘을 주고 잰걸음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엉덩이에 힘을 주고 미끄러운 길을 내려온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미끄러지게 되면 괄약근을 조았던 힘이 순간 풀리면서
엄청난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점점 참기 어려워졌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케이블카 타는 곳이 보이면서부터는 인내의 한계가 오기 시작하여
괄약근이 풀리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더욱 잰걸음으로 뛰듯이 걸었습니다.
화장실에 뛰듯 들어서니 공용화장지가 있는데
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이미 괄약근은 기능을 상실하여
조금씩 내용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화장지 뜯는 것을 포기하고
화장실 문을 닫을 시간도 없이 바지를 내리며 변기에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았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쏟아지는 똥으로 인해 변기의 물이 튀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나요?
그냥 고스란히 당하며 내장의 반란이 진압되길 기다릴 밖에요.
속이 좀 안정되기 시작하자 걱정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장지를 안 가져 왔는데 뭐로 닦나, 똥을 조금 지렸는데 팬티는 어찌하나...
결국 방법은 하나, 팬티를 벗어 엉덩이와 튀어 오른 물을 닦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등산화의 긴 끈을 풀고 바지를 벗고 팬티를 벗는데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였던 좁은 화장실이 왜 그리도 불편하던지...
다 처리하고 바지를 입는데 많이 허전하였습니다.
항상 내 엉덩이를 보호해주던 팬티의 존재감은 상당했습니다.
손을 씻고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이 부는데 거시기 주위가 왜 그리도 썰렁한지.
적응하는데는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연수원 약속이 없었으면 바로 집으로 달려가 씻고 옷을 갈아입었을 테지만
어쩔 수 없이 노 팬티로 연수원으로 갔습니다.
회의를 하고 점심을 먹는 동안 찜찜한 기분이 계속되었습니다.
빨리 마치고 집에 돌아와 씻을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 생각하니 아찔하였고 쑥스러운 사건이었지만
재미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납니다.
연수원에 노 팬티로 들어간 사람이 저 말고는 없겠지요...
그리고 그 화장실 청소하실 분께 죄송스런 마음도 드네요.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버리고 간 똥 묻은 팬티를 치우는 일이
얼마나 성가시고 짜증나겠습니까?
저는 여행 가거나 산행 갈 때는 항상 작은 배낭을 가지고 다닙니다.
물과 카메라와 화장지, 양치질 도구, 메모장 등을 넣은.
하지만 그날은 괜시리 배낭이 귀찮게 느껴져 그냥 두고 가는 통에
공용화장지를 뜯으려는 노력을 해야만 했고
그 바람에 인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괄약근의 무장해제로 낭패를 보았던 거지요.
이 낭패를 당하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를 놓치면 작은 일이 큰 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였습니다.
평소 아무리 챙기고 옆에 두었더라도
정말로 필요할 때 옆에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철저한 준비, 빠짐없는 대비가 필요합니다.
저는 원래 양변기보다는 좌변기를 좋아합니다만
이번 사건을 겪으며 더욱 양변기가 탐탁찮아졌습니다.
좌변기는 물이 튈 일도 없고 누가 앉았더라도 위생적인 면에서는 안전(?)하지만
양변기는 물이 튀기도 하고 어느 누가 깔고 앉았을지도 모를 변기에
살을 맞댄다는 사실이 비위생적이고,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가 보면 고객이 선택할 수 있도록
좌변기 수를 늘려가고 있어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용화장실에서도 화장지는 공용으로 세면대 옆에 둘 것이 아니라
화장실마다 따로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준비가 철저하여 자기의 화장지를 쓰는 것이겠지만
저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봉변을 당할 이들이 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나니 재미있었던 일로 치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당했을 당시에는 암담하고 곤욕스러웠습니다.
항상 대비하는 자세, 마음가짐이 필요함을 새삼 느낍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깨달음과 개선꺼리를 준 그 상황에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18대 대통령 선거가 열흘 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때’란 선택입니다.
올바른 선택,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택하여 후회를 줄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때가 끼지 않도록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때(모셔온 글)========================================
때를 놓치면 때가 낀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으면 비겁의 때가 끼고
나눠야 할 때 나누지 않으면 탐욕의 때가 끼고
놓아야 할 때 놓지 않으면 고통의 때가 끼고
기뻐할 때 기뻐하지 않으면 슬픔의 때가 끼고
즐거워할 때 즐거워하지 않으면 근심의 때가 끼고
사랑해야할 때 사랑하지 않으면 그대 인생에 후회라는 때가 낀다.
-----정우식의 '하루 첫 생각' 중에서